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로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오직 머리가 좋아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기억력이 즣아질 수 있고(컨텐츠가 늘어나니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 읽은 내용을 서평으로 연결짓는 과정을 겪으면 기억하는 게 많아지니 사람들에게는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서평을 쓰면 단편적인 내용들이 아닌 덩어리 형태의 의미 있는 지식들을 기억할 수 있다.

저자의 문장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문제의식에 맞춰 글을 쓰게 되면 문장력도 좋아지고 기억력도 좋아진다.

김종갑 교수의 ‘생각, 의식의 소음‘을 완독 4개월만인 어제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쳤는데 기억나는 것도 있었지만 생소하기까지 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서평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서평이 아닌 잡글의 형태로라도 책 내용을 반영하는 글을 쓰는 것도 의미 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글감이 될지 신경쓴다면 기억력을 좋게 할 수 있다.

결국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력을 좋게 하는 법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사실 기억력보다 창의력을 더 높게 본다.

물론 창의력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 기억하는 게 많은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정체성과도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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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의식의 소음 마이크로 인문학 1
김종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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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갑의 생각, 의식의 소음은 생각을 많이 할수록 행복할까? 묻는 책이다. 이 물음은 도전적으로 들린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그렇다. 저자는 생각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식 내용으로 설명한다.(14 페이지)

 

저자는 생각이 행복에 백해무익하다고 믿는다. 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저술들을 저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읽으면서 얻어낸 결론이라고 한다. 저자는 생각의 99퍼센트가 삶의 소음이라 생각한다.(17 페이지)

 

저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예로 든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구절이 있는 이 시는 님의 생각이 목젖으로 올라올 정도로 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화자에 대한 시이다.

 

이런 면모는 김소월의 못잊어의 정서와도 통한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란 구절이 그 점을 말해준다. 이 두 시인과 대조적인 시가 박재삼 시인의 아득하면 되리라이다.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걱정은 없어라

 

이 시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후에 쓴 시이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저자는 득도한 스님 같다고 화자를 표현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의 스트레스가 투입되지 않으면 부재하는 님이 현존하는 님 생각으로 승화되지 않생각으로 님을 초혼(招魂)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욱더 님의 부재를 의식하고, 더욱더 눈물을 흘리며, 더욱더 불행해져야 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잊을 것을 주문한다. 이는 떠난 님에게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님의 침묵이나 못잊어의 화자와 사뭇 다른 면모이다.(42 페이지) 저자가 건네는 또 다른 주문은 자신의 불행 속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명상 시간에 배워 아는 바이지만 생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명상을 해야 하는가?

 

부재하는 대상을 현재의 공간에 불러들이면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을 놓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무와 꽃을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으며 지각하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6 페이지) 그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

 

저자는 감정은 생각(이라는 음식)을 먹고 증식하는 생명체라 말한다. 아사(餓死)시켜야 하는생각에게 계속 먹이를 제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마음이나 생각은 주어진 환경 변화에 인류가 적응하기 위해 발달시킨 생존의 부산물이다.(74 페이지)

 

짝짓기가 본능이라면 더 좋은 조건의 짝짓기를 하려는 것이 욕망이고 그런 욕망을 따르거나 거부하는 능력이 의지이고 욕망과 의지에 대한 의식이 생각이다.(74 페이지)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그것도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생각한다.(76 페이지)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한 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능력이 생각인바 그것은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인데 생각이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메타 단계로 접어든다.(76 페이지)

 

니체에게 생각은 순수한 자기실현의 동력이 아니라 원한(resentment)이나 증오와 맞물려 있다.(80 페이지) 니체에게 생각은 행동과 반비례하는 것이다.(82 페이지) 여기서 귀족과 사제의 차이가 생긴다. 귀족은 모욕당할 경우 즉각 응수하지만 사제는 약자이기에 마음으로 분을 달래고 삭이게 된다.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고서 수시로 상처 입은 감정을 은밀하게 꺼내보며 복수를 꿈꾸는 것이다.(82, 83 페이지) 문제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반동적이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이다.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욕과 상처에 의해 생각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잔걱정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사소한 것을 가지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굽은 사람들을 소인배라 칭한다.(92 페이지)

 

새겨 들을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생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627)는 성경 구절도 같은 차원의 말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소인배의 고해성사 같은 시로 파악한다.

