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한화(竹窓閑話)는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책이다. 멀 형()자를 쓰는 죽천은 꽃다울 형()자를 쓰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는 동명이인이다. 죽창한화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명묘(明廟; 명종을 가리킨다. 참고로 '정묘; 正廟'는 정조고 '세묘; 世廟'는 세종이다.) 때 참찬 조언수(趙彦秀)가 특진관으로 경연(經筵)에 들어가 임금을 모셨는데 임금이 공부(功夫)라는 두 글자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가운데 조언수가 "공은 여공(女功)이고 부는 전부(田夫)입니다. 이 말은 선비가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마치 여자가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농사를 힘써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임금이 조언수의 말을 아름답게 여겼다고 한다. 어제 이곳 저곳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글이다.

 

멋진 말이지만 "공부는 여자가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힘써 농사를 짓듯 힘써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원문이 그런 것인지 해석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 성호 이익(李瀷; 여주 이씨),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저자인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전주 이씨), 이덕형(李德泂; 한산 이씨) 등 세 사람의 이씨가 한 말을 재미 있게 보았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고려에 나라를 바친 아버지의 처사에 반발해 금강산으로 갈 때 가지고 간 아버지의 거문고가 미수 허목에게까지 전해졌다는 말을 했다. 간서치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규경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마의태자 유적지가 있다고 처음 밝힌 이다.

 

금강산으로 죽으러 간 마의태자가 설악산에서 살았다는 의미다. 모두 흥미롭다. 자질구레하다는 의미의 사설(僿說)이라는 말이 들어간 성호사설, 거친 문장이라는 의미의 연문(衍文)과 흩어진 원고라는 의미의 산고(散稿) 등의 말이 들어간 오주연문장전산고, 한가로운 이야기라는 의미의 한화(閑話)라는 말이 들어간 죽창한화 등 책 제목들도 다 흥미롭다. 아니 겸손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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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 지리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통합교과적 국토 여행
마경묵.이강준.박선희 외 지음 / 갈매나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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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地理)의 힘 또는 가치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이 읽기에 좋은 책이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지질 해설을 하게 된 데서부터 나의 지리 공부가 시작되었다. 단 나는 아직 지리의 지질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우리 땅과 역사, 2부 우리 땅과 경제, 3부 우리 땅과 환경 등이다.

 

이 제목들을 보면 우리 땅과 관련된 역사, 경제, 환경을 알 수 있는 책이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어도가 중국에 의해 분쟁지역화되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되고 명당(明堂)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된다.(명당의 명은 ;이 아닌 ; 이다.) 잘 알 듯 독도는 일본이 분쟁지역화하려는 섬이다.

 

독도는 제주도나 울릉도보다 먼저 해저에서 형성된 화산섬이다.(울릉도에서 독도는 육안으로 보인다. 울릉도에서 독도는 87km 정도 떨어져 있다.) 명당에 대한 글에서 우리는 비보풍수에 대해 다시 접하게 된다. 비보(裨補)라고 쓴다. 산이 있어야 할 곳에 산이 없으면 흙을 쌓아 가짜 산을 만드는 것,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게 하는 것 등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성종 재위시 노사신, 양성지 강희맹 등에 의해 편찬된 책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특기할 부분은 왕이 편찬을 명해 탄생한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읍성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은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의 대비다. 동헌은 고을 수령의 집무 시설이고 서헌은 수령의 살림채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은 낙안읍성(순천), 해미읍성(서산), 고창읍성(고창) 등이다. 읍성은 일제에게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이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편에서는 지도학(cartography)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서(唐書) ‘양관전에 양관이 출세하기 전 왼쪽에 지도를, 오른쪽에 역사책을 놓고 공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부터 좌도우사(左圖右史)라는 개념이 나왔다.

 

대동여지도의 높이는 6.6m, 폭은 2.4m.(참고로 말하면 광개토대왕비는 높이는 6.39m, 폭은 1.35m~2m. 대동여지도가 높이나 폭에서 조금씩 더 크다.) 대동여지도는 목판 인쇄본이기에 지리 상황을 한 가지 색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표현했다. 물론 김정호는 물길도 둘로 표현했다. 한 줄로 표시된 물길은 강폭이 좁아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이고 두 줄로 표현된 물길은 강폭이 넓어 배가 다닐 수 있거나 반드시 배를 타야 건널 수 있는 물길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육로로 물류를 운반하기가 어려웠고 바다는 사고 위험이 높아 내륙의 하천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하천 곳곳에 나루터가 있었다. 대동여지도는 처음으로 기호가 쓰인 고지도다. 대동여지도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지도다. 조선은 나름의 경위도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수레 바퀴 모양의 기리고차(記里鼓車)를 이용해 거리를 측정했다.

