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김선희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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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에서 말하는 서학은 철학 및 자연과학, 그리고 종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서양 지식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동서양의 지적 조우는 예수회의 중국 진출에 따른 결과다. 예수회는 1534년 스페인 출신의 퇴역 군인 이냐시오(1491 - 1556. 스페인)가 파리대학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결성한 가톨릭 수도회를 말한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들과 다른 점을 보였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고 이교도들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교황의 명령에 따라 미지의 동양 세계로 선교를 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마테오 리치(1552 - 1610. 이탈리아), 아담 샬(1591 - 1666..독일) 등의 친숙한 인물이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번역본으로 서학을 접했다.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중국어를 배운 뒤 중국 경전을 활용해 서양 지식을 번역한 예수회 회원들의 서학서를 통해 서구 지식을 접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실학자들이 반드시 개혁적이거나 반성리학적 혹은 탈주자학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조선 유학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했다고 알려진 정약용은 성리학의 토대인 이기론의 이론적 함의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지 주희의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고 성리학의 핵심 주제들과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20 페이지) 


다산(茶山) 실학을 성리학과의 단절과 대치로 파악하는 시각을 부정한 한형조 교수(1996년 8월 8일 시사저널 수록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펴낸 한형조 교수’)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종교와 철학, 자연학과 수학, 심지어 음악과 미술 등의 다양한 영역이 뒤섞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학술 세계, 서학 앞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학(儒學)으로 서학의 세부들을 평가해 수용하든 배척했다.(22 페이지) 당시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수용한 사례도 있지만 그조차도 유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하기 어렵다.(25 페이지) 


15세기 말 인도 항로가 개척되면서 열린 대항해 시대에 따라 포르투갈의 주앙 3세는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의 거점이었던 인도 남부에 동행할 선교사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마테오 리치는 만학도였던 이냐시오가 세운 예수회 대학 출신의 인재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전통의 유학과 신유학을 스콜라 철학, 스토아 철학 등으로 설명했고 기하학, 수학, 천문학 등을 소개했고 지도, 악기, 자명종 등 발달한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아담 샬은 중국에서 뛰어난 천문학자로 활약했다. 아담 샬을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 신학, 철학, 자연학을 일방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한 학습과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 학문을 중국 지식 체계와 결합하고 절충했다.(39 페이지) 하지만 다른 수도회에서 예수회의 이런 방식을 비판하자 교황청은 예수회의 전교(傳敎) 방식을 공식 금지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도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했고 교황청은 제사를 금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황청의 제사 금지 정책을 따르다가 당국에 적발되어 참형을 당했다.(40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의 저자로 유명한 분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전임자인 루지에리가 쓴 천주실록의 한계와 문제 때문이었다.(43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Deus라는 기독교 신을 중국어 천주로 번역한 뒤 이를 중국 경전에 등장하는 지고존재인 상제(上帝)라 규정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상제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면 기독교의 신을 유일한 신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6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성리학이 고대 유학의 유신론적 전통을 끊고 사람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공격했다. 마테오 리치가 꺼내든 상제라는 개념은 예수회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신이 사제라는 개념으로 고착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제는 결국 천주로 대체되었다. 


아담 샬은 시헌력의 토대가 된 서양 역법서 ‘숭정역서’를 편찬했고 천문 관측과 역법 제정을 주관하는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활약했다.(38 페이지) 역법(曆法; Calendar)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을 말한다. 중국에서 서양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학적 지식들이 가장 활발하게 번역되던 시기는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재위; 1661 - 1722)가 청을 통치하던 17세기였다.(65 페이지) 


참고로 조선 영조와 정조, 청나라 강희제(순치제의 셋째 아들)와 옹정제(강희제의 넷째 아들)와 건륭제(옹정제의 넷째 아들), 프랑스 루이 14세 등을 하나의 틀로 보는 시각도 있음에 유의하자. 조선에서는 18세기인 영조, 정조 때 성공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18세기 말부터 개혁에 실패하고, 19세기에는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청나라의 훌륭한 황제들이었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재위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건륭제 말기부터 사회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18세기 말인 1796년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고 19세기부터 청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도 18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18세기 말부터 혼란에 빠졌다.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가 활동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루이 15세가 루이 14세의 치적을 물려받으며 유럽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루이 16세가 통치한 18세기 말에는 혼란이 발생하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이후 유럽에서는 끊임없이 혁명이 일어났다. 