 

왜 나는 조그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째 네 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의 화자는 지식인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그는 생각을 곱씹는다. 그런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화자를 소인배라 말할 수 있는가? 김수영이기에 높은 기대를 갖고 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우리에게는 지각해야 할 것을 생각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114 페이지) 이런 대표적인 예가 영화 토탈 리콜이다. 이 영화에는 몸으로 체험하는 여행이 아니라 컴퓨터 정보로 여행을 하는 상품이 나온다.(116 페이지)

 

생각을 내려놓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접어든다.(117 페이지) 이런 저런 걱정, 근심 등에 사로잡히면 하늘이 하늘로 보이지 않고 바람이 바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117 페이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려면 생각하는 대신 지각해야 한다.(118 페이지)

 

지각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생각은 신경세포를 거쳐 전달된 정보를 처리하는 것 즉 사후처리장치이다.(118 페이지) 생각은 지각보다 한발 늦게, 언제나 상황이 종료된 뒤에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골방에 칩거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다.(119 페이지)

 

저자는 생각에도 중독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124 페이지) 저자는 생각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몸의 하녀라고 말해야 옳다고 말한다.(130 페이지)

 

저자는 가장 많은 생각의 노력이 요구되는 대화도 사실은 흐르는 물처럼 저절로 행해진다고 말한다. 상대와 호흡이 잘 맞으면 내가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미노처럼 상대의 말에 자극되어 나의 말이 저절로 이끌려 나오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131 페이지)

 

아무리 자유로운 사람도 생각이 자유롭지 않다. 생각으로 생각을 극복하거나 물리칠 수 없다.(139 페이지) 생각도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데 너무 많아지면 삶이 생각으로 대체되고 그러다가 생각의 홍수에 빠져 익사할 수 있다.(141 페이지) 물론 화음(和音) 같은 생각도 있다.

 

내 경우 명상 스승으로부터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듣곤 했다. 생각을 하는 것에도 적용될 말이다. 그러면(알아차리면) 멈출 수 있다. 생각을 알맞게 할 수 있다. 명상에서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현재에 머물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도 없는 것(과거, 미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현실)을 감각적으로 즐기라는 말을 한다.(145 페이지) 예컨대 어떤 일을 두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거나 해결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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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연천을 漣川이 아닌 蓮川으로 써 현판을 내건 예술 단체가 있습니다.

무슨 국악단체인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단순 착오이기보다 연(lotus)을 좋아해 그렇게 쓴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기심 탓이지만 蓮川이란 지명을 제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 보았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꽤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 방문 5년만에 강화 고려산 적석사 인근의 한 수행자께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 2013년 8월 1일 엄청난 폭염을 뚫고 다녀온 곳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제 수행 외의 상담은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들은 말은 수행하라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저에게만 내려진 말은 아니었을테니 상담을 접은 사연이 짐작됩니다.

어떻든 다녀오는 길에 강화 선원사의 연꽃도 보려 했는데 아쉬움이 큽니다.

남양주의 김명리 시인께서 인근 봉선사의 연꽃을 보시고 시를 써 페북에 올리신 것을 보고 더욱 연꽃을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선택지는 남양주 봉선사 말고 없는 것일까요? 강화가 수행자 말고 만날 일이 없는 곳이 아니니 여전히 갈 수 있는 곳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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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 동기가 업무 차원에서 받은 메일 말미에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란 시가 함께 수록되었다며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간단하게 느낌을 적어봤습니다.

‘선운사에서‘란 시 참 좋습니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지듯 쓰지만 최고의 내공을 보이는 명필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전공(서양미술)과 문단 데뷔(시집)와 최근 출판(장편 소설 청동정원; 2014년)이 다 다른 최영미 님의 대표 시이지요.