 

김정호에게 지도 제작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해준 사람이 혜강 최한기다.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지도를 만들어 기밀 누설)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은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지어내기 위해 일제가 만든 가짜 뉴스라 보아야 한다.

 

김정호의 죽음은 죄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물고(物故)가 아닌 자연사를 뜻하는 몰()로 표현되어 있다. 김정호의 자서전인 대동지지에 의하면 조선에는 10개의 대로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의주대로다. 한양 숭례문에서 시작해 고양, 파주, 개성, 평양을 지나 의주까지 이어진 길이다.

 

성서조선에 조와(弔蛙)’라는 글을 실어 폐간되고 옥고(獄苦)를 치른 김교신(1901 1945) 선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스승(마라톤 코치)이자 무교회주의자였던 선생은 도쿄 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학과 출신의 지리 교사이기도 했다.

 

그는 식민사관에 근거를 둔 조선반도정체론(停滯論)을 논박했다.(한반도가 토끼 형상이라는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주장이 식민사관의 대표격이다.) 저자들은 창지개명(創地改名)이란 말을 쓴다. 일본에 의해 우리 민족이 창씨개명되었듯 땅 이름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바뀐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넓은 다리라는 의미의 너더리가 청계천의 흐름을 살피는 곳이라는 의미의 관수동(觀水洞)으로 바뀐 것, 잣골이 숭교방 동쪽이란 의미의 동숭동으로 바뀐 것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이 좁지만 남북으로 길어서 다양한 기후가 나타난다.(가옥 구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기후다.) 배산임수(背山臨水)란 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지을 물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하천과 그 하천이 만들어 놓은 평야(범람원) 주변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물은 꼭 얻어야 할 대상이지만 집중호우 등으로 인해 피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평지이면서도 고도가 높아 범람 위험이 적은 곳을 선호했다. 이런 곳이 배산임수 지형이다. 이런 곳은 평지의 완경사와 산지의 급경사가 만나는 곳이다. 겨울의 바람도 막아주고 물과 평야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책 전체를 일관하는 메시지는 지리의 가치다. 지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갯벌은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갯벌은 생태적 가치 및 경제적 가치의 보고(寶庫).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의 어원이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두 학문에는 eco란 단어가 공통으로 들어 있다.) 우리는 간척 사업을 고수하지만 유럽 선진국들은 역으로 갯벌을 살리고 있다는 점이 시사점이다.

 

저자들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은 한산도가 아닌 지심도(只心島)라 지적한다.(152 페이지) 섬 모양이 마음 심()자 모양이어서 지심도라 불리는 이 섬은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섬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해군 요새로 쓰인 섬이다.(‘; 는 다만 지자이다.) 오랜 기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까닭에 동백, 대나무, 해송 군락(群落)이 잘 보존되어 있다.(조선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지만 일본군이 1937년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뒤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숲의 물 저장 능력의 비밀은 나무 뿌리에 있지 않고 흙에 있다. 빗물이 스며드는 곳은 나무 뿌리가 아니라 토양 속의 작은 구멍 즉 공극(孔隙)이다. 나무는 그런 토양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나무에서 떨어진 잎(낙엽)’들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유기물질이 된다. 이 유기물질을 먹이로 삼는 지렁이 같은 작은 동물들이 땅을 헤집고 먹이를 찾거나 집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흙 속에 작은 구멍들이 생기는 것이다.(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녹색댐의 효과가 크다.)

 

지구 온난화로 녹은 극지방의 얼음이, 적도의 에너지를 극지방으로 운반하는 멕시코 만류의 흐름을 막아 극지방의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소빙하기의 도래라 한다. 지구 온난화로 극지방 상공의 기온이 상승해 극지방에 갇혀 있어야 할 한랭한 공기가 남하해 추위를 가져온다는 분석도 있다.

 

지구의 암석은 38억년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25억년전까지를 시생대, 그 이후 57천만년전까지를 원생대라 한다. 이 두 시기에 만들어진 암석들이 40퍼센트에 이른다. 시생대와 원생대에 만들어진 편마암 속으로 마그마가 끼어들어 천천히 굳어 화강암이 되었고 화강암을 덮고 있던 암석들이 풍화, 침식되어 사라지고 지하의 화강암이 지표로 나오게 되었다.