지구 온도가 주요 변수다. 지구 온도는 16세기 말부터 크게 상승하기 시작해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고 18세기 말에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수확량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기온이 올라 따뜻해지면 수확량이 늘고 추워지면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량은 떨어진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는 세계사’ 참고) 


강희제의 서학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서학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강렬한 반대였다.(65 페이지) 양광선이란 사람이 아담 샬의 시헌력을 가장 집요하게 반대했다. 서양 역법과 선교사들을 신뢰했던 순치제가 사망하고 일곱 살의 강희제가 즉위해 만주족 출신 신하들의 섭정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오배(鰲拜)가 양광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아담 샬, 페르비스트(1623 - 1688. 벨기에) 등 흠천감을 주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투옥되어 고문 받았고 중국인 조력자들은 사형당했다.(70이 넘은 아담 샬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 해 사망했다.) 


강희제가 오배의 섭정에서 벗어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희제는 페르비스트와 양광선에게 각각 책력을 만들어 대결하게 했다. 양광선이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반면 페르비스트의 예측은 정확했다. 양광선은 투옥되었고 페르비스트는 흠천감의 책임자가 되었다.(66 페이지) 예수회와 조선의 첫 만남은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인 정두원(鄭斗源)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담 샬이 조선 국왕에게 천리경, 자명종, 화포, 화약 등의 서양 문물과 천문 관련 서학서, 지도 등을 선물한 것이다. 


소현세자(1612 - 1645)도 아담 샬을 만났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였다. 소현세자는 9년의 볼모 생활을 했고 귀국 2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칠극(七克)이란 책이 있다. 마테오 리치와 함께 활약했던 디에고 데 판토하가 쓴 윤리서이다.(칠극이란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 등 기독교에서 모든 죄의 뿌리로 여기는 일곱 가지 죄를 말한다.) 이익, 이벽, 정약용 ,윤지충 등이 이 책을 읽었다. 이익은 이 책의 핵심을 유교의 수양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서학을 이념이나 사변적 원리로서가 아닌 실질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다만 이익은 천주교를 황당무계한 종교로 보았다.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등을 저술한 김담(金淡; 1416 - 1464)이 주도한 세종시대의 조선 과학(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사대부 출신 신하들의 권력이 국왕을 능가하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되면서 붕당정치 속에서 권력 투쟁이 심화됨으로써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계승하지 못했다. 


다행히 영, 정조 시대에 부흥의 노력이 기울어졌다. 서학중원설(西學中原說)이란 것이 있다. 서학의 기원이 본래 중국에 있었다는 설이다. 조선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서명응, 홍양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조의 스승 서명응(서유구의 할아버지)은 자신의 지적 자산을 모두 동원해 서양 천문학적 지식들이 중국 전통의 천문 역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92 페이지) 조선 지식인들은 비교적 거부감 없이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였다. 서양인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 없이 책이라는 중립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학술을 수용했기 때문이다.(94 페이지) 


남인 계열의 학술적 경향 안에서 성호 이익은 평생 퇴계를 학문과 삶의 지향으로 삼아 존숭(尊崇)했다. 부친의 유배지에서 태어나 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 이잠(李潛)이 장살(杖殺) 당하는 비극을 겪은 남인(南人) 이익은 평생 이황을 존숭(尊崇)했지만 이황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서학을 연구했다. 이익은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서 귀신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점이 문제일뿐 서양 선비들의 학문 전체를 폐기할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익은 천주, 천당지옥설 등 현실 세계를 초과하는 종교적 측면들을 제외한다면 서학을 학술적 차원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103 페이지) 이익에게 기술 진보와 활용이 중요했을 뿐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단(異端)의 글이라도 옳으면 취할 뿐이라 말했다. 그는 유학과는 다르지만 마테오 리치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 


성호는 조선에서 도통의 중심인 퇴계를 평생 흠모하며 퇴계의 철학과 삶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퇴계를 떠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부의 지적 자원을 활용해 유학을 넓히고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106 페이지) 이익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뇌주설(腦主說) 즉 뇌가 기억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학설을 받아들였다. 이익은 인간의 마음 즉 인식과 감정 같은 정신적 작용을 리(理)나 성(性)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성리학과 다른 경로를 밟았다.(108, 109 페이지) 


