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정; 叱正'이 아닌) 질정(質正)을 바란다는 저자의 책을 읽고 있다. 질정(叱正)은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의미고 질정(質正)은 묻고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흔히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의 叱正을 많이 쓰니 약간 기이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質正이 훨씬 뜻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강호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중국의 유명 선사인 마조의 활동무대인 강서(江西)의 강과 석두의 활동무대인 호남(湖南)의 호를 딴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강호라는 말 자체가 강과 호수 즉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강호제현이란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무슨 상징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산을 앞에 두어 산하, 산천, 산수화, 요산요수 등으로 부르지 물을 앞에 두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2019년12월 30일 아주경제 수록 강효백 교수 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 소절부터 일본식 표현' 참고) 어떻든 앞서 말한 저자의 책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눈에 띈다.

 

꾸짖음이든 물음과 비판이든 받을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 또는 사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질정 앞에 겸허해야 한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궁예의 성씨가 궁씨냐 김씨냐 같은 사소한 문제를 두고 따질 것이 아니라 궁예의 실패한 불교개혁의 의미처럼 무게감 있는 것들을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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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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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작이다. 성균관 박사까지 지낸 유학자 출신의 사학자인 단재는 구한말 궁녀 출신의 박자혜와 결혼한 분이다. 단재가 논한 우리 상고사는 어떤 시기보다 많이 왜곡되는 등 논란이 큰 분야다. 책은 1편 총론에서부터 2편 수두 시대, 3편 삼조선의 분립 시대, 4편 열국 쟁웅(爭雄)시대, 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 6편 고구려, 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 제국의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삼국 혈전의 시작, 9편 고구려의 대 수(隨) 전쟁, 10편 고구려의 대(對) 당 전쟁,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타깝지만 선생의 조선상고사 저술은 미완으로 끝났다. 57세에 여순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책은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생에 의하면 주관적 위치에 선 자가 아(我)이고 그 외의 모든 존재는 비아(非我)다. 선생은 아든 비아든 역사적 아가 되기 위해 두 가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속성(相續性)과 보편성(普遍性)이다. 전자는 시간적으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外寇)의 병화(兵火) 때문이 아니라 조선사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이 없어지고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사대주의적이었음을 증거한다. 선생의 읽기는 해체적 읽기의 전형이다. 선생은 김부식을 유학자로, 일연을 불교도로 언급하며 논의를 이어나갔다. 즉 김부식과 일연이라는 두 다른 세력이 화랑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삭감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화랑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유교와 불교는 외래의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물론 두 외래의 사상이 긍정적인 영향도 끼쳤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문제적임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우리의 역사가 전해진 것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중국의 사료에 적힌 내용을 자신의 책에 담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등의 정사를 사대주의적 저술로 평했다. 선생이 보인 것은 선행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일관성이다. 한편 중국에는 춘추필법이라는 역사 서술 방법이 있다. 위국휘치(爲國諱恥), 위존자휘(爲尊者諱), 위현자휘(爲賢者諱) 등이다. 위국휘치는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은 숨기는 것이다. 위존자휘는 존귀한 자의 잘못이나 수치는 감추는 것이다. 위현자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위해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렇기에 역사는 언제나 비판적으로 읽고 맥락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추론해 읽어야 한다. 기록된 부분은 여러 사료를 고루 읽어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부분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면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록되지 않은 부문은 유물이나 시대 정황 등을 미루어 읽어야 한다. 선생은 백제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 합리적 의심을 했다. 백제는 백전(百戰)의 나라이자 미수 허목이 ‘호전지국 막여벡제(好戰之國 莫如百濟’)라 평한 대국이다. 선생은 이런 나라가 작은 나라 신라를 향해 늘 화의(和議)를 구걸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읽었다. 김춘추마저 신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약하기에 오직 외원(外援)을 빌려 백제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선생이 행한 비판적 읽기의 두 가지 사례를 보자. 1) 선생은 김유신의 명성은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들은 과장한 결과 생긴 것이라 보았다. 이 부분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고구려가 중국을 비롯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힘을 소진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아니었다면 신라는 통일을 이루기 전에 소멸했을 것이다. 2) 선생은 연개소문이 중국에 정벌차 들어간 기록이 없자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곡 창고(노적가리)라고 속이고 고구려인들이 쳐들어오면 복병으로 유격했다고 한 황량대를 연개소문이 북경까지 추격했음을 알리는 유적으로 읽었다.