‘선운사에서‘를 비롯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린 시들이 다 좋지만 제게 최영미 시인은 미술강연자나 소설가로 더 인식되는 분이지요.

최영미 님은 쇠와 살이 맞부딪히던 시대(작가가 통과한 80년대 초 대학시절)를 청동시대라 표현했지요.

우연이지만 같은 해에 태어난 강신애 시인의 시 가운데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이란 표현이 있는 ‘오래된 서랍‘이란 시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그곳은 의식 맨 아래의 서랍이고 오래된 서랍이지요.

최영미 시인에게 ‘선운사에서‘를 쓴 시절은 비록 청동시대의 한 시기였겠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그래서 좋은 것 같습니다. 평온하기만 해 보이는 나희덕 시인(1966 - )도 시와 다르게 수필에는 상처와 얼룩이 핍진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강신애 시인은 ˝맨 아래 서랍은 열어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만 최영미 님은 다른 듯 합니다.

돌층계 위에서 플라톤을 읽을 때마다 총성이 울렸고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이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으나 그럼에도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던 시를 쓴, 최영미, 강신애 시인의 한 살 위의 기형도(1960 -1989) 시인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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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있습니까? - 연애 감정부터 혐오까지, 격정적인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10가지 감정 지형
몸문화연구소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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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문화연구소의 감정 있습니까?’는 연애 감정, 혐오, 시기심, 수치심, 공포, 분노, 애도 등의 주요 감정들과 감정 코칭, 감정 노동 등 감정에 대한 이야기거리들을 다룬 모음집 형식의 책이다. 소장 김종갑 교수를 비롯, 김운하, 김주현, 윤소영, 윤지영, 임지연, 최은주 등 건국대 교수들과 홍익대의 정지은 교수 등이 모인 몸문화연구소는 그간 몸의 미래 미래의 몸’, ‘내 몸을 찾습니다’, ‘공간의 몸 몸의 공간’, ‘그로테스크의 몸등을 펴냈다.

 

감정을 다룬 이번 책은 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김종갑 교수(이하 교수 생략)는 감정을 외부 자극으로 인해 몸에 발생하는 변화로 정의한다.(12 페이지) 한편 요즘 화두가 된 정동(情動)이란 개념은 의식에 잡히지 않는 몸의 변화를 의미해 감정 논의에 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김종갑은 감정이란 무엇인가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데카르트의 오류를 예로 들어 감정이, 옳고 그름을 분별/ 판단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성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자질이며 능력이다.(24 페이지) 프로이트가 말한 바 감정에도 에너지 보존 법칙이 존재한다는 말은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감정은 안으로 표출되어 자신의 내부를 공격한다.(27 페이지)

 

이와 관련해 추가할 말은 리비도 경제학이란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당연히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계속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리비도 경제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246 페이지)

 

김종갑에 의하면 감정은 곧 정념(情念: passion)이다. 피하고 싶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마지못해 겪어야 하는 불행이 정념이다.(25 페이지) 김종갑이 말하는 바는 사회적 압력이 없는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지만(26 페이지) 감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서 발생하는 몸의 변화로 타자에게 나를 열어놓지 않으면 변화가 생기지 않는데 그것 즉 변화 없는 삶은 타성이고 관성이고 역사의 종말이라는 점이다.(38 페이지)

 

최은주는 대도시에서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기에서 자기가 관여하는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잭 바바렛 지음 감정의 사회학중에서)을 의미하는 감정 또는 느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이 축소되고 이성이 확대된 합리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이성의 규율에 종속하게 되었지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내밀성의 세계라는 이중 구조로서 가족 영역이 출현하였고 그로 인해 가족에 대한 기대나 감정 노동의 부담이 커졌다고 말한다.(72, 73 페이지)

 

