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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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談論)’은 신영복 선생님(이하 저자)(성공회대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저자는 서삼독(書三讀)을 주장한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한다.

 

교사와 학생의 대칭 관계(13 페이지)를 주장하는 저자는 강의라는 프레임을 깨뜨리고 우연의 점들을 여기 저기 자유롭게 찍어 갈 것이라 말한다. 대신 여러분들이 그 선을 이어 점을 만들고 장()을 만들어 여러분의 지도(知圖)를 완성하고 여러분이 발 딛고 선 땅속의 차가운 지하수를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고 말한다.(22 페이지)

 

인연들이 모여 운명이 된다고 말하는 저자이다.(15 페이지) 첫 시간에 시()를 논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틀이 문사철(文史鐵)에 과도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25, 26 페이지) 저자는 시를 랑그가 아닌 파롤이라 말한다.(랑그, 파롤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던 사람은 이 강의를 통해 의미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 파롤인가? 개인의 언어, 남다른 은유(隱喩)를 말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상투성의 지양(止揚)이다. 시서화(詩書畵)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37 페이지)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인생의 영원한 주제라 말(42 페이지)하는 저자는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간다고 설명한다.(44 페이지)

 

저자는 냉정한 자기비판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것은 일견 비정한 듯 하지만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훨씬 높여 준다는 것이다.(48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는 군자표변(君子豹變)을 읽었다. 저자는 생명이란 방랑하는 예술가(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자기 생성, 즉 자기가 자신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라는 말을 한 마투라나를 언급하며 그것은 기계론, 환원주의, 고전주의에 대한 창조적 배반으로 동양적 사유에는 인과론이나 환원론이 없다고 설명한다.(51 페이지)

 

추상화 능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사소한 문제 속에 담긴 엄청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52 페이지)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말이 알게 하듯 고전은 오래된 미래이다.(58 페이지)

 

나는 주역(周易)’을 점서로도 과학으로도 읽지 않는 저자는 주역 독법에 주목한다.(61 페이지) 주역은 패턴(을 보여주는 책)이다. 정착하며 농사를 짓는 반복 패턴의 사회인 농경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유목사회는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의미가 없다. 저자는 자신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주역을 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62 페이지)

 

저자는 위(), (), (), ()의 네 개념으로 주역을 읽는다. 양효가 어디에 있든 늘 양효로서 운동하지 않는 것이 위()를 설명할 때 중요하다. 자기 자리에 있어야(得位해야) 하는 것이다.(63 페이지) 양효, 음효 자체보다 그것들이 처해 있는 자리와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는 바로 옆에 있는 효와 상응 관계를 보는 것이다.(65 페이지) ()은 초효(初爻)4, 2효와 5, 3효와 6효의 음양 상응을 보는 것이다.(65 페이지) ()은 하괘의 중과 상괘의 중을 중시하는 독법이다.(66 페이지)

 

주역은 효() 자리, 효와 효, 소성괘와 대성괘, 대성괘와 대성괘 등 중층적인 관계를 읽는 것이다.(69 페이지) 주역은 64, 384효이다. 그것만으로 매우 복잡하다. 여기에 동효(動爻), 변효(變爻)도 있다. 그것까지 고려한다면 4,096개의 효가 된다. 주역은 그 무수한 관련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69 페이지)

 

저자는 개인주의적 사고, 불변의 진리, 배타적 정체성 등 근대적 인식론에 갇혀 있던 나에게 감옥에서 손에 든 주역은 충격이고 반성이었다고 말한다.(69, 70 페이지) 저자는 역이불역(易以不易) 불역이대역(不易以大易)을 언급한다. 퇴계와 다산의 독법이 다르다. 퇴계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 변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역(大易)“이라 했고 다산은 변하지 않는 것도 크게() 보면 변한다()”고 해석했다.(74 페이지)

 

