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주(宇宙)라고 할 때 우(宇)는 나무 뼈대를 덮은 풀엮음, 주(宙)는 나무 뼈대였다. 구석기 시대에도 움막 안에 누워 천장을 보면 나무 뼈대인 주(宙)가 보이고 그 위를 덮은 우(宇)가 보였을 것이고, 집 밖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면 둥그런 천구(天球)가 보였기에 그 둥그런 천구를 하늘의 집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란 생각에서 우주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서윤영 지음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참고)

 

뼈대 즉 주(宙)가 먼저이고 그 위의 풀엮음 즉 우(宇)가 나중이니 주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우리는 우주라고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이 생각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신영복 님은 우리가 실제 집을 지을 때는 기초를 파는 등 아랫 부분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해 위쪽으로 나아가지만 집의 모습을 화면에 담을 때는 지붕부터 그리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집 하나에도 이런 의미가 깃들어 있다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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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복궁의 서수(瑞獸), 문양(汶樣), 단청(丹靑) 등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단청은 조금) 내 관심은 환유적인지 나는 설명되는 것과 다른 것을 마음 속으로 자꾸 비교하곤 하고 몇몇 건에 대해서는 질문으로 답을 구하기도 한다.

가령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등의 이름이 시경이나 서경 등에서 유래했는데 교태전만 주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태전 말고 주역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다른 건물이 있습니까?˝ 식으로.

그리고 경복궁의 낙하담(落霞潭)이 설명되는 시간에는 ˝저 하(霞)란 글자는 자하문(紫霞門)의 하란 글자와 같은 것이지요?˝처럼. 궁궐 답사(?) 또는 탐사(?) 또는 관람(?) 경험이 일천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왜 궁궐 어플리케이션에서 경희궁은 포함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설명되는 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는 것은 덜 알려지고 방문객이 적은 곳에 대한 내 나름의 대안이라면 지나칠까? 지금은 경복궁을 위주로 배우고 있고 개인적으로 덕수궁과 창덕궁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 외의 궁궐들도 두루 공부하고 싶다. 그렇게 공부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이다.

내가 하나의 궁궐 안에서 정전, 편전, 침전의 차이 또는 하나의 궁궐과 다른 궁궐의 차이에 초점을 둔다면 조재모 교수는 궁궐을 만든 사람들과 사용한 사람들의 관점을 나누어 궁궐을 볼 것을 요구한다.

나는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를 추천하고 싶다. 이유를 말하라면 편하고 솔직한 서술 때문이라 답하겠다. 물론 이 분은 전문적인 지식도 갖추었다. 단청 자료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 서재를 찾아 보니 ‘궁궐, 조선을 말하다‘가 눈에 띄어 펼쳐 보았다.(재독해야 할 것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가 파랑새를 찾아 다니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파랑새를 발견한 것처럼 나는 조재모 교수의 책이 파랑새란 생각을 한다. 경복궁 단청에 대한 내용은 두 군데 정도에서 볼 수 있지만 서술 방식에 주목할 책이 ‘궁궐, 조선을 말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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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나온 헤겔 전공자 전대호 님의 `철학은 뿔이다`를 최근에야 읽었다. 망설임 끝에..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등의 철학을 헤겔적 시각으로 읽고 비판한 책. 전공자답게 저자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고전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오류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와 관련이 있다고 풀었다.

오늘 아침 도정 스님의 화엄경 관련 글을 읽었다. 화엄경의 대의는 깨끗한 업(현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인데 중생들이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자꾸 설법을 요청한 결과 방대(스님의 표현은 광대)한 경전이 되었다는 것이 스님의 결론이다.(화엄경과 헤겔 철학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헤겔철학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철학사상 역시 기존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점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하고 전문화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을 나는 오류를 철저히 청산하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불교적 의미에서 업을 깨끗이 하는 것은 통한다고 읽었다.(여시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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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우연히 우울한 소식을 두 가지나 접했다. 하나는 시에 관한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관한 소식이다. 시와 역사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든 시에 관한 소식은 유형진 시인이 쓴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심정'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고, 역사에 관한 소식은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 과잉의 시대, 어느 젊은 역사학자의 죽음'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시와 역사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의 일만이 아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내는 시의 미덕을 보고 한 말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에 비해 유연한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낸다면 역사는 해야 할 바를 일깨우기에 나는 역사는 시보다 사회적이란 말을 하고 싶다.