이익은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세 가지 영혼(식물의 혼인 ’생혼; 生魂’, 동물의 혼인 ‘각혼; 覺魂‘, 인간의 혼인 ’영혼; 靈魂’)을 생장, 지각, 의리의 마음으로 규정했다. 식물은 생혼만 있고 동물은 생혼과 각혼이 있고 인간은 생혼, 각혼, 영혼이 있다. 이익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자신의 실용적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선택과 운용의 능력을 자신했다.(123 페이지) 이익은 세상을 구제하려 한다는 예수회 회원들의 의도와 진심을 믿었다. 


이익의 서학 연구는 학파를 셋으로 분기시켰다. 친서파로 분류되는 녹암 권철신과 이가환, 이벽, 정약용, 이승훈 계열, 중도 우파 성향을 보이는 정산 이병휴 계열, 적통으로 인정받는 안정복, 신후담 계열이다. 정조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을 보고 받았으나 중인인 김범우만 귀양보냈다. 정조는 유학이 바로 서면 사교(邪敎)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유생들 사이에서는 척사(斥邪)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안정복 등은 남인 전체를 향한 외부의 공격과 의심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중심으로 회귀하려고 한 것이리라. 이벽, 정약용 등은 자연학이나 수학, 기술의 측면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철학적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학 - 천주학을 신앙으로 수용하거나 철학적 관심으로 연구했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그의 삶에서 정조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그에게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난 문을 열어 준 이벽이다. 서학서를 통해 독자적으로 서학을 연구했던 이벽은 1783년 이승훈이 서장관으로 파견된 아버지 이동욱울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다.(154 페이지) 


이승훈은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 최초였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벽은 주변 남인들에게 서교에 관한 자신의 공부와 체험을 전하며 주도적으로 서학서에 대한 토론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156, 157 페이지) 이벽은 남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권철신에게 적극적으로 입교를 권했다. 이 과정에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이 먼저 이벽을 따라 천주교로 향했다. 


정약용은 23세였던 1784년 여름 정조가 초계문신에게 내준 중용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벽을 찾았다. 이벽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천주실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중용을 새롭게 해석할 학술적 자원으로 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벽은 태극이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벽은 태극은 감괘와 리괘 즉 음과 양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벽의 주장은 마테오 리치의 주장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테오 리치에게 태극은 기독교의 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반드시 반박해야 하는 개념이었다.(159 페이지) 


이벽의 논리는 정약용에게 이어진다. 마테오 리치는 리(理)에 인격성이 없음을 집중 공격했다. 정약용은 기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리는 기에 의지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에는 인격성이 없기에 만물을 주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를 부정하고 배제한 자리에 고대 유학에 등장하는 상제라는 개념을 내세웠다.(162 페이지) 정약용은 인격성이 있는 상제는 리와 달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점은 상제가 고대 유학의 개념이란 점이다. 물론 정약용이 내세운 상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는 존재이지 인간에게 경배와 신앙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정약용은 인간에 대한 기존 논의로는 사회의 타락과 혼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65 페이지) 정약용은 성(性;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이 리(理)가 아니라(성즉리의 부정) 기호(嗜好)로 보았다. 정약용은 성을 리로, 심을 기로 규정하는 이론을 부정했다. 


정약용은 기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눈앞의 쾌락을 따르는 것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리를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일종의 도덕적 방기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인간의 대체는 성이 아니라 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한다. 정약용은 인간에게 선을 향하는 도덕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그 실천에 실패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 즉 세(勢)가 인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보고 그를 위해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을 제안했다. 


