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모험 -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
황산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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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글쓰기의 모험’은 파스칼, 니체, 블랑쇼, 바르트, 사르트르, 벤야민, 들뢰즈, 데리다 등 여덟 명의 철학 거장들에게서 건져올린 글쓰기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여덟 철학자는 현대 철학의 거장들이다. 이 철학자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현대적 글쓰기를 배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황산의 이 책은 글쓰기의 요령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고 현대적 글쓰기의 기본이 되는, 파스칼에게서 비롯된 논리적이고 명료하고 간결한 글을 먼저 염두에 둘 것을 주문하는 책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파스칼에게서 비롯된 근대적 글쓰기 방식을 익히되 그것을 넘어서는 글을 써야 한다. 저자도 언급한 바이지만 자신이 호명한 여덟 철학자는 대부분 프랑스 철학자(파스칼, 블랑쇼, 바르트, 사르트르, 들뢰즈, 데리다)이거나 프랑스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 철학자(니체, 벤야민)들이다.

 

니체는 완성품으로서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예술의 특성 때문에 천재 신화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43 페이지) 니체는 천재성이나 위대한 작품은 수공업적 성실성의 결과라 보았다.(44 페이지) 니체는 자기의 체험이 반영된 진짜 자기 글을 쓸 것을 주문했다. 니체는 규정적인 질서나 체계에 묶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과 고유한 차이를 지녀야 하고 두려움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늘 새롭게 발견할 때 새로운 자신만의 방식의 글을 쓸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말한 초인을 글쓰기로 말하자면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경계를 넘어서며 언제나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감행하는 자라 할 수 있다.(54 페이지)

 

블랑쇼는 글쓰기는 글 쓰는 이로부터 펜을 앗아가는 절망 속에서만 그 근원을 갖는다는 말을 했다. 물론 저자는 지독한 불행이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식으로 블랑쇼를 오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혹한 시련이나 칠흑 같은 밤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겸허하게 출발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77 페이지)

 

‘사랑의 단상’의 저자인 롤랑 바르트에게 글쓰기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랑의 주체는 불안정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우 순박한 텍스트를 쓴다.(92, 93 페이지)

 

사르트르는 작가란 세계의 실상을 드러내고 그 드러냄을 통하여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고 보았다.(105 페이지) 사르트르에게 작가는 창조자 즉 신과 같은 존재다. 사르트르에게 창조적 과정은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는 자기 구원의 경험이자 성스러운 행위였다. 일상 가운데 행해지는 구도 행위이자 종교적 의례 같은 것이었다.(108 페이지)

 

사르트르 글쓰기론의 또 다른 특징은 타자를 위한 글쓰기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란 작가의 자유와 독자의 자유가 만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조물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작가가 독자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는 신중함과 존중의 태도다.(116, 117 페이지)

 

벤야민은 아이들 세계의 규범들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은 벤야민의 예술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메시스 개념과 연결된다. 인간 특유의 미메시스 능력으로서 유사성 관계가 조성되는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현상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다.(127, 128 페이지)

 

벤야민은 비평의 기능은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순수예술의 가면을 벗겨내고 예술의 중립적인 터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131 페이지) 비평은 환기시키는 힘이자 살리는 힘이다.(132 페이지) 벤야민은 서평을 비평의 중요한 영역으로 생각했다. 저자는 서평가들이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책들만 다루게 되면 정작 다루어야 할 작품들이나 글들은 배제되어 버린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게 작품에 대해 비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나 다루어야 할 중요한 작품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비판은 해야 하는 과제는 언제든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비평은 텍스트 너머의 콘텍스트 전체를 비평하는 것이라 말했다.(134 페이지)

 

벤야민은 최고의 읽기를 필사(筆寫)로 보았다. 벤야민에 의하면 필사는 도보여행, 단순한 읽기는 비행기 여행이다. 벤야민은 좋은 비평은 비평적 주석과 인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인용 역시 아무런 창조성의 개념이 없는 편집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의 어떤 부분을 발췌하는 데에도 발췌자의 관점과 시선이 담겨 있으며 인용문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에도 인용자의 관점과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인용 본문의 선택 자체가 창조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 자체가 비평이다.(138 페이지) 일상 가운데 소소한 것들을 모아 쉼 없는 작업을 거쳐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는 일, 이것이 글쓰기다.(144 페이지)

 

