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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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성혐오(女性嫌惡)를 비판하는 글을 써야 하기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었고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3년만에 다시 읽고 있다. ‘혐오와 수치심은 알라딘 신간평가단 과제여서 리뷰를 썼지만 미흡하다는 생각 때문에 1개월여만에 리뷰를 다시 쓰다가 중단한 상태이다.

 

3년만에 다시 읽는 너스바움의 책에서는 월트 휘트먼에 대한 기술(記述)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이는 올해 읽은 두 권의 책(박홍규 지음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장석주 지음 은유의 힘’)에서 휘트먼에 대한 글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박홍규의 책에서 시집 풀잎의 시인인 휘트먼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헤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스타프 그레저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고 장석주의 책에서는 은유와의 관계하에서 거론되었다.

 

구스타프 그레저는 자신의 성()인 그레저(Graser)는 그라스(grass)의 복수를 의미한다며 풀 잎 한 닢을 명함으로 삼았다.(‘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144 페이지) 휘트먼은 한 아이가 풀잎을 따와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織造)된 깃발이라고 말했다.(‘은유의 힘’ 25 페이지)

 

논점이 달라서이지만 이 책들에서 거론된 사실만으로 휘트먼의 온전함을 아는 데는 부족하다. 휘트먼은 몸의 흥분을 노래한다란 시에서 남자의 몸도 여자의 몸도 신성하다네./ 어느 누구의 것이든 몸은 신성하다네. 노동자 집단의 몸이라고/ 비천할까?”란 말을 했다.(‘혐오와 수치심’ 218 페이지)

 

너스바움에 의하면 전 생애에 걸쳐 휘트먼의 응답은 섹슈얼리티의 수용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을 기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같은 책 220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의 미국은 하나의 허구로 실제 사회는 그에 의해 표현된 방식으로 혐오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한다.(같은 책 224 페이지)

 

너스바움은 휘트먼이 그린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이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너스바움이 말한 바는 여성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없는 사회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성급하게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든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리에게 혐오는 실제적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진화적인 유리함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양한 시기의 다양한 문화에서 또는 최소한 같은 문화 속의 여러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것과 매력적인 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바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섹슈얼리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휘트먼의 요구대로 하려면 결국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과 퇴화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껴안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225, 226 페이지)

 

꽤 설득력 있지만 동의하기가 꺼려진다.(세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불교 수행을 참고한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에노 치즈코는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고 말한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16 페이지)

 

치즈코는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얻게 되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남이 실은 여성을 멸시하는지, 또는 왜 남자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여자를 욕망하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는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289 페이지)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 아닐지?

 

우에노 치즈코의 책은 복잡 다기(多岐)한 폭력과 도착(倒着)적인 현실을 잘 그려낸 책이다.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읽는 데 꽤 불편하다.(우에노 치즈코는 사회학자라는 직업이 업보라 생각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기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마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것, 화가 나는 것, 용서하기 힘든 것을 대상으로 골라 그 수수께끼를 밝혀내고자 골몰하기 때문이다.)

 

우에노 치즈코에 의하면 여성 혐오는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멸시이다.(1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이 성녀로 추앙되든 매춘부로 업신여겨지든 모두 한 동전의 양면이라 말한다.(27 페이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생식용 여성(아내)와 쾌락용 여성(매춘부)의 이분법적 시각이다. 전자는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후자는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53 페이지) 물론 이때 말하는 쾌락이란 오로지 남성의 쾌락만을 의미한다. 저자는 남성에 의해 성녀와 창녀로 나뉘는 여성의 현실을 분할 통치라 말한다. 성녀와 창녀는 여성 억압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며 양쪽 모두 허울 좋은 타자화에 지나지 않는다.(57 페이지)

 

저자는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에 대한 동일화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에 의해 성립하며 그 경계에는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게 된다고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는 다른 남자의 성적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가 된다. 이로 인해 남성됨의 방식에는 다양성이 없다. 음담패설이 정형화되고 나는 ...’식의 일인칭 말하기가 성립하지 않는다.(43, 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멸시를 아이덴티티의 핵심 깊은 곳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 여성 혐오이다.(51 페이지) 중요한 것은 호모 포비아이다. 남성은 자신이 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증명해야 한다.(51 페이지)

 

이브 세지윅에 의하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이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02 페이지)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끝까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이다.(79 페이지)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 한다.(111 페이지) 여성 혐오는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이다.(112 페이지) 페미니스트는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는 사람이다.(297 페이지)

