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비밀
자현 스님 지음 / 담앤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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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 자현 스님 책을 세 권 읽었다. '스님의 공부법', '스님의 논문법'에 이어 '사찰의 비밀'을 읽는다. 목차를 눈여겨 보게 된다. 1'산문이 열리고 이름이 생기다'는 세 챕터, 2'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여섯 챕터, 3'전각의 배치와 장엄'은 아홉 챕터, 4'안에서 본 법당'은 열한 챕터, 5'수행과 의식의 상징들'은 네 챕터이다. 조금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사찰은 기도 및 수행처이지만 비보(裨補) 사찰, 역참(驛站) 사찰, 능침(陵寢) 사찰도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화성 용주사가 대표적 능침사찰이다. ()이란 이름이 들어간 곳은 능침사찰이 많고 원()이란 이름이 들어간 곳은 역참 기능을 한 곳이 많다. 사고(史庫) 역할을 한 사찰도 있다. 오대산 월정사가 그에 해당한다.

 

사찰을 나타내는 많은 명칭들 중 가장 상위 개념이 절과 가람(伽藍)이다. 절은 절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나온 말이고 가람은 인도 불교에서 절을 가리키던 상가라마에서 온 말이다. 애초 불교와 무관했던 하마비가 절에까지 확대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과 관련이 있다. 문정왕후가 절을 보호하기 위해 전국의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했다.

 

불교, 하면 화장(火葬) 즉 다비를 생각하게 된다. 화장은 유목문화의 전통이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화장 문화에 대한 저항이 오래 지속되었다. 수백년간 승려들도 화장을 하지 않았다. 사리는 화장의 결과 나오는 결정물이다. 뼈는 화장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단서이다. 초분이나 가묘(假墓) 후 뼈를 추려 골호(骨壺)에 담는 문화로 인해 성스러운 뼈<성골>와 진짜 뼈<진골>라는 인식이 생겼다.

 

사찰의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 이후 천왕문, 해탈문이 이어진다. 일주문이란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기둥의 문이란 의미이다. 일주문부터 수미산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사찰은 전체적으로 수미산의 구조를 모사하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불교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제석천(帝釋天)을 정점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수미산 중턱의 사왕(동방 지국, 서방 광목, 남방 증장, 북방 다문)천을 상징하는 것이 천왕문이다. 해탈문은 수미산 정상 입구를 상징한다. 동아시아 탑은 위아래로는 홀수, 좌우로는 짝수이다. 10층의 10은 완전수이다.

 

사찰의 중심은 금당(金堂; 주불전; 主佛殿)이다. 예전에는 금당에서 함부로 법을 설할 수 없었다. 부처님의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법을 설하는 강당이 만들어졌다. 강당은 금당의 부속 건물이다.

 

대부분의 종파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主尊)으로 모셨다. 그러나 불교에는 여러 부처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왕실과 조정에 의해 불교 종파들이 강제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대웅전(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 법당) 중심의 사찰 구조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계신 곳은 대웅전, 사리를 모신 곳은 적멸보궁임을 감안하면 부처님이 군왕급 예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은 99칸 제한을 받지 않았고 궁궐 건축에만 할 수 있었던 단청도 할 수 있었다. 법당은 꽃으로 장엄한 궁전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출처는 여불위의 '여씨춘추'이다.

 

궁궐도 사찰도 정전(正殿; 궁궐), 불보살을 모신 곳(본당; 사찰)은 둥근 기둥, 편전(便殿; 궁궐), 요사채(사찰)은 네모 기둥을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현존 고려시대 건축물들이 일곱채이다.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조사당, 강원도 강릉 객사문, 황해도의 성불사 응진전, 심원사 보광전 등이다.

 

그런데 왜 유독 불교 건물들만 남았을까?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의 경제력 차이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는 오래된 건물을 유지하기보다 새 건물을 짓고 확장하는데 전력했을 것이다. 사찰은 궁핍한 경제력 때문에 건설하기보다 보존하는데 주력했을 것이다.

 

이익대영(以杙代楹)이란 말이 있다. 말뚝으로 기둥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잘못된 인사(人事)를 비유해 쓴다. ()은 기둥을 의미한다. 주련의 주()도 기둥을 의미한다. 주련(柱聯)은 영련(楹聯)이라고 한다. 주련 문화는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해 쓴 잠()이 확대되어 기둥에까지 쓰인 것이 주련이다.

 

잠은 혼자 보려는 의미의 것이라면 주련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주려는 용도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보게 하는 주련을 한문 흘림체로 쓰는 것도, 한글로 쓰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불교는 다불보살(多佛菩薩)의 종교이다. 가섭불(과거불), 미륵불(미래불)처럼 시간적으로도 많고 약사여래(동방 약사 유리광세계 거주),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 거주) 등 공간적으로도 많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은 다르다. 대웅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대웅보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한다. 대웅보전의 경우 중앙, , 우 존재 모두 부처이다. 이때는 위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구분된다.