질 들뢰즈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오직 하나의 꿈만 추구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글쓰기와 삶을 구분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이는 자신의 삶에 주목해야 하고 삶의 경험 속에서 글을 길어올려야 한다.(151 페이지) 들뢰즈는 배치를 다르게 하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문학의 새로운 배치를 고안하고 실험하라고 요청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저자는 주어진 배치 안에서만 글을 쓴다. 작가는 새로운 배치를 고안하고 새로운 배치 관계로 들어가 다양한 것들과 공명하며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이다.(152, 153 페이지) 창조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들뢰즈편에서 논의되었다. 창조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65 페이지) 들뢰즈는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 나 자신을 차이 나는 새로운 나로 만들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168 페이지)

 

데리다는 글을 쓰는 것이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작가의 부재를 강조했다. 작가의 부재란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가 사라진다는 말이다.(180 페이지)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작가 자신에게 귀착하는 글쓰기를 지양하라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바는 글을 통해 어떤 의미나 사상을 전달하려 하기보다 그냥 흔적을 남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쓰고 독자가 작품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냥 문지기로 남기로 마음 먹으면 편하다는 것이다.(186 페이지) 데리다는 유령(幽靈)론의 발원지이다. 유령이란 사본(寫本)의 세계를 말한다.(저자는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은 칸트의 숭고, 벤야민의 아우라, 라캉의 실재, 들뢰즈의 ‘정동; 情動; affect‘과 유사한 것이라 말한다..정동이란 말보다 ’감응; 感應’이 어떨지?)

 

데리다는 이 세계를 본질, 근원, 기원이 없고 차이만이 드러나는 사본의 세계로 보았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자기답게 쓰는 것, 자기답게 사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만의 글을 쓰는 것이다.(196 페이지) 삶과 글쓰기가 하나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저자는 글쓰기란 사랑하는 일이라 말한다.(214 페이지)

 

‘글쓰기의 모험’은 글쓰기의 기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글쓰기의 의미, 본질 등을 제시한 책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 여덟 철학자의 사상을 잘 정리해 지침과 연결시킨 책이다.

 

자기 글을 쓰고 매일 쓰고 사람의 삶이 담긴 따뜻한 글을 쓰라는 말 등이다. 책 전편을 통틀어 내게 가장 시사적인 말을 만났다. 그것은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재료의 구성이 새로운 것이다.”란 파스칼의 말이다.

 

이 말에 내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에 따라 다른 사람의 글을 재배치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란 말이다. 인용 본문의 선택 자체가 창조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 자체가 비평이라는 벤야민의 생각도 내게는 크게 반가운 지침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중요한 말은 삶(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가는 것)은 글쓰기와 같다는 말이다. 그 두 영역(삶과 글쓰기)이 잘 조응하도록 애쓰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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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에 힘들었지만 해설과 글쓰기 등과 관련해서는 가장 좋은 해였던 2020년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천자문에 나오는 미단숙영(微旦孰營)이란 구절이다. ()은 주()나라의 주공(周公) 단을 지칭하고 미()는 작을 미로 많이 쓰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아니라면이란 의미로 쓰였다. ()은 누가라는 의미다.

 

그러니 미단숙영이란 주공 단이 아니라면 누가 경영하겠는가?란 말이 된다. 경영이란 개인 차원이든 단체 차원이든 어려운 일이다. 계획은 내실(內實) 있지 못했고 실천은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 내 2020년이었다. 올해는 다를 것이다. 장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에 신경을 쓰는 정도가 지난 해보다 다르기에 희망적인 2021년의 벽두(劈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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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해 동안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글자는 무엇일까? 2음절 이상은 생각나는 것이 없고 1음절 단어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평(平)이란 글자다.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지난 11월 고석정(孤石亭), 마당바위, 송대소(松臺沼), 직탕폭포(直湯瀑布) 등 철원의 지질공원 코스에서 평화(平和)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나름으로는 잘 대처했다고 자평하며 말한 바를 소개하면 송대소의 적벽(赤壁)에서 “적(赤)이란 글자가 있지만 한자에는 이 글자 외에 붉음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더 있지요. 단(丹), 주(朱), 홍(紅), 자(紫) 등이지요.. 공자(孔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붉은 색(‘주; 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했지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평화란 섞였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서 배제해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일방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요. 이 이야기가 오늘 제가 평화를 주제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지요. 조화를 지향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란 말을 한 것이다.

 

이제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에 대해 이야기 하자. 2019년의 일이니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이유로 말하려는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2019년 9월 2일이 내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일이다. 하지만 이 날은 그저 자격증을 받았을 뿐이니 정식 데뷔일이 아니다. 내가 지질로 첫 해설을 한 것은 2020년 1월 3일이다.

