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감성 여행 2 경제성장기 - 미래유산에 담긴 서울을 만나다 서울 감성 여행 2
민현석 지음 / 서울연구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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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석의 ‘서울 감성 여행 2’는 경제성장기를 주제로 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미래유산에 담긴 서울을 만나다‘이다. 미래유산은 2012년 도입된 제도다. 지난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유지하고 지켜 다음 세대에 넘겨주자는 의도로 만든 제도다. 책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여섯 번째 이야기까지로 구성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박완서(朴婉緖; 1931 - 2011) 작가의 ’나목‘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네 번째 이야기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귀로‘를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다섯 번째 이야기는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여섯 번째 이야기는 손창섭 작가의 ’길‘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박수근(朴壽根; 1914 - 1965) 화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나목‘에는 명동성당이 주된 무대로 나온다. ’나목(裸木)‘에는 동화백화점도 나온다. 여주인공 이경(李炅)이 근무하던 공간이다. 중구 소공로 63에 신세계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자리는 원래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의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던 곳이다.

 

이 백화점은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개칭되었었고 한국전쟁 이후 1955년까지 미군 PX로 사용되었고 1963년 삼성이 동화백화점을 사들이면서 신세계백화점이 되었다. ’나목‘의 주요 무대 중 명동 화교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명동에 중국인이 정착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다.

 

명동성당은 명동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주요 건축물이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은 종현(鍾峴)이라 불렸던 언덕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예배장소(명례방 공동체)로 사용된 김범우(金範禹; 1751 - 1787)의 집이 있던 장악원(掌樂院) 바로 옆이었다.(현재 장악원은 표지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위치는 외환은행 옆이다.)

 

김범우는 역관(譯官) 가문 출신이었다. ’나목‘에서 명동성당은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과 증오, 분노와 광기 속에서 방황하는 이경에게 삶의 위로를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64 페이지) 영락교회는 평북 정주(定州) 출신의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건물이다. 박동진은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취업하여 보성전문학교 본관, 조선일보 사옥, 아서원, 중앙중학교 등을 설계했다.

 

옛 수도극장터도 ’나목‘에 등장하는 주요 지점이다. 박완서는 이경과 태수(PX에서 일하는 전기공)의 데이트 공간으로 수도극장을 설정했다. 본문에 의하면 이만희(李晩熙; 1931~1975) 감독의 ’귀향‘은 억압된 욕망으로 갈등하는 한 여성의 일탈 여행을 그린 영화다. 중구 세종대로 110에 위치한 서울도서관은 옛 경성부청으로 1926년 10월 완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설계는 이와이 쵸사부로(岩井長三郞)와 사사 케이이치(笹慶一)가 담당했다.(103 페이지)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서울도서관이 된 것은 2012년 10월 26일이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정문은 인화문(仁和門)이었으나 궁의 남쪽에 자리하고 주변 길도 협소하고 물길도 있어 대한문이 정문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대안문(大安門)으로 했으나 1904년 경운궁(경운궁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순종 즉위 이후다.) 대화재 이후 수리를 거쳐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14 페이지) 대한문은 세종대로 확장 공사로 도로 위에 섬처럼 고립되었었다. 대한문이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된 것은 1971년 1월이다.

 

중구 서소문로 89 - 11에 평안교회가 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평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부산 보수산 중턱에 교회를 설립했고 1953년 상경해 중구 충무로 3가에 평양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1956년 서문교회와 통합하면서 교회 이름을 평안교회로 바꾸었다. 1964년 중구 순화동 6 - 9번지를 매입하고 1967년 9월 지상 6층, 지하 1층, 연면적 2,950 제곱미터의 예배당을 지었다.