 

삼세불은 연등불(과거) - 석가모니불(현재) - 미륵불(미래)로 나뉜다. 삼신불은 석가모니불(작용) - 비로자나불(본체) - 노사나불(현상)로 나뉜다. 삼존불은 아미타불(서쪽) - 석가모니불(중앙) - 약사여래불(동쪽)로 나뉜다. , , , 과일, , 차를 여섯 가지 공양물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날씨가 더워 음식이 부패하기 쉬웠다. 그래서 정오 이후 공양은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사시불공은 이로 인한 현상이다. 향은 더위 때문에 냄새가 심한 인도의 기후 조건과 관계가 깊다. 향을 피워 냄새를 없앤 것이다. 반면 더위로 인해 꽃과 과일은 사철 풍부했다. 이런 문화가 종교와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 육법공양이다.

 

신라(新羅)는 계를 의미하는 실라(sila)에서, 서라벌은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서, 가야(伽耶)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서 유래했다. 아궁이는 인도의 불의 신 아그니(agni)에서 유래했다. 부처님은 시간적으로 여러 부처들이 순차적으로 계시지만 공간적으로는 한 공간에 한 부처님만 있어야 한다. 한 부처님의 구역이 삼천대천세계(10억 세계).

 

나한 또는 아라한은 산스크리트어 아르하트(arhat)를 음차한 것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격에 해당한다.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제자를 성문(聲聞)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기원 전후가 되어서야 경전이 글로 옮겨졌기에 그 이전의 공부 방법은 듣는 것 뿐이었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들어 터득한 분이란 의미이다. 이 성문 제자들은 성취 정도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나뉜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은 보살이다. 아라한은 작은 배로 제도하고 보살은 큰 배로 제도한다고 말해진다.

 

사찰의 의식구(儀式具)들은 필연의 이유로 발전했지만 단체 생활을 한 승려들의 생활과도 관계가 있다. 과거 사찰에는 수백의 스님들이 살았기에 소리를 질러 의사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신호 용구들이 발달했다. 목탁은 대표적 의식구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수행 도구이다. 과거 불교에서 징과 꽹과리도 의식구로 사용했다. 죽비는 선종의 도구이다. 죽비삼성은 죽비 예불은 간댜해서 세 번의 소리만으로 모두 끝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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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 카프카 / 카뮈 / 쿤데라 깊이 읽기
조현행 지음 / 이비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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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밀란 쿤데라... 모두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읽지 못했고 사유하지 못한 작가들이다. 조현행의 책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은 세 작가의 작품들에서 길어올린 질문들을 함께 나누며 생각할 수 있게 배치한 책이다.

 

카프카의 작품은 '변신', '소송', '()‘ 등이다. 카뮈의 작품은 '이방인', '페스트', '전락' 등이다. 쿤데라는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무의미의 축제' 등이다.

 

카프카는 우리가 실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비밀, 어둠인바 거기에 진실이 거주한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처럼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는지 묻는다. 있지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다. 이유라기보다 작가가 비인간적이고 소외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레고르를 벌레가 되게 했다고 생각한다.

 

'소송'은 법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침대에서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카프카는 법에는 지혜가 담겨 있지만 십중팔구 그것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저자는 '소송'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난해했는지 논해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보다 왜 그의 소설은 난해한가를 알고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의 난해함은 이해불가하고 수용할 수 없는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은 작가가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 두고 소설만 쓰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책이다. 친구 막스브로트에게 유고를 태워버리라 말했지만 친구는 그 부탁을 따르지 않고 출간함으로써 우리에게 명작을 선사한 셈이 되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과 같이 거대한, 다가갈 수 없는 실체였다.

 

카프카가 법학과에 간 것도 아버지의 바람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에게 글쓰기는 도피처였다. 그가 보험회사에 취직한 것도 글쓰기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은 성의 부름을 받고 토지측량사로 임명된 주인공 K가 마을 공동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존재와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K는 성에 진입하지 못한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가 소송에 휘말려 법의 정의를 찾아 나서지만 진실을 찾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듯 ''k는 성의 부름을 받고 일하러 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해명을 요구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전해듣지 못한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성은 높은 곳에 있거니와 중요한 사실은 그 이미지가 오랜 시간을 거쳐 전승된 무수한 말들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내가 기를 써서 도달하려고 하는 성은 오랜 시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추상적 관념이 아닌가 묻는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왜곡이나 문제는 없었는가 묻는다.(81 페이지)

 

저자는 k가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K의 불복종적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84 페이지) 저자는 여러분이 만들고 싶은 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몇 가지가 있지만 프라이버시를 위해 침묵하겠다.

