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로 대변되는 힘의 관계는 갑과 을로 나뉜다. 갑질은 바로 그 갑이 저지르는 못된 횡포를 말한다. 우리 사회의 갑들은 정치인, 고위 공직자, 재벌 등이다. 하지만 갑질은 상대적이어서 힘센 사람 앞에서 을인 사람이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갑으로 군림할 수 있다.

 

저자 강준만은 갑질을 우리가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본다. 저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안 드림의 토대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방식을 내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각개전투 사회의 시스템이다. 요즘에는 각자도생이란 말이 더 자연스럽다. 저자는 진보가 힘주어 주장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가 그들이 온힘을 다해 비판하는 낙수효과의 사회적 버전임을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거나 완화하는 동시에 개천 죽이기를 중단하고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6.25 심성(心性)이란 것이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참사를 겪는 동안 우리 국민들이 몸에 익힌 극단의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인주의 등을 말한다.

 

갑질은 6.25 심성이 구현된 것이다. 물론 갑질은 한국인의 전투성을 키워준 동력이었다. 한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압축성장을 하게 한 힘이 한국인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모욕사회이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걸 자신의 인정욕구 충족이나 존재감의 확인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인 것이다.(42 페이지)

 

한국은 우리가 개인주의 사회로 알고 있는 서구 사회보다 공동체성이 훨씬 취약한 나라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철저한 서열의식과 귀천 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나는 모욕을 견디는데 너는 왜 못하냐며 내부 고발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약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를 보며 이는 인간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 말한다.(59 페이지)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온갖 불합리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참으로 난제 중의 난제이다. 이런 불합리와 모순은 상당히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성은 없고 떼 쓰고 과시하고 일그러진 의식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양상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막무가내를 보는 듯 하다.

 

'내가 누군지 알아?'란 말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는 '너 따위가 감히'를 핵심으로 하는 권력 담론이자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갑질 언어이다. 저자는 나름으로는 제법 성공을 거둔 이들이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그들이 기고만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열심히 조성해오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84 페이지) 사실 속물적 과시와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신분이나 지위를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철저한 서열의식과 귀천 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경 매관매직(賣官賣職)은 국가 시책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탓도 있었지만 황실은 세원(稅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탐관오리들만이 득실거렸는데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본전 뽑고 이익까지 남겨야 했음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갑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양반 족보는 학력, 학벌 증명서로 대체되었다.

 

저자는 능력주의는 허구이거나 사기(詐欺)라 말한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서울대 합격률은 아파트 가격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모든 능력을 세습되지 않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보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격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즉 능력주의이다.(145 페이지)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온갖 차별과 서열주의의 시발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로부터 배운 그런 악덕들을 학생들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한국의 학벌 카스트는 상징자본은 물론 돈과 힘까지 독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 어떤 면에서 인도보다 뒤떨어진 카스트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161 페이지) 저자는 지위(地位)의 본질은 비교라 말한다.(191 페이지) 한국인들이 자부심이 낮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인들은 남의 시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좁은 땅에서 동질적인 사람들이 몰려 살다보니 갖게 된 인정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211 페이지)

 

저자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상상력과 용기, 이것이 바로 지위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 말한다.(222 페이지) 학력, 학벌 차별처럼 외모 차별도 갑질의 하나이다. 대기업의 중소 기업 착취도 그렇다.

 

미생(未生)’을 통해 널리 알려진 비정규직에 대한 푸대접, 차별 등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고용 안정성이 없는 비정규직이 돈을 더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272 페이지)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전히 재벌을 사랑하는 것을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유한다.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막대한 이익을 남기면서도 고용확대를 주저하고 오히려 사내 하청을 통해 비정규직 남용을 주도한다. 하도급 기업에 대해 납품 단가 후려치기, 기술 빼앗기 등 불공정 거래를 일삼으며 이익의 공유를 거부한다. 중소기업 영역과 심지어는 골목상권까지 침투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사는 나라는 경쟁 과잉이지만 강자들()이 사는 나라는 경쟁 과소이다.(245 페이지) 관피아, 전관예우, 담합 등을 보라. 저자가 말했듯 한국은 시장경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공정 경쟁조차 구현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245 페이지)

 

우리 사회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승자 독식 사회가 되었다.(276 페이지) 승자 독식 사회란 개천에서 용 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대학 등록금 폭등의 원인이 대학 서열화에 있는데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면서 억울하면 너도 대학 가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라 말한다.