 

편마암은 화강암보다 단단해 화강암보다 덜 깎여 산지로 남았고 화강암은 상대적으로 쉽게 깎여 움푹 파였다. 이를 차별침식이라 한다. 한탄강 유역 특히 철원은 제주도처럼 현무암으로 이루어졌지만 보수력(保水力)이 약한 제주도와 달리 벼농사가 활발하다. 현무암층 위에 퇴적층이 넓게 발달했기 때문이고 양수 시설을 이용해 한탄강 물을 끌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하면 재미가 크다.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는 기후, 지리, 지질 이야기가 두루 잘 조화를 이루는 책이다. 인간사 아니 자연과 어우러지는 인간사의 만화경이 보이는 듯 하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공간은 과거의 삶이 누적된 곳이기에 역사와 지리라는 창으로 공간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 메시지다. 시간이 나면 때로 읽고 익힐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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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해설을 하고 평창 상원사와 월정사를 거쳐 고성 델피노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당시 나는 올해 5월 있었던 고성 화재 소식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일정이 되지도 않았지만 되었다 해도 그 생각을 아예 못했으니 일행에게 현장에 가자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답사는 늘씬하고 굵은 최상의 소나무들을 본 일정이기도 했다. 그랬으니 고성에 갔다면 아마도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나무 상황을 보며 마음이 많이 착잡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숲해설사 동기방을 통해 고성 현장 소식을 들었다. 뉴스나 사진을 통해서는 별 감응이 없겠지만 직접 가서 보면 처참하다는 것이 동기의 전언이었다. 나무의 나이테(annual zone)에는 나무의 나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세한 기상현상까지 전부 담긴다. 화재도 예외가 아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보도이지만 공룡이 살아 있던 백악기 중기 지층에서 당시 살아 있던 나무 뿌리와 포자, 꽃가루 화석이 발견되었다.(202042일 연합뉴스 기사 얼음 덮인 남극, 9천만년 전 공룡시대 땐 울창한 숲이었다‘..영국 노섬브리아 대학교 지리환경과학과, 독일 헬름홀츠 극지해양연구센터 알프레드 베게너 연구소 과학자들) 이는 공룡시대에는 남극이 울창한 숲이었음을 말해준다.

 

남극의 만년설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찾다가 이런 뜻 밖의 사실을 접하게 되니 금맥이라도 찾은 듯 하다. 남극과 그린란드 등에 내린 눈이 얼어 형성된 만년 빙하라 해온 얼음층을 분석하면 눈이 내릴 당시의 기온을 알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는 세계사’ 17 페이지) 기후를 포함한 자연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큰 강과 비옥한 범람원이 없는 관계로 땅이 척박했던 그리스는 농업 기반이 제한된 까닭에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만드는 대신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를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그리스에 수준 높은 토론 문화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생겼고 이는 과학 발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저술가 필립 블롬은 소빙하기(14세기 초부터의 몇 백년 동안)가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주장을 한다. 날씨가 추워지자 곡물 수확이 감소했고 이는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의 사회질서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 봉건 체제에서 잉여 생산물이 없게 되자 농노들은 봉건 영주에게 바칠 것이 없어지고 수확이 급감한 지역은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야 했기에 화폐가 결정적으로 확대 사용된 것이다.

 

조선 시대 사회상도 기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기상 재해가 빈번했던 시기가 중종(71), 현종(60), 명종(40) 재위시다. 바로 이 중종 13년인 1518년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왕에게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으나 후에 다시 지진은 물론 우박과 수해까지 이어지자 조광조 세력은 훈구파의 역공에 속수무책이었다. 즉 훈구파는 조광조 세력이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기후 문제이기도 하고 조광조의 미숙한 대응이 초래한 문제이기도 하다.

 

충북대 박원규 교수는 목재연륜학적 조사를 통해 1835년에서 1848년 사이에 혹독한 저온기가 있었음을 밝혀냈다.(2010514일 사이언스 타임즈 기사 ’‘나이테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시기는 헌종 재위기(1834 1849)와 거의 일치한다. 헌종은 혹독한 저온기가 시작되기 1년 전에 임금이 되었고 그 시기가 끝난 지 1년 후 승하했다. 헌종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임금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이 건물은 헌종이 승하하기 2년전 건립된 건물이다.