 

우리가 나라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한(韓)이 왕(王)을 뜻한다는 사실, 삼조선은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이란 사실 등은 새롭다. 선생의 책은 복잡한 사건들을 하나 하나 가려내 읽은 노고의 산물이다. 고구려의 원래 이름이 가우리였다고 한다. 이는 전장에 선 선두 깃발을 의미하는 말이다. 신크마리는 스승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선생의 책은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편으로 종결되었지만 총론에서 조선 이야기를 꽤 했다.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조선의 경우 세종과 세조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했다.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이 내세운 사대가 굳어지는 가운데 세종은 몽골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각종 실기에 근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골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게 아첨하던 문자와 위조한 고사(故事)에 근거해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쳤고 전대의 실록은 세상에 전포(傳布)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秘藏)했다. 물론 이 기록은 임진전쟁 중 불탔다.

 

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 강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이는 태조의 존명건국(存明建國)의 국시와 충돌했다. 이 일로 인해 여러 신하들이 끊임없이 간쟁한 데 이어 명의 압박과 경계가 심해지자 세조는 생각을 바꾸었다.

 

선생은 우리 역사는 대개 정치사들이고 문화사는 별로 없으며, 정치사 중에서는 동국통감과 동사강목 외에 고금을 두루 관통한 저작이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망만을 전했으며 공자의 춘추를 역사의 절대적 준칙(準則)으로 알고 그 의레를 흉내 내어 군왕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는 존군억신(存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중국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장하다가 끝에 가서는 자기 나라까지 배격하는 편벽됨에 이르렀고 역사를 자기 국민들이 비추어 볼 거울로서 제공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아첨하고 잘 보이려는 데 치중해 자기 나라의 강토(疆土)를 조금씩 잘라 양보함으로써 결국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했다고 비판했다.

 

국민들이 비추어 볼 거울이란 문장에 나오는 거울이란 말은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이란 김선희 교수의 책 제목을 생각하게 한다. 어떻든 단재가 든 아쉬움은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이다.

 

지난 2월 중국 대사관도 포함된 명동 해설 시간을 가졌다. 중국대사관이 있는 자리는 1882년 갑신정변 이래 청나라 군사가 사용하던 곳이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정변이 좌절된 개화파의 수장 김옥균이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 방대한 자치통감이다. 단재는 아홉 살에 그 책을 배웠다니 대단하다. 물론 선생에 의하면 자치통감은 당 태종이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부터 악성 종기를 앓은 끝에 죽었다고 썼다.

 

선생은 5, 6 종의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출입하거나 무의식중에서 얻거나 고심 끝에 찾아내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눈을 상하고 도망쳐 돌아가서 30개월을 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수십 자의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선생은 ”원효와 퇴계가 만일 희랍의 강단에서 태어났다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란 말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태어났다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했다. 베르그송 철학을 읽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그런가 하면 오이켄은 나도 생소하게 느끼는 철학자다.)

 

선생은 개인은 사회라는 풀무에서 만들어질 뿐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개인이든 사회든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自性)이 성립한다는 말도 했다. 선생은 역사 읽기의 한 모범 사례를 제공했다.

 