 

저자는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왜 우리만 자기성찰을 해야 하느냐?”, “왜 적을 이롭게 하느냐?“는 항변으로 대체하는 멘털리티라 말한다.(280, 281 페이지) 한 사교육 관계자는 가진 사람들이 부를 세습하는 장치들이 너무 단단하다, 공부 잘 한다고, 명문대 나온다고 중산층으로, 그 이상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다, 대학 잘 가는 것은 경쟁력 요소의 하나일 뿐 그리 큰 경쟁력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318 페이지)

 

온갖 독설을 하며 공부를 독려하던 이의 말이다. 목숨 걸고 공부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고착화 사회, 변화(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없는 정체 사회가 되었다. 이게 가장 큰 갑질이 아닐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를 우리 나라를 설명하는 데 쓸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런 가혹한 투쟁이 을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것이라 말한다.(336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에 신사동이란 동이 은평구(新寺洞)와 강남구(新沙洞)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강준만 교수의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를 통해 관악구에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관악구의 신사동은 新士洞이다.(新寺洞, 新沙洞, 新士洞...) 강준만 교수에 의하면 관악구 신사동은 달동네 인상을 줄 수 있다며 관악구가 2008년 신림 4동을 새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관악구는 신림 6, 10 동은 삼성동으로 바꾸었다. 이 삼성동은 三聖洞이라 쓰는데 이는 구(區)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산에서 따온 것이다.

강남구에도 삼성동이 있는데 이 동은 三成洞이다. 관악구 삼성동은 삼성산에서 따온 이름이라지만 이 산이 없었어도 삼성동이라 지었거나 강남의 다른 동의 이름을 한문을 달리 해 썼을 것이 분명하다. 관악구 신사동이 강남을 따라 지은 이름이듯.

한편 양천구는 신월동과 신정동을 신목동으로 바꾸려 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존 목동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는 어느 동네에 사는지가 계급을 나타내는 우리 나라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런 동명 변경은 단순히 강남을 지향하는 데서 나온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갑질이다. 본문에 나오는 한 공인중개사에 따르면 강남에선 중학생부터 회사원들까지 자기들이 사는 동네를 엄청 내세운다.

이 공인중개사는 강남에 이사 오는 사람들의 60 ~ 70 퍼센트는 과시 욕구와 교육 문제로 오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했다.

오늘날 교육은 갑질을 가르치는 일선에 서 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경 매관매직(賣官賣職)은 국가 시책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탓도 있었지만 황실은 세원(稅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렸는데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본전은 물론 이익까지 남겨야 했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갑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양반 족보는 학력, 학벌 증명서로 대체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준만 교수의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를 읽다가 우연히 재미 삼아 해본 나의 상위 여섯 가지 자질 알아보기.

내 자질로 나온 것들은 1) 절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내치지 않습니다. 2) 절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3) 언제나 희망을 품습니다. 4) 항상 사람들을 믿어줍니다. 5) 감성 지능이 높습니다. 6) 매우 재미 있습니다 등이다.

대체로 이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물론 갑질과 대체로 무관한 나의 이력은 나의 낮은 사회적 지위나 힘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다만 말할 수 있는 점은 나의 이런 무지위적 삶은 어느 정도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를 싫어한 결과란 점이다.

강준만 교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안 드림의 토대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방식을 내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은 각개전투 사회의 시스템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거나 완화하는 동시에 개천 죽이기를 중단하고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만해의 ‘알 수 없어요‘의 한 구절을 들춰 본다.

이 부분에서 의미 있는 구절은 언뜻이란 말이다.

좀 더 말하자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이란 구절이다.

언뜻은 잠깐 나타나거나 문득 생각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인데 다른 부분도 아닌 이 시의 그 부분을 인용하는 이유는 책 한 권을 전부 읽고 리뷰를 쓰던 습관을 지양(止揚)하고 부분 부분을 읽고 생각 거리를 얻는 내 행태(行態)가 마치 언뜻 언뜻 보이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아니 지양한다기보다 전부를 뜯어 먹기 힘든 책이 점점 많게만 느껴져 이제는 책 속을 어슬렁거리다가 이거다 싶은 구절이 있으면 눈을 굴려 사람을 만들 듯 생각을 붙여나가 글 한편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뜯어 먹기 힘든’이란 말은 노혜경 시인의 ’뜯어 먹기 좋은 빵‘이라는 시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소설에 비유해 책을 말하자면 대개의 것들은 장편이 아닌 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단편들을 하나로 묶은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의미이다.

전체를 다 읽고 리뷰를 쓰는 것도 좋지만 단편적인 부분들을 읽고 단상 형태의 글을 쓰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김행숙 시인의 평론집 ’천사의 멜랑콜리‘도 그런 방식으로 읽는다.