앞에서 감정이 옳고 그름을 분별 및 판단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이성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자질이며 능력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알랭 바디우가 현대 세계의 철학에 사랑을 포함시킨 이유와 관련이 있다. 바디우는 사랑을 정념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이 단지 정념이었다면 발생만 있었을 것이지만 사랑은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계기이며 진리 과정으로 구축하는 절차다.(77 페이지)

 

김종갑이 타자에게 나를 열어놓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무변화의 삶은 타성이고 관성이고 역사의 종말이라 말했다면 최은주는 관계의 갈등을 인정하지 못하고 폐쇄적이 된다면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타인에게 완전히 확인받을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란 바우만의 말을 언급한다.(78 페이지)

 

김운하는 낭만적인 사랑 따위는 없어에서 감정 사랑관계 사랑을 이야기한다. 전자는 감정의 온도와 강도가 사랑의 본질이고 그것이 사랑과 비사랑을 나누는 유일한 잣대라는 믿음으로 대표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가 나를 때린 것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며 그의 사랑은 확실하다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96 페이지)

 

후자는 관계의 성격과 질()을 말하는 사랑이다. 김운하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무죄이고 순수한 감정은 항상 옳고 정당하다는 사고는 역사적으로 18세기 말 낭만주의 시기에야 최초로 등장한 것이라 말한다.(100 페이지) 김운하에 의하면 추구하는 이상이나 대상의 미덕이나 악덕 여부와 관계 없이 추구되는 감정과 열정 자체를 숭배하는 사상이 바로 감상주의로 치닫기도 하는 낭만주의이다.(101 페이지)

 

또한 감정의 순수성을 가치로 확립하는 순간 낭만성은 감상성과 혼동되기 시작하고 이기적 소유욕과 쉽사리 뒤섞인다.(102 페이지) 감정 사랑으로 이해되는 사랑은 언제든 감정 과잉의 감상주의나 이기적 나르시시즘이나 광적인 소유욕에 불과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으로 쉽게 변질된다.

 

김운하는 감정은 그저 사랑을 촉발하는 계기이고 사랑이라는 욕망의 기관차를 내달리게 하는 엔진이기에 사랑 구성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말은 일체유심조란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를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알고 있지만 마음은 어떤 것에 시동을 거는 것, 김운하의 어법으로는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하는 것 즉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김운하에 의하면 사랑은 윤리적인 관계 형식으로 감정의 소통뿐 아니라 공감 능력, 배려, 헌신, 용기, 절제, 심지어 결별의 윤리까지 포함하는 소통의 윤리적 관계이다.(103 페이지) 김운하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말한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소통 능력과 이성의 지혜를 말한다.

 

김운하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성을 배제하는 것, 욕망과 감정의 순수성만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샤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라 말한다.(106 페이지) 이성은 사랑을 인도하는 나침반, 사랑의 동반자이다.

 

김종갑은 혐오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니에서 지금까지의 서양 역사를 남성이 문화를 독점하면서 여성을 자연으로 비하했던 가부장의 역사로 규정했다. 김종갑에 의하면 문명의 주인공으로서 여성을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그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혐오는 관념으로서의 인간은 신처럼 위대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하늘이면서 동시에 땅이고, 멋있으면서 비루한 존재라는 이중성 또는 양가성을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부분은 남성이 챙기면서 부정적인 부분은 여성에게 투사함으로써 생겨난다. 김종갑은 남성의 여성 혐오는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남성의 여성 혐오는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말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누리다가 이제 그 몫을 챙기지 못하게 된 많은 남성들이 적대감을 여성에게 투사하거나 여성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지은은 고통스러운 질투, 존재의 시기심에서 라캉, 멜라니 클라인 등의 논의에 의거해 질투와 시기심을 구분한다.(라캉의 논의가 클라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클라인은 질투심은 한 사람이 두 사람 즉 자신의 연인과 이 연인을 사랑하는 경쟁자와 맺는 관계로, 시기심은 오직 시기하는 자와 시기받는 사람과의 관계로 설명했다.(148 페이지)

 