정약용은 인간이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도심과 인심의 싸움에서 도심이 이기기 때문으로 여기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이벽과 정약용의 관심은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그래서 신의 인격과 신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는 서학과 갈라질 수밖에 없다.(179 페이지) 몇몇 유학자들이 천문학을 연구하고 역법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학이나 기술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 성리학의 이론 체계 위에서 더욱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개별 지식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185 페이지) 


이익을 비롯한 17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책으로 서양 학문을 접했다면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연행(燕行)을 통해 서양인을 직접 대면했다. 18세기 선비들이 주장한 북학에 서학도 포함되었다. 홍대용은 천원지방설을 비판했다. 만물에 둥근 것은 있으나 모난 것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등에게 중요한 것은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들이었지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가 아니었다.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천주당(天主堂) 방문이었다.(203 페이지)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천주당은 조선인들이 경험한 문화적 충돌과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이다. 마테오 리치가 지은 남당은 북경 내 천주관 중 중심 역할을 했고 예수회가 자리잡던 곳이자 홍대용이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학 - 천주학에 대한 갈등과 의심이 증폭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충격을 입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그의 일가들이었다.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정약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고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보호하고 천주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선을 공격하라는 내용의 밀서를 중국 천주교회측에 보내다가 적발되어 조선을 큰 충격에 빠지게 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였다. 천주교를 접하고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워 참수당한 진산(지금의 충청도 지역인 전라도 진산) 사건의 주인공 윤지충은 외가쪽 6촌이었다.(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사촌이었다.) 진산 사건으로 남인에 대한 노론의 견제가 공식화되었다. 


정조가 승하하자 정국이 요동쳤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이익 문하의 남인 소장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승훈, 정약종 등은 참수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당했고 정약용은 지금의 포항 지역인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남 강진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정약용의 앞길이 막힌 것은 서학 자체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견제 때문이다. 조선에 유학에 위협이 될 실질적 이단은 없었다. 당연히 서학은 전래 초기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히지 않았다. 


정학(正學)이 밝으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그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정조에게 서학 - 천주학에 접촉한 남인들을 징계하는 일이나 소품체의 패관잡기를 막고 순수한 고문을 회복한다는 문체반정이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과 명분의 일이었다.(219 페이지) 더 나아가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정조에게는 남인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서학 - 천주학이 정치적 갈등의 핵이 되기 이전에 정조는 노론으로 기울어진 정국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학문적 자질을 정국에 활용하기 위해 남인의 소장학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 같은 인재를 등용해 신임했다. 


정조와 남인 소장학자들의 매개가 된 것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었다.(220 페이지) 양명학이나 불교는 유학의 입장에서 이단이었지만 그런 학문을 한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거나 사형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222 페이지) 채제공은 서학을 불교 서적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며 서학을 한다는 것이 정치적 탄압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했다. 채제공도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소멸할 것이라 보았다. 


당시 백성들이 급격히 천주교로 향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세도 정치 등 조선 내정의 실패와 사회적 불안에 있었지만 상층부는 이런 자신들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사특한 행위에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렸다.(229 페이지) ‘양아치새끼들’이란 시를 쓴 윤기(1741 - 1826)는 천주가 상제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인격적 존재로 추앙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다.(235 페이지) 


앞에서 17세기 지식인들과 18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18세기와 19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도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리라. 19세기 지식인들은 서학이 아니라 서양을 대면해야 했다.(243 페이지) 그들이 경험한 것은 중국과 조선을 옥죄며 다가오는 강력한 타자, 전쟁에서 중국을 압도한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 조선 앞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목전의 힘으로서의 서양이었다.(250 페이지) 


저자는 조선 지식인들 중 일부가 서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들의 사상적 지향을 쉽게 근대성이라는 틀에 넣고 평가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라 말한다.(275 페이지) 정약용의 경우 상당히 근대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구상하고 기획한 세계는 현재의 관점에서 매우 중세적인 왕도 국가 그 자체였다. 이들은 모호하거나 미완성인 자기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낯선 사유에 자극을 받았고 이를 자기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27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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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1-03-26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21-03-26 11:54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읽어보아야겠습니다.
 

가끔 들춰보는 자료 가운데 '사이코의 섬'이란 책이 있다. 독일 통일 이전인 1943년 동독에서 태어난 신경정신과 의사 한스 요하임 마즈의 책이다. 번역 출간된 지 27년이 지났으나 이렇게 아주 가끔이지만 늘 새롭게 들춰보는 것은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본문에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내가 걸어온 직업의 길은 나 자신의 치유 시도"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더욱 현실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베드로와 바울일까? 그들은 갈등 당사자들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헷갈렸었다.