 

여자의 질투는 남자를 빼앗은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지만 남자의 질투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소유권의 침해, 한 명의 여자가 자신에게 소속됨으로써 유지되던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125 페이지)

 

남자는 바보 취급 가능한 여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한 명 확보해 놓는 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시키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177 페이지)

 

어떤 의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혐오하는 감정은 모든 근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보편적 감정이라 할 수 있다.(154 페이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전편이 밀도 높은 데다가 정신분석적 개념에 근거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9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가 그렇다.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라캉 학파의 계승자인 사이토의 모녀관계론은 프로이트 이론에 익숙한 이라면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남성에게 해부당하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169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라고.(302 페이지) 그리고 이브 세지윅에 의거해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는 말을 한다.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갈파(喝破)를 언급한다. 치즈코에 의하면 남성됨을 인정해주는 것은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동성인 남성이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이다.

 

물론 나는 이런 남성 집단의 인정에 별 관심이 없다.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이 부분에서 나는 김영민 교수(철학)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사람은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성을 선사받는다는 플라톤의 향연의 논의를 겨냥해 자신에게는 자식이라는 생산성을 통해 불멸하려는 욕심이 없다는 말을 했다.(‘보행’ 319, 322 페이지)

 

어떻든 정녕 시시한 존재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분노나 혐오보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남자가 여성 의존도가 클수록 현실 부정에서 기인하는 여성 혐오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한 고상한 위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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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 -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9
사이토 다카시 지음, 남지연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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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다작의 저술가 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부제로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배움에의 동경(憧憬)과 꾸준한 열정이다. 이 미덕들은 다른 사람들 가령 후학, 제자 등등의 배우려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동경의 벡터는 언어를 초월하여 몸에서 몸으로 전해진다.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계속적인 배움에 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가르치는 행위에만 골몰하여 교사 자신이 배움을 잊는 것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서로 함께 실력을 갈고닦는 적당한 긴장 관계가 배우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상대에게 배움이 즐겁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전문가인 동시에 배우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학생들에게 갖게 하는 것이 교욱자의 임무이다.

 

교사의 실력이 검증받는 승부처는 발문력(發問力: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물음을 던져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힘)에 있다.(33 페이지) 중요한 것은 물음은 모호해서도 평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질문은 아는지 모르는지 묻는 것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생각하며 접근하려 하는 것이 발문이다.(106 페이지) 저자는 1년의 수업을 했음에도 상대가 늘지 않았다면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학생이 책을 읽도록 능숙하게 유도하여 1년 후 학생이 지식을 갖추고 생각하는 힘을 얻었다면 이는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 된다고 말한다.(42 페이지) 저자는 잘 가르치기 이전에 잘 배우는 것이 기반(基盤)이 되며 가르침에 있어서 기본은 배움을 통해 기쁨을 얻은 경험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43 페이지)

 

저자는 교육자에게 학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일종의 축제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터프함이 있으면 좋다고 말한다. 저자는 니체의 구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인용한다. “보라, 나는 지금 너무 많은 꿀을 모아버린 꿀벌처럼 지혜의 과잉에 싫증이 났다. 나는 나에게 손을 뻗어줄 많은 이들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을 전하고 함께 나누리라.”

 

이 인용 후 저자는 교사는 꿀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48 페이지) 개개의 지식을 연결된 육지로 만드는 설명 방식이 교사에게 요구된다. 교사란 해당 지식을 기억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맥력이다.(49 페이지)

 

공부의 기본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57 페이지) 공부하면 할수록 융통성 없이 고집만 부리게 된다면 그것은 공부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서야 배우는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59 페이지)

 

공부란 정보의 고속 처리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맥(文脈)을 파악하는 힘을 가리킨다. 저자는 학문을 엄청나게 잘하지 못한다고 교단에 설 수 없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배움의 즐거움, 소중함을 전하는 종합력이 중요한 직업이 교사직이다.(71 페이지)

 

공부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숙달(熟達)의 보편적 원칙을 상대에게 전한다는 의식을 항상 가진 사람이 교육력 있는 사람이다.(73 페이지) 아주 빠른 속도로 다른 것을 흡수하면 그것들을 조합해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74 페이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모방력이야말로 창의성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모방은 언뜻 무의식적인 행동 같지만 실제로는 포인트를 인식(의식화)하여 문자로 나타낼 때 비로소 정착한다.(78 페이지) 모방이란 고도의 인식력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지 어쩌다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80 페이지)

 

