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 서정시학 신서 44
전병준 지음 / 서정시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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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暎: 1921 1968) 시인과 동시대 시인들이 누구인가란 물음에 박인환(1926 1956), 김종삼(1921 1984) 시인 등을 답했다. 김춘수(1922 2004) 시인을 빼놓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집에 돌아와서였다. 사두고 아직 읽지 않은 평론집들 가운데 전병준의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이 있어 펴보았다.

 

저자는 김수영은 참여시, 김춘수는 순수시를 쓴 시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안이한 관점이라 비판한다. 저자는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감정의 변화 양상이 개인에 대한 자각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 계기가 되었음을 논의하고 김춘수 시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충할 몇 가지 요인이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김수영의 시학은 자유로 귀결되고 김춘수의 시학은 무의미로 귀결된다는 관행적 이분법이 극복되었음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두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유사성과 변별성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주체와 타자(他者)라는 주제가 두 시인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라는 것이 저자의 한 진단이다.

 

저자는 감성을 중시한다. 감성이란 이성(理性)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나 토대임은 물론 타자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라는 것이다.(28 페이지) 한편 감성과 감정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지만 저자는 두려움을 예로 들어 감정이 지닌 이성적 요소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두려움은 예상되는 위험과 손상에 대한 예측에 바탕하기에 판단의 한 형태이고 그것은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한다는 것이다.(30 페이지)

 

타자의 작용과 활동이 주체에게 가해져 주체의 변화를 낳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주체는 자신의 위치를 변경하고 조정하면서 다시 타자에게 작용하고 활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행위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수동성이 먼저 작용한 다음 능동성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38 페이지)

 

타자의 활동을 통해 주체성을 버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자기 자신의 활동과 작용을 시작하는 주체의 특성을 적극적 수동성이라 할 수 있다. 적극적 수동성의 태도는 타자와의 만남을 새로이 생각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김수영 시어의 주요 어휘는 설움인데 기존의 연구들은 설움에 대한 인식이 자기의식의 중요한 계기임을 지적하긴 하였으나 그것이 어떻게 사회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되는지를 적절히 밝히지 못한 채 단지 4.19라는 사회적 사건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49 페이지)

 

김수영 초기 시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감정은 설움인데 이 외에 포괄하는 의미망이 다른 부끄러움 또는 수치심도 있기에 세밀한 접근이 요구된다. 김수영에게 타자와의 관계를 인식하게 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한 사람이 박인환이다. 김수영에게 부끄러움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데서 온 감정인 한편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부끄러움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인간 실존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김수영은 포로수용소 체험을 다룬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저자는 설움이나 부끄러움을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타자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염려하는 감정으로 정의한다.(62 페이지)

 

저자는 김수영이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이란 말을 한 것을, 오직 자신에게서 현실을 뚫고 나갈 힘을 찾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이것은 외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내부의 문제에만 골몰함으로써 독단적인 세계를 구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극과 고통을 제공하는 외부를 통해 스스로 그에 반응하는 힘을 찾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설명한다.(67 페이지)

 

초기시에서 김춘수가 끊임없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다시는 그 아름다움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탄식하는 것은 지나간 것에 대한 회상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합일과 매개의 지점을 모색하는 것은 다가올 것에 대한 동경의 형식으로 나타난다.(88 페이지)

 

누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기의식은 타자의식을 경유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적대적인 것과의 만남과 대결을 거쳐야만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가능하다.(109 페이지) 감정의 흐름을 상대에게 건네고 다시 상대의 감정을 되받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활동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11 페이지)

 

김수영 초기시에 나타나는 사랑은 분리와 적대를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분리와 적대를 증오와 원한으로 만들지 않고 끊임없이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놓고 내맡겼으니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놀라운 비약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김수영이 특이하게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다.(112 페이지)

 

김수영은 자신을 괴롭히던 역사의 폭력과 그에서 비롯되는 비애를 사랑하고 타자를 통한 사유를 실천함으로써 변혁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외부의 자극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비애에서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결의와 변혁을 추출하는 놀라운 비약과 단절이 김수영 시학의 역설적인 면모이다.(113 페이지)

 

4.195.16을 겪으며 김수영의 시는 많은 변화를 거친다.(139 페이지) 4.19가 발발한 직후에 쓰인 시들에서 김수영은 좀 더 분명하고 직설적인 어조로 기존의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그에 야유를 보내며 새로운 행동을 요청한다.(136 페이지)

 

김수영은 혁명이 가져다준 짧은 기간 동안의 자유에 환호하며 제어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와 동시에 금세 위기에 처한 혁명과 자유의 가치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자유에 대해, 언론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많은 발언을 했던 것도 결국 문학의 자유,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삶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149 페이지)

 