철기시대인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宗法) 질서가 붕괴된다. 종법 질서는 천자(天子)의 맏아들은 천자가 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諸侯)가 되는 제도이다. 제후의 맏아들은 제후가 되고 둘째 아들은 대부(大夫)가 된다. 유가학파는 패권 경영에 반대하고 제후국 연방제라는 주나라 모델을 지지한다. 이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78 페이지) 저자는 우리의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선택은 화화(和化) 패러다임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저자는 시제(時制)와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비판은 처음부터 부정적 결론을 염두에 두는 비방이라 말한다.(94 페이지) 저자는 사상의 진보성과 민주성은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 속에도 여러 가지 충돌하는 쌍들이 혼재해 있을 것이라 말하며 공자와 논어의 경우 어떤 것을 호출하고 어떤 독법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결론짓는다.(95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의 끊임없는 재구성(103 페이지), 사회적 의미(114 페이지), 사람이 최고의 교본이라는 것(116 페이지), 필자는 죽고 독자는 꾸준히 탄생한다는 말(131 페이지),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만남이 곧 연대라는 말(137 페이지), 노동은 생명의 존재형식이라는 말(147 페이지),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을 선명하게 보는 것(153 페이지) 등이다.

 

묵자(墨子)’에는 무감어수(無監於水), 감어인(監於人)이란 말이 있다. 믈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물에 비추어 보면 외모만 보게 되지만 사람에 비추어 보면 인간적 품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155 페이지)

 

묵자 사상의 핵심은 겸애(兼愛)이다.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밥상을 함께 하는 것을 겸상이라 하듯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을 겸애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묵자의 반전, 평화 사상을 언급하며 나쁜 평화 없듯 좋은 전쟁이 없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노자가 개선장군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상례(喪禮)로써 맞이해야 한다고 했다면 전쟁에 관한 한 묵자 만큼 불가함과 흉포함을 소상하게 밝힌 사람은 없다.(167 페이지)

 

묵자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파이다.(168 페이지) 한비자는 권모술수의 달인 같은 평판을 받고 있지만 교사불여졸성(巧詐不呂拙誠)의 고사를 생각하게 한다. 교묘한 거짓을 졸렬한 성실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188, 189 페이지)

 

한비자(韓非子)’에는 진정성이 묻어나는 예화가 많다.(190 페이지) 세계는 분절되어 있지 않다. 분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틀이다. 결정론과 환원론은 단순 무식한 틀이다.(196 페이지) 저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글들이 차분해서 놀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들이 보는 (편지) 글이기에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검열을 거쳐야 했기에 무너지는 모습을 (국가에)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의 결과이다.(224, 225 페이지) 저자는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239 페이지)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함께 깨닫는 것이라며 불편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함으로써 생명의 위상을 새롭게 바꾸어 가도록 하자고 말한다.(253 페이지) 저자는 조카 단종을 유배해 죽이고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신하들을 처단하고 집권한 세조의 정치 과정을 윤리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국 초기의 산적한 과제들을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헤쳐 나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세조는 태종보다도 훨씬 더 비윤리적인 집권을 했다고 설명한다.(389 페이지) 의아하다.

 

저자는 마지막 글인 희망의 안어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이야기한다. 이 말이 20년 감옥 생활을 견디게 한 힘이다. 저자는 산지박(山地剝)괘의 효사인 석과불식을 이야기하며 사십불혹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의혹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혹(迷惑), 환상 등을 갖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420, 421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자살하지 않은 것은 햇볕 때문이었고 살아간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다고 말한다.(424, 425 페이지) 저자는 독방에서 만나는, 길어야 두 시간이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인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는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라 말한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기의 이유를 줄이면 자유(自由)라는 말이 된다.(426 페이지) 저자는 제한된 시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진 면도 있다.

 

물론 이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내 내공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리뷰를 쓰지는 않았지만 읽었기에 대부분 건너 뛰었다. 저자가 주역과 시를 강의 주제로 선정한 이유가 참 긍정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은 관계론, 시는 이성의 과잉에 대한 해결 방식으로 제시된 주제이다. 이 두 주제는 내 주제로 오래 유지될 것이다. 타계 2주기(2016115)를 넘긴 선생님의 명복을 늦게나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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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봄입니다./ “..꽃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봄..............이지요?

