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독일로 가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후에 박사가 된 국문학과 출신의 시인 허수경 님이 타계한 지 2년이 되었다. 내일(69)은 시인의 생일이다. 그에 맞춰 유고 산문집 오늘의 착각이 나왔다.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집을 풍천소축(風天小畜)과 산뢰이(山雷頤) 괘로 분석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 나는 이화원(頤和園) 이야기를 생각하며 연결점을 느낀다.

 

이화원은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가 지은 여름 별장이다. 땅을 파내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는 산을 쌓았다. 분명 산과 무덤은 다르지만 나는 가산(假山)이란 말로부터 무덤을 떠올린다.

 

왕릉을 발굴하는 불운 혹은 행운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한 시인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이란 말을 더했다. 좋은 시로 큰 울림을 전해준 시인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신의 고고학자라도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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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부 공간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정도는?

2. 실용적 도면 그림에 대한 흥미와 숙련도는?

3. 미술, 조각 등에 대한 흥미도는?

4. 식물, 수학, 지리, 역사, 사회학 등에 대한 흥미는?

5. 쓰기와 말하기의 숙련도는?

6. 독서량은?

7. 타인이 자신을 어느 정도 믿는지?

8. 문제해결의 논리성은?

9. 대중의 욕구에 얼마나 민감한지?

10. 예술적 욕망에 대한 민감도는?

 

이상은 이규목 교수가 선정한 16개의 조경가 자질 테스트 항목들 가운데 10개를 고른 것이다. 자연과학, 인문과학, 예술 등에 두루 관계되는 종합적 재능과 소양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서양에서는 정원설계가가 정원을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사대부들이 정원을 만들었다.

 

사대부는 정치에도 관여했고 시서화(詩書畵)를 할 줄 알았고 풍수에 능했고 정원도 만들었다. 조경을 영어로 landscape architecture라 한다. 문화해설에 도움이 될까 싶어 조경 기능사 과정에 등록했는데 자꾸 escape하고 싶어진다. 조경의 기능적인 면만 가르치는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든다.

 

(원성을 살 것이 분명하고 효율적이지도 못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나는 조경 논문으로 이론 시험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워오든 책을 보고 쓰든 고사장에서 완성하도록 말이다.) 나는 조경의 배경, 정신(마음가짐), 역사 등을 배우고 싶다. 그런데 인공위성이 지구 중력을 뿌리치고 비행하려면 초속 8km에 가까운 속도를 내야 하듯 인간이 관성을 뿌리치려면 결단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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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 소진사회의 인간과 종교
김화영 지음 / 나다북스(n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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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집을 읽고 난 느낌은 좋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느끼는 기쁨 이상일 수 있다. ‘이론과 이론 기계‘, ’힘의 포획등을 쓴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나다 공동체 대표인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가 그런 책들이다. 오길영 님은 에세이의 뿌리는 감상적 체험의 글이 아닌 지성과 개념이며 에세이의 문체는 현란한 글재주가 아니라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라 말한다.

 

김화영 님은 자신의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통찰과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려 장치들에 포획당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비극적 자본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웃음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에세이는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글과 공명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린다는 김화영 님의 말과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김화영 님은 주체(subject)라는 라틴어가 주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툼과 종속된 것 또는 하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투스라는 두 개의 어원을 갖는다는 말을 한다. 자발적 복종 주체가 되기도 하는 주체의 역설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오길영 님도 주체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체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두 저자의 주체론은 배경이 다르다. 김화영 님은 장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는 차원이고 오길영 님은 유아론(唯我論)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차원이다. 장치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인간 주체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것이다.

 

김화영 님은 장치를 설명하는 장에서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말하며 내부는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외부도 내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부와 외부는 상대방 없이 정해지지 않으며 둘을 나누는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길영 님은 사람이 배우는 것은 오직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나하고 생각이 다른 책을 읽을 때, 익숙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는 오길영 님이 말한 지성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마음 공부라는 장을 통해 나는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어떤 사유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김화영 님의 마음론은 색다르다. 김화영 님은 마음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이 제시하는 대안은 지성에만 의존해오던 공부를 지양하고 지성과 마음이 하나가 된 온전한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칸트는 물() 자체(自體)는 보이지 않기에 알 수 없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나오는 입력된 코드 그대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 자체다; 진은영 지음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70 페이지)

 

후설은 장미를 보면 감각기관에 수용된 그대로 장미가 인식된다는 칸트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만일 그렇게 기계적으로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장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게 제각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후설의 말을 풀어보면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에 따라 세계를 본다는 말이 된다. 후설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이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이끌림에 반응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에 대해 논하며 일상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일상에서 습관적으로(별다른 지향 없이) 행동하고 사유하는 우리에게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의 순서를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너무 친숙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습관화된 세계가 깨지는 것은 세계를 지탱하던 방식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기존 세계가 존속되도록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상이다.)

