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왕조실록도 행간의 의미를 헤아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광해군 당대의 사초 등 원자료를 옮긴 실록 본문이 아닌 인조(정원군 아들)대에 편찬될 때 작은 글씨로 추가된 세주(細註)가 출처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통해 다시 광해군 일기는 반정 세력인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일기는 사학사(史學史)적으로 단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정서본(正書本)과 중초본(中草本)이 남겨진 것이 광해군 일기다.

 

실록은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통해 편찬된다. 방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작성한(휘갈겨 쓴) 초벌 원고를 초초본(初草本)이라 하고 수정작업을 거친 원고를 중초본(中草本)이라 한다. 이 역시 초서로 휘갈겨 쓴 원고다. 중초본 원고를 정서한 것이 정초본(正草本)이고 정초본을 대본으로 활자를 뽑아 조판 작업을 벌여 인쇄한 것이 완성된 실록이다.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은 세초(洗草)한다. 종이 재활용 차원이고 완성된 실록과 다를 경우 생길 시비거리를 막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광해군 일기의 정서본과 중초본이 남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과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인쇄를 포기하고 정서한 두 벌을 강화 정족산과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관했고 중초본은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다.

 

광해군 일기 뿐 아니라 광해군도 기록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을 노숙까지 하며 다닌 것이다. 분조(分朝)를 이끌고 왜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분조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조정(朝廷)이 피란할 때 임금과 세자(世子)가 따로 피란하여 세자(世子)가 거느리는 조정(朝廷)을 말한다. 이 분조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가 그렇게 빨리 밀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낙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쫓겨난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서다. 폐주(廢主) 즉 쫓겨난 임금,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 등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었다. 폐주는 맞지만 혼군은 아니다.

 

광해군을 쫓아낸 사람들은 반정 13년만에 청나라군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태종(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광해군의 정책을 답습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였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는 의미의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에서 유래한 반정(反正)이란 용어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 것이다. 어떻든 반정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 무리한 토목공사,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재조지은을 베푼 명을 배신한 것 등이다.

 

광해군의 부인 유씨가 반정 당일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 주체들에게 한 말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요,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기할 말이 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주류 학자들은 주자학 강화에 여념이 없었고,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는 말이다.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권력을 찬탈(簒奪)했고 우암 당시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

 

맞 비교는 무리인가? 그렇지 않으리라. 물론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인조반정에 대해 동조했던 남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재조지경: 再造之慶)라 극찬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을 보자. ‘상부(孀婦)‘란 시를 통해 유몽인은 새 남편감(인조)이 훌륭하다 해도 본래의 지아비(광해군)를 배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 시로 인해 그는 반혁명 행위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어우(於于)란 그의 호는 공자를 조롱하는 말이다. ’장자천지조에 나오는 말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이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이덕일 지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269 페이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광해군이 태어난 해인 1575년은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난 해이다.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을 의미하는 전랑(銓郞)5, 6품에 불과한 직이지만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이 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김효원 후임으로 추천된 심충겸이 외척(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인 까닭으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세력이 동인이었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서인이었다. 광해군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낸 1580년대는 중요 전환기였다. 척신정치가 끝나고 사림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정여립 처리 문제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과정에서 남명 문하의 수재였던 최영경의 죽음으로 수사 책임자인 송강 정철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이 북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는 동인의 분열이 일어났다.

 

()의 원병 파견은 자국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 위해 택한 조치였다. 광해군에게 영특하고 총명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명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정의 요청을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부했다. 이는 광해군의 반명(反明) 감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은 끝내 명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선조의 급서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어렵게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이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한 것이었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진 국가 기반을 세우고 후궁의 자식이자 둘째로 등극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것이다. 붕당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심약했던 광해군을 더욱 심약하게 한 것은 형 임해군의 역모 혐의와 그에 따른 교살이었다. 광해군 5년인 1613년 대북(大北)이 영창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도 저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역모 관련자로 치부되어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다.

 

저주 행위란 선조가 죽은 것은 이미 죽은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 탓이라는 소문을 듣고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 사람을 보내 허수아비 등을 묻는 등 주술적인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 폐모 논의는 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는 광해군의 큰 실책이었다.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이 있었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막혔다. 이 좌절로 광해군이 서울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청도 광해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을 살렸다는 명분을 내세운 명의 무리한 은() 수탈도 조정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의 군대를 보냈다.

 

광해군은 신중하게 처신(관망)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사실만을 놓고 보면 강홍립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관망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긴 것을 강홍립의 책임으로 돌렸다. 하지만 언급했듯 전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었음을 알아야 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명의 의심을 희석하려 했다. 정묘호란 시 강홍립은 향도(嚮導)로 차출되었다.