천재는 처음부터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숙달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8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적 정신이란 조건을 한정하는 능력이다.(88 페이지)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바꾸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 요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실험이 가진 본질적 의미는 조건을 제한하는 절차구성법이다.(89 페이지)

 

부지런히 연구하는 교사는 일반적인 통설은 이렇지만 이런 시각의 설도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다각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94 페이지) 연구란 스스로 테마를 발견하여 논문을 쓰는 것이다.(95 페이지) 지금까지 연구 대상이 된 적 없는 것을 대상으로 삼으면 훌륭한 연구가 된다.(96 페이지)

 

연구자적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은 50, 60세가 되어도 존경받는다.(98, 99 페이지) 저자는 아무리 연구해도 읽어줄 사람이 없는 것은 쓸쓸한 일이라 전제한 뒤 자신도 논문을 써도 아무 반응이 없는 시기가 10년이나 이어져 비관하다가 대학생이라는 들어줄 사람을 얻고 나서 젊어진 듯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한다.(100 페이지)

 

천재란 남이 시키지 않아도 계속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연습하는 사람이다.(102 페이지) 진짜가 갖는 대단함을 알게 하는 것 자체가 교사의 역할이다.(111 페이지) 저자는 교과서를 해체하여 학생에게 전할 만큼의 힘이 없으면 교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시험은 학생의 역량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교육력을 평가하는 방편이 된다.(131 페이지) 잘 하게 만드는 힘은 선생님의 실력이다.(133 페이지) 대화력은 교사의 기본이다.(134 페이지)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지금 정체(停滯)되어 있는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과 만나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닫는다.(158 페이지)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을 불생불멸의 열매를 얻기 위해 신앙이라는 씨앗과 이해라는 쟁기, 부드러움이라는 채찍으로 밭을 가꾸는 농부로 표현했다. 사이토 다카시는 교사를 지하수맥을 발견해 그것을 퍼 올리고 물과 비료를 계속 공급하는 양수 펌프에 비유한다.(170 페이지)

 

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럼 나는 기꺼이 멸망하리라! 그때엔 조종(弔鐘)이 울려도 좋을 것이며, 너는 나에 대한 종노릇에서 해방되리라.

 

시계는 멈추고, 바늘이 떨어질 것이며, 나의 시간은 그것으로 끝나게 되리라!.. 내가 한순간을 고집하게 된다면, 나는 즉시 종이 될 것이며, 그것이 너의 종이건, 누구의 종이건 상관하지 않겠노라.”(이인웅 옮김 문학동네판 괴테 파우스트’ 1108, 109 페이지)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이인웅 옮김 문학동네판 괴테 파우스트’ 2432 페이지)

 

사이토 다카시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위반을 이야기하며 결국 파우스트가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란 말을 한 계기가 된 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행위라 설명한다.(178, 179 페이지)

 

다카시가 말하는 미래를 건설하는 행위란 당연히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이다. 저자는 교사에게 문화유산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그 수업은 의도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저자는 문화의 수준은 제작자의 질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교사는 문화의 수용자와 제작자를 동시에 길러내는 역할을 짊어진 존재이자 다음 시대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197 페이지) 동경하는 마음을 심미안과 함께 길러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201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둘이서 대화할 때 못하는 사람은 셋을 상대할 때도 하지 못하고, 셋을 상대 못하는 사람은 열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며, 열을 상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십 명은 도저히 무리라는 것이다.(215 페이지)

 

교사란 지성, 감정, 의지에 리스폰스(응답)할 수 있는 몸까지 가져야 하는 균형 잡힌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다.(216 페이지) 공부에서는 객관성과 다각성 시점이 매우 중시된다.(223 페이지) 자신의 호불호에 상관 없이 틀린 것은 틀린 것, 그것을 항상 직시할 필요가 있다.(224 페이지)

 

교육에는 스타일이 요구된다.(264 페이지) 스타일과 더불어 언급해야 할 것으로 호흡이 있다. 교사는 활기차고 차분하게 호흡해야 한다. 숨을 길게 내쉬어야 한다. 호흡을 컨트롤함으로써 거리감을 컨트롤할 수 있다.

