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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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는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9인의 정치가는 태종,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수양대군, 김종서, 신숙주, 정조 등이다. 우리는 세종을 성군(聖君)으로만 알고 그의 재위기는 오직 평탄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종 재위시에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무리수도 있었고 아픔도 겪었고 임금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불평도 있었다.

 

세종 재위는 수성(守城)기에 해당한다. 부왕 태종의 작업에 힘입은 바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피의 숙청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장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 묵인 내지 승인했다고 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태종이야말로 조선왕조를 국가로 인식한 첫 국왕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태종이 화가위국(化家爲國)이란 말을 이해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 주로 개국 시조가 사용했다. 물론 태종은 화가위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에 준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세조는 계유정난을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겨 이 말을 사용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양녕이 주색잡기에 탐닉한 것과 달리 충녕(세종)은 독서를 피난처로 여겼다는 말이다.

 

태종은 세종이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놓아 염려스러워 했지만 내심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평했다. 태종은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태조는 자신이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만들었으나(화가위국; 化家爲國)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무가(武家)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태종은 아버지(태조)는 정치의 세계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영역이라고 보았다고 말한다. 권간(權奸; 권력을 가진 간신) 속에도 충신이 있고 지금 충신으로 보이는 자도 언젠가는 역신(逆臣)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충녕이 예능에도 뛰어났고 형제간에도 독특한 우애를 보여주었으며 음주와 가무도 제법 하는 듯했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고려라는 그림 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넣으려 한 것이 자신의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종은 충녕을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의 자주국방론을 반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대(事大)외교론자로 평했다.

 

송파(松坡)라는 호 외에 눌재(訥齋)라는 호도 썼던 양성지는 자주국방론자였고 규장각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다. 태종은 명나라 시조 주원장(朱元璋)의 피의 숙청을 잔인한 것으로 평하는 세론에 반대하며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특히 국왕의 일이라 말했다. 그리고 충녕을 그런 정치관과 정치적 폭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44 페이지)

 

황희는 양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해 유배에 처해졌었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였었다. 남원에서 4년의 귀양 생활을 하던 황희는 태종의 서거 3개월전 상왕이던 태종의 부름을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불러 세종에게 중용(重用)할 것을 부탁했지만 세종은 황희를 중용하지 않다가 강원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세종 재위시 많은 여진족들이 귀화해 왔다. 황희는 이를 조선의 어진 정치, 그리고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삼는 세종의 포용 정책 때문이라 생각했다. 왜구, 여진, 명나라, 남만인(南蠻人)들까지 귀화하려 하자 명나라는 요동 지역의 여진족들이 조선에 귀부(歸附)함으로써 조선이 중화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황희는 세종께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의 단점을 아시고도 공적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며 그렇게 세종께서 시종 보호해주신 덕분에 추문과 허물을 극복하고 청백리로 거듭날 수 있었고 급기야 죽어서 당신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조말생은 황희를 간악한 소인이라 평했다.)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말은 문묘 공신당에 세종대의 공신으로 모셔졌다는 의미다.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 이수(李隨), 이제(양녕대군), 이보(李補; 효령대군) 등이 함께 배향되었다. 허조(許稠)는 하양(河陽) 허씨다. 허조는 유감동(兪甘同; ? ~ ?) 사건을 논했다. 유감동은 조선 전기의 기생, 무희, 시인으로 양반 출신 부녀자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기녀로 생활하며 고관 40여 명과 간통해 처벌 받은 여자다.

 

세종은 유감동 사건 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허조는 세종이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을 접하고 마음 아파했다고 평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세종이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법제인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힌다.)

 

허조는 세종이 후궁보다 낮은 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녀를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으로까지 올린 사실을 언급했다.(신빈은 소헌왕후의 시녀였다.) 그리고 세종이 자신의 즉위 후 초토화된 처가를 생각해 소헌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평했다.