 

1616년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풀려난 뒤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아간 이귀란 자가 있다. 이귀 일당이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들어가 광해군이 직접 이귀를 문초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을 주물렀던 개똥이가 이귀를 비호함으로써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이는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의 외교는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숙종이 시귀(蓍龜)라 칭한 미수 허목(1595 1682). 점칠 때에 쓰는 가새풀과 거북이란 말에서 유래한 시귀란 시()의 귀신이 아니라 점칠 것도 없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숙종의 말은 주역에 능통한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주역의 대가였던 미수는 병중(病中)에도 누워서 주역을 읽었다. 미수는 숙종으로부터 은거당(恩居堂)을 하사받았다.

 

미수 이전에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경우는 둘이었다. 방촌(厖村) 황희가 세종에게서 영당(影堂)을 받았고, 선조 때 활약했던 오리(梧里) 이원익이 인조에게서 관감당(觀感堂)을 받은 것이다. 84세에 우의정에서 물러나 연천으로 돌아온 미수는 은거당에 은거(隱居)했다.

 

리은시사(離隱時舍)는 명재 윤증(1629 1714)의 고택이다. 리은(離隱)1) 속세를 떠나<> 은둔<>한다는 의미라 주장되기도 하고, 2) 알맞은 때에 은둔<>을 벗어난다<> 즉 세상에 나아간다는 의미라 주장되기도 한다.

 

나는 2)를 지지한다. 주역의 첫 괘인 중천건(重天乾)괘를 설명하는 효사 가운데 현룡재전 이견대인(見龍在田 利見大人)이란 말이 있다. 잠겨 있던 용<잠룡: 潛龍>이 물 밖으로 나와 밭에 나타났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물론 주역 중천건괘에는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말도 있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나타났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이 이견이란 말에서 경복궁 경회루의 동문 중 하나인 이견문(利見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어떻든 은둔도 때를 따라야 하는 것일 수 있지만 정녕 알맞은 때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리은시사를 세상에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윤증은 한번도 벼슬하지 않았지만 이산(泥山)에서 송시열을 상대로 소론의 논리를 만들었다.

 

소론(少論)인 윤증이 노론(老論)인 송시열(1607 1689)의 정적이었듯 남인(南人)인 허목 역시 송시열의 정적이었다. 나로서는 세 사람이 모두 당시로서는 드물게 80을 넘겨 살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허목 88, 윤증 86, 송시열 83)

 

아깝게(?) 80 문턱인 79세에 세상을 떠난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다. 맹사성의 조부 맹유는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발해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해 버렸다.

 

이때 맹유의 나이는 78세였다.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는 충청도 서천으로 숨어 들었다. 맹희도는 아들 맹사성에게 고려 왕조는 더 이상 없다. 마침 네 스승인 권근이 너의 출사를 권하고 있으니 새 왕조에 몸을 담아 백성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라.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은 너의 할아버지와 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했다.

 

맹사성은 조선 건국에 대한 노골적 거부 의사를 철회한 아버지를 보며 새 왕조에 출사(出仕)했다.(신동욱 지음 조선 직장인 열전’ 90 페이지)

 

연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이양소(李陽昭), 김양남(金揚南) 모두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고 은둔한 사람들이다. 태종 이방원과 동문수학했거나 친구였던 두 사람은 태종의 부름을 끝내 거절했다.

 

연천(漣川)의 연()은 물 이을 연이기도 하고 눈물 흘릴 연이기도 하다. 이양소로부터 거절당한 태종의 눈물이란 데서 연천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이름의 유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정도전, 정몽주, 이방원을 비롯 여러 군상들이 빚어낸 고려 말, 조선 초 정치사회가 새삼 관심을 끈다. 나로서는 이제 조심스럽게 고려로까지 관심을 넓힌 셈이다. “이번 겨울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비어 있는 들판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볼까.”란 말을 한 한 작가처럼 나는 아직 남은 겨울에 서점에 들러 해당 책들을 찾아야할까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5대손이다.“(운현궁 홈페이지) 그들의 계보는 영조 사도세자 은신군 남연군 흥선대원군으로 이어졌다. 자손을 뜻하는 손()이란 말을 쓰는데 왜 영조를 포함하는가, 란 의문이 든다.

 

운현궁이 말하듯 흥선대원군이 영조의 5대손이라면 남연군은 4대손이고 은신군은 3대손이고 사도세자는 2대손이고 마침내 영조는 영조의 1대손이란 말인가?

 

민 작가는 충정공의 증손녀(직계 4대손)이다.“(20181028일 한겨레신문)..직계라는 말을 왜 붙였는지 의아하지만 어떻든 민 작가 즉 민명기씨가 충정공 민영환의 증손녀라는 말이다. 이 글에서도 민영환이 포함되었다.

