‘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뉴턴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말이다. 이 말은 진리를 겸손하게 인정한 말인가 하면 뉴턴이 동시대의 자연철학자인 로버트 훅을 조롱하기 위해 한 잔인한 말이라는 말도 있다.

뉴턴이 자신에게 끊임 없이 표절 혐의를 씌운 작고 구부정한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라는 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용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례가 불교계에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란 게송(偈頌)이 인용된 내력으로 이는 성철 스님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스님의 원작(原作)이 아니라 스님이 중국 12세기 송(宋)나라의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말을 변형, 인용한 것이다.

물론 청원유신 스님도 9세기의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 말이다.(세 스님은 진리 또는 깨달음을 다소 다른 각도로 보았다.)

출처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불명확한 부분이 있음을 감안하되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이다.

지식의 대양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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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재미가 없지만 직접 연주하면 뜻 밖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곡이 슈만의 곡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피아노를 들을 줄만 아는 입장이기에 바르트가 한 말의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롤랑 바르트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파격적인 글을 쓴 바 있다. 슈만의 곡에 대한 말도 파격이란 생각이 든다.

케노시스란 자기 버림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을 의미한다.

불교라면 석가모니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 비유될 수 있다. 애나 골즈워디의 ‘피아노 레슨‘이란 소설을 보자.

‘시반 선생님과 함께 한 피아노 레슨의
추억‘이라는 부제의 이 작품에서 시반 선생님은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연주 방식대로 따라 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단지 오늘을 위해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배운 것이 나중에는 걸림돌이 되거든.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켜야 해.˝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키는 피아노 교사들의 가르침도 케노시스라 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처럼 참신하고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것도 화석화한 옛 것을 버릴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기에 케노시스라 할 수 있다.

케노시스란 말을 너무 세속적으로, 쉽게 쓰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용어는 새롭게 의미 규정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속화의 운명에 노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직 낯선 단어에 대해 너무 오버하는지도 모르겠다. 큰 의미의 불멸과 작은 의미의 불멸을 이야기한 밀란 쿤데라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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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거듭나기
David H. Rosen 지음, 이도희 옮김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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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G Jung) 학파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로젠(David Rosen)'우울증 거듭나기'는 병리적 우울증 환자들이 저자의 인도를 따라 자아 죽이기를 통한 상징적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살 위험에서 벗어난 과정을 담은 인상적인 치료 사례집이다.

 

저자 데이빗 로젠은 우울증을 앓았던 남다른 이력을 가진 분이어서 주목을 받는다. 저자의 우울증은 부모의 이혼과 낯설기만 한 곳으로의 이사 등 급격한 외적 사건이 겹친 결과였다. 그런 저자에게 빛처럼 다가온 분이 있었다. 새 친구 댄의 아버지 밀트였다.

 

밀트는 로젠을 각별히 보살피는 것은 물론 지지를 보내지만 충격적이게도 로젠에게 자살 소식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만다. 로젠은 이 사건은 물론 그 후 겪게 된 아내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생각의 전환점을 얻는다.

 

전자는 로젠에게 누구든 자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고, 후자는 로젠으로 하여금 떠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태가 준 충격과 증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로젠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듣는다. 당신은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말이다. 부분의 실패나 좌절을 전체의 실패나 좌절로 확대해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기를 잘 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맞춤 처방이 아닐 수 없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자살은 가해자와 희생자가 같은 존재인 사건이고 계획된 살인이라는 진단이다. 저자는 상징적인 죽음을 결정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이는 우울증 환자들이 상징적으로 자신 및 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 생각을 죽이고 내면의 죽음과 생명력, 부정적인 자아와 자기 사이의 분열을 초월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가 제시한 처방은 자아 죽이기와 거듭나기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이기만 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우울증이 촉발하는 자살을 줄이는 데 합당하다. 그리고 그런 처방들이 집대성된 우울증 거듭나기는 우울증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확보할 여지를 주는 책이다.

 

여기서 주의할 개념은 자아와 자기라는 개념이다. 자아와 자기는 융 학파의 고유 개념이다. 자아는 의식의 주체이고, 자기는 무의식과 전 인격의 주체이다. 물론 자기도 양면성을 지닌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모든 원형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적인 차원의 자아 죽이기가 가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상징은 다각도로 궁구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잠시 이 글을 읽어보자. “..상징제의는 현실을 개조하지 않고도 무언가 중요한 개조가 이루어진 듯한 만족감을 공급하고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며 현실모순의 현실적 해결을 연기할 수 있게 한다.(도정일 지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79 페이지)

 

상징이 가진 다양한 함의를 볼 필요가 있다. 융 학파의 관념성이 자주 지적된다는 사실을 환기할 여지는 충분하다. 자살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과 개인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와 개인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자살 위험도는 아주 높다. 이러한 때에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우울증 거듭나기'의 출간은 의미가 깊다.