 

대체로 이 건물은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이라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혹독한 저온이 재위 내내 이어져 기근이 일상적이었는데 무슨 여유가 있어 단청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치스러울 수 있었는데 검소하게 지었다면 대단한 것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당연히 검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여유가 없는데도 사치스럽게 지은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대단한 일인 양 말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여유가 있는데 검소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헌종의 경우 혹독한 시기에 낙선재를 지은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역학만 헤아리는 것도 문제고 자연 조건에 너무 비중을 두고 사태를 보는 것도 문제다. 단 역사를 자연을 키워드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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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설립된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한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보다 무려 34년 먼저 설립되었다. 지질 해설을 하기에 자연사박물관에 관심이 많지만 내가 실제 가본 자연사박물관은 재작년 11월 문화재지킴이 전국대회에 참석한 뒤 들른 목포 자연사박물관(1983년 목포 향토문화관이란 명칭으로 개관, 1998년 자연사문화박물관으로 개칭, 2003년 자연사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2004910일 정식 개관)이 유일하다. 

 

자연사박물관도 역사가 긴 유럽 국가들이 먼저 설립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자연은 아름답고 독특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곳들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래서라도 자연사박물관은 필요하다.(자연사박물관의 교육 및 파급효과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한다.)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이 설립되기 전인 2001년 기준이지만 당시 이미 150개의 자연사박물관을 갖춘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수준은 너무 초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보다 경제면에서 많이 뒤떨어진 방글라데시나 우간다도 이미 10여개의 자연사박물관을 갖추었다니 충격이다.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은 학교나 개인이 아닌 지자체가 직접 기획해 만든 첫 구립 자연사박물관이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내가 고민할 바가 아니다.(자연사박물관은 일반 박물관들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한다. 표본을 잘 보관하고 전시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시설이 받쳐줘야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나라의 국립 자연사박물관 설립 계획은 예비타당성조사 단계에서 막힌다고 한다.) 늘 최적의 조건을 갖출 것을 목표로 열심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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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
랜디 올슨 지음, 윤용아 옮김 / 북스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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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자주 듣는다. 당연하지만 재미 있는 강의도 있고 지루한 강의도 있다. 지루한 강의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강사가 주제 없이 정보들을 나열하기만 해 재미 없었다.” 물론 이 말은 반만 맞는다.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해도 주제가 없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라면 강사가 정보들을 나열하기만 한 것은 사실이기에 맞는 말이다. 내가 잘못 파악한 부분은 무엇인가?

 

저자는 ABT(and, but, therefore) 구성을 제안한다. 그리고, 하지만, 그러므로 구성이다. 가령 캔자스의 농장에 한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무료하다. 하지만 어느 날 토네이도가 그녀를 휩쓸어 신비한 나라 오즈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같은 문장이 바로 전형적인 ABT 구성의 문장이다.

 

그런가 하면 AAA(and, and, and) 구성은 어떤가? 가령 이런 문장이다. ”사람들이 걷는다. 그리고 몇몇은 개를 데리고 있다. 그리고 해가 쨍쨍하다. 그리고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가? ABT 구성은 흥미를 유발하는데 비해 AAA 구성은 지루하고 재미 없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정보의 나열은 이야기가 아니고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저자에 의하면 서사 또는 이야기는 문제 해결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223 페이지. 언급된 게 정보뿐이라면 이야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224 페이지)

 

저자는 이채(異彩)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뉴햄프셔대학교 해양생물학과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남가주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에 진학에 할리우드 영화계로 진출한 것으로 저자의 삶이야말로 ABT 구성을 보인다. 오디세우스를 좋아해 랜디와 오디세우스를 결합해 랜디세우스라 자칭하는 저자는 하버드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호주의 그레이트베리어리프의 한 섬에서 1년을 살았고 남극의 빙하 밑으로 다이빙도 했고 반 마일 깊이의 심해에서 잠수도 했고 60피트 깊이의 해저 서식지에서 일주일이나 지냈다.

 

그리고(A) 해양생물학과의 종신교수가 되었다. 하지만(B) 동부의 과학 세계를 떠나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향해 영화학과 석사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T) 그에게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는 것이었고 언젠가는 과학계로 돌아가 할리우드에서 배운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과학계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20년이었다.

 

과학계와 영화계를 모두 경험한 저자는 그 두 분야의 특성을 이렇게 파악한다. 과학은 서사의 구성과 진행을 따르는 분야지만 과학자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과학자는 학부 시기에 인문학을 건너뛰고 과학자로서만 최대치의 훈련을 받기 때문이라고.(65 페이지)

 