 

가령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식의 문장이 머리를 수놓기도 했었다. 누가 누구에 대해 말했는지는 중요하다. 저자의 의도대로 따라야 하리라. 베드로는 베토벤으로, 바울은 바흐로 치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바흐 사후 태어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도 바흐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베토벤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베토벤은 바흐란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는 말을 했다.(독일어 '바흐; Bach'는 시내라는 말이다.) 음악학자 폴 뒤부세가 바흐란 말은 동유럽 방언으로 떠돌이 음악가라는 말을 했으니 베토벤의 말은 은유에 근거한 개인적 헌사 이상이 될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빛난다.

 

'사이코의 섬'의 저자는 예수를 건강한 사람 그 자체로 보며 그가 솔직했고 개방적이었고 진실했기에 중상(中傷)과 박해(迫害)를 받았다고 썼다. 저자는 세 체제의 공통점도 언급했다. 실재하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낙원을, 실재하는 시장경제는 더욱더 많고 새롭고 나은 상품을 통한 만족을, 실재하는 기독교는 요구에 상응하는 순종을 할 때 더 나은 저 세상 삶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왜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란 말 대신 부드럽고 온건하게 보이는 시장경제란 말을 썼는지 의문이다. 우리에게 마음의 고고학이 필요하다. 이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란 말을 생각하며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라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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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土宜)란 땅에서 나는 작물을 의미한다. 의(宜)가 마땅하다는 뜻이니 토의란 작물을 키워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땅의 순리란 뜻에서 도출된 단어이겠다. 사실 땅이라기보다 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흙에 대해 얼마나 알까? 화강암이 풍화되면 모래흙이 되고 현무암이 풍화되면 점토질 흙이 된다.(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흙' 31 페이지) 이 정도는 단순한가? 자연을 이야기할 때 하나만을 볼 수는 없다.

 

모쿠다니 구니야스는 지구에는 산과 구릉, 평야와 해저 등 다양한 지형이 있지만 달에는 그런 지형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지구와 달리 달에는 물질을 운반하는 바람과 공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 36 페이지)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강수량이 많을수록 땅위를 흐르는 빗물이 많아지고 따라서 침식이 더 많이 일어나지만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여 흙이 침식되는 걸 막아 준다고 말하며 이런 기본적인 균형은 강수량만으로 흙의 침식 속도가 결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흙' 34 페이지)

 

전자의 두 가지(물과 공기)와 후자의 두 요인(비가 하는 두 가지 일)은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협동 관계고 후자는 길항(拮抗) 관계다. 아니면 상반(相反) 관계든지. '세종실록지리지'는 흥미롭게도 토지의 비옥도를 평하며 비척상반(肥瘠相半)이란 표현을 썼다.

 

비옥함과 척박함이 반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당시는 토양 구조나 점성(粘性), 토양 색 등보다 비옥도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니 흥미롭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생긴 현실적인 기준이었다. 물론 상반이란 표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토양의 점성이나 색에 대해 상반(相半)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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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 - 땅과 사람의 기록으로 보는 시대상
정치영 지음 / 푸른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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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영(丁致榮) 교수의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은 조선시대의 주요 지리지들을 활용해 오늘의 참고점을 모색한 책이다. 오늘날의 지역성이나 지역 구조가 과거의 그것에 기초해 형성되었기에 과거의 지역지리학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지역을 고찰하고 미래의 지역을 예측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12 페이지)

 

조선 시대에 제작된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관찬(官撰) 지리서,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의 사찬(私撰) 지리지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24년 세종이 대제학 변계량에게 지지(地誌) 및 주, 부, 군, 현의 연혁을 편찬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것에서 비롯된 책이다.

 

여지도서는 1757 - 1765년 사이에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 후기 들어 간행된 지 270년이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고치고 그간 달라진 내용을 싣기 위해 1757년(영조 33년) 홍양한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간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인식하는 데에 이원적인 인식 체계를 보였다. 산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하천을 중심으로 한 체계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산경표이고 후자의 대표적 예가 정약용의 대동수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기도의 대천(大川; 주요 하천)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꼽았다.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다.