 

중구 순화동과 중림동을 잇는 서소문 고가차도는 경의선 철도 통과로 생긴 교통 혼잡을 완화할 목적으로 1966년 6월 25일 준공된 도로시설물이다. 서소문 고가차도가 놓인 서소문로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한반도의 서북 지역으로 가는 길목으로 1921년 경의선 노선이 개편되면서 경의선 철도와 교차하게 되었다.(124 페이지)

 

이만희 감독의 ’귀로‘에서 서소문 고가차도는 소설가의 아내 지연이 걷던 길이다. 서소문 공원은 조선시대 서소문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공원이다. 공원 일대는 중죄인을 다스리는 참수형의 형장이 되었던 곳이다. 서소문은 원래 이름이 소덕문(昭德門)이었고 영조 20년인 1744년 홍예문 위에 문루를 지으며 소의문(昭義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광희문과 소의문은 도성 안의 시체가 반출돼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경향신문 기사 ‘서소문의 성스러운 공간’ 참고) 서소문은 서울에서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의 시발점인 동시에 한강 포구에 모인 삼남 지방의 물류가 만초천(蔓草川)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일대에는 문외미전(門外米廛), 문외상전(門外商廛), 생선난전(生鮮亂廛), 외어물전(外魚物廛) 등의 난전이 들어섰다.(139 페이지) 조선시대 서소문 일대는 중죄인의 참형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로 가톨릭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대표적이다.(1801년..김범우 처형; 1787년)

 

그러던 조선에 가톨릭 포교가 사실상 허용된 것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다. 약현성당(藥峴聖堂)은 서소문 일대에서 처형된 가톨릭 신자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조선 후기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였던 서소문 일대는 새로운 교통 수단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다르게 변모했다. 유유히 흐르던 만초천 대신 철로가 놓였고 그 위로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145 페이지)

 

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벽돌로 지은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다.(147 페이지) 약현은 과거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염천교 구두거리는 1925년 서울역 건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제는 만초천을 정비하고 기존의 남대문 정거장 남쪽에 스위스의 루체른역을 닮은 서울역을 신축했다. 이후 서울역 주변에 물류 창고가 건설되면서 칠패시장의 길목이었던 염천교를 중심으로 구두거리가 형성되었다.(155, 158 페이지)

 

서울역과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 사이를 연결하는 서울역 앞 지하보도는 중구 봉래동 2가 한강대로에 위치한 도로시설물이다. 서울 중구 퇴계로 6에 위치한 남대문교회는 1955년 기공하여 1969년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전신이다.(169 페이지)

 

서울역사(驛舍) 맞은편 중구 통일로 10에는 24층 높이의 연세재단의 세브란스빌딩이 있다. 1904년 문을 연 세브란스병원이 있던 자리다. 세브란스는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한 초기 이민자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생인 록펠러가 설립한 정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의 재무회계 담당자로 활약한 사업가였다.(194 페이지)

 

세브란스빌딩 앞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구 세종대로 40에 위치한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이다.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한양공고 앞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약 3킬로미터 길이의 6차선 도로이다. 조선시대에는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었다.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구리개 혹은 동현(銅峴)이라 하였다.(211 페이지)

 

을지로에는 조선시대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인 혜민서(惠民署)를 중심으로 약종상(藥種商)상이 모여 있었다. 서울에 처음으로 전기가 도입된 것은 1887년으로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경복궁 궐내 건청궁과 장안당과 곤녕합 주변을 밝혔다.(221 페이지) 1930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서울시 마포구 당인동에 건설되었다.(224 페이지)

 

샬롱 드 마샬은 중구 명동 10길 15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국내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용실 가운데 하나다.(228 페이지) 동대문종합시장이 자리한 종로구 종로 266 일대는 과거 동대문 전차 차고지가 있던 곳이다.(235 페이지) 서울의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으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던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238, 239 페이지)

 

전차가 사라지고 서울시는 동대문 일대를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교통 허브로 개발하기 위하여 1969년 동대문 전차 차고지에 동대문 시외 버스 터미널을 건설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동야 최대 규모의 단일 시장인 동대문종합시장을 개장했다.(241 페이지)

 

