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민의 두 얼굴의 조선사를 읽다가 낯익은 이름을 만났다. 장길산(張吉山). 주제를 뒷받침하는 작지 않은 이름이다. 1990년 여름 황석영 작가의 10권짜리 장편 장길산을 읽던 때를 회상하게 하는 이름이다. 장길산은 17세기 후반인 1680년 무렵 활약한 도적으로 근거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름이다. 17세기는 윤선도(1587 1671), 허목(1595 1682), 윤휴(1617 1680) 등이 살아 있던 때였다.

 

이경구의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에는 윤선도, 허목은 없고 윤휴를 비롯 김장생 부자, 김집 부자, 김육, 장유, 송시열, 유형원, 이현일, 남구만, 김창협, 김창흡 등이 소개되어 있다. 생소한 장유, 이현일, 남구만 등을 알 수 있어 좋지만 허목과 윤선도가 없어 아쉽다. 윤선도, 허목, 윤휴는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허목, 윤선도는 단행본 책을 통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두 얼굴의 조선사의 부제인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이 꽤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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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20일 운현궁(雲峴宮), 건청궁(乾淸宮), 러시아 공사관(公使館), 중명전(重明殿) 해설 시간에 주역 이야기를 했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나오는 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등의 네 신하의 이니셜을 딴 천하장안(千河張安)을 주역 중천건괘에 나오는 원형이정으로 불렀다는 말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222일 연천에서 양주팀 해설을 하는 것으로 올해의 해설을 모두 마쳤다. 쓸쓸한 계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시간이지만 어설프고 서툰 대로 한 해를 잘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뿌듯한 감회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담론에서 신영복 님은 주역 산지박괘 다음 괘인 지뢰복괘로 강의(‘담론은 강의를 묶은 책이다.)를 마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산지박은 아래에는 세 음효로 이루어진 곤()괘가 자리하고, 위에는 두 개의 음효와 하나의 양효가 만난 간()괘로 이루어진 괘로 가장 위에 마지막 희망처럼 남은 하나의 양효가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해석을 낳는다.

 

산지박괘 다음의 괘는 지뢰복괘다. 상하가 바뀐 것이다.(산지박은 곤괘가 아래에 자리하고 간괘가 위에 자리하는 반면 지뢰복괘는 간괘가 아래에 자리하고 곤괘는 위에 자리한다.) 신영복 님은 지뢰복괘를,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괘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산지박이라는 절망의 괘(산지박의 은 박탈당함을 의미한다.)가 지뢰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된다는 말을 한다.(박괘가 음기에 의해 양기가 침식당하는 괘인 반면 복괘는 양기가 되살아나 서서히 음기를 제압해 가는 괘다.: 신원봉 지음 주역’ 233 페이지.. 세부 해석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큰 틀로 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주역(周易)’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대한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주역 64괘 가운데 60개에 원형이정이란 말이 들어 있다. 그러나 원형이정에 대한 해석은 너무 다기(多岐)하다. ’문언전은 원, , , 정 네 글자를 각각 떼어 해석했고 왕필 이후 정이와 주희는 원형과 이정으로 떼어 해석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원형이정을 하나로 붙여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든 원형이정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주역 이해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대체적인 해석은 주희가 제시한 춘하추동 사시론으로 수렴한다. 서대원의 주역 강의의 논의가 마음에 든다. 서대원 선생은 원을 혼돈의 시기로, 형을 창조의 시기로, 리를 왕성한 활동의 시기로, 정을 소멸의 시기로 본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은 정녕 천하장안을 원형이정으로 불렀을까? 흥선대원군을 파락호(破落戶)로 설명한 김동인의 소설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일단 인용은 했지만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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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aharu U(ながはる U)라는 영문 표기로 한국식 성을 고집했지만 자식들은 일본인 아내의 성을 따르도록 한 사람. 우장춘 박사.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가 개발한 씨 없는 수박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지요.

 

우장춘 박사의 이름을 거론할 때 누구와의 인연을 드시겠는지요? 저는 바바라 맥클린톡의 이름을 들겠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한 바바라 맥클린톡의 도약이론이 우여곡절 끝에 1983년 노벨상을 수상한 까닭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분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건국 이래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하자 드디어 한국이 자신을 인정했다고 기뻐했지만 수상 3일 후 생애를 마감했지요. 1959810일의 일입니다. 이 분은 1895820일 을미사변 때 일본 무장세력에 가담해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그의 시신을 욕보이고 화장(火葬)까지 한 우범선의 큰 아들이지요.