’우리가 엄마, 언니, 소년소녀를 불렀을 때‘란 글에서 나는 무엇 무엇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절과 어쨌든이란 구절(을 시인이 쓴 것)에 주목한다. 내가 자주 쓰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무엇 무엇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절은 사랑스런 엄마와는 다른 초자아(超自我: 금지하고 억제하는)적인 엄마로 소개된 기형도 시인의 ’바람의 집 – 겨울 판화‘의 “어머니“ 때문에 있게 되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시인은 초자아로 군림하는 무서운 어머니의 단초를 ’바람의 집 – 겨울 판화‘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지난 화요일(7월 11일) 백범 기념관에서 동기(同期) 모임을 가졌다. 잘 알다시피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을 독립운동가로 키운 강한 어머니이자 그 자신 독립 운동까지 하신 분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어떤가. 이 분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옥에 갇힌 아들에게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란 편지를 쓴 분이다.

불온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분들의 (슬픔과 아픔을 이긴) 강함을 초자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나는 초자아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식의 상투(常套)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이를 위해 이철송의 ’황지우와 박노해, 증상과 욕망의 시학‘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 말 그대로 참고서로.

저자 이철송은 노동자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박노해의 시적 실천은 정확히 정신분석학적 처방이라 말한다.

이 부분이 초안(草案)일 뿐인 내 생각에 실마리를 준 것이다.(초자아란 말은 정신분석학의 주요 용어이다.) 내 생각은 어디로 가게 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중 있는 문예 계간지 ‘문예중앙‘이 사실상 폐간되었다고 한다. 통간 150호인 이번 여름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에 들어갔으나 복간 일정을 제시하지 못하니 사실상 폐간인 셈이다.

정기 구독자의 수가 고작 몇 십명이었다고 하니 길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의 문학의 무력을 감안하면 150호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이다.

내가 이렇듯 문예중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유료 구독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도 잡지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입장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간이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지난 해 여름 문예중앙에서 시집을 낸 성윤석 시인이 쓴 관련 글도 페북에서 접했다.

출판사가 문을 닫을 경우 시집의 저작권과 출판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란 글이다.

현역 교수로 부지런히 강의를 하시는 한 페친이 쓴 이런 글도 보았다. 문예창작과 대학생의 고민과 갈등이라며 쓴 글로 ˝월 30만원만 벌어도 글만 쓰겠는데...˝란 것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절박한 글을 쓴 그 문예 창작과 대학생에게 그것 가지고 어떻게 생활할 수 있냐고 묻지는 못하겠다.

모두 우울한 소식 뿐인 듯 하다. 모종의 흑막에 의해 문예지들이 쏟아지기도 한다니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고 해야 할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예지를 바람직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인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문학계가 처한 환경이 참 빡빡하고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복간 전문 출판사인 최측의 농간 블로그에서 읽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계기로 연(緣)이 닿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난 해 여름 이후 출판사로부터 허만하 시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 여림 시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이연주 시전집, 서정인 작가의 장편 소설‘달궁‘, 박서원 시집 ‘아무도 없어요‘ 등을 받았다.

부지런한 문학 독자가 아님에도 귀한 책들을 받아 죄송하다.(더욱 리뷰는 허만한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단 한 권만 썼을 뿐이어서 리뷰를 써줄 것을 바라고 책을 보내준 것은 아니지만 많이 미안한다.)

어제는 조연호 시인의 시집 ‘저녁의 기원‘을 소개하는 글을 메일로 받았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문장에 신경을 쓰는데 전에도 그랬지만 최측의 농간의 대표 신동혁 님의 짧은 시평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 뒤 더욱 그랬다.

오늘 읽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길을 잊는 일‘이란 글도 그런 점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동혁 님 본인의 글로 시작해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이 이어진 글이다.

그런데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글의 서두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글 잘 쓰는데...‘란 생각을 하며 한참을 읽었다.

대단한 감수성과 정교한 필치의 글이 인상적인데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는지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김승희 시인이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평하며 쓴 ˝원초적 야성 즉 신성(神性)의 점화를 성대하게 베풀어 주는 혈액의 혁명을 일으키는 책˝이란 생각을 하며 읽었다.

가령 이런 글들.

<죽은 이연주가 내 꿈속에서 “철사로 된 빽빽한 말다발”이라고 말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꿈에서 깨어나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내 울음이 저승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를 위해서 내가 잘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 목을 매달아 버린 네 잘린 말 대신?....>

‘영혼의 역사‘라는 시인의 평론집 날개에 적힌 ˝심리몽환적이며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지적˝이라는 글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과학이 주도하는 비신화화의 시대에 신화를 말하고, 합리적 개념 언어의 시대에 신비하고 풍성한 상징 언어에 주목˝(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7 페이지)했다는 리쾨르를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인은 이연주 시인을 만난 꿈에서의 대화 이후 진혼곡 같은 말을 했다는 데 있다.

다양한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시를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느끼기 위해서는 시를, 알기 위해서는 평론을 읽어야 하니 읽을 거리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물론 즐거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