가령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논할 것이 아니라 신라 이래 존숭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우리나라)에 새로운 불교를 성립시키려 한 것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만일 왕건이 아니었다면 궁예의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후 이를 계획하였던 궁예와 그에 적대한 왕건의 사(邪)와 정(正)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누구의 핵심 사관을 논하기보다 이름 등에 너무 크게 관심을 두었으니 그간 지엽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 대해 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재독할 날을 기다린다. 더 나아진 문제의식과 내공으로 더 깊이 이해하는 읽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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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문학 강의 : 서울의 재발견 - 시민이 행복해지려면 도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승효상 외 지음 / 페이퍼스토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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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발견’은 건축전문가, 지구과학이나 지리 전공자들, 그 밖의 인문학자들의 옴니버스 형태의 책이다. 총 아홉 장의 글과 한 편의 대담이 실려 있다. 승효상은 ‘지문의 도시, 서울‘에서 우르(Ur)를 예로 들었다. 도시의, 도회지의 등을 뜻하는 urban이 우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승효상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우르는 다스리는 사람, 시민, 생산하는 곳, 통치하는 곳 등을 갖춘 도시다. 흥미로운 점은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비판하려고 책을 썼는데 모순되게도 르네상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수많은 도시계획도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우리가 투시도법에 익숙해진 이후 얼마만큼 세상을 왜곡해 보게 되었는지를 비판하는 글로 시작하는 책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어느 페이지부터 시작해도 전체의 줄거리를 다 알 수 있어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도시는 구석을 파악하는 것으로 도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시이고 그 도시가 민주주의 도시라고 승효상은 말한다. 승효상은 달동네란 도시계획가나 건축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 세운 동네라 말한다. 달동네는 재개발의 손쉬운 대상이다. 건축(建築)은 일본식 한자로 지금은 중국에서도 이 말을 쓴다.

 

우리는 조선 시대까지 영조(營造)라는 말을 썼다. 승효상은 city는 소프트웨어, urban은 하드웨어라 말한다. 리(理)가 옥석의 결, 무늬를 의미하는데 터와 무늬의 결합어인 터무니는 원래의 땅 무늬 위에 우리가 사는 인문적 무늬를 덧댄 것이다. 승효상은 터무니를 지문(地文)이라 바꾸어 부른다.(’지문의 도시, 서울‘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어떻든 승효상은 산이 있으면 깎고 밀어서 터무니를 없애고 지은 아파트는 터무니 없는 집이라 말한다.(’리; 理’는 자연의 무늬, ‘문; 文’은 인위적 무늬다.) 우리에게 배산임수 자체가 랜드마크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는 이미지보다 서사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도시 안에 녹아 있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미학보다 윤리라는 말을 했다. 오영욱은 도시의 주요 키워드로 흔적을 들었다.

 

물론 오영욱은 도시는 기억과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했다. 오영욱에 의하면 도시의 흔적은 상처와 추억이 공존하는 도시의 자취다. 조한 건축가는 처마의 선은 구축 방식에 따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형태라 말한다. 조한 건축가는 감동의 원인은 바로 시간이라 말한다.

 

조한 건축가는 기억은 실존의 문제라 말한다. 지구과학교육과 출신의 작가 권기봉은 수선(修善)이란 모범, 으뜸 등의 의미로 한 나라의 선(善)은 수도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라 말한다. 양주동은 서울은 새벌에서 나온 말이라 설명했다. 새는 솟아 있다, 높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벌은 울타리를 의미한다. 서울은 높은 울타리 즉 성곽을 가진 도시라는 의미가 된다.

 

동양학자 조용헌은 서울은 산이 있는 도시라 말한다. 조용헌은 바위는 유독 두뇌를 혹사시키는 작업에 참 좋다고 말한다. 서울은 대도시인데도 북한산 같은 바위산이 있고 한강이 있다. 조용헌은 중국 남경은 진시황 때도 계속해서 왕이 날 것이라고 운위되던 곳이어서 진시황이 남경 사람을 등용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고려 태조가 모방한 것이라 말한다.

 

고려 태조는 금강을 반궁수(反弓水; 강 흐름이 활처럼 휘어져 땅이 움푹 들어온 곳)의 강 즉 화살로 개경을 겨누는 반역을 꾀할 곳으로 낙인찍어 그 지역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성계도 전주 사람이니 강남 사람이란 점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용비어천가’에서 아무리 강남을 견제해도 인물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 이야기를 한다. 골목이란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자동차가 생기고난 후 더 이상 골목을 만들지 않기에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로버트 파우저는 골목에는 추억과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기억은 객관적 메모리이고 추억은 애착이나 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161 페이지)

 

로버트 파우저는 골목에는 낭만과 신비주의, 이국성이 있다고 말한다. 19세기끼지 골목은 도시 흐름의 중심이었다. 골목은 어떤 면에서 개발되지 않은 곳, 자동차가 없는 곳, 옛 생활방식을 상징한다. 창신동은 오래된 서민 동네로 20세기의 모든 주택의 형태가 모여 있다. 아파트, 연립, 양옥, 한옥, 큰 집, 작은 집, 일본식 집...창신동은 주민 스스로 뉴타운을 포기한 첫 사례지다.(서촌은 서울시가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창신동 사람들이 스스로 재개발을 포기했기에 앞으로 낙후된 동네를 어떻게 서울시와 소통해 극복할 것인가가 큰 관심사다. 로버트 파우저는 서울은 파리나 빈과 다르게 골목으로 인해 계획되지 않은 랜덤성으로 빛난다고 말한다.