 

박연(朴堧)은 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박연은 자신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음악의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어떤 계기로 자신이 음악에 관한 주상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함)를 받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박연은 세종이 자신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황종(黃鍾; 음악을 이루는 기본음)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

 

박연이 아악(雅樂) 전용을 주장하자 세종은 반대했다.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라 중국 음악이라 말했다.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 향악을 듣고 죽어서 아악을 듣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했다. 박연은 세종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종묘나 사직 제사는 아악으로 국가 행사의 상징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연은 공자가 계환자가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이자 서둘러 노나라를 떠난 공자를 언급하며 세종의 여악 사용 긍정론을 비판했다. 박연은 여악을 쓰면 음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연은 세종이 당대의 정치는 후세인들이 평가하게 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 세종은 그런 생각으로 목조(穆祖)에서 태종까지만 칭송하는 것으로 용비어천가를 구성하게 했다. 박연을 통해 우리는 세종이 최상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인지가 본 세종편에서 거론된 인물 가운데 정창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창손은 단종 복위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한 사람이거니와 세종에게는 충신, 효자 등이 나오는 것은 자질(資質)의 문제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파직당했다.(정인지는 술에 취해 세조를 너라고 불렀으며 굳이 어린 조카를 죽였어야 했느냐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인지는 한글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자신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편에서는 세종이 한 이런 말이 나왔다. “작년의 강무(講武)는 참으로 한심했다.”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 사건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시던 부왕께서는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 완강하셨다.“ 세종은 강무란 군국의 중대한 일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창업의 시기에는 권도(權道)가 중요하지만 수성(守城)의 시기에는 정도(正道)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풍수학을 강명(講明; 강구하여 밝힘)하는 일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종서는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는 세종의 말을 거론했다. 김종서는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세종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들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하여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이 최윤덕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하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하여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가 천출의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라는 것이다.

 

신숙주는 세종이 성삼문에게 단종을 잘 돌보라고 한 말이 그를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가 묻는다.

 

성삼문은 세조가 왜 모반을 했느냐고 묻자 당치 않다고 말하며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이에 세조가 ”그러면 처음 선위 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고 묻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들였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말했다.

 

정조는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무모릉; 無模稜)을 문제삼았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 세력인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에 한탄했다.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 정조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정동준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 자살했다.

 

정조는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시킨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게 하면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결국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정조는 자신이 즉위했을 때 자당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자당은 무조건 감싸는(당동벌이; 黨同伐異) 행태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정조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 마흔아홉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을 거론하며 내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재위 19년에 탕평 정국을 이루었다고 운을 뗀 뒤 흥미롭게도 세종에게도 재위 19년이 중요한 해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배우려고 하는 준거군주인 세종께서는 그 해에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 문제를 예방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정조는 세종에 비하면 자신은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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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내용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

 

정조 7년(1783년)의 기록을 통해 정조가 승지에게 무모릉(無模稜)이라는 말을 꺼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경영의 책임 당사자들이 자신의 안녕만 염두에 두고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을 지칭해 한 표현이다. 정조는 서로 공손히 하며 정사(政事)를 위해 바람직하게 협력 한다는 의미의 동인협공(同寅協恭)이란 말도 했다.

 

이어 잘 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졸렬한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했다. 종합하면 무모릉을 지양하고 동인협공을 지향하되 욕교반졸의 잘못을 하지 않도록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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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한용 지음 / 채륜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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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는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가 선정한 2020년의 과학도서 10권 가운데 한 권이다. 저자인 이한용은 전곡 선사박물관 관장이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1부 인류의 도구, 2부 인류의 기원, 3부 인류의 예술 등이다.

 

책은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부분부터 시작해 구석기 시대 백남준이란 내용에 이르기까지 “인류 진화의 34 가지 흥미로운 비밀”을 망라했다.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돌에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가공한 흔적이 있는가 여부다.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만든 석기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다.(규칙성과 정형성이 중요하다.)

 

구석기 시대 인류 진화와 석기제작 기술을 한 마디로 하면 머리는 점점 커지고 석기는 점점 작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기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채택한 기술이 간접타격이다. 돌망치로 돌을 직접 떼어내는 대신 사슴뿔로 만든 일종의 정(punch)을 사용해 길고 얄팍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사박물관, 하면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주먹도끼는 대략 16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되기 시작해 약 10만년전까지 구석기 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먹도끼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석기를 만드는 기술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원재료인 석재의 차이 때문이다.