 

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 "한 개인의 내적 심리도 개별 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시대적 징후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강계숙 지음 '우울의 빛' 9 페이지)

 

'우울증 거듭나기'를 통해 우울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돋보이는 점은 치료자와 내담자가 신뢰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오랜 기간을 통해 희망적인 사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고 저자를 융의 개념인 상처받은 치유자(wound ed healer)로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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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소요산(逍遙山)에 다녀왔다. 단풍 축제가 끝난 11월의 산이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원효(元曉) 대사와 요석(瑤石) 공주의 사연으로 물든 이 산을 찾은 것은 10여년 만의 일이다.

오늘 일정은 등산(登山)이 아닌 산문(山門)에 잠시 머문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간 수없이 많이 이 산이 있는 도시를 지났으면서도 제대로 마음 내지 못한 산만(散漫)함을 돌아본 일정이기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였지만 산을 오르는 중간 중간 산문(山門)이라는 단어를 음미했다.

그렇게 한 것은 산문이란 단어가 나희덕 시인의 ‘시월’이란 시를 통해 만난 서정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덧붙인다면 산 중턱의 자재암(自在庵)이라는 작은 암자 때문이기도 하다.(山門은 산의 어귀, 산사의 바깥 문을 함께 의미한다.)

물론 이 암자는 문수전(文殊殿)과 대웅전(大雄殿), 보타전(寶陀殿) 등을 갖추었다.

어렵게 산에 든 김에 자재암이 주관하는 연(年) 단위의 토요 경전 공부(무료)를 화제로 종무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과연 꾸준히 이 산에, 그리고 암자에 드나들 수 있을까? 자신할 수도 없으면서 집 가까운 곳에 독서 모임이나 불교 경전 공부 모임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성큼 다가온 추위가 본 모습을 보이면 산은 산대로 산사는 산사대로 분주할 것이다.

한겨울에도 궁궐을 찾는 사람이 있듯 한겨울에도 산사를 찾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끔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든다. 거기서 새봄을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지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 습니다 새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김소연 시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마지막 연)

‘당신‘이란 말을 슬며시 ’나‘로 바꾸어 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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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출신의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시인이 ‘귀향(歸鄕)’이란 시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작곡가와 전혁림(全爀林: 1916 – 2000) 화가를 말한 부분을 읽는다.

..그날
뇌조(雷鳥)는 뇌조의 몸짓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더라고 했다.
그건 구(球)도 원통(圓筒)도
원추(圓錐)도 아니더라고 했다.
그건 빛<色>이며 빛<光>이 아닐까
전혁림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오랜만에 와보니 윤이상은 또다시
촛대마냥 말라 있다...

학교에서는 ‘뇌조는 빛‘이라는 구절은 은유(隱喩)로, ‘촛대마냥‘은 직유(直喩)로 설명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시를 그렇게 문법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은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修辭學)’에서 한 말이다.

은유를 설명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 내게는 철학자 김형효 교수의 책(‘마음 혁명’)이다.
저자는 ”백합화 같은 소녀는...했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며 은유법은 백합화 즉 현장에는 없는 숨은<은: 隱> 단어로 소녀를 설명하는 수사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비해 “술 마시자“는 말을 ”술 한 잔 하자”로 표현하는 것에 쓰인 환유법(換喩法)은 술과 술잔의 상호 인접성에 근거를 둔 수사법이다.

은유가 현장에는 없는 것을 끌어들이는 수사법이라면, 환유는 술을 현장에 함께 있는(인접해 있는) 술잔으로 표현하는 수사법 즉 장소를 바꾸는(치환하는: 換) 수사법이다.

수사학은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소유욕의 일종이라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은유는 정신적 소유를, 환유는 물질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최현식 교수의 ‘감응의 시학’에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은유(적 언어체계)는 오로지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동일화하는 데 반해 환유(적 언어체계)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의 인접 관계 즉 연관성에 주의한다.

저자는 서정(抒情)을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권력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김형효 교수가 말한 소유를 이해할 글로 “서정은 이미 말해지거나 의도된 욕망을 넘어서는 감각의 운동”이며 “실재계를 끊임없이 배반하며 차이와 위반을 생성하는 감응 행위”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감응의 시학’ 15 페이지)

진리, 구조, 가치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 용어들까지도 은유라는 말을 한 사람은 니체이고, 두 관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때라야 은유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한 사람은 김애령(철학자)이다.(‘여성, 타자의 은유’ 75 페이지)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 작업도 불가능하며 극단적으로 말할 경우 모든 글이 은유적인 글인지도 모른다.(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5 페이지)

읽는 것이 인생(Lesen ist leben)이라는 독일어가 있다. 쓰기가 인생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읽기나 쓰기가 인생에서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읽기(쓰기)는 닮은 듯 다르게 이전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은 섬(고립된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즉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김애령 지음 ‘여성, 타자의 은유‘ 5, 6 페이지)

전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것을 닮은 것으로, 고립된 것을 다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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