 

카뮈는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했다. 카뮈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기에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치를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카뮈의 중요한 개념이 부조리이다. 부조리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에서 생겨난 틈에서 발생하는 불편감, 낯섦을 유발하는 것들이다.

 

부조리의 인간과 부조리한 인간은 다르다. 전자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세계와 불화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세계와 타협하고 화해하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카뮈가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 부조리의 인간은 깨달은 자, 거부하는 자, 반항하는 자이다.(105 페이지)

 

외람(猥濫)되지만 이 부분에서 나를 떠올리게 된다. 책 읽는 나, 무언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나. 그것은 기존의 통로와 다른 새 길을 만들려는 것이고 나에게서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유래한 생각을 정리해 보이려는 것이다.

 

카뮈는 육체가 내린 판단도 정신이 내린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는 말을 했다. 부조리에 맞선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반항이다. 카뮈에 의하면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121 페이지) '이방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부드러운 무관심이란 구절이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인간인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카뮈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부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카뮈는 그 세계에 익숙해지는 삶은 노예의 삶이라 말했다.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싸운 그 만큼 이긴 것이다. 베케트가 말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락'은 카뮈의 마지막 장편이다. 이 작품은 자살하는 여자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 하는 한 변호사의 참회와 심판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쿤데라는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난 데 이어 시민권을 박탈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쿤데라는 '농담'을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한 소설로 읽는 것에 강력 항의한 작가이다. 소설은 다의적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하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1945년부터 20여년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쓴 '농담'은 한 마디로 농담하지 말라는 명령을 담은 소설이다. 1948년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한 시기이다. 작품의 주인공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에게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농담조의 편지를 썼다가 대학에서 쫓겨나 탄광으로 끌려가 노역을 치르게 된다.

 

쿤데라는 "우리가 열망해 왔던 것, 우리가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것, 이제 우리의 죽음까지도 바치려는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떨 것인가?" 묻는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무수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성에 대해 물은 카프카를 연상하게 한다.

 

'농담'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만든 신념에 매몰된 두 주인공(루드비크, 야로슬라프)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쿤데라는 인간은 자신의 개념 자체를 잃어버릴 것이고 파악도 이해도 불가능한 인간의 역사는 의미를 상실한 도식적 기호 몇 개로 축소될 것이라 말했다.

 

저자는 '농담'을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인생이 고약하게 꼬인 남자의 이야기라 말하며 농담이나 유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눠 보자고 말한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난다고 말하고 싶다.

 

쿤데라는 영원회귀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 표현한 니체를 염두에 두고 그렇다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취하는 중용이고 균형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여주인공 테레자는 사랑 없는 섹스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엄마로부터 낙태해줄 의사를 찾지 못해 나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으로 항상 책을 끼고 다니며 읽는다.

 

그녀는 책을 읽으며 자신이 도달하려는 세계를 그린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지었다." 후에 그녀는 영혼이 없는 육체적 관계라는 가벼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빨래를 하면서도 욕조 곁에 책을 두었던 테레자에게 책은 어떤 의미였을까 묻는다. 저자는 쿤데라가 인생의 무의미를 인정하자고, 그리고 소소하게 보이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고 말한다. 이는 부조리하기에 의미를 찾아내자고 한 카뮈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쿤데라가 전생에 걸쳐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사소하기에,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그럴 것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대단한 것들은 우리가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나고 가치 있다. 생이 허망하고 덧없음을 알기에 쿤데라는 아니 모두는 그 작고 하찮은 시뮬라크르 같은 진실을 긍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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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 님의 '사람, 장소, 환대'를 통해 알게 된 '자아연출의 사회학'의 저자 어빙 고프먼(사회학자)'수용소'가 번역, 출간된 것은 올 여름이다.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가 부제인 책이다.

 

지난 달 로널드 랭(정신과 의사)'분열된 자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온전한 정신과 광기에 대한 연구'가 부제이다. 한 심리학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하며 심리치료에서 기법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치료사 자신의 성숙한 인격과 마음의 건강이란 말을 했다.

 

완벽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이긴 치료자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기에 적격이라는 의미다.