 

한탄강에서 주은 규암계 자갈돌로는 아무리 뛰어난 석기 제작자라고 해도 유럽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얄팍한 모양의 주먹도끼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계획성과 예측능력, 기억력과 창의성 등이다. 그래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인류 최초의 예술품이라 하는 것이다.(주먹도끼는 양면 가공 ‘석기; bifaces‘다.)

 

최초의 석기는 약 250만년전 호모 하빌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료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시기가 더 올라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의 뇌를 최신 의료장비로 조사해 보니 돌을 솜씨 좋게 두드려 깰 때 작동하는 뇌의 특정 부위와 말을 할 때 작동하는 뇌 부위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0 페이지)

 

아름다운 좌우대칭의 주먹도끼가 예술본능 발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적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석기도 진화했다. 그리고 석기가 진화할 때마다 인류도 진화했다. 인류가 두 발로 일어섰을 때, 본격적인 사냥꾼이 되어 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때,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이 심해지던 때, 인지혁명이라는 지적 능력이 대폭발 했을 때 등이 인류 진화의 획기적 시기들이다.

 

인류가 석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지 100만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다. 현미경으로 석기 날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석기가 가죽을 벗기는 데 쓴 것인지 나무를 자르는 데 쓴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석기를 만들어서 사용해 보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써는 용도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정교한 대칭의 석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 중요하게 드러난다.(44 페이지)

 

2005년 포브스지가 선정, 발표한 인류 역사의 20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낚시 바늘이 있다. 인류 역사는 바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53 페이지) 귀가 있는 바늘로 꼼꼼하게 꿰맨 옷이 빙하기의 추위를 넘어서는 데 유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까지의 고고학 증거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바늘이 있었지만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55 페이지) 이 차이는 작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낳았다. 작은 것이지만 바늘 구멍을 뚫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냥을 통해 할 수 있게 된 육식과 석기는 불가분의 조합이다.

 

사냥으로 획득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함으로써 신체를 튼튼하게 할 수 있었고 두뇌도 커졌다. 석기 제작은 뇌를 자극해 뇌 발달을 촉진했다. 석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냥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전략 수립 및 역할분담을 통한 사회적 조직력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대부분 오른손 잡이인 이유는 석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교한 손동작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좌뇌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좌뇌의 운동조절기능의 영향을 받는 것은 오른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만이 있었던 시대에 인류가 사냥감에 불과한 미천한 생물이었다는 인식을 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 말한다.(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애석하지만 초기 고인류는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에 가까웠다.(98 페이지)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체질적 특징은 직립보행이다.(107 페이지) 직립보행의 가장 유력한 동기는 나무 위에 살던 인류의 조상이 열대우림이 사바나로 변하는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지만 걷는 과정은 간단한 기술이 아니다. 걷기는 매우 정교한 해부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과정이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두 발로 걷는 과정이지만 두 발에만 집중해서 보더라도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묘기를 부리는 복잡한 기계다.(111 페이지)

 

인류는 머리가 먼저 좋아지고 두 다리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두 다리로 일어서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머리도 커지고 좋아진 것이다.(113 페이지) 사람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3가지는 두발 걷기, 도구 제작 능력, 커다란 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두발 걷기다.(146 페이지)

 

저자는 구석기시대의 여러 사건들은 마치 드라마 줄거리를 연상하듯 상상하며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116 페이지) 평균적인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만일 날 음식을 먹는다면 매일 5kg의 양을 여섯 시간에 걸쳐 씹어야 한다고 한다.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만큼 중요하다. 구워 먹는다는 것은 인류 최초의 요리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119 페이지)

 

초기 고인류들은 하이에나, 독수리 등과 같이 맹수가 먹다 남긴 고기 찌꺼기나 부서진 뼈 속에 남아있던 골수를 빨아먹는 야생의 사체 청소부 역할을 하면서 서서히 동물성 단백질에 적응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126 페이지) 인류 진화과정을 아주 짧은 말로 요약하여 표현하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그리고 이 적응력을 무기로 지구의 구석구석에 퍼져 살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35 페이지)

 