여섯 번째 이야기는 손창섭의 ‘길’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 성공을 찾아 떠난 성칠의 서울살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회현동(會賢洞)은 퇴계로(退溪路) 남쪽에서 남산3호터널에 이르는 면적 0.84제곱킬로미터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남부 호현방에 속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아사히마치(旭町)로 불리다가 해방 이후 다시 회현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회현이라는 이름은 어진 사람이 많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가문 대대로 열두 명의 정승을 배출한 정광필(鄭光弼)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270, 271 페이지)

 

조선시대에는 회현동의 맞은편 남산동 일대의 넓은 지역을 남산골이라 불렀다. 이곳에 청렴한 관원들이나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아 남산골샌님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274 페이지) 1969년 발표된 손창섭의 ‘길’에서 출세와 성공의 꿈을 안고 상경한 열여섯 살 소년 성칠이 처음 일자리를 얻어 정착한 곳도 서울역에서 가까운 회현동의 값싼 여관이었다.(275 페이지)

 

회현동은 도심 재개발 열풍이 불었던 1980년- 1990년대 내내 명동과 남대문, 서울역 사이에서 특유의 불안정한 입지를 유지했다. 1962년 5월 12일 개통된 남산 케이블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객용 가공삭도(架空索道)다. 가공삭도는 공중에 설치한 강철선에 운반차를 매달아 사람을 나르는 장치다.

 

남산 팔각정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정자다. 팔각정 자리에는 본래 조선시대 태조에 의해 지어진 국사당이란 신당이 있었다. 기우제나 기청제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중요한 신당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은 1925년 일제에 의해 인왕산으로 이전되었다.

 

남산도서관은 용산구 소월로 109에 자리한 서울시 교육청 관할의 공공도서관이다. 남산도서관의 전신은 중구 명동 2가 25번지에 있었던 옛 한성병원을 개수하여 개관한 근대식 공립도서관인 경성부립도서관이다. 중구 소파로 46에 위치한 지상 18층, 지하 1층 규모의 교육청 과학전시관 남산분관은 어린이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297 페이지)

 

어린이회관은 1923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이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복지시설이다. 1974년 12월 어린이회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되었다. 중구와 용산구의 11개 동에 걸쳐 있는 높이 262미터의 남산은 목멱산(木覓山), 종남산(終南山),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미뫼 등으로 불렸다.

 

1968년 9월 2일 새롭게 자연공원으로 개원한 남산의 모습은 소설 ‘길’에도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취지에 따라 백범 동상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섰다.(318 페이지) 도쿄역을 모방해 지었다는 가설과는 달리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7월, 서울 시민이 기증한 경성역 준공도면을 공개하면서 경성역이 1856년에 완공된 스위스 루체른역을 모방해 건설한 건물이라고 밝혔다.(324 페이지)

 

코스 구상을 위해 읽게 된 ‘서울감성여행 2’는 문학작품 또는 영화와 연계된 부분을 매끄럽게 연결지어 설명한 책이다. 책에서 소개된 코스를 직접 걸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소스를 취해 설명도 다르게 할 부분도 있다. 문학 작품도 직접 읽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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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소형(陸紹珩)이란 인물은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란 책을 쓴 '명(明)나라 말(만명; 晩明)의 지식인이다. 이름의 첫 글자인 소(紹)는 소개하다 외에 끈의 의미도 있고 두 번째 글자인 형(珩)은 노리개, 패옥, 갓끈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문 기사는 제목에서는 珩을 연이라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형이라 했다. 생소한 글자이기 때문이었으리라. 珩을 연이라 한 것은 아마도 衍과 혼동한 탓이었으리라. 취고당이란 당호도 인상적이다.