 

아버지가 자객에게 피살되었을 때 우장춘은 겨우 다섯 살이었지요. 고생이 극심했지요.. 역사에는 슬픈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가 많다고 해야 하나요? 분노할 일이 많다고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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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란 책에 흥미로운 단어들이 꽤 있다. tl: dr이란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too long: didn’t read의 약자로 너무 길어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헤밍웨이가 여섯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고 쓴 다음의 문장은 시린 감동을 준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 팝니다란 문장이다.

 

읽기 연구가인 저자는 아들 벤 이야기를 한다. 창의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지능이 높은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쉬운 읽기 스킬에서 문제를 지닌 아이 즉 난독증 아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좋은 사회의 세 가지 삶에 대해 말한다.

 

세 가지 삶의 첫 번째는 지식과 생산의 삶이고 두 번째는 즐기는 삶, 세 번째는 관조의 삶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관조의 삶이다. 독서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바다. 좋은 독자의 세 번째 삶은 읽기의 절정이자 두 삶의 종착지인 관조적 독서의 삶이다. 우리 안의 관조적 차원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와 시간을 들여 유지해야 한다.

 

저자는 읽기의 기쁨이 삶을 바꿀 만큼 중요함을 보여준 예로 히틀러를 타도하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투옥되어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를 든다. 저자는 본회퍼가 나치 수용소에서 쓴 옥중서신에는 곤경에 처해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이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순수한 행복을 얻은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를 연상하게 하는 사람이다. 깊은 비교를 수행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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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흥선대원군 : 운현궁의 봄 평생 소장 소설
김동인 지음 / 부크크(book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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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석파(石坡)라는 호 외에 유극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나막신을 신는 노인이란 뜻을 가진 유극옹이란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호다. 흥선대원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운현궁이다. 고종이 즉위한 후 대대적으로 확장, 정비된 궁이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嘉禮)가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가장 핵심적인 설명은 금동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을 통해 알 수 있듯 흥선대원군이 보인 능숙하고 탁월한 처세(處世)와 보신(補身)의 근거지라는 말이다. ’운현궁의 봄은 안동 김씨가 위세를 부리던 철종 재위시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로 묘사되었다.

 

본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옳은 말이로다... 상갓집 개지. 옛터를 잃고 굶주려 다니는 석파나, 주인을 잃고 구석을 찾아다니는 상갓집 개나. 다를 것이 뭐냐? 이제부터는 석파라는 호를 버리고 상가구(喪家狗)라는 호를 쓸까 보다.” 총애하는 계월로부터 김병기(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자 영의정 김좌근의 양아들)가 자신을 상갓집 개 같이 헤헤 하며 다니는 사람이라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흥선대원군이 계월에게 건넨 말이다.

 

김동인은 흥선대원군을 주책없는 인물, 가난한 주정뱅이라 설명한다. 흥선대원군은 김병기로부터 놀림과 무시를 당한다. 그런 그에게도 자기 편이 있었다. 대제학 김병학, 훈련대장 김병국 형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인 조성하, 그리고 그의 장인 이호준 등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성하를 통해 신정왕후와 접촉하려고 한다. 조성하는 백악(白嶽)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홀로 숭례문까지 간다. 거기서 그는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에 눈길을 보낸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맏아드님으로 일찍이 세자로 책립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님 왕의 마음이 자기에게 계시지 않고 자기의 셋째 동생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고 양녕은 아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미친 체하고 치인(痴人)의 흉내를 내었다.” 흥선대원군도 그렇다는 의미다.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속 없는 사람으로 처신하면서도 아들 이재황(훗날 고종이 되는)에게는 은밀히 왕자(王者)의 길을 가르쳤다. 서민을 긍휼히 여길 것, 편중편애를 삼갈 것, 처권(妻權)에 눌리지 말 것, 처세에 밝을 것 등이다. 흥선대원군은 헌종의 7촌 아저씨이자 철종의 6촌형이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철종이 왕이 된 것은 안동 김씨들에 의한 것이었다. 세도정치를 계속 펼 수 있는 데 문제가 없을 인물이 강화도령 철종이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보령(寶齡) 15세까지 하지만 철종은 19세에 즉위했음에도 아는 것이 없어 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건강했던 철종은 너무도 편한 궁중 생활에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였다.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역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철종은 바로 그 강화에서 태어난 초동(梢童)이었다. 철종의 아들들이 죽자 후계자가 누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왕족인 이하전과 이하응이 물망에 올랐다. 도정 이하전(李夏銓)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정통 후계자였다. 이 상황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이하전 역모사건을 꾸몄다. 이하전은 강인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헌종 승하시 신왕의 후보자로 꼽혔던 사람이었다. 권돈인이 강추했으나 순원왕후 김씨가 철종을 선택한 것이다.