38세의 나이에 새로운 여정에 들어설 때까지 서사의 힘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이 목격한 베테랑 시나리오 작가의 경우 서사적 직관을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귀띔한다.(서사적 직관이란 말은 이야기 센스라는 말을 인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학계의 안주(安住)는 정년 보장과 큰 연관이 있다. 이에 비해 할리우드는 과거의 화려함이 어떻든 흥행에 한번 실패하면 언제 재기할지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면 청중이 흡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뇌는 특정한 방법으로 엮인 정보가 필요하다,“(54 페이지) 관건은 복잡한 사실을 구체화해 간결하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전이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 결과 재미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뇌 반응도는 낮고 재미 있는 이야기에는 높다. 중요한 사실은 서사가 없으면 지루하고 있으면 흥미롭고 과도하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23 페이지)

 

단 서사적 직관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35 페이지) 정리하면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해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ABT 유형의 사건 또는 반전이 알맞게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강조점도 필요하다. 가령 진화론이 빠지면 생물학은 그저 잡다한 요소가 된다. 어떤 요소는 흥미롭고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의미 있는 큰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같은 말을 보자.

 

진화론 즉 서사가 빠지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지만 잡다할 뿐이라 말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피치라는 말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자신의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핵심을 간결하고도 인상 깊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ABT 구성에 맞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쓴 숭의전에 대한 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반전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자주 언급했다.

 

임진(臨津)팔경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파주 지역에만 국한되었지만 연천 지역에도 팔경이 있다고 한 점도 그렇고 이성계가 예성강에서 띄운 돌배<석주; 石舟>가 임진강까지 흘러왔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며 실제 여부를 말하지 않고 강() 또는 물길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한 점도 그렇다.

 

저자는 과학자에게 효과적 커뮤니케이션의 짐을 지라고 말한다. 수십 시간의 고민을 하고 몇 차례의 원고를 거치고 자료를 다듬어 청중의 뇌에 있는 둥근 수용기에 부드럽게 들어맞을 원통형 발표를 만들라는 것이다.(131 페이지) AAA는 귀납법이고 ABT는 가설연역법이다. 가설연역법은 발견된 패턴을 설명할 수 있을 법한 모든 가설 중에서 고민하고 실험하기에 시간 낭비인 것부터 쳐내는 방식이다.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이어가는 것은 반전이고 They say..I say 형식의 문장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의 문장이다. ‘하지만을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은 필연적이다. 스토리텔링에서 갈등은 음악에서 소리와 같다.(141 페이지) 서사의 방향은 한 번만 바꾸는 것이 좋다.

 

DHY는 그런데도(Despite), 할지라도(However), 그렇지만(Yet)을 의미한다. 서사가 너무 많은 경우다. ABT에 단어는 몇 개여야 적당한가? 직관에 따라라. 정해진 길이는 없다. 때에 따라 한 개 이상의 ABT가 필요할 수도 있고 청중이 누군가에 따라 각기 다른 ABT를 작성해야 할 수도 있다. 궁극적 목표는 서사적 직관을 기르는 데 있다. 직관적으로 서사의 문제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171 페이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황금열쇠를 선별해낼 수 있는 서사적 직관이 필요한 것이다.(173 페이지)

 

ABT 구조를 잘 잡으면 사람들이 강연자의 주장을 따라가기 쉽고 강연자도 자신의 글을 기억하기 쉽다.(204 페이지) 이는 나도 평소 공감하던 바이다. 다만 나는 흐름이 좋은 글은 글쓴이 스스로 기억하기 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자는 수없이 많은 과학책을 읽었지만 내용의 핵심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은 거의 없다고 말하며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은 예외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나선은 여러 부분이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말한다.(204, 205 페이지)

 

저자는 왓슨의 책이 유명한 것은 생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 책이 서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에 의해 집필되었다면 밋밋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공감한다. 하지만 내용(사건)과 서사적 역량이 함께 중요한 것이 아닌지? 서사적 역량만으로 밋밋한 이야기를 멋지게 이끌고 갈 수 있을까? 물론 이야기 거리가 되는 사건을 찾(아 쓰)는 것이 관건이긴 하다.

 

저자는 아직도 서사의 세계라 말한다. 과학 연구 지원 단체의 이야기가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즉 그들은 현존하는 것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 대한 실험에는 관심이 없다. 모두 뚜렷한 패턴이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지원하고 싶어한다.(239 페이지) 저자는 서사라는 것은 평생의 공부이며 누구도 완벽한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261 페이지) 아무리 스필버그라도 그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있다. 이것은 끝없는 도전이다.(262 페이지)

 

사실 저자는 할리우드로 진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정보와 방향이 잠재되어 있어서 정리하려면 며칠 더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적법한 훈련과 시각을 통해 누구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자 가르침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저자가 만난 가장 완벽한 과학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다.(내가 좋아하는 과학자여서 반가움이 크다.) 다시 굴드의 책들을 정독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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