서론이 길었으니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시인의 수와 내 삶이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착잡한 마음마저 든다는 말을 우선 하고 싶다. 나는 시인들의 가난과 그들의 수적 포화가 연관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난감한 마음이 든다. 두 이야기라 했으나 시의 필자는 엄연히 당당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 역사 이야기의 당사자는 글의 제목을 보고 알 수 있듯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시 이야기의 필자인 유형진 시인은 출간 5년만에 첫 시집인 '피터 래빗 저격사건'(2005년 5월 출간)을 재쇄(再刷)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재쇄한 책이 거의 재고로 남아 처치곤란한 애물단지가 되어 그 시집을 절판시키고 복간을 하고 싶어 다른 출판사에 문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확인한 사실은 재고를 모두 떠안고 출판권을 정지시켜야 절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아는 시인은 기껏 50여명이고, 가지고 있는 시집은 300여권이란 말을 하며 그 많은 7만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시집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요?란 질문을 던졌다. 시인은 최근 문제가 된 남성 시인들의 성추행(또는 폭력)에 관해 심경을 밝힌 글이기도 한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생각'이란 글에서 성추행 당사자 중 한 명이 낸 힛트 시집과 자신의 시집이 같은 출판사를 통해 같은 날 나왔으나 분명하게 엇갈린 길(명성, 판매 등에서)을 걷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신춘문예 투고자들은 그 남자 시인의 문체나 시어를 따르고 추종했고 문단의 원로들은 그를 극찬했다는 부분이다. 시인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글은 이미 한 번 썼기에 생략하고 말하면 우리의 쏠림을 돌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는 유형진 시인의 다음의 말과도 관계있다. "저는 제 시가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린 시들보다 못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벤치에서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대기 선수 취급 받은 것은) 오랫동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승자독식을 만들어주는 쏠림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반면 역사학도의 죽음에 대한 글은 더 딱한 사정을 전한다. 41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뜬 고구려사(高句麗史) 박사인 그는 연구가 아닌 과중한 행정업무에 시달리는 등 매일 야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는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계약직 연구자였다. 기자는 지금 우리 시대를 연구자들에게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시대로 정의했다.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는 말은 한 국회의원이 실제 한 말이다. 나는 시에 관한 글에 대해서는 나 역시 명성에 휩쓸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역사과잉이 역사학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글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덧붙일 것은 우리가 너무 역사를 재미에 치우쳐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을 품는다는 점이다. 내게는 두 개의 날개 같은 시와 역사! 문외한이기에 누구보다 바람직한 습관을 들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설사를 꿈꾸는 사람인 나에게 시인과 계약직 연구자가 겪은 일 모두 남의 일 같지 않다. 고난(苦難) 과잉(過剩)의 시대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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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신을 찾는 인간의 초능력 - 자전적 철학 수필 인간의 슬픈 진실과 초의지 4
김종면 지음 / 명지출판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영혼과 신, 초능력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신과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초감각능력을 가졌는가? 등 우리가 가질 법한 질문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답을 찾아가는 책 ‘영혼과 신을 찾는 인간의 초능력’. 특별히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에게도 신, 영혼, 초능력 등은 한번 쯤 관심을 둘 법한 의문들이다. 그러나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고 우리는 흐지부지 길을 잃거나 놓고 만다.

 

자전적 철학 수필이란 책 설명이 눈에 띈다. 물론 저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공부도 고독한 수행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131 페이지) 종교의 의미를 일괄하고 파동이론과 정신세계로 나아가기 전에 저자는 자신의 종교관이 (각자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 지금의 종교보다 수준 높은 정신적 수단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더한다.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저자가 종교를 영성 및 파동을 근거로 한 정신세계로 나아가기 전 단계의 것으로 설정한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종교의 두 가지 문제점을 거론한다. 하나는 신앙의 대상에게 지나친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권을 가상의 절대자에게 위임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길이 진정 올바른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사유한 결과를 말해보고자 한다고 밝힌다.(13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은 지적 자각이고 진정한 깨달음은 정신적 자각이다. 저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을 지적 깨달음(에 이른 것)이라 정의한다.(149 페이지) 이는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어렵다. 그 이유는 하나) 두뇌 속에 인간에 대한 많은 지식들이 퍼즐조각처럼 낱개로 기억되어 있고, 이를 제대로 체계화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 생명과 인간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인해 부분적으로 오도된 가치와 관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셋) 정신세계의 구조와 작동 원리, 그리고 그 근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넷) 신과 영혼처럼 상상에 의한 관념들로 인해 혼란스럽기 때문이고, 다섯)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접근방법과 그 과정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니체의 인간관을 거론한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발달해가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구분하는 니체. 이렇게 보면 니체도 깨달음을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깨달음 즉 정신적 자각은 고정관념에 변화가 이루어지고 이를 의식이 깨닫고 느끼는 것이다.(208 페이지) 저자는 인간의 미스터리한 정신세계와 자연의 모습에서 보이는 신비로운 현상들을 우주적 본질인 파동성의 관점으로 해명한다.

 

저자는 우주적 본질이 파동이라는 과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229 페이지... 미시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과 관계가 있다.: 235 페이지) 저자는 인간의 기억력이 세포단위의 파동과 상관관계가 있다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세포기억설도 황당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233 페이지) 저자는 초자연적인 현상, 신비현상들을 두루 소개한다.

 

저자는 원자단위에서의 진동은 개별적이며 독립적이고, 파동은 진동하는 물체가 서로 연결되어 운동이 이웃한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라 설명한다.(303 페이지) 모든 신비 현상들이 파동 차원에서 일어나고 파동 차원에서 해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파동 원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다.(457, 458 페이지)

 

 

저자는 미래엔 인간의 능력(파동을 응용하는 새로운 과학 기술)으로 스스로를 성숙시켜서 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게 되리라고 전망한다. 기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결말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완벽한 해명, 전망을 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노고는 돋보인다. 길고 긴 책을 일관된 관점으로 끌어간 내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저자는 후속작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연속되면서 단절(발전)되는 새 면모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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