 

후설의 제자인 메를로 퐁티는 마음의 지향이 이미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했다. 하이데거가 세계 - - 존재인 우리가 늘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퐁티는 우리의 마음의 지향 작용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화영 님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경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어쩌면 신체 경험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길영 님은 물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진은영 님의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거론한다. 진은영 님은 선험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개성이라 말한다. “우리는 물자체와 직접 만날 수 없고 단지 감성과 오성(悟性)이라는 형식의 매개를 통해서만 사물과 관계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은 항상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유는 선험적 도식론에서도 계속된다.”(’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211 페이지)

 

네그리와 하트를 인용해 진은영 님은 매개 없이 우리는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철학적으로 칸트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된 매개 메커니즘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는 의회나 합의기구라는 대표제를 작동시킨다.”는 말을 한다.

 

오길영 님은 진은영 님이 주로 기대는(의거하는) 니체, 들뢰즈, 네그리 등의 탈근대적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답을 시도하고 그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하며 자신에 찬 모든 직접적 형식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이들보다는 우리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탐색하는 칸트의 겸손함에 마음이 쏠린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오길영 님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런가 하면 김화영 님이 언급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칸트, 후설, 하이데거, 퐁티 가운데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하이데거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약천 남구만 등 조선의 문인 - 정치인 가운데 누가 가장 두 영역에서의 괴리가 적은지를 논할 때 우리는 남구만을 들지만 위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단연 하이데거를 들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이데거는 부정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에 하이데거 이야기가 나온다. 박찬국 님이 쓴 하이데거와 나치즘을 읽고 쓴 서평 형식의 글인 사상과 정치라는 글에서다. 박찬국 님은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그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는 악성의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는 없고 양자 사이에 우연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는 현실 정치로서의 나치즘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과 그것의 이념적 표현인 니힐리즘, 그리고 니힐리즘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극복할 대안으로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번쩍 혹은 아하 하는 초월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경험이다.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규칙적인 종교생활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환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치 유희와 같아서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놀이이기도 하고 삶에 자리한 고통들을 유유히 견뎌내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희망이기도 하다. 다시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분의 존재도 아니고 세계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삶은 그저 나의 길을 함께 가며 웃는 것, 비극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운명과 자유의 놀이터다.“, ”모든 것이 있게 하라! 다만 모든 장치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게 하면서.“ 김화영 님에 의하면 마음은 우리의 지향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창조적 근원지이고 기도는 마음의 통로로 걸어내려가 그 안에 깃든 신성을 만나는 문이다.

 

김화영 님의 결론은 영성(靈性) 신학자의 해답답다. ”비극을 침묵으로 견디고 마침내 눈을 뜬 이들이 모든 존재 안에서 신을 보는 날, 비로소 삶의 수수께끼들이 풀리며 빛을 보게 되는 그 날이 바로 우리의 시간, 영원한 지금이 될 테니까.”란 결론은 신비한 만큼 희망적이다.

 

노력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다. 그게 인간답다. 그러나 가 하는 노력의 중요한 전제는 그런 노력을 한다고 욕망이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유몰론자의 윤리를 설명한 오길영 님의 결론도 좋고 영성 신학자 김화영 님의 결론도 좋다.

 

칸트의 겸손에 마음이 쏠린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생각해본다. 맥락이 일치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나보다 공부가 깊고 영성에 접()한 김화영 님의 인도를 따라 내 인식 밖의 영역에 열린 유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이 김화영 님의 책을 읽고 얻은 결실이라면 결실이다. 묵직한 중수필, 지성과 사유의 깊이를 느낀 책을 읽게 해준 두 분께, 특히 내게는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뜨게 해준 김화영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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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정리를 단행했다. 몇 달간 무분별하게 사 방바닥에까지 쌓아둔 책들, 사놓고 먹지 않아 유통 기한이 지난 약들, 언젠가 읽을 것이라는 생각에 여기저기서 가져와 모아둔 인쇄물들이 주대상이었다. ..더이상 읽을 가능성이 없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아 두고 있던 책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최근 샀으나 공간이 없어 바닥에 놓아둔 책들을 꽂았고 먼지를 털어내고 필요 없는 잡동사니들도 버렸다.

 

공간이 넓어졌고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졌다. 번뇌와 아집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리(整理)는 정리(情理)에 연계되어 버리지 못하고 두고 있던 것들과 정리(定離)한 것이기에 정리(正理)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간만 차지하다시피 하던 책을 버리니 새로 산 책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나에게는 어디 있는지도 몰라 읽지 못하던 책들이 눈에 띄니 일목요연의 통찰력이 생긴 셈이다.

 

사놓고 먹지 않은 약을 보면 누구에게인지 모르나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살 때는 꼭 필요하고 무언가 의미심장한 결과가 생기리라 생각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흐지부지하다가 결국 돈을 버린 셈이기에 그렇다.