 

시간 감각도 컨트롤할 수 있다. 말의 간격을 조절할 때도 호흡은 중요하다.(269 페이지) 호흡이 너무 거칠고 불규칙하게 끊기면 계산을 하든 무엇을 하든 의식도 끊어져버린다.(271 페이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인간관계도 좁아진다.(272 페이지) 교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배우는 자세를 만들어주는 것이다.(273 페이지)

 

저자는 학문 그 자체의 재미,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즐거움에 이끌리는 공부를 권한다.(274 페이지) 저자는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을 강조한다.(276 페이지) 저자의 책은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한다. 지정의체(智情意體)를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이 공부이고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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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오고 햇빛이 또 가고˝.. 장석남 시인의 ‘감꽃‘의 한 구절이다. ˝여성으로의 도주, 여성으로부터의 도주˝.. 일본의 문학 이론가 미즈타 노리코가 일본 근대 남성 문학으로부터 읽어낸 키워드이다.

나는 이를 ˝책이 내게로 오고 책이 내게서 멀어지고˝라는 말과 ˝(하나의) 책으로의 도주, 그 책으로부터의 도주˝란 말로 바꾸어 나를 설명하고 싶다. 탐나는 책들이 매일 같이 쏟아지는 현실에서 내게 온 책을 통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대부분의 책은 옆에 두고 때때로 펴보는 것이 되지 못하고 멀어지는 존재가 된다.

이런 현실은 하나의 책으로 도주했다가 다 읽었든 어렵거나 유익하지 않아 중도에 그만 두었든 다른 책으로 도주하게 되는 내 실상의 다른 말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함석헌 기념관을 들르고 동작 50플러스 센터를 들른 뒤 14시 30분 무렵 책방 순례를 시작했다.

교보에 들러 신간들을 체크한 뒤 영풍문고와 종로서적을 찍고 종로 알라딘에서 ‘글쓰기 비결 꼬리물기에 있다‘(박찬영 지음)와 ‘빅뱅에서 인류의 미래까지 빅 히스토리‘(이언 크로프턴& 재러미 블랙 지음)를 산 것이 16시 1분.

대학로 알라다에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지음)를 구입한 것이 16시 59분.
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이 합정 알라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갔으나 실종 도서로 분류되어 발길을 돌린 것이 17시 51분.

신림 알라딘으로 가 구입한 것이 16시 28분. 부천 알라딘에 오래 전부터 사려 했지만 비싸 손놓고 있던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탄 전철이 신창행이기에 구로에서 인천 가는 것으로 바꿔 타야 했는데 한 정거장 지나 부랴 부랴 구로로 돌아가 인천행을 타고 제대로 도착해 산 시각이 19시 49분.

배고파 e 마트에서 빵과 프로바이오틱으로 요기한 후 20시 10분 소요산 행 전철을 타는데 성공. 아니 책을 뭐 이다지도 요란하게 좋아하는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도 책을 읽으며 가며 참 질긴 인연이라 생각.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책을 만나면 내가 아니면 누가 읽겠는가, 란 생각으로 구입하는 나를 본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호사다마를 우려할 정도로 또는 무슨 복선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컨디션이 너무 좋아 자축하는 마음으로 책을 샀다.

물론 그래 보아야 총액은 50000원을 조금 넘는다. 문제는 총액이 아니라 시간을 쏟아부으며 이리 저리 헤매 다니며 너무 산만하고 비효율적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가운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구절이 있다.

내게 스승 같고 친구 같았던 책들과 나는 많은 세월이 흘러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나는 오늘 이렇게 산만하고 이기적으로 책을 찾아 다니는 아들을 너그럽게 봐주시는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소중한 인연의 주인공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분들이다.
21시 7분인 지금 전철은 청량리 도착을 앞두고 있다.

피로하지만 보람스러운 하루였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 집에 가려면 한 시간은 더 필요하고 가서도 책을 읽느라 자정을 넘겨야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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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4-03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로점,대학로점,합정점,신림점,부천점까지 다섯 군데 도셨군요. 합정점에선 허탕치셨고.
저도 올해 1월25일에 동탄점,수원점,강남점,종로점 네 군데 돈 적 있죠. 저도 그날 먼거리 힘들게 찾아간 동탄점에서 찾던 책 없어 허탕친 기억이 나네요.
지난해 10월인가 11월에도 분당서현점,분당야탑점,건대점,부천점 네 군데 돈 적 있죠.
그 때 서현인지 야탑에서 산 책이 고 최인호의 <가족> 연작 가운데 하나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는데 그게 김광섭 시에서 나온 건지 오늘에야 알았네요.
날씨는 따스해졌는데 미세먼지가 심하군요. 건강 조심하시기를.