 

산은 산(山)이나 봉(峰)으로 명칭이 나뉘었지만 하천은 매우 다양했다. 강(江), 천(川), 수(水), 포(浦), 탄(灘), 도(渡), 진(津) 등이다. 또한 산은 하나의 이름을 갖는 데 비해 하천은 지류뿐 아니라 본류의 경우에도 구역이나 장소마다 다른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온난습윤한 기후 조건과 함께 토양의 모재가 되는 암석 중 화성암인 화강암과 화편마암이 전 국토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그래서 토양 종류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토양 종류가 많은 편이다. 점토질 토양은 사질 토양보다 비옥하다. 오늘날은 토양 구조, 점성(粘性), 토양색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조선시대는 토양의 비옥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제주도의 토성을 부조(浮燥)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가벼워서 건조하면 바람에 날리기 쉬운 화산회(火山灰) 토양의 물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척박(瘠薄)한 땅으로 분류된 곳 가운데 삭녕, 연천, 마전 등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절대 고도보다 주변보다 우뚝 솟아 있는 땅을 산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천을 제사 장소로도 여겼다. 이런 신성한 하천을 규모와 무관하게 대천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읍치(邑治)는 수령에 의한 지방 지배 기능과 재지세력에 의한 자치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 행정적 중심지였다. 연천의 읍치는 연천군 읍내리에 있다가 1910년 연천군 차탄리로 옮겨졌다. 연천읍의 읍치는 군자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동쪽으로 차탄천을 바라보며 남동향으로 열린 골짜기 안에 들어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아(官衙)는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명당)에 자리했다. 조선은 국가 지도 이념인 유학(儒學)을 온 백성에게 보급하기 의해 1읍 1교(1邑 1校)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없어졌고 군현이 생기면 향교도 생겼다.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마을을 촌락(村落)이라 하고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마을을 도시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행정, 군사, 경제,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읍치가 도시에 가까웠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촌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을 중요시한 것은 그만큼 산이 많기 때문이다.

 

촌락은 북쪽의 산과 언덕에 기대어 산과 평지가 만나는 완경사면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했다. 이는 장점이 많다. 북쪽의 산이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아준다.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 지하 수면이 낮아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천 범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큰 강변의 평야지대보다 골짜기나 분지가 벼농사에 유리했다.

 

우리나라는 괴촌(塊村)이 많았다. 괴촌이란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을 말한다. 대다수의 촌락은 집단 이주에 의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두 가구로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졌기에 계획적인 가옥 배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지가 한정되었고 더욱 명당은 제한적이기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집촌해야 하는 벼농사 중심의 체계도 한 몫 했다.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족촌(同族村)이 많은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토지에서 나는 소산(所産)을 토의(土宜)라 했다. 토공(土貢)은 공물을 말한다. 지리지마다, 지역마다 산물의 표기가 달랐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지도서에는 미역이 나는 군현으로 55개 지역이 기록되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두 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광물 자원이 다양할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이를 이용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광물을 감정하고 탐사하는 방법이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발달하여 주요 광물인 철, 납, 아연, 금, 은 등의 광상(鑛床) 개발이 촉진되었다. 광상은 유용 광물의 집합체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지리지가 토의(土宜), 광상(鑛床) 등에 관한 항목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백성의 어려움이 컸으리라 보인다. 백토는 고령토라고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토 산지가 한 곳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지도서에는 더 많은 곳이 기록되었다.

 