 

오늘 내 정리(整理)는 반하백출천마탕을 오래 벼르기만 하다가 주문해 먹고 있는 내 근황과 같은 차원의 결단인지도 모른다. 올해도 벌써 반환점에 접어들었고 책도 제재로 읽지 못하고 체력은 떨어져 힘들어하기만 하는 내 사정을 심각하게 고려한 결과 무언가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결과이리라. 생강고(生薑膏)도 주문할 생각이다. 공자(孔子)께서 불철강식(不撤薑食)했지만 불다식(不多食)했다던 음식인 생강을 진액이 나오도록 오랜 끓인 음식이다. 이 역시 반하백출천마탕과 같은 목표로 구입하려는 음식이다.

 

내일은 210시간의 숲 해설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런 저런 일들이 겹쳐 바쁘고 힘들지만 열심히 할 생각이다. 욕심으로 무리하게 신청한 것들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가려내고 집중할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나는 그간 다른 사람들을 화제에 많이 올린 점을 반성한다. 변변히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했고 잘 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 했다.

 

시간이 이렇게 가면 머지 않아 2021년이 되었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나는 불가피하게 화들짝 놀라며 상투적 반성과 오래된 다짐을 되풀이 할 것이 분명하다. 시간은 내 불성실과 치열(熾熱)하지 않은 삶의 결과 빠르게 느껴지지만 현대를 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이 느끼는 것이리라.

 

두 달 후 치러야 할 새로운 목표로 인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읽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기에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는 불편함이나 아쉬움은 크지 않을 것이다. 연천 재난기본소득으로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 경기도 재난 기본소득으로도 두 권을 샀다. 남은 돈으로 살 책이 몇 권 더 있다.

 

무작정 서울에 가 나름으로 고른다고는 하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고 무원칙하게 책을 사다가 지방 소도시의 책방 사정 때문에 치밀하게 돈 계산을 하고 주문을 하고 받으러 가는 시스템에 잠시이지만 들어왔기에 나를 돌아보고 계획적인 구입을 하는 방향으로 내가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사실 책 구입이 여의치 않아 평소 같으면 사지 않을 먹을 것들을 하릴 없이 구입하는 바람에 대책 없이 엥겔 계수만 올라간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마음이 어수선하면 방 정리를 추천한다.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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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출판사 대표이자 숲해설사인 강맑실 님의 경희궁 숲 해설을 들었다. 경희궁에 초점을 두고 찾아가 들었지만 사실 주인공은 나무와 꽃이었다. 수피가 특이한 모과나무도 보았고 열매가 등잔불을 밝히는 데 사용된 쉬나무와 (선비를 상징하는) 회화나무가 나란히 있는 장면도 보았다.

 

설명에 의하면 두 나무는 선비들이 이사갈 때 가지고 간 나무였다고 한다.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이지만 통의동 백송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나이테 분석 결과 일제 시기에 자라지 않았다는 나무다. 파란과 고통의 시대상황이 압박으로 작용한 탓이리라.

 

자료에 의하면 백송은 10년이 될 때까지 높이가 1미터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자라다가 15년이 지나면 생장이 왕성하다.(전영우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212 페이지) 이 부분이 마음에 든다. 바람(희망)을 투영해 들을 만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백송은 3엽송이지만 2엽송인 소나무나 해송보다 5엽송인 잣나무와 더 가까운 사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관다발을 기준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즉 백송은 잣나무처럼 관다발이 하나이고 소나무나 해송은 둘이다.(전영우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212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에 소나무 기록이 많다. 벌레를 잡도록 했다는 내용, 벼락 맞았다는 내용, 수피를 구황식품으로 사용하라고 허락했다는 내용, 능에 심었다는 내용, 큰 바람이 불어 뿌리가 뽑혔다는 내용, 금산(禁山) 명령을 어기고 베어 처벌을 받았다는 내용, 벌목을 허락했다는 내용,

 

비보(裨補)를 위해 심었다는 내용, 벌레가 잎을 갉아먹었다는 내용, 능의 나무가 쓰러지자 위안제를 지냈다는 내용, 임금의 관으로 사용되는 품질 좋은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한다는 내용, 옛 중국에서는 천자의 무덤에 심은 나무라는 내용 등이다. 소나무 관련 내용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소나무가 우리에게 친숙하고 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나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소나무의 강인한 유전형질 때문이다. 이 부분이 백송 이야기(10년이 지나도 1미터도 채 안 되지만 15년이 되면 생장이 왕성하다는 내용. 백송에게 그 시기는 내실을 다지는 시기일 것이다.)와 공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소나무에는 이래저래 이야기 거리가 많다. 하기야 유독 소나무에만 해당하는 사안은 아니리라. 해설 앞 부분에서 나왔듯 동물과 다른 식물의 사정이 반영되어 참으로 다양한 생식기관()을 가진 식물 자체는 그 만큼 이야기가 많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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