 

검소(劍掃)는 칼로 없앤다는 뜻이겠는데 삿된 욕망이나 망상을 없애겠다는 의도의 산물인 듯 하다. 형(珩) 즉 패옥(佩玉)에서 패는 옆에 찬다는 의미다. 패검(佩劍)은 칼을 차는 것을 의미한다. 육소형이 실제로 칼을 찼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칼을 찬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이 생각난다. 조식은 이런 시를 썼다. "40년 동안 더럽혀져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버린다/ 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어떻든 검소(劍掃)라는 말은 흥미롭다. 덕분에 남명 조식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남명의 무인적(武人的) 기질과 법가적(法家的) 요소는 그 단처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건전한 균형을 잡아줄 수 있었던 귀한 자산이었다."(한형조 지음 '조선유학의 거장들' 150 페이지) 문숭(文崇)의 나라에서 무인적이었던 조식은 곽재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의병을 이끌고 왜적(倭敵)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더욱 빛났다. 20세의 나이로 조광조의 급진 개혁이 좌절된 답답한 시대를 살게 되었던 남명 조식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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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척사(彛阮尺辭)는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친구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낸 짧은 편지 13편을 필사한 책이다. 척사(尺辭)와 척독(尺牘)은 짧은 편지를 이르는 말이다. 조용미 시인의 ‘봄의 묵서’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連篇累牘)만 더합니다...” 연편누독은 쓸데 없이 길게 늘여쓴 문장을 이른다. 늘 궁금한 것은 이재의 세한도와 완당의 세한도 가운데 어떤 작품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가 먼저 그려졌는지, 권돈인이 먼저 그렸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인저리 타임 수록 시인 조해운의 글)고 하는 기사도 있다. 안동 권씨 화천군파 사이트에 가니 이재 권돈인 할아버지의 세한도가 완당의 세한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글이 있다. 물론 갈필(渴筆) 대 윤필(潤筆)의 차이, 소나무, 측백나무 대 소나무, 대나무의 차이, 유배 대 유배의 차이가 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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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 서연문답
김도환 지음 / 책세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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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가 된 김도환이 영조 50년 이후 9개월간(1774 - 1775)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 8품직인 시직(侍直)을 맡았던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서연(書筵) 대화집인 ‘계방일기(桂坊日記)’에 근거를 두고 관련 사료들을 참고해 지은 책이다.

 

서연은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이고 계방(桂坊)은 세자를 호위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홍대용은 세자익위사가 호위직에서 서연에 드나드는 직으로 바뀜에 따라 (후에 정조가 되는) 세손인 이산(李蒜)과 만나게 되었다.

 

정조와 홍대용이 서연을 통해 만난 1774년은 정조의 즉위 2년전으로 이때 정조는 23세였고 홍대용은 44세였다.(홍대용은 세손에게는 아버지 사도세자보다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홍대용; 1731년 생, 사도세자; 1735년생) 홍대용은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의미의 유춘오(留春塢)라는 별장의 주인공이었다.

 

이 별장에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이 달렸다. 사실 홍대용은 수학자였고 지구 자전설을 신봉한 과학자였으며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예인이었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홍대용은 실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과거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북학파의 인사였다.

 

홍대용이 관직에 오른 것은 시직이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 덕으로 오르는 관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홍대용 혼자 서연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서열에 따라 홍대용은 한정유, 신재선 다음에 자리했다. 서연 시간은 둘로 나뉘었다. 경전 순서대로 읽는 법강(法講)과 간략하게 읽는 소대(召對)였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을 보면 큰 줄기를 보고 그것의 실천을 중시했다.“(35 페이지) 홍대용은 세손이 오히려 질문을 하자 난감해 한다. 홍대용은 배우는 자의 병통 중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손은 비록 그렇다 해도 초학(初學)도 명백하게 자신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옳지 않다고 말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라 말한다.

 

서연은 중국의 고전들을 가지고 논하는 자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정치 사례들이 논의되었다. 물론 각자 처한 입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홍대용은 세손에게 적대적인 외증조부 홍인한(세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 작은 아버지)이 우의정이 되자 긴장한다.

 

정조와 홍대용은 맹자의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 상대방이 잘못이 있을 경우 그를 거절하고 만나주지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부분에 공감한다.(屑; 달갑게 여기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에 걸맞게 홍대용은 진심으로 세손의 학문을 걱정했다.