 

인터넷에 세손이라는 말은 시조를 포함하고 계산하는 것이고 대손은 시조를 포함하지 않고 계산하는 것이라는 글이 있다. 학성 이씨 곡강파 문중 인터넷 족보에 의하면 세()는 시조로부터 계산해 후손을 가리는 말이고, ()는 선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 시조는 1, 아들은 2, 손자는 3세라 부르는 것이겠다. 손자는 3세이지만 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몇 세손 식으로 말하려면 2세손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조에서 2세대가 내려왔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와 나는 2(2) 또는 두 사람이지만 촌수로 말하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한 마디(세대)가 파생되었다는 의미에서 1촌인 것처럼. 그리고 대는 선조를 가리키는 말이라니 엄밀히 따지면 대손이라는 말은 잘못이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 종로점에서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조선왕조 건강실록을 들여다 보고 있는 차에 다음 달에 남한산성(南漢山城) 해설을 부탁하는 양주팀 총무님의 전화가 왔다. ‘조선왕조 건강실록이야기를 한 것은 알고 보니 임금이 정신질환자 인조라는 글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인조를 색다른 의미에서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색다르다는 말을 하는 것은 상기한 책이 한의사들이 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남한산성을 인조와만 연결짓는 것은 아닌가, 싶은 자괴감이 든다. 당연히 인조 이전의 남한산성과 인조 대의 남한산성, 인조 이후의 남한산성 등으로 나누어 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조 이전, 인조 대(), 인조 이후란 말을 하니 인조가 대단한 왕처럼 보인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튜브를 검색하고 책을 참고하고 코스도 점검하고 교통편도 체크해 사전 답사를 가야 하리라. 지난 해 여주, 파주, 경주 등이 내가 양주팀과 다른 팀들에게 해설하기 위해 찾아간 서울 외의 지역들이다.

 

여주, 파주, 경주, 광주(廣州)까지 주()로 끝나는 도시들만 가게 되는 것 같다. 수원화성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한산성이라니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어제 사정상 내가 식사만 하고 먼저 일어난 티타임 시간에 남한산성 이야기가 나왔고 능()3월 이후에 가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일 고궁박물관 청나라 아침 심양 고궁전(간단). 경복궁(메인) 해설을 앞두고 임시 동참자 한 선생님의 주차 문제를 위한 답을 찾았다. 인근 광화문 교보문고에 2시간 주차를 하기로 정한 것이다. 책과 교보 핫트랙스의 문구 등에 대한 구입 실적을 가지고 부여하는 혜택 등급 가운데 나는 프렌즈 등급이어서 3만원 이상의 책을 구입하면 2시간 무료 주차를 할 수 있다.

 

바로 드림 시스템으로 하루 전에 책을 주문해 해설 시작 시각(10) 30분 전이자 교보 개장 시간인 930분에 책을 수령하고 주차 문제를 해결하고 경복궁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어떤 책을 고르는지였다. 늘 결정 장애에 시달리는 나는 요즘 상황으로는 지질, 고고학/ 인류학, 나무, 역사 등을 편향되지 않게 골라야 하기에 더 어려웠다,

 

결론은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할인 적용해 19, 800), 오가와 요코(小天洋子)어디서나 불쑥 얼굴을 내미는 뜻밖의 수학’(할인 적용해 10, 800)으로 하기로 했다.(합계 30,600)

 

리차드 세넷은 투게더의 저자여서 기억에 남는다. 오가와란 이름이 마음에 든다. 작을 소()와 내 천()을 쓰는 이름이다. 요코라는 성()도 그렇다. 큰 바다 양()과 아들 자()를 쓰는 단어다. 바다에서 비롯된 생명을 뜻하는 듯 하다. 작은 내와 큰 바다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독일어 바흐(Bach)가 냇물이란 사실이 생각난다. 물론 바흐는 폴 뒤 부셰의 말대로 순회음악가를 뜻하는 동유럽 방언이지만 작은 내라는 말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 경우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는 베토벤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 책을 고르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세상에는 실력자들이 참 많기 때문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책을 고르고 생각하고 읽고 쓰고 고치고 되새기지만 현실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오늘은 금액에 맞춰 최소의 구입을 했지만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하고 대단한 저자와 책의 향연에 경의와 부러움을 함께 느낀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내 지식은 너무 초라해 늘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역(周易)의 중천건괘에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말이 있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 즉 실력자를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나에게 대인 즉 실력자는 도서(圖書)이고 그 저자다. 중천건괘의 마지막은 항룡유회(亢龍有悔). 너무 높이 나는 용은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데서 후회할 일은 무엇일까? 지나치게 비경제적인 즉 비전략적 읽기가 아닐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산만하게 읽는 경우에 해당한다. 기분을 좋게 하고 시를 읊게 하고 춤을 추게 하는 촉매(觸媒)인 술도 마구잡이로 마시면 반응이 일어나지 않듯(인사불성) 너무 지나친 비전략적 읽기도 잡스런 쓰기 정도를 낳을 뿐이리라. 이를 늘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