 

2019년 9월에서 1년이 넘은 2020년 11월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만날 오리산과 680미터 고지가 있는 평강(平康)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지질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느냐?” 물론 이는 나를 겨냥해 나온 말이 아니었다.

 

시위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원뜻과, 이에서 나아가 방법만을 가르치고 스스로 핵심을 터득하게 함을 이른다는 수사(修辭)로 쓰이는 것까지 두루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란 말이 있지만 전기한 분은 그 지침을 그르친 것이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내가 시연한 좌상바위 지질 해설을 주의깊게 들은 분이었다.

 

그랬으니 내가 아우라지 베개용암, 백의리층, 재인폭포 등을 50만년전에서 10만년전 사이에 오리산 등에서 분출해 흘러온 용암으로 만들어진 명소들이라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불가피하게 언급했지만 짧게 필요한 부분만을 다룬 것임을 알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평강에 대해 잘 모른다. 수십만년전 화산 분출로 연천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북한 강원도 평강군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지질학자들과 해설사들, 그리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아우르는 당사자들이다. 이제 같은 평(平)자가 들어 있는 평양의 한 궁궐에 대해 이야기 하자.

 

평강처럼 공교롭게 같은 평(平)이란 글자를 쓰는 이 도시는 당연히 평양(平壤)이다. 평양에는 풍경궁(豊慶宮)이란 궁궐이 있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경복궁을 확장해 짓기까지 한 고종은 평양에 360칸이나 되는 풍경궁이란 행궁(行宮;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특진관 김규홍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 아뢰자 고종은 짐은 벌써부터 이에 대하여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중신(重臣)이 상소를 올려 논하였으니 이제 평양에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백성들이 시의적절하지도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토목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뜻으로 신문고를 치자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아 생긴 현상이라 답한 임금이었다. 그에게 평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종에게 평양은 관서(關西)의 요충지이기에 방비를 강화해야 하므로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경운궁 즉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우측에 전각이 있었으나 1904년 원수부 폐지 이후 건물이 헐렸음)로 하여금 평양 친위대를 재편하라고 명한 곳이었다.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평양에 지은 행궁인 풍경궁은 자혜의원으로 전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멸실(滅失)된 뒤 현재는 그 터에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 평강의 오리산과 평양의 풍경궁(터)...두 곳 모두 갈 수 없는 가운데 평강은 일반인들(예컨대 소이산에 오르는 분들)에게 익숙한 반면 풍경궁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남한 지역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원수부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교과서에 실렸는가 여부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시설이든 인물이든 사건이든 무슨 맥락에서 알게 되는지가 관건이다. 망국 군주(무능함과 무책임함, 반민중적 등)로서의 고종이 주제가 아니니 짧게 말하자면 오늘 주제로 이야기 한 풍경궁은 고종의 어이 없는 허식(虛飾)을 말하는데 필요한 시설이다.

 

연천에는 장수왕(5세기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임금)의 평양 천도가 계기가 되어 축성된 호로고루가 있다. 우리는 연천이 한국전쟁 이전 북한 지역이었다가 수복된 곳이라는 데에 안도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 북한 지역이 아니기에 호로고루를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감사하게 된다.

 

평(平)은 의미 있는 뜻들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 고르게 하다, 가지런하게 되다, 편안하다, 무사하다, 이루어지다, 바르다, 갖추어지다, 사사로움이 없다, 화목하다 등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단어는 올해가 아닌 내년에 더 필요한 단어다. 평화(平和)란 입('구; 口')에 밥(’화; 禾‘)이 고루(’평; 平’) 들어가는 것이라 파자(破字)해 말하곤 하지만 2021년의 나에게 평화(平和)의 시작은 음식을 평탄하게, 그리고 울체(鬱滯)되지 않게 먹는 것이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나는 올해보다 더 좋은 내년을 염원하며 마음이 평온한 와이제너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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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암석(巖石)인 맨틀, 액체인 외핵, 고체인 내핵 등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맨틀은 망토(cloak)라는 말에서 비롯된 말로 바깥 부분을 뜻한다. 한글 자판으로 설정하고 cloak을 입력하니 ‘치ㅐ마’라는 글자가 된다. 재미 있는 글자다.

 

ㅐ에 해당하는 o를 빼고 한글로 설정한 뒤 clak를 입력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관련 단어가 결과로 도출되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clak(으)로 검색하시겠습니까?란 문구가 떴을 뿐이다. cloak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로 프랑스어에서 온 manteau가 있다.