 

세손이 ‘중용’이 말한 한 글 자 한 글자의 뜻에 너무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분류하는 폐단에 빠질까 봐 걱정했다.(65 페이지) 홍대용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되 다른 이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른 이가 스스로 부끄러워서 견해를 고친다면 그것이 곧 불설지교가 되는 것이고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각자 제 소견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66 페이지)

 

홍대용은 확실히 박식한 사람이지만 정치가보다 학자의 풍모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83 페이지) 홍대용도 주자 성리학자였다. 그는 격물치지가 없다는 이유에서 양명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홍대용은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 정심을 말했고 곧 등극할 처지의 세손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치국, 평천하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손은 주자(朱子)주의자 송시열 이야기를 꺼냈다. 이호(李淏)가 죽은 뒤 남송의 효종과 같은 묘호를 갖게 한 사람이고, 주자의 탄생지 우계(尤溪)를 모방해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송시열이다. 세손은 궁궐(창경궁)에서 태어나고 궁궐에서 자라 바깥 세상 이야기가 재미 있었던 것 같다.

 

송시열은 주자 계승의 명분을 장악한 한편 임진전쟁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게 해 명나라에 대한 의리, 북벌과 복수설치라는 명분도 수중에 넣었다. 이에 숙종도 대보단을 설치했다.

 

세손은 십년 동안 행해보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을 닫고 약속도 끊어버림이 가할 것이라는 송시열의 말을 빈말이라 했고 홍대용은 빈말이 아니라 답했다.(106, 107 페이지) 저자는 세손의 ‘빈말’ 운운을 외척 세력 제거의 명분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보았다. 그리고 홍대용이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정조 시대를 다룬 책이기에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홍국영과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등 풍산 홍씨 가문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이 전하는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조가 세손에게 어떤 책을 읽냐고 물었다. 세손이 ‘통감강목’ 4권이라고 답하자 영조가 안색이 변해 보던 책을 당장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세손이 읽고 있다고 답한 ‘통감강목’ 4권에는 측실(側室) 소생인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이야기가 나온다. 영조가 안색이 변해 호통을 친 것은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받아 세손의 처소로 간 사람이 해당 책을 내놓으라고 하자 영민한 홍국영이 어떻게 알았는지 문제의 부분을 종이로 가리고 건넸다. 이에 영조는 과연 내 손자라고 하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세손은 홍국영에게 감사해 그대가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세손이 소대(召對)에서 통감강목을 다 읽은 것은 계사년(1773년) 8월 27일이고 홍국영이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들어간 것은 그해 12월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종이로 가리고 있었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니 그것을 보고 임금이 기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손이 홍국영에게 범궐(犯闕)의 죄가 아닌 이상 용서하겠다고 한 것도 의아하다는 것이다. 나는 홍국영이 아무리 영민해도 어떤 연유로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아차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처리했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홍대용은 논어 한 구절을 상고할 일이 있는데 어느 부분인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정조에게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 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 말한다.

 

나는 상고할 구절이 있다는 말에 저술 운운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 홍대용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경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에서 세손은 황제인 유비의 입장을, 홍국영은 신하인 제갈량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그런데 유비가 제갈량에게 ”만약 내 아들이 도와줄 만하면 도와주되 재주가 아닌 것 같으면 그대가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말한 것을 보면 사정은 남다르다. 저자의 말대로 ”유비 같은 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고 제갈량 같은 충신이 아니면 들을 수도 없고 효과도 없는 말“(131 페이지)이 아닐 수 없다.

 

세손이 상고하려 한 책은 ‘논어’ 자한편이다. 세손이 손여(巽與)가 무슨 의미냐고 묻자 홍대용은 부드럽고 순하다는 의미로 군신(君臣)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납약자유(納約自)가 손여와 같은 것이라 답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알기 쉬운 것(임금이 밝게 알고 있는 것)’부터 설명하여 차츰 깨닫도록 하는 것이 손여라고 답한 것이다.