우연히 찾아온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영구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준열한 자기비판과 그에 따르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 김수영이 깨닫게 된 이치라고 할 수 있다.(149, 150 페이지)

 

4.19 이후 기존 정치세력에 대해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었던(156 페이지) 김수영은 5.16 직후 도봉산 기슭의 어머니 집으로 피신, 양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157 페이지) 도봉산 기슭으로 피신한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160 페이지)

 

그 시기에 쓰인 시 가운데 누이야 장하고나! - 신귀거래사 7’이 있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란 구절이 있는 시이다. 김수영이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풍자와 해탈 가운데서 위태로운 균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161 페이지)

 

김수영은 한국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등을 거치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시적 기투(企投)를 감행한 끝에 자기를 긍정하고 사회와 역사라는 타자를 용인하기에 이른다.(189 페이지)

 

김수영의 사랑이란 시를 보자.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이 시에서 특징적인 것은 사랑이 나와 너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만남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라는 점이다.(199 페이지) 진정한 사랑은 일상의 고투를 통해서 달성된다. 그것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나와 너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만날 때 이루어진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완전히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지니면서 새로운 것을 생성해낼 때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210 페이지) 자유를 시작하는 것, 그것은 창작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일 수도, 정치적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한 투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211 페이지)

 

감성 없이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고, 지성(이성) 없이 어떤 것도 생각될 수 없다.”(28 페이지..칸트, ‘순수이성비판참고)는 글을 생각하게 된다. 김수영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서로 부딪히며 무질서와 갈등을 만들던 시기에 혼란을 넘어설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한국의 문화적 낙후성이 창조적인 혼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운 설움과 비애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212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연구는 적극적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제기함으로써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를 새로이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진단하였다고 말하며 자신이 도출한 결론을 시론과 연결시켜 살펴볼 필요성이 요청되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후속 작업을 기약하기로 한다고 결론짓는다.(246 페이지) 김수영 강의를 위해 자료 정리 차원에서 읽은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은 차분하게 읽히는 좋은 책이다.

 

김수영과 김춘수(나는 김수영을 위주로 읽고 리뷰했지만..)를 그들의 삶과의 연계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분석하고 설명을 한 노고가 빛나는 책이다. 책이 나온 지 4년이 지났으니 후속 작업이 나올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시인을 비교(했다기보다 같은 논점에 따라 하나로 설명한 것이지만)한 점이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니 같은 유형의 이승규의 김수영과 신동엽같은 책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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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映; 1921 - 1968) 시인도 있지만 김수영(1967 - ) 시인도 있다. 이 시인은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란 시가 좋아 4년 전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던 시인이다.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검색을 하면 거의 김수영(1921 - 1968) 시인에 대한 자료만 뜬다.

 

1992(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마산 출신의 김수영 시인에 대해 알고 싶어(우선 한자만이라도) 조선일보에 가서 1992년 신춘문예라 치니 반칠환 시인(1964 - ) 이야기가 나온다.(이 분은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이다.) 시인이고 동화작가이고 숲해설가인 이 분은 "감수성 짙은 문학적 해설"을 하는 분으로 알려졌다.

 

숲해설사 교육기관인 숲연구소에서 숲해설 강의를 한다고 한다.(20161123일 월간 산 수록 글 '시인의 감성으로 들려주는 나무 이야기' 참고) 반경환(1954 - ) 문학평론가가 형이다. 이 분의 숲해설을 꼭 듣고 싶다. 반경환 평론가는 지난 1994년 나온 '한국문연''행복의 깊이'의 저자이다.

 

'행복의 깊이', 대단히 독특하고 도발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책이다. "나에게 지적인 통찰력과 섬세한 감수성과 예술가의 정신을 가르쳐준 니체와 바슐라르와 김수영 시인에게 이 부끄러운 책을 바칩니다. - 반경환"이란 헌사부터 눈길을 끄는 책이다.

 

"거친 문장과 멋진 미사여구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실제비평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김현(1942 - 1990)을 극복하고 뛰어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는 서문도 그렇다.

 

반칠환 시인은 "나무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숲해설사가 되었다. 숲해설가 공부를 하면서 무척 행복했는데 결핍이 없어졌기 때문에 시가 안 나온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1967 - ) 시인을 오랜만에 생각하게 된 것은 김수영(1921 - 1968) 시인론(전병준 지음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을 읽다가 만난 ''라는 시 때문이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끼는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 일부)

 

이 시를 읽고 생각한 시가 김수영(1967 - ) 시인의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이다.

    

누가 묻는다

..지나간 발자국에서도 향기가 날까?