경상도 진주목, 평안도 구성, 선천, 함경도 길주, 단천, 종성도호부 등이다. 송이버섯의 경우 29곳이 늘었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여지도서에서 크게 준 항목도 있다. 옻나무(354 페이지), 닥나무(378 페이지) 등이다. 조선을 문적(文籍)의 나라라 한다. 그렇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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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 - 신학, 성례, 교회 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전희준 지음 / 이레서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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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니던 시골 장로교회에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자기 교단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교회의 신자들이 느는 것에만 집중하는 교회였다는 점이다. 교파를 떠나 그리고 신앙적 인도를 위한 가르침을 잠시 에포케하고(내려놓고) 문화사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 여러 신학을 자유롭게 가르쳐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다른 교단도 크게 다르지 않는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희준의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에서 비슷한 사연을 만났다. 장로교회에서 감리교에 가까운 신앙을 보이자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한 신자의 사연이 소개된 것이다. 감리교를 이단이라 하다니,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그러니 당연히 저런 교회는 물건 팔 듯 설교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말을 음미한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교파를 제대로 알면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고 더 건전하고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본문에는 장로교가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기에 인간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교파들을 공부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잘못된 적용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 감리교회의 경우 1800년대 중반 노예 문제로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로 분열되었다. 장로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개혁에 동참한 이들이 세운 여러 교회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장로교회의 체계가 형성, 발전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1054년 공식 분열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교류했지만 1054년 완전히 갈라섰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1965년 1054년의 파문(서로 파문)이 철회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임신을 받아들인다. 동방정교회는 원죄 없는 임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마리아에게 특별한 지위(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를 부여한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 해석의 권위가 교황에게, 동방정교회는 공의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시온은 열등한 구약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사도신경이 생겨났다. 한 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영은 순수하고 거룩하지만 물질 세계는 더럽고 죄악에 물들었다고 믿는 이원론 신앙에 대처하기 위해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처형, 부활 등을 언급한 것이다. 기독교 공인 이후 모든 교회가 모여서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들었다. 성자가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아리우스주의(성자는 피조물이라고 봄)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아버지와 아들(필리오케)에게서도 나온다고 믿는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장 18절) 이 말씀과 관련해 다른 교파에서는 헬라어로 베드로는 남성 단수 명사이지만 반석은 여성 단수 명사이기 때문에 같이 취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은 예수님이 실제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고 아람어에는 두 단어간의 성 구별이 없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개신교는 첫 번째 해석을 더 강조하고 동방정교회는 두 번째 해석을 더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원래 루터란이란 표현은 로마 가톨릭이 루터를 따르는 놈들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붙인 이름이었다. 장로교를 칼뱅주의 대신 개혁주의라 부른다. 개혁주의는 칼뱅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다수 개혁가들의 공통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다수의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임직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받아들인다는 선서를 한다. 중용의 신앙은 성공회의 주요 특징이다.

 

다양한 성향의 신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준은 램버스 4개조다. 감리교회의 기원은 기도, 금식, 성경 공부, 선행 등의 방법들을 규칙적으로 실행하며 신앙생활을 한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 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홀리 클럽, 규칙주의자, 방법주의자(Methodist) 등으로 불렸는데 후자의 이름이 감리교회의 이름이 되었다. 이 클럽의 일원이었던 존 웨슬리는 1728년 영국 성굥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미국 조지아로 선교하러 가다가 죽음의 위험을 겪으면서 자신에세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회심을 올더스게이트 회심이라 한다. 거리의 신도회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웨슬리는 조지 화이트필드와 함께 당시 영국 교회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노동자들을 위해 야외에서 설교했다. 수많은 사람이 회심한 가운데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기존 교회와의 갈등이 계속되자 교단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는 일본 주재 선교사였던 로버트새뮤얼 맥클레이다. 맥클레이는 1884년 6월에 내한해 고종에게 학교, 병원 사업에 한하여 선교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1885년 4월 아펜젤러 부부가 입국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감리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존이 교단 설립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찰스는 영국 국교회 교회 마당에 묻혔고 존은 감리교 예배당 옆에 묻혔다.

 

우리나라 성결교회는 19세기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생 교단이다. 운동의 이론적 토대는 웨슬리의 완전 성화론이다. 우리나라 성결교회는 4중 복음을 강조한다.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 등이다. 앞의 두 가지는 웨슬리 신학을 계승한 것이고 뒤의 두 가지는 19세기 성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성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라고 한다. 신유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 아플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나음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성결교회는 병을 낫기 위하여 기도, 안수 하는 것을 당연한 특권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교회 범주에 속하는 교회들은 결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들은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 오순절 교회와 비교 대상이 있다면 바로 성결운동이다. 성결 운동은 성령 세례가 내적인 성결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오순절 운동은 성령 세례의 1차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순복음교회가 속한 하나님의 성회가 오순절 운동의 기치 아래 형성된 교단이다. 오순절은 부활절(復活節) 후 50일째 되는,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루터교회도 개혁주의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인간의 공로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친 중세 교회를 비판하면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섯 개의 ‘오직’을 따른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등이다. 체코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톨라, 프랑스의 피터 발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 등을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이라 부른다.