편지로 띄울 글에 담을 시를 고르며 위의 둘을 놓고 잠시 고민. 내 시도 아닌 다른 이의 시인데 이래도 되는가?

주역점이라도?

아직 봄은 완연하지 않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다시 읽는다. 간첩 조작 사건인 통혁당 사건으로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한 선생님.

이 분이 자살하지 않은 것은 햇볕 때문이었고 살아간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다.(‘담론’ 424, 425 페이지)

선생님은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길어야 두 시간이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인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말한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선생님이 가장 아낀 희망의 언어이다. 씨로 쓸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

‘주역(周易)’ 산지박(山地剝) 괘의 가장 위의 양효(陽爻: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이다.

빼앗김(박탈당함)을 의미하는 박(剝)괘는 주역 64 괘 중 가장 암울한 상황.(강병국 지음 ‘주역독해 상경’ 391 페이지)

나도 주역에서 내 언어를 설정했다. 수뢰둔(水雷屯) 괘의 첫 번째 효사(초구: 初九) 중 하나인 반환(盤桓) 이거정(利居貞).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름을 의미하는 수뢰둔 괘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반석이 굳고 튼튼함을 의미하는 반환(盤桓)과, 정(貞)함에 머무는 것이 이로운 것이라는 의미의 이거정(利居貞)은 좋다.
지수사(地水師) 괘를 설명하며 ‘남산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백석(白石) 시인이 말한 갈매나무(“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를 굳고 정(貞)한 것으로 설명(이지형 지음 ‘주역, 나를 흔들다’ 47 페이지)한 논자가 있지만 수뢰둔 괘의 이거정도 좋다.

반환(盤桓) 이거정(利居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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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지 않기질투하지 않기를 화두(話頭)로 하던 K 교수의 근황이 궁금하다. 그리워하지 않기도, 질투하지 않기도 알고<旣知하고>도 모른 체 하기일 것이다. 내 화두는 기다리지 않기슬퍼하지 않기’.

 

모두 알고도 모른 체 할 수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기는 그리워하지 않기의 다른 말이다. 그럼 질투와 슬픔의 관계는? 숙제!

 

주역(周易)에 지()의 인상적인 사용 사례가 있다. ‘건지대시(乾知大始)’ 곧 하늘은 큰 시작을 주관한다는 구절이다. ()에는 알다 외에 주재(主宰)하다/ 주관(主管)하다는 물론 사귀다, 병이 낫다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알아야 주재하거나 주관할 수 있고, 알아가는 것이 사귀는 과정이고, 알아야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 참 유용한 글자이다. 그런데 알고도 모른 체 해야 할 때, 그리워하기/ 기다리기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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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신영복 지음 담론’ 20 페이지)는 글은 흥미롭다. 사실이라 하지 않고 글이라 한 것은 자료 출처가 명기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경우 글의 출처가 명기된다 해도 해당 글을 내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없어 그냥 잠정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다. 어떻든 저 글을 수용한다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일등 항해사인 스타벅으로 하여금 전 세계인들을 커피의 바다로 이끌게 하고 사이렌이 그들을 커피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는 스타벅스 커피점의 전략은 대단히 상징적이고 전략적이다.

 

두 로고(스타벅과 사이렌)를 사용한 것은 스타벅스의 본점이 있는 시애틀이 항구 도시이고 커피는 대개 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모비딕의 스타벅은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는 절대금주주의(teetotalism)를 지킨다.(물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절대평화주의이다.)

 

대신 그들은 물, 쥬스, (), 커피 등을 마신다. 커피 모델로 쓰기에 제격이다.(절대금주주의를 지키는 퀘이커교도인 스타벅을 커피 모델로 쓰는 것은 절묘해 보인다.) 일본의 커피 오타쿠인 의사 탄베 유키히로의 커피 과학에 이런 내용들이 있다.