호모 에르가스터는 아프리카를 벗어난 첫 인류다. 인간 가운데 가장 빠른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주파한 9초 58의 기록은 시속으로는 37.5km 정도다. 이 스피드는 치타는 물론 곰보다도 느린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공포의 사냥꾼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목표물을 정해 끈질기게 뒤쫓아가서 잡는 추격사냥의 비법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사냥을 해야 하는 사자나 치타와 같은 맹수들이 급격한 체온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그늘에 앉아 혀를 뽑아 물고 핵핵거리는 것으로 강제 쿨링을 시도할 때 인간은 털이 없는 온몸을 냉각판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체온관리가 가능했다. 경쟁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는 데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을 것이다.(138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 못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51 페이지) 그들의 뇌 용량은 현생 인류보다 100cc 정도 더 컸다. 지난 2010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섞여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주범인지 여부도 논란 거리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네안데르탈인이 약 3만년 전에 홀연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153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지구가족의 일원으로서 오랜 기간 함께 살았었다.(174 페이지) 데니소바인도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었다.(165 페이지) 즉 우리,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이 함께 했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직립보행 덕이다. 직립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똑바로 세워진 척추는 뇌는 물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강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187, 188 페이지)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자료만으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지만 약 50만년전을 전후로 후두의 위치가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188 페이지)

 

인간이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구강구조의 변화뿐 아니라 두뇌와 청각기관이 함께 발달했기 때문이다.(189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남은 것은 본격적인 예술활동의 차이에서 비롯된 창의력과 적응력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 말해지지만 최근 네안데르탈인이 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벽화가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216 페이지)

 

동굴벽화에서 원근법은 물론 반 고흐 그림에서 보이는 점묘화 기법도 관찰된다는 사실이 놀랍다.(220 페이지) 오래된 동굴벽화는 서양에서만 발견되어야 하는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는 발견들이 최근 들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22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은 계속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255, 25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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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 용어 호니토(hornito)란 용암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떨어져 굳은 바위덩어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수형암맥(樹形巖脈)이라고도 하고 용암기종(溶巖氣腫)이라고도 하고 애기 업은 돌(부아석; 負兒石)이라고도 한다. 제주 비양도에서 볼 수 있다. 피자를 굽는 스페인의 작은 화덕을 닮아 호니토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업은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 72 페이지)

 

이 분은 물에 반쯤 잠긴 호니토를 보니 해녀 엄마가 물 밖으로 나와 우는 아기를 업은 것 같았다고 하며 "비양도 역시 해녀의 섬이라 그 모습을 닮은 것일까"라는 말로 자신의 감성을 설명했다. 이 설명을 접하기 전에 나는 생강을 떠올렸다. 요즘 내가 생강의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뿌리 채소 가운데 울퉁불퉁하기로 치면 생강을 뛰어넘는 것이 있을까? 뿌리 채소라고 다 그렇지는 않은 것은 당근은 울퉁불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니토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용암 내의 가스 분출에 의해 화산쇄설물이 화도 주변에 급경사로 쌓인 소규모 화산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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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주변 고구려성을 찾아서
진종구 지음 / 어문학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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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북한 함경남도 덕원군 풍상면 두류산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이 강을 장악하는 것은 한강 진출의 교두보(橋頭堡) 및 북진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요새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에 백제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임진강 유역을 차지해야 했다. 고려가 통일을 이룩한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충돌이 없었기에 임진강은 군사안보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는 송도의 해상 세력들이 철원의 궁예의 태봉국에 합류할 때 배를 이용하여 예성강을 출발해 서해로 나왔다가 다시 한강 하구를 통해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12, 13 페이지)

 

저자는 피난 길에 오른 조선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의주까지 갔다가 환도(還都)하기 위해 다시 임진강에 도달했기에 신지강(神智江)으로 불렸던 강이 다시 나루터에 돌아왔다는 의미에서 임진강(臨津江)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말한다.(15, 16 페이지) 임진강 북안(北岸)의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은 고구려의 배후 거점성으로 중요도가 높았다.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인 한강 북안 아차산 주변에는 전초기지 보루들이 축성되어 한강 남안의 백제를 감시하거나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물론 아차산성도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가 빼앗아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단기간 넓은 영토를 점령했지만 주민들을 남쪽 변방까지 이주시키지 못해 노동력을 대거 확보할 수 없어 천혜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둘레가 기껏 300 ? 400미터 남짓한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34 페이지)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支流)이고 임진강은 한강의 지류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중앙의 돌출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만 장악한다면 서해에서 배를 이용하여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력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두산성을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은 관미성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41 페이지)