 

웨슬리가 개혁주의와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은 예정론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도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웨슬리를 따르는 교파로 감리교회 외에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 구세군 등을 들 수 있다. 웨슬리주의를 이해하려면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서 유래한 사상 체계인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것에 대한 출발이자 지속이며 성취이지만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루터교와 장로교회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聖化)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반면 감리교회에서는 완전 성화를 믿는다. 물론 감리교회에서 믿는 완전 성화는 절대적 의미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정도의 상대적 완전함을 의미하지만 장로교회나 루터교회와 크게 차이나는 지점이다. 네덜란드의 칼뱅파와 항변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618년 11월부터 1619년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교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칼뱅주의 5대 교리로 알려진 도르트 신조를 발표했다.

 

당시 정죄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오늘날 감리교 신학을 이루는 웨슬리안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르다. 전자는 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점을 부정하고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은 반면 후자는 사람의 완전한 타락을 인정하고 본성상 사람의 의지는 악을 행하는 일에만 자유롭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구원론의 관점에서 일반 침례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특수 침례교회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였다.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두 파는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자극을 받아 결국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고 1891년에 통합을 이루었다.

 

성례 즉 성만찬과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예식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지를 의미한다. 모든 교파에서 성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며 성례가 주는 특별한 유익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례의 구체적 내용에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표지 자체가 의미라 말한다. 즉 성례 자체로부터 은혜가 전달된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침례교회에서는 외적 의식은 상징일 뿐이라고 믿는다.

 

구세군은 외적인 형태의 성례를 거부한다.(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엄 부스는 감리교회 목사였기에 웨슬리의 성례관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웨슬리가 감리교회의 종교 강령을 제정할 때 39개 신조 중 14개를 삭제했는데 성례 조항은 유지했다. 루터는 세례가 생명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물은 절대 그런 일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물과 함께 그리고 그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물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몸 전체를 담그는 침수례(浸水禮), 물을 머리에 찍는 점수례(點水禮), 물을 머리에 뿌리는 살수례(撒水禮), 물을 머리에 붓는 주수례(注水禮) 또는 관수례(灌水禮) 등이다. 세례 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을 나타내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수세자(受洗者)가 물에 잠기는 의식 즉 침수례만을 인정한다. 침수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지냄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초기 한국 성결 교회는 침수례를 강조했지만 현재는 침수례를 권유하기는 해도 수세 방법을 한정하지는 않는다. 침례교회에서는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 세례도 거부한다. 어린 아이는 믿음을 스스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도 이런 입장을 따른다. 우리나라는 초기 교회의 경우 세례를 주기 전에 엄격하게 교육하고 철저히 점검했다. 세례 전에 대개 1에서 2년 동안 복음서, 기본 교리서, 교회 생활 안내서로 교육하는 학습 제도를 채택했다.

 

학습인은 책 내용을 암기하고 우상숭배, 귀신 숭배, 조상 제사를 버리고 주일을 지키며 바른 직업을 가지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열매로 두 명 이상을 전도해야 하며 교리 질문에 바르게 답하고 직접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1907년 새문안 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여섯 명 중 한 명만 문답을 통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몇 번의 교육만으로 세례 준비 과정을 마친다. 그리고 지식만 전달하고 삶을 점검하는 시스템은 거의 시행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한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가 축성(祝聖;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도)할 때 떡과 포도주의 본질에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도 사제가 축성할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지만 인간의 지성으로는 변화의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루터의 성찬 이해는 공재설(共在說) 또는 공존설(共存說)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 떡과 포도주 안에, 그것들과 함께, 그리고 그것들 아래에 임재한다고 믿는다.

 

루터교에서는 실재설이라는 용어를 쓴다. 침례교회는 상징설을 유지한다. 떡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의미다. 상징설은 떡이 자신의 몸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떡이 내 몸을 의미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1529년 10월 1일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들이 마르크부르크에서 모였다. 하지만 이들은 성찬의 의미를 놓고 심각한 이견을 보인 끝에 적대적 언사를 주고받고 말았다. 개혁교회 연합이 무산된 순간이다. 감리교회, 장로교회 등은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하늘에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교회 정치체제는 감독 정치(로마 가톨릭, 감리교회, 구세군, 성공회), 회중 정치(침례교회), 장로 정치(장로교회, 성결교회)로 나뉜다. 우리나라 감리교회에는 장로 직분이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원래 목회자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1949년 교리와 장정을 개정해 평신도 직제로서 장로를 공식화하면서 우리나라 감리교회에만 장로 직분이 생기게 되었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로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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