 

세손이 그러면 손우여지(遜于汝志)의 손(遜)과 뜻이 다른가? 묻자 홍대용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것이라 말한다. 납약자유는 29번째 괘인 중수감(重水坎)괘에 나오는 구절이다. 앞서 세손이 책을 상고할 일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강연(講筵)에서 오고 간 좋은 이야기를 초기(抄記; 초록; 抄錄; 가려 뽑아 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세손이 척리(戚里)를 배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고 하며 청풍 김씨 김석주(金錫胄; 1634 - 1684)를 거론했다. ”숙종 때의 여러 환국(換局)에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지만 남인을 끌어들여 서인을 칠 때에도, 서인을 끌어들여 남인을 칠 때에도 막후에서 움직인 것은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김석주였다.

 

그는 이미 80세가 넘어 그냥 두어도 얼마 못 살 송시열에게 굳이 사약을 내리게 하여 그 자신이 서인이면서도 남인 정권을 세우게 하였고, 별로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역모를 꾸며 남인을 일망타진하고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우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로부터 서인과 남인은 서로 살부지수(殺父之讐)가 되어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데에도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157 페이지)

 

저자는 홍계희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논한다. 나경언이 내시가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한다는 말을 해 임금의 친국을 받았을 때의 일은 석연치 않기가 그지 없다. 나경언이 내시 이야기가 아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몸수색 한번 하지 않은 잘못이 지적된 것이다.(162 페이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공공연하게 처리해 자존심 강한 임금이 적당히 넘어가지 않게 한 것이다.

 

세손은 한고조 유방(劉邦)을 중국 역대 임금 중 최고로 여겼다. 학문과 사대부의 풍모만 더한다면 이상적 군주인 요순에 필적하리라 생각했다. 한고조는 단점도 많았지만 너그러웠고 신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줄 알았다.(174 페이지) 한고조가 보인 이런 면모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세손은 머리가 좋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어서 모든 일에 간섭하려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실 세손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수많은 백성을 골고루 비춰주는 밝은 달을 자처한 것이다. 또한 군사(君師)를 지향했다.

 

홍대용이 이와 기가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이요, 본디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자 세손은 그 말이 매우 좋다고, 그렇게 보아야 폐단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홍대용은 그것은 자신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라 주자의 것이라 답한다.(181, 182 페이지) 군사(君師)란 다스리는 자이면서 스승이라는 의미로 당위적 차원의 말이다.

 

세종과 정조 정도가 그에 맞는 역할을 했다. 다른 임금들은 능력면에서 모자라기도 했지만 중기 이후 양반 사대부 계층이 성리학 연구를 주도한 때문이기도 하다. 홍대용은 절문근사(切問近思)를 강조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가까운 곳부터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손은 홍대용이 청나라 사정에 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세손의 질문(북경에 가보았는가? 무슨 일로 갔는가?)에 홍대용은 승지를 지낸 숙부 홍억이 십 년 전인 을유년(영조 41년; 1765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이 되었기에 자제비장으로 동행했다고 답했다. 홍대용은 유리창(琉璃廠) 이야기도 한다.

 

원, 명 시대에 자금성을 지을 때 소용된 유리기와 공장이었다가 자금성이 다 지어진 후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골동품과 책방 거리로 변신한 곳이다. 세손은 북경에 대해 일일이 물을 수 없어 일기를 썼는가, 물었고 홍대용은 기록하지 못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사실 홍대용이 쓴 연행록은 3대 연행록의 하나였다. 홍대용은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했다.

 

세계에 안과 밖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홍대용을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홍대용을 지탄했다. 양반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홍대용은 그래서 연행 일기를 드러내놓을 수 없었다.

 

세손의 질문이 두서 없어 홍대용은 토막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안에서나마 개혁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세손은 자신은 잘못이 있을 때마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다만 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생각이 부단히 일어나 고민스럽다고 말했다.(216 페이지)

 

홍대용은 허물을 이미 고친 다음에는 자연 마음이 후련해지는 법인데 어찌하여 가슴 속에 남겨두고 뉘우칠 것이 있습니까?란 말을 한다. 세손은 도무지 무엇 하나 대충 알고 마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이야 모르겠지만 아는 것은 누구나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손의 물음이 홍대용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222 페이지)

 