 

붉은 꽃도 지고 푸른 잎도 지고

흐린 물 속에는 탁발을 나가는 검은 발목뼈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살강살강 찰강찰강

물 밖으로 걸어나가는 젖은 발을 보았느냐고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일부)

 

''에서는 시인이 아내에게 묻고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에서는 누군가가 시인에게 묻는다. ''를 통해 드러난 김수영(1921 - 1968) 시인과 아내 김현경 여사의 사연(사랑의 우여곡절)은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사연('빗방울' 전주곡은 마요르카 섬에 머물던 쇼팽이 외출한 연인 조르주 상드를 기다리며 지었다는..)을 생각하게 한다.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을 읽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읽게 된 김현경 여사의 '김수영의 연인'은 화려한 등장 인물들이 자꾸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책이다.

 

김현경 여사의 5촌 당숙 김순남(1917 - 1983?; 김소월의 '산유화'에 곡을 붙인.. 성우 김세원의 부친), 김현경 여사가 읽었다는 보들레르, 발레리, 김현경 여사의 이화여대 시절 교수였던 정지용, 김순남의 집에 가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는 임화(1903 - 1953), 오장환(1918 - 1951) ..

 

이 부분에서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는 것은 발레리, 오장환, 정지용 등과의 공통 인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도 발레리와 오장환의 시를 읽었고 정지용 시인을 스승처럼 여겼다.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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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울 미(美), 아름다울 휘(徽), 아름다울 의(懿), 아름다울 가(嘉), 아름다울 가(佳)..모두 아름다움을 뜻하는 한자들이다.

이 다섯 글자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글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양(羊)과 대(大)를 합한 미(美)는 아주 먼 옛날 한자가 만들어질 때 인류의 주요 행사 가운데 하나였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관습과 관계된 글자이다.

[미(美)가 양과 관계된 글자라면 생(牲)은 소와 관계된 글자이다.]

미(美)는 가장 크고 살찐 양 즉 가장 실용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한데서 비롯된 글자이다.

그런데 휘(徽), 의(懿), 가(嘉), 가(佳) 등 미(美) 외의 글자들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졌지만 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휘(徽)와 의(懿)는 조선 왕릉 이름에서 볼 수 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휘릉(徽陵), 정조의 후궁 수빈(綏嬪) 박씨(순조의 생모)의 무덤인 휘경원(徽慶園; 동대문구 휘경동은 휘경원에서 유래),

경종과 그의 두 번째 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의 의릉(懿陵)..

경종(景宗)은 懿자와 인연이 깊다. 첫 번째 비는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이고, 자신과 懿자를 쓰는 선의왕후가 의릉(懿陵)에 묻혔기 때문이다.

가(嘉)는 가례(嘉禮)라는 말에서 만날 수 있다. 왕실의 혼인(婚姻), 책봉(冊封), 진연(進宴) 등을 가례라 한다.

물건이나 충고 등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가납(嘉納)이란 글자에서 가(嘉)를 만날 수 있다.

그럼 가(佳)는? 가인(佳人)이 있다. 아름다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등을 뜻한다.

이 글자들을 보며 문자에 능한 사람들은 위계(位階)와 세분(細分)에 밝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미와 흥미를 두루 담고 있는 글자들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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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映; 1921 - 1968) 시인은 포로 수용소 체험을 다룬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부끄러움 또는 수치심 때문이다. 초기의 김수영 시인은 설움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끄러움이나 수치 등의 말도 많이 했다.
김수영 시인과 대비되는 사례가 이탈리아의 화학자, 소설가 프리모 레비(1919 - 1987)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레비는 수용소 체험을 글로 많이 남겼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레비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만 수용소의 참담한 현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란 영화가 있다.

“유태계 이탈리아인인 귀도 오라피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들과 아내를 구하는 이야기”인 ‘인생은 아름다워’는 마음 먹기에 따라 삶은 유쾌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김수영 시인은 자조(自嘲)의 웃음 즉 부끄러움의 웃음을 짓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意志)를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경우처럼 나에게도 부끄러움은 극복의 의지를 다지게 하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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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가 문화 관련 기사에서 접한 용어 가운데 가압장(加壓場)이란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인지도 등에서 어느 정도 시의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이라는 구체적 사용 예로 거론할 수 있는 가압장은 수압을 높여 높은 곳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말한다.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이란 윤동주 문학관이 영혼을 고양(高揚)시키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왜 가압장이란 용어를 썼을까? 그것은 윤동주 문학관이 수도 가압시설이 있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산기슭의 아파트로 인해 설치되었다가 아파트가 헐림에 따라 의미 없이 홀로 남겨진 가압장을 개조해 만든 문학관이다.

종로구의 의뢰를 받아 윤동주 문학관을 설계한 분은 아뜰리에 리옹 서울 대표인 건축가 이소진이란 분이다.

궁금한 것은 윤동주 문학관에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은유를 부여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라면 ‘시의 지성소(至聖所) 윤동주 문학관‘이라 이름했을 것이다. 관련 시설을 활용해 이름을 짓는 것이 순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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