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사회(大同社會)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즉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의 삼황,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 요 임금), 제순중화(帝舜重華; 순 임금)의 오제가 통치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이때는 인재를 선발하여 왕위를 넘겨주는 선양제(禪讓制)를 통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반면 제순중화(帝舜重華) 즉 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은 우(禹) 임금으로부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세습제(世襲制)가 실시되었는데 이를 소강사회(小康社會)라 합니다.(안성재 지음 ‘노자의 재구성‘ 144 페이지)

요순시대(堯舜時代)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던 태평한 시대를 말합니다. 치세(治世)의 모범으로 삼는 시대입니다.

요순시대(堯舜時代)는 먼 과거의 신화시대가 아니라 현재·미래에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의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공자는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熙皓皓)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희희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는 희다는 뜻입니다. 만 가지 일이 모두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게 티끌하나 터럭 하나만큼의 악이나 더러움도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순시대(오제의 시대)는 공자가 이상화한 시대입니다.

조선의 경우 섣부른 왕도정치 사상에 따라 인조에게 덕을 쌓아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다면 후금의 위협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간언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덕치를 하면 오랑캐들이 자연히 복종한다는 ‘맹자‘의 기록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본 시독관 엄성(1575 - 1628)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156, 1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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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11월 18일) 중독치료 전문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는 분을 만났다.(내가 심리상담을 받은 것이 아님) 대화를 통해 나는 그 분이 자격증 공부를 거쳐 심리상담사가 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학 전공자도 아니고 미술치료나 명상, 유식(唯識) 불교 등 다른 분야의 지식을 갖춘 분도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해 묻자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답으로 제시했다. 과거의 사건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물었다. 그 분은 답을 하느라고 했지만 정답과 거리가 멀었다. 어설프게 알고 넘어간 뒤 흐지부지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 분에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아예 들어보지 못한 지식이었다.

그러니 압축(condensation)을 은유(metaphor)와 연결짓고 치환(displacement)을 환유(metonymy)와 연결짓는 것에 대해서도 모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분은 언어학의 명제이자 문학에서 빈번하게 거론되는 수사인 은유와 환유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듯 했다. 물론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물은 것은 저 분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었다.

내심 그 분이 그런 물음에 답을 해 이방인들을 안심시키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내게 있었다. 심리상담은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정신분석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자격증 공부를 통해 얻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더구나 문외한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분에게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추천했다. 이 책을 권하며 나는 그 분이 우려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멜라니 클라인 등에 의해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는 말을 했다. 공연한 개입이 아닌가 우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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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론티어(frontier)와 보더(border)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변경(邊境)을 의미하는 프론티어는 미국에서 개척지와 미개척지의 경계선을 이르던 말이다.

분명하지 않은, 확정적이지 않은, 유동적인 경계를 의미한다. 이와사부로 코소의 ‘유체(流體) 도시를 구축하라‘란 책/ 개념이 생각난다.

저자는 건축이라는 단어로 물리적인 도시 공간을 소유하지 않는 도시 민중이 자신의 역사/ 지식/ 문화를 자신의 신체 안에 새겨넣는 과정을 지칭한다.(난해한 개념이다. 매력적이기도 하면서.)

보더는 확정적인 의미의 국경을 말한다. 이문열 작가의 ‘변경‘이란 제목을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염명순 시인의 ‘국경을 넘으며‘란 시에는 ˝삶의 경계를 지나며˝란 표현이 있다.

시인은 ˝사는 건 끊임없이 경계를 허무는 연습˝이란 말을 한다. 삶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니 가변적인 변경들로 둘러싸인 무대이리라.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는 나희덕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너무 늦게라도 놀러갈(허물) 수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 삶은 허물고 새로 짓기에는 너무 굳어버린 것이 아닐 수 없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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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문화재청이 페북을 통해 도난 문화재 소식을 알렸다.

지난 1988년 도난된 경남 고성 옥천사의 나한상이 미국의 모 경매에 나온 것을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이 발견, 경매를 취소시키고 원만한 협상을 이루어냈다는 내용이다.

이 나한상은 이번 달 중 국내 귀환된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온갖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을만한 공덕을 갖춘 자이다.

아라한(arhat)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보다 높은 깨달음을 얻은 최고의 존재이다.

에드워드 콘즈에 의하면 불교도들 스스로는 아라한을 적(敵)을 뜻하는 아리(ari)와 죽임을 뜻하는 한(han)이 만난 말 즉 인간의 욕망과 정념 등의 적을 죽인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대 학자들은 ‘~할 만한‘을 뜻하는 아르하티(arhati)에서 찾는다.

후자의 경우 아라한은 ‘숭배와 공양을 받을 만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133, 135 페이지)

석가모니 붓다 자신도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초기불교의 이상적 인간이다.

팔리어로 외웠던 나모 다싸 타타갓다싸 아라핫도 삼마삼붓다싸(Namo tassa Tathagatassa Arahato Sammasambuddhahassa)란 귀의문(歸依文)을 급히 불러내게 된다.

‘그렇게 오셨으며 동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저 붓다께 절합니다‘란 의미이다.

붓다의 제자로서 나한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된 나한은 실존하지 않는 공상적인 존재이다.(명법 스님 지음 ‘미술관에 간 붓다‘ 108 페이지)

아라한은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기에 무학(無學)이라 불리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아라한 이전의 단계들은 더 배우고 닦을 것이 있어 유학(有學)이라 불린다.(권오민 지음 ‘아비달마 불교‘ 265 페이지)

이 불교 지식들이 내게는 치유의 소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유식(唯識)을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앎만 있다는 의미의 유식은 나는 이렇게 알고 저 사람은 저렇게 아는 등 자기 경험에 비추어 제 각각 안다는 의미이다.(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38 페이지)

유식은 다름을 인정해야 소통이 가능해짐을 말한다. 유식의 한 게송(偈頌)에는 파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유식은 오직 마음만 존재하고 일체 만물 즉 현상은 인정하지 않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가르침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유식무경은 유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유식은 식 즉 앎, 마음만을 인정하지도 않고 일체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유식 15송(頌)에서 보듯.(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45, 146 페이지)

치유는 그 냉엄한 현실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11월 24일 나는 치유를 위해 스승을 만나러 간다. 가기 전 잠시 도난 문화재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치유와 억지로 연결짓고 이렇게 내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나의 훈습(薰習; 어떤 성질에 물들거나 기운이 배어든 것)은 기승전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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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글일망정 오래도록 써온 부작용이 나타날 때가 있다. 글을 매개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 바로 그렇게 예상 못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일까?

다름이 아니라 시험 공부를 하다가 보게 된 단어나 개념을 주제로 글을 쓰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논술로 치르는 시험도 아닌 객관식 시험을 위해 책을 읽다가 이 무슨 딴 짓이란 말인가.

마르크스가 예술을 가장 잉여적인 생산물 즉 현실적 욕구가 충족된 후 생산되는 작품이라 말했지만 예술은 고통스러울 때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울 것 없는 말을 듣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시험은 코앞인데...)

‘그래 이건 내 이야기야‘란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글쓰기 그것도 비전문적인 글쓰기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처럼 글쓰기도 힘들 때 나타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변명처럼 하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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