 

오두산성은 원천적으로 백제가 축성한 주력 거점성이었으나 후에 고구려와 신라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였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의 성을 어느 특정 국가의 성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오두산성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범할 당시 유용하게 사용되었기에 고구려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43 페이지)

 

덕진산성 앞에는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동쪽 임진강 상류 쪽에는 임진나루가 있으며 서쪽 하류 쪽에는 수내나루를 두고 있어 서울 방면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 방면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요 거점성이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임진강 주변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없었던 까닭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군이 쉽게 임진강을 건너 북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광해군이 보수, 개축하도록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국군 주력부대의 남하 루트였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 동남쪽의 돌출된 곳에 위치한 백제의 육계토성(六溪土城)까지의 직선 거리는 4km 정도였다. 호로고루는 대략 4세기 말경 토루(土壘)나 목책(木柵) 같은 초보적 형태의 방어시설로 구축되었다가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어 임진강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지배가 이뤄지게 된 5세기경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호로고루를 지배한 것은 4세기 말부터 나라가 망한 7세기 후반까지 250년 정도다.(60 페이지) 호로고루는 임진강 하류 가운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은 현무암 수직단애에 구축한 천혜의 요새다.(64, 65 페이지)

 

남안(南岸)의 호로고루라 불린 이잔미성은 호로고루와 대적하기 위해 구축한, 육계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성으로 추정된다. 칠중성은 호로고루와 육계토성을 잇는 평야지대와 임진강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감악산 서북쪽 줄기인 해발 149미터의 중성산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군은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등 임진강 북안의 성들을 거점으로 임진강을 건너 이잔미성과 육계토성을 거쳐 칠중성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인다.(79 페이지) 당포성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위치한 강안평지성이다. 당포성 뒤편 마전리 지역은 개성으로 가는 요로(要路)였다.(83 페이지) 당포성은 당개나루를 통제하는 교통 요지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성이 높았으나 삼국통일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잊혀졌던 성이다.

 

저자는 왕이 머무는 곳을 상(上)/ 북(北) 평양(平壤)이라 했고 왕이 순회하여 머물 수 있는 두 번째 도읍 정도를 하(下)/ 남(南) 평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89 페이지)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주장은 고구려의 통치영역을 한반도로 축소하는 잘못된 논리라는 것이다.(91, 92 페이지)

 

한탄강은 논과 밭이 펼쳐진 평원지대에 갑자기 밑으로 푹 꺼져 생긴 수직절벽의 아래를 흐르는 강이다.(107 페이지) 직탕폭포는 원래 직탄(直灘)폭포였으나 발음 편의상 직탕폭포로 불리고 있다.(117 페이지) 연천군의 재인폭포는 주상절리 폭포로 원래는 한탄강에 바짝 붙어 있었으나 두부침식(頭部浸蝕)으로 수십만년 동안 약 400여 미터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용암 분출시 온도는 1,000-1,200도씨이며 온도가 600-700도씨에서는 용암이 굳어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다. 산성 용암일수록 온도가 낮고 점성이 높아 멀리 가지 못한다. 알칼리성일수록 온도가 높고 점성이 적어 멀리 흘러간다.(121 페이지) 좌상바위는 응회암이다.(응회암은 연한 녹색이라 한다.)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생긴 주상절리 절벽에 은대리성이 자리한다.(144 페이지) 대전리산성은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대격전을 치른 매초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한탄강과 신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강안절벽에 구축된 성이다.

 

반월산성은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 5-1 청성산 일대 7-9부 능선에 반달 모양의 타원으로 축조된 테뫼식(’산정식; 山頂式‘) 산성이다.(157 페이지) 일반적으로 고구려성들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에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구려군은 임진강 및 한탄강 북안에 위치한 거점성을 출발하여 주요 하천을 타고 천보산맥 일대의 중간기지 보루에 도착, 다시 중랑천을 타고 한강 북쪽 전초기지 보루에 이르렀다.(1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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