 

어원학은 모르지만 맨틀과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단어를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그것은 아니고 정리를 위해 수고를 감수한 것일 뿐이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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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지음 / 사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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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의 말이다.(니덤은 미국의 천문학자 루퍼스; Will Carl Rufus‘; 1876-1946’가 세계 학계에 소개한 석각 천문도; 태조가 명해 제작한 석각 천문도를 바탕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이 말은 찬사지만 아쉬움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 그리고 한국은 천문학 분야에서 정체되거나 15세기의 성과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의 지리적 안목도 가졌었다. 이 사실은 사라진 원본 대신 모사본이 일본 류코쿠 대학(龍谷大学)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증명하는 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후 조선은 16세기 초 훨씬 퇴보한 혼일역대강리지도라는 지도를 만들었다.

 

정성희의 세종의 하늘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을 다룬 책이다. 조선은 자신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구려 천문도를 이용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바로 그렇게 이성계가 4세기 무렵 고구려 평양에서 각석(刻石)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관서인 서운관 관원에게 명해 탄생한 천문도다.(지도가 땅의 모습을 구현; 具顯한 것이라면 천문도는 하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태조본 석각 천문도에는 입성; 立星이란 별자리가 있고 태조본을 토대로 만든 숙종본 석각 천문도에는 건성; 建星이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같은 별자리이지만 고려 시대에는 왕건(王建)의 건 즉 세울 ; 을 피휘해 뜻이 같은 설 ; 자를 써서 별자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면 조선 건국세력은 고려 천문도를 고구려 천문도라 주장한 것이 된다.)

 

하늘의 형상을 차()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린 그림이란 뜻의 이 천문도는 1241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다음으로 오래된 유산이다.(차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적도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나눈 12구역을 말하고,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를 12구역으로 나누어 땅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을 말한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군주는 하늘의 천문 현상을 단서로 삼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의 현상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제왕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5 페이지) 세종도 임금이 덕을 닦으면 일어날 일, 월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경(詩經)’의 말을 믿었다.(54 페이지)

 

전통시대 사람들은 신하가 군주의 권능을 침해할 때 일식(日蝕/ 日食)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일식을 용이 태양을 삼키려는 것으로 이해해 용을 쫓아 태양을 구하는 구식례(救食禮)를 치렀다. 우리 조상들은 일식을 신하를 상징하는 달이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잠식하는 현상 또는 강한 음기가 쇠약한 양기를 압도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구식례는 퍼포먼스였다. 북을 치고 활을 쏘는 등 달을 향해 공격을 하고 제단에는 희생(犧牲; 종묘제사 등에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바쳤다.

 

반면 가뭄에 대해서는 일식과 달리 존귀한 양()이 비천한 음()을 소멸시킨 현상으로 생각하고 조용히 기우제를 올리며 비가 내리기를 수동적으로 요청하는 등 난리를 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종을 만들어 쳤다. 시간을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을 알리려는 데에 더 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면 28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가운데 인정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파루는 우리 고유의 것이다.(64 페이지) 조선시대에 시보(時報)는 민간에 대한 통치 수단이자 지배층의 시간 관리를 위한 방편이었다.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88 페이지)

 

고종 21년인 1884년부터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에 대포를 설치하여 종 대신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렸다. 1895년부터는 인정과 파루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신 오정과 자정에만 시간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조선과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에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관상수시(觀象授時)라 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 사돈인 심온을 제거하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힌 태종은 그래서인지 하늘의 재이(災異)에 민감했다. 재이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이르는 말로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을 지칭한다. 태종은 누구보다도 하늘이 재이를 내려 인간을 꾸짖는다는 천견(天譴) 사상을 굳게 믿은 왕이었다. 조선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킨 세종도 천견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세조는 왕이 근신한다고 해서 혜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천인감응론에 바탕을 둔 재이론이 점차 극복되어간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과학의 수용 등으로 자연관이 변화한 결과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하늘의 일은 천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천자만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관상수시는 사대의 예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제후국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갖는 것은 종주국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천문을 정사(政事)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들여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설치했다.(103 페이지) 그런데 세종은 비용을 많이 들여 백성들이 힘들게 지은 간의대를 헐고자 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반대가 극심하자 결국 중국 사신이 볼 수밖에 없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했다는 말을 했다.(103, 106, 108 페이지) 간의대는 세종의 의지대로 경복궁 북서쪽으로 이전되었다.(109 페이지)

 