세손은 청나라에 빗대어 인사 문제며 궁방전 문제를 이야기했으나 실은 외척 세력을 줄일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225 페이지) 세손은 식체(食滯) 때문에 다주(茶珠)를 먹으며 서연을 행했다. 결국 그 때문에 차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세손은 북경에서는 어떤 차를 최고로 여기는가 물었다. 그러자 홍대용은 보이차를 최고로 친다고 답했다.(226 페이지) 세손은 자기는 원래 체증(滯症)이 없었는데 어릴 때 체증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래 부럽게 여겨 트림하면서 따라 했더니 최근에 실지로 체증이 생겨 아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홍대용은 체증은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겪는 증세이며 독서에 가장 방해가 되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226, 227 페이지)

 

홍대용이 격물치지, 실심, 실학 등의 말을 아뢰었으나 세손은 그보다는 그의 학문적 배경이나 박학다식함에만 주목했다.(229, 230 페이지) 세손은 이단의 학문이라도 반드시 그 까닭을 밝힌 연후에 배척하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대용은 세손의 논리는 옳은 듯 하지만 그것이 더욱 강한 압력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은 생각이 다르면 그저 내버려둘 뿐이었다.(234 페이지) 세손이 홍대용에게 과거를 그만 두었냐 물으니 홍대용은 그만 둔 지 4, 5년 되었다며 재주와 지식이 부족하고 더욱이 정문(程文; 과거 시험에 쓰이는 문장 형식)은 익히지도 못하였으니 기꺼이 스스로 그만둔 것이지 달리 고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답한다.(239 페이지)

 

세손은 "세손은 노론, 소론, 남인, 병판, 이판 등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홍인한을 제거할 생각을 한다. 홍인한은 삭탈관직된다. 사도세자가 죽자 임금은 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있은 지 3개월만에 임금이 승하했다.

 

세손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여동생을 임금(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뒤 원빈(元嬪)이라 하게 한 홍국영은 원빈이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준의 이름을 이담으로, 작호를 완풍군(完?君)으로 고치게 하고는 죽은 원빈의 아들로 삼으려 했다. 완이라는 글자는 완산(完山)이니 임금의 고향인 전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자식이 없자 완풍군으로 하여금 임금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도였다. 임금이 28세 밖에 되지 않았으니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렇게 했으니 역적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행위였다.(268 페이지) 홍국영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임금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관료들은 홍국영을 구원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이 후에 복귀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홍국영이 복귀할 경우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269 페이지) 홍대용은 아까운 나이인 53세에 중풍으로 쓰러졌다.(273 페이지) 정조의 급선무는 행검(行檢; 점잖고 바른 몸가짐)을 닦는 일이었다. 붕당간의 다툼은 붕당간의 의리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다툼을 없애려면 보편타당한 의리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280 페이지)

 

홍대용의 진가는 공평하게 보고 아울러 받아들임(‘공관병수; 公觀倂受’)와 큰 도로 함께 돌아감(‘동귀대도; 同歸大道’)에 있었다. 홍대용은 전인적 인격 수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준 높은 논쟁에 몰입하거나 과거 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시대상과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 후기를 통틀어 유학 본연의 전인적 학문, 실천적 학문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단연 홍대용이었다.(2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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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썩 좋은 제목은 아니다. 약간의 자기 고집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서연(書筵)에서 정조와 홍대용은 아주 사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정조가 식체(食滯) 때문에 다주(茶珠)라는 씹는 차를 먹으며 서연에 임하다가 무안했던지 북경에서는 어떤 차를 최고로 여기는가, 란 질문을 던졌다.

 

이에 홍대용이 보이차라 답하며 체증은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겪는 증세이며 독서에 가장 방해가 되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세손은 어릴 적 체증 있는 사람이 부러워 트림을 하며 따라했더니 최근에 실지로 체증이 생겨 아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기록을 보니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2018년 9월 이후 2년 4개월만에 다시 읽는 책이다. 두번씩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주역을 모르지 않았지만 납약자유란 말을 별 생각 없이 넘겼었기에 재독하는 것이다. 삼독할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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