 

역사지리학자 이현군은 장소는 시간이 녹아 있는 시간의 지층이라 말한다. 한양이 의례, 관념 등이 중시된 도시였다면 서울은 자본주의의 도시다. 한양이 의례의 도시라는 말은 숙정문,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이 형식적으로 만든 문이라는 말과 통한다. 가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냈다. 양의 기운을 차단하고 음의 기운을 크게 하기 위한 조치다.

 

비는 용이 내려준다고 믿은 조선 사람들은 용 대신 도롱뇽을 경회루에 묻었다. 광진(廣津)은 건너면 광주(廣州)여서 붙은 이름이다. 삼전도, 송파나루는 비가 많이 오면 새 물길이 생긴다고 하여 신천(新川)이라 불렀다. 언어학 박사 유재원은 서울 언어의 변천사를 다루었다.

 

고미숙은 10년마다 대운(大運)이 바뀐다고 말한다. 1년마다 바뀌고 오늘 하루도 바뀐다고 말한다. 기획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서울의 재발견’은 흥미로운 구성의 책이다. 여러 전문가가 본 서울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 책이다. 글쓰기에 단서를 주는 책이다. 고 박원순 시장과 고미숙의 대담을 보며 한 시대가 그렇게 갔구나, 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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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패러디해 내 이야기로 쓴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재인폭포, 베개용암, 백의리층 등 연천의 지질공원들, 도서관, 숭의전, 당포성 등의 문화유적지 외에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다.

 

서울이 더 편하고 갈 곳이 많으니 문제다. 그럼 나는 서울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서촌, 정동, 부암동, 청계천, 올림픽 공원, 광화문, 인사동, 익선동, 삼청동, 혜화 등의 답사 코스와 아직 만들지 못한 코스를 찾아가는 과정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만든 코스를 찾는 것보다 새 코스를 구상하고 식사를 하고 서점을 들르는 여정을 쓰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요즘은 지인들에게 연천에 오시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에게 연천 안내를 하는 과정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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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측체의 - 기 철학과 서양 과학의 행복한 만남 청소년 철학창고 30
이종란 지음 / 풀빛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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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惠崗) 최한기(1803 - 1879)의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기(氣)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얼핏 제목만으로는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최근 읽은 한 책에 의하면 터 잡기 예술과 지식체계로 나뉘는 풍수에서 후자의 경우 기(氣)는 중요하게 처리되지 않는다.(전종한, 서민철, 장의선, 박승규 공저 ‘인문지리학의 시선’ 참고)

 

최한기에게 기는 이기론에서 말하는 기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를 해석하고 조망하는 가장 큰 틀이다.(김선희 지음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263 페이지) 혜강의 기는 비근하게 말하면 사람 이전에 먼저 자연 속에 있다가 사람의 몸이 생기면 그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연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기측체의’ 31 페이지)

 