벤투의스케치북 2018-04-04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책을 그렇게까지 열심히, 적극적으로 찾아 다니며 사지는 않았는데요 어느 순간 양질의 중고 서적이 알라딘에 참 많다는 사실을 안 후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병상련(?)의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雨香 2018-04-25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
저는 환승할인 재미에 강남점 (지하철) 신천점 (버스) 잠실롯데월드타워점 (지하철) 건대점 (버스) 집으로 간적이 있고, 합정점 (지하철) 연신내점 (버스) 종로점 (지하철) 집, 분당야탑 (지하철) 분당서현 ( 버스) 건대 (지하철) 집 요렇게 세군데 코스로 돌아봤고요. 얼마전에는 일산점과 화정점을 엮어 보려고 했었는데, 원하는 책 구성이 안되어서 다음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4-25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책을 좋아하다 보니 그렇듯 무질서하고 무분별하게 보일 수 있는 행보도 취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흔들리며 균형을 찾는 것의 미덕을 생각한다. 토마스 만 이야기이다. 참으로 오래 전에 읽은 책 ‘마(魔)의 산’을 다시 읽으려 하는 나에게는 아이러니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아이러니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작가이다.

전업 작가로 활약하기 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잉여성(剩餘性)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출근을 하는 것처럼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토마스 만 자체가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엄격한 부르주아 인물이었던 시의원 아버지의 기질과 몽상적이고 예술가적인 어머니의 기질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려 한 토마스 만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불신하다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극우 세력의 공격을 받자 토마스 만은 지금은 이성(理性)이 야수성에 균형을 잡아주어야 할 때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마의 산’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죽음 지향적인 면모를 현실적인 데로 어느 정도 돌려 놓고 시민성과 야수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의도로 쓴 작품이다.

물론 그럼에도 ‘마의 산’의 낭만성과 아이러니한 면모는 매력적이기만 하다. 토마스 만을 만난 지 4년만에 그와 더불어 ‘마산(魔山; 마의 산)’에 올라가 앙드레 지드가 탄복한 대로 비길 데 없는 소설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말한 한무숙(韓戊淑) 작가가 생각난다.

물론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칸트 이야기도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물(物)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자신의 견해가 모든 규범과 윤리의 성립을 저해할 수 있으리라는 우려에 ‘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 이야기이다.

토마스 만은 언어에 대해서도 중요한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언어는 현실에 상응하는 역동성과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 단정적 표현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점을 작품에 반영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 소설을 쓴 것 역시 언어에 대한 견해에 기인한다. 그가 뚜렷한 사건 없이 인물들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소설을 쓴 것은 진실은 오직 세부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는 생각을 한 결과이다.

한무숙 작가도 의식의 흐름 기법의 소설을 썼다. ‘감정이 있는 심연’이다. 궁금한 것은 한무숙 작가는 어떤 연유로 그런 작품을 썼을까, 하는 것이다. 울프와 비슷하든 아니든 이야기거리가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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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잘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표준화된 견해를 수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길상사 범종각 앞에서 민흘림 두리기둥이란 말이 있는 김명리 시인의 ‘먼 길’을 읊으며 민흘림 기둥과 배흘림 기둥의 차이에 대해 말했다.

착시를 보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엇갈리는 두 견해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밑면의 기둥은 작은 석재로도 지탱할 수 있기에 밑면을 작게 한 것이고 그 결과 중간 부위가 불룩해져 배흘림이 되었다는, 아름다움보다 최적의 건축 구조를 찾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으로 배흘림 기둥을 보는 것이 다른 견해이다.

함성호 건축가는 “누구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지만 나는 울 정도의 혜안은 없어서 단지 무릎에 힘이 빠지는 절망감 같은 것을 느꼈다.”(‘철학으로 읽는 옛집’ 81 페이지)는 말을 했다.

이 묘한 뉘앙스의 말은 배흘림 기둥을 최적의 건축 구조를 찾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는 관점의 발로일까?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배흘림 기둥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순우의 오버(?)도 의미 있다 생각한다. 배흘림 기둥이 최적의 건축 구조를 찾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해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성북구에서 마련한 한옥아카데미(2018년 4월 12일 – 5월 17일, 매주 목요일 19시 – 21시, 강화 탐방 09시 – 18시, 가구박물관 탐방 10시 - 12시) 수강을 신청했다.

배흘림 기둥의 진실(?)을 알고 싶어서는 아니고 한옥 일반에 대한 관심이 크고 한 차례 강화도 탐방을 가고 한 차례 가구 박물관을 가는 일정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물론 그 답을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결과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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