 

중요한 사실은 획기적인 치료법이 아니라 내담자를 보는 치료자의 눈이 바뀌고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로널드 랭은 정신과적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비정상 환자로 볼 것이 아니라 불화(세계와의 관계에서)와 분열(자신과의 관계에서)을 경험한 사람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이는 칸트적 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비유된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치료자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를 이긴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말로부터는 선하고 올바른 행위만을 하는 사람이 군자가 아니라 실수를 반성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군자라는 공자의 관점을 떠올릴 수 있다. 칼 융의 "상처받은 치료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전환적 시각이라는 말이다. 이 말로부터는 ''라는 인식 주관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앎도 말할 수 없다는 칸트적 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에 더 비중을 둘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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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썼지만 저자의 이름을 무심히 흘려버린 책이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이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의 그 단턴이다. 서평 작성 5년만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김병익 선생의 '조용한 걸음으로'란 책을 읽고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김병익 선생에 의하면 단턴은 '미래의 책'에서 1968년에서 1984년 사이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도서 전자화를 위해 9300만 페이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1000만 달러의 책과 문서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건재를 전제한 이야기이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이 있기에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해도 복구는 시간 문제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시인을 체포하라''고양이 대학살' 말고도 단턴의 저술 목록에는 '책의 미래', '책과 혁명', '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 등 책과 관련한 읽을거리들이 꽤 있다.

 

특이하게도 단턴은 프랑스사를 전공한 미국인 역사학자이고 2007년에서 2016년 사이에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지낸 사서이다. '책의 미래'에는 도서관에 관한 유용한 자료들이 꽤 있다. 도서관 관련 자료는 아니지만 프로이트보다 푸코’, ‘책읽기에서 책쓰기로같은 흥미를 자극하는 글들도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단턴을 이야기하며 '고양이 대학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진 고양이 대학살을 다룬 책이다.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두 견습공이 인쇄소 여주인이 좋아하던 20여 마리의 고양이들을 죽인 사건이다. 견습공들은 춥고 더러운 방에서 잠을 잤고 고양이들조차 거부한 음식을 먹었던 반면 고양이들은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고 구운 새고기도 먹었다.

 

고양이들은 밤새 울어댔다. 흉내를 잘 냈던 레베이예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진짜처럼 흉내내 주인과 아내로 하여금 '미친 고양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게 했다. 두 견습공은 유쾌하게 고양이들을 죽였다. 여주인은 그들이 죽인 고양이가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것들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단턴은 견습공들은 여주인이 아끼던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실제 그녀가 마녀였다고 기소한 것이고 고양이들을 재판(견습공들은 고양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최후 의식을 치른 뒤 교수대에 고양이들을 매달았다.)함으로써 법 질서와 사회 질서 전체를 조롱했다고 썼다.

 

번역자 조한욱 교수는 견습공들의 행위를 상징의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드러나는 상징적 모독으로 설명한다. 조한욱 교수에 의하면 이는 인류학적 방법이다. 인류학은 오지의 원주민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흥미로운 생활방식을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같다는 자신들의 학문적 전제에 따른 것이다.

 

인류학은 단순화된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이 다른 복합적인 문명권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이는 과학의 환원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관건은 단 한 차례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노동자들 일반의 사고방식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인류 전체의 죄가 되고, 한 존재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는 물론 십자가 사건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삶이 모두 관계한 것이다.)이 모든 인류를 사()한 것을 알지 않는가.

 

다나 해러웨이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서 한 말이 있다. 하나는 부족하고 둘은 너무 많다는 말이다. 백소영 교수는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을 예로 든다. 그 청소년은 자신 혼자만 있을 때와는 다르기에 한 개체라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둘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은 하나 이상이고(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하나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둘은 아니라는(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는 둘은 아니라는) 의미란 것이다.('페미니즘과 기독교적 맥락' 95 페이지)

 

다나 해러웨이의 말을 맥락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고양이 대학살의 두 견습공의 행위가 당시 노동자 일반을 대표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 같고 아니라고 하면 너무 자폐적인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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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후에는 물론 읽는 중에도 지인들에게 대단한 책이라는 말로 거듭 추천한 책이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방문객은 많으나 추천은 아주 적은 예스에서 지난 119일 게시 이후 무려 열 분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예외적인 책이기도 하다.

 

정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글도 잘 써야 하지만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도 필요함을 느끼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지금 그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읽고 있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선불교를 철학하다'란 부제를 가진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을 사려고 한다.

 

사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출간(201611) 직후부터 구입을 망설인 책이었는데 중고로 나온 책을 보고 사 읽고 뜻 밖의 성취를 이루었다. '선불교를 철학하다'는 선불교에 대한 내 몰이해 또는 편견을 깨줄 책이 될 것이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을 통해서는 공간에 대한 사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책에 현상학적 공간 개념에 대한 글이 있다. 나는 시간보다 공간에 더 관심이 크다. 물론 그 관심은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관심이기도 하고 일상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그 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산책에 비해 공간적 산책이 제한적'('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105 페이지; 옮긴이 해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같은 문인의 삶을 보며 음미하는 유의 공간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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