정지은은 너도 나도 결여의 주체임을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라캉 정신분석에 의하면 결여는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결여의 주체는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 그런데 결여를 모르는 자, 시기하는 자는 즉각적 만족과 향유를 줄 수 있다고 믿는 향유의 대상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원리상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향유의 대상을 얻기를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소유했다고 믿는 타자를 그 대상과 함께 파괴하고자 한다.(159 페이지)

 

임지연은 부끄럽습니다만..’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구분한다. 수치심이 전체 자기를 문제삼는다면 죄책감은 구체적 행동을 문제삼는다. 수치심이 숨거나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라면 죄책감은 고백하기나 사과하기로 나타난다.(169 페이지) 임지연은 수치심을 개인의 내면을 인간적으로 만들고 타자와 깊이 공감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긍정적 감정으로 취급한다.

 

박완서 작가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수치심의 긍정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나 이것만으로 부족한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수치심을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임지연에 의하면 수치심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형성되는 심리적이면서 관계적인 복합 감정이다.(170 페이지)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도 수치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을 보라. 반면 붉은 뺨을 가진 사람들‘(부끄러움을 알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고 윤리적 책임을 지려 했다.

 

윤지영은 분노의 정치학으로서의 메갈리안 현상에서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혐오하는 자는 불합리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그 현실의 판을 뒤집어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분노하는 자는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질문하는 자이고 상식적 좋음으로 통칭되는 예의범절과 효, 사회성, 효율성 등의 프레임을 깨는 자이다.(216 페이지)

 

혐오하는 자는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사태의 원인 제공자에게 분노하기보다 스스로 부조리의 재상산자가 된다. 윤지영은 메갈리안들을 분석한다. 메갈리안들은 노르웨이의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과 메르스 갤러리 사용자의 합성어로 이 호칭을 획득한 이들은 이전까지 만연해 있던 여성 혐오의 프레임을 뒤집어 패러디하며 문제적 주체들로 부상한 사람들이다.(218 페이지)

 

윤지영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단계 중 사자 단계로 메갈리안들을 설명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메갈리안들은 중력과 도덕, 상식의 무거움에 짓눌린 낙타 단계에서 벗어나 사자 단계로 돌진해나갔다. 윤지영은 메갈리안과 일베의 차이를 논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메갈리안들은 자신의 존립 자체의 항구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혐오 현상의 종식과 더불어 스스로도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베와의 공멸을 유도해내고자 하는 신적 폭력 혁명적, 법 파괴적 폭력 의 구사자들이다. 신적 폭력이란 개념은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신화적 폭력이란 개념과 함께 제시된 것으로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 법 보존적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혁명적/ 법 파괴적 폭력이다.

 

윤지영은 메갈리안의 미러링에 대해 논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거울은 동일성의 궤적에서 끊임없이 이탈하는 것이다. 평면 거울, 볼록 거울, 오목 거울 등 거울들 가운데 동일성의 원리에 기여하는 것은 없다.

 

이미 대칭과 휘어짐, 맺힌 상의 상하 반전, 좌우 반전, 크기의 축소와 확대 등을 수반하는 변형의 장이 거울의 구성 원리이다. 윤지영은 메갈리안이라는 반사경(反射鏡)을 일베와의 동일체로 보는 것은 거울의 반사 원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한다.(231 페이지)

 

우리가 제대로 분노한 적이 있는가를 묻는 윤지영은 남성 혐오는 없고 단지 남근 질서에 대한 분노, 여성 혐오에 대한 분노가 있을 뿐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인상적인 말은 메갈리아 이후의 새로운 페미니즘은 메갈리안을 계승함과 동시에 넘어서고 있다는 말이다.

 

감정 있습니까?’는 몸문화연구소원들이 감정을 화두로 씨름하고 고민하면서 생각을 입 밖으로 발성하면서 2016년 한 해를 보낸 결과물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분노와 혐오, 질투와 시기심, 정서 - 사랑과 관계 - 사랑,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 일베와 메갈리안(미러링 부분), 수치심과 죄책감 등의 정치(精緻)한 구분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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