세종이 만든 간의대는 중국 원나라 천문가인 곽수경이 1279년에 건립한 사천대(司天臺)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109 페이지) 곽수경의 업적 중 가장 찬란한 것은 수시력(授時曆)이란 역법을 만든 것이다.(114 페이지) 수시(授時)서경(書經)’에 나오는 경수민시(敬授民時)에서 유래했다. 공경히 백성이 때를 잘 맞추도록 한다는 의미다.(115 페이지) 수시력의 완전정복은 조선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조선 세종 대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내편으로 인해서다.(칠정산은 움직이는 7개의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일곱 개의 별이란 해와 달 + 목화토금수성이란 다섯 행성을 의미한다.) 이는 곽수경의 수시력 계산법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선 실정에 맞게 교정한 역법이다.(116 페이지) 건국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시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동지사행(冬至使行)은 명 황제가 반포해주는 달력을 받기 위해 연경(북경)에 가는 일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도 연경과 조선 한양은 위도가 달라 시간이 달랐다는 점이다.(광화문; 37348, 북경; 3956)

 

세종은 백성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 임금이었다. 세종은 일식 시작 시각을 15분 어긋나게 예측한 이천봉(李天封)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물론 15분 오차는 이천봉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국과 시간이 다른 탓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현실에 맞는 천문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91, 92 페이지)

 

세종은 즉위 2년 후인 1420년에 경복궁에 내관상감을 설치하고 첨성대란 이름의 관측대를 세웠다. 우리 역사에서 천문 관측대는 고구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설치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시간, 인력, 경제적 부담 등 때문에 왕립 천문대 건립 염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세종은 이미 장영실 등의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천문대 건립 준비를 했다.(일행이 본 천문기기는 명나라 것이 아니었다. 1279년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천문기기였다.; 133 페이지)

 

세종의 천문 사업은 1432(세종 14)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1433년에 간의대(簡儀臺)가 축조되었고 1434년에 자격루(自擊漏)와 앙부일구(仰釜日晷), 1437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 해시계), 1438년 흠경각(欽敬閣) 옥루(屋漏) 등이 완성되었다. 1420년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18년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105 페이지)

 

세종이 이룩하고자 한 천문학은 바로 원나라 곽수경이 이룩해놓은 첨단 천문학이었다. 찬란했던 곽수경의 사천대는 명나라가 들어서자 운행을 멈추었다. 명나라는 천문이나 과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천문학은 원나라의 천문학을 그대로 답습했다. 과학에서 답습은 퇴보를 의미한다.(116 페이지)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니덤의 말을 인용했거니와 이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천문학에서 퇴보했기 때문이다. 물론 명의 퇴보만이 아니라 세종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니덤은 한국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에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15세기 초는 세종의 프로젝트 덕이고 17세기 초는 인조와 효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양 천문학 전래가 계기가 되었다.

 

전통 시대의 달력은 역서, 월력, 책력 등으로 불렸다. 이는 오늘날의 달력 이상의 농경 및 길흉화복 등의 정보가 담긴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앞 부분에서 장영실 일행이 명나라에서 보고 온 것이 원나라의 천문기기였다고 했거니와 이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명나라 천문대였다면 경비가 삼엄해 제대로 조사해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133 페이지)

 

장영실의 임무는 곽수경이 만든 보루각과 흠경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대로 모방하여 제작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천문의기 제작을 총감독한 이천(李蕆),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한 이순지(李純之),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개발한 장영실(蔣英實)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범 7년만에 완성된 천문 프로젝트도 놀라운 성과였다.(166 페이지)

 

구루(晷漏)란 말이 있다.(167 페이지) ()는 앙부일구(仰釜日晷)란 말에서 보듯 해시계를 의미하고 루()는 자격루(自擊漏)란 말에서 보듯 물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구루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르는 말이다.(일구라는 원문 그대로 풀이하면 해 그림자다.) 가마솥 시계라는 의미의 앙부일구는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지고 17세기 후반인 현종-숙종 대에 다시 제작되었다.(204 페이지) 경복궁 사정전 앞,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창경궁 풍기대 앞의 앙부일구는 17세기 후반에 만든 앙부일구 복제품이다.

 

일성정시의는 주례(周禮)’원사(元史)’ 등의 경전과 역사서에 소개된 별을 이용한 시간 측정 방법을 참조하여 세종 대에 독창적으로 제작한 시계다. 낮에는 태양의 운동을 통해,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장치다.(220 페이지)

 

세종의 하늘은 조선 역사와 과학을 조화롭게 다룬 책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천문학은 첨단 과학이었다. 전기했듯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은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다. 15세기 우리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정체되었다. 이는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의 한계 때문이라 짐작된다. 세종이 우리의 역법이 중국의 역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이 우리의 글이 중국의 글과 달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우리 글을 만들려고 결심하게 된 데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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