혜강이 보는 질(質)은 기가 단단히 엉겨 굳은 것이다.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가운 것으로 풀이하지만 비유하자면 혜강에게 기는 빗물, 질은 얼음이다. 어떻든 기는 공기와 다르다. 공기는 아무리 모여도 물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만물의 근원을 기로 보았다. 최한기는 기가 아니라 질의 차이에 의해 나무, 돌, 사람 등이 다르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신 대신 신기(神氣)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좋은 책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끼지 않고 사들이고, 독파한 뒤 오래 된 책은 헐값으로 팔았으며 다 전하지 않지만 평생 천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김선희 지음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259 페이지) 무수히 많은 책을 접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기측체의’에도 다양한 책이 인용되었다. 최한기는 기(氣)가 리(理)의 근본이라 주장했다는 점에서 주자 성리학자들과 달랐다. 주자 성리학에서는 공히 실체인 기와 리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섞이지도 않는다고 보았다.(최한기는 리를 실체가 아니라 보았다.) 최한기는 리는 기로 이루어진 사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직접 경험하거나 파악될 수 없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법칙이 사물보다 먼저 있거나 독립해 있다는 견해를 비판했다. 최한기는 성리학의 리(理)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유행지리라는 말을 만들어 법칙 또는 자연의 원리를 말할 때만 사용했다. 추측지리는 인간이 추리하고 판단한 결과 생긴 학설이나 윤리를 말한다.(‘추측; 推測’은 추리와 판단의 결합어이다.) 최한기는 인간은 형질(육체)과 신기(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또한 신을 기의 정화(精華)로 보았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불의 밝음은 기름의 정화이며 기름은 불의 바탕이라는 말이다. 성리학에서는 인의예지를 하늘의 이치로 본 반면 최한기는 인간의 육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이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최한기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즉 선악은 본성에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자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일 선하든 악하든 인간의 심성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운명적인 것으로 행동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인간의 정이 일곱 가지이지만 크게 나누면 좋아함과 싫어함 두 가지라 보았다. 최한기가 처음 안 천문학 지식은 천주교의 신학관인 천동설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로부터 벗어났다. 최한기는 마음과 앎을 분리했다.

 

경험 이전에 마음에 온갖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본 성리학이나 양명학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대개 앎이란 내가 밖으로부터 얻어온 것이지 마음속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한기는 사람의 공부는 오직 자신에게 여러 냄새가 찌든 것을 없애는 데 있다고 보았다. 최한기가 사용하는 신기란 자연과 인간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마음이면서 인간의 인식 주체, 반사운동을 주관하는 무의식 등을 두루 의미한다.(113 페이지)

 

경험 외에 앎의 방법으로 추측이 있다. ‘추측록’은 추측에 관한 책이다. 최한기는 인간의 마음을 원래 맑은 것으로 보고 인간의 경험을 샘물에 물감을 넣는 것에 비유했다. 최한기는 주자(朱子)는 많은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추측의 큰 작용을 찬미한 것이지 결코 만물의 이치가 본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했다.

 

사람들의 모든 이치를 하늘의 이치라고 여긴 사회에서 그런 이치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 주장한 최한기의 사유는 당시 지배층의 주목을 받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한기는 사랑과 공경이 맹자가 말한 선천적 능력인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에서 나왔음은 인정했지만 경험이나 추측 없이 윤리적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는 윤리와 도덕이 자연 속에 없다는 말로 자연과 인간을 구별했다. 이는 자연법칙인 천리 속에 인간 윤리의 영원성이 들어 있다는 성리학의 주장을 정면 부인하는 것이다. 천리 속에 인간 윤리의 영원성이 들어 있다는 말은 인간 윤리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리학자들이 천리 즉 리(理)를 높이 여기고 기(氣)를 아래로 본 것은 당시의 신분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신분 제도는 하늘이 준 불변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최한기는 사물을 살피는 다섯 가지 방법을 이야기했다. 1)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2) 주체인 나의 입장을 떠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3) 주체인 내가 직접 사물을 탐구하는 것, 4)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주체인 나를 살피는 것, 5) 밖의 대상과 관계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증험(證驗)도 이야기했는데 이는 내가 사물을 제대로 아는 것인지,

 

사물의 물리를 가지고 내가 아는 것이 거기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앎이란 바깥의 정보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전의 지식과 정보 또는 내면에 확립된 일정한 기준이나 범주를 가지고 비교, 검토, 검증하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최한기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말류의 폐단을 노출하여 떳떳한 가치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음을 근거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자연사물의 법칙인 유행지리를 성리라고 불렀다. 최한기는 주공(周公)과 공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지 않았다. 그들의 말도 시대 변화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뿐 아니라 전통 유학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종교도 학문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서양 종교를 서학(西學)이라고 불렀다. 성리학은 인간의 욕심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불선으로 흐를 수 있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한기는 자연은 그 자체 질서에 의해 움직이지 인간적 윤리나 도덕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자연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자연이 인간과 만물의 고향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다윈에 앞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관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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