 

흥선군은 그간의 행실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하전은 왕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벌써 12년 전에 당했을 일이라 생각한다. 부인에게는 "12년을 더 살았으니 넉넉하지 않소?"라고 말한다. 흥선군은 이하전이 사사된 이후 더욱 어지럽고 거친 생활을 하는 한편 조대비가 자신을 부를 날을 기다렸다.

 

조대비의 부름을 받은 흥선은 자신의 아들 재황을 거론했다. 조성하는 흥선이 겉보기와 달리 대군, 왕자에게 지지 않는 단아한 귀인이라고 판단한다. 조성하는 서원 문제를 비롯 나라의 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은 흥선군 밖에는 없다고 판단한다.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는 운현궁의 천하장안이라 불렸다. 흥선은 천하장안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불렀다. 원형이정은 주역의 용어다.

 

김병국 역시 흥선군의 처신에 숨은 뜻을 알았다. 그리고 조대비와 결탁해 큰 일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았다. 김병국은 흥선의 정체를 호소할 경우 오히려 비웃음을 살 것이라 판단하고 눈감고 흥선에게 미래를 맡기기로 결심한다. 흥선군과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익종의 대를 이어 26대 조선 국왕으로 만들자는 밀약을 한다. 헌종이 위중할 때 순원왕후 김씨와 동생 김좌근이 헌종 승하시 강화도령을 모셔다가 순조의 대를 이어 25대 조선 국왕을 만들자고 한 것처럼.

 

조대비는 조씨 일문의 세도를 생각했지만 흥선군은 외척을 제거해 강한 왕권을 확립하는 데에 생각이 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대리를 하게 된 조대비에게 흥선군은 김씨들이 신을 모욕했을망정 무서워하지는 않는다며 종실의 다른 분을 추대하는 것보다 자신을 오히려 쉽게 볼 테니 극력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김씨 일족은 몰락을 지각하고 있었다. 왕으로 내세울 마땅한 자기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순조 대왕 대로부터 지금까지 삼대째 보름달과 같이 빛나는 영화에 취해 있었던 그들이다.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익성군으로 봉해 이미 절사된 익종 대왕(효명세자)의 대통을 부활하게 하라고 명한다.

 

흥선대원군은 생존해 대원군이 된 유일한 존재였다. 인조 부친 정원대원군, 선조 부친 덕흥대원군, 철종 부친 전계대원군 등은 사후 추존된 경우다. 영의정 하옥 김좌근은 흥선의 계략을 뒤늦고 알고 치를 떨었다. 특히 흥선군은 김좌근을 찾아가 이하전 사건 며칠 전 전하가 돌아가시면 아마 대개 이하전이 보위에 오르겠지요?란 말을 했다. 김좌근 입장으로서는 그 말에 부담을 느끼고 부랴부랴 역모사건을 꾸며낸 것이었다.

 

이재황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의 생친이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이 힘든 시절에 병국, 병학 헝제에게 신세를 적지 않게 졌으니 자신의 얼굴을 보아서 두 형제는 그냥 머물게 하고 김좌근은 아무리 순원 왕후 마마의 동기로되 무능한 노물에 지나지 않고 그 위에 독부 양씨가 있으니 실직을 깎을 것을 제안했다.

 

조대비의 조카이자 큰 역할을 한 조성하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으로 정3품 통정대부 우승지가 되었다. 운현궁은 붐비는 곳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노론 외의 소론, 북인, 남인 가운데서 추려내 요직에 앉히기로 결정한다. 김동인은 이렇게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전에는 비루먹은 개 한 마리 찾지 않던 흥선 댁이나 지금은 팔도 강산에서 매일 찾아드는 수없는 시민의 무리 때문에 수십 명의 궁리도 그 응대를 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이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은 오랫동안 쓸쓸하였던 만큰 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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