 

중세 아랍의 수피들이 환각제로서 커피를 마시고 대중에게 퍼뜨렸다는 기록, 카페인은 커피 나무와 차 나무가 생존 전략으로 갖게 된 성분이라는 기록..고옥주 시인은 녹차 한잔 속에 바다의 출렁임과 잔잔한 온기가 잠들어 있다는 말을 했는데 유키히로의 책에는 커피에 깃든 오래된 역사와 문화 및 과학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는 해찰(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당연히 혼자 가야 할 것.)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해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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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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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정 작가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자득명(自得明), 법득명(法得明)”이란 단어를 보았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패러디인가? 어떻든 자득(自得)이란 말을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다시 만났다.(먼저 나온 장회익 교수의 책을 내가 나중에 읽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 본질적 요소라고까지 말한 시간, 공간 등은 배우지 않고 스스로 아는 자득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지만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이 불완전해졌다. 시간, 공간 외에 자득적인 개념이 생명이다.

 

저자는 온생명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시간, 공간처럼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하듯 생명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 공간을 다시 보면 사물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지듯 생명을 온생명으로 수정해 보면 생명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저자는 (개별 인간의) 상위 개체로서의 공동체도 하나의 삶의 주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삶의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나눈다. 온생명은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이다.(17 페이지)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 체계는 온생명이고 각 단계의 개체들은 낱생명이다.(20 페이지) 온생명에 속하는 낱생명들은 온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족적인 온생명조차 그럴 경우 생존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20 페이지)

 

온생명도 내적 구성 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지닌 매우 특이한 성격은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점이다.(21 페이지) 의식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가? 저자는 마음과 물질을 한 가지 대상의 다른 두 측면으로 본다.(23 페이지)

 

의식의 주체로서는 자기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의식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곧잘 상정한다. 개체로서의 내 몸과 주체로서의 나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조직으로서의 공동체와 삶의 주체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28 페이지)

 

저자는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가는 현대 사회를 우려하며 제한적 의미의 이상을 내포한 대안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아직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못지 않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70 페이지)

 

생명을 논할 때 부딪히는 난점 가운데 하나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72, 73 페이지) 어느 범위의 대상을 놓고 생명을 말해야 하는지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생명이라는 말로 지칭될 엄연한 현상이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엄밀히 규정하려고 하면 번번이 우리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난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 개념 안에 독자적으로 규정될 그 어떤 실재로서의 생명 개념과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부분적 대상으로서의 생명 개념이 상충하기 때문이라 말한다.(74, 75 페이지)

 

비유하자면 생명현상의 경우 나무에 해당하는 것이 온생명이고 나뭇잎에 해당하는 것이 낱생명이다.(76 페이지) 어떻게 낱생명과 함께 온생명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물질의 화신이다. 그 자체가 물질이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이 물질 세계의 질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라는 형태로 내면화하여 사고하며 행위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의 이러한 조화가 결코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97 페이지)

 

환경 문제의 경우 과학의 언어만으로는 대중을 파고들 수 없기에 필요한 것이 문학이다. 작가는 두 가지 기능에 능통해야 한다. 과학을 포함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다시 이를 문학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대표 사례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다.(104 페이지)

 

미국 작가 다니엘 퀸의 장편 소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근원으로서 인류의 농경생활을 든다.(107 페이지) 인류는 다시 농업 이전의 수렵 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다니엘 퀸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110 페이지) 레이켈 카슨은 문명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니엘 퀸은 문명 자체의 근원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생명체 안에 이를 살아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 별도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것 안에 생명이란 것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외부의 여건과 잘 연결됨으로써 살아 있다고 할 때 보여주는 여러 기능들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113, 114 페이지)

 

저자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황무지에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문학의 힘이고 희망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현실은 삭막하고 파괴적이지만 우리는 그렇기에 이런 작은 씨앗 같은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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