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신명기(申命記)의 원어인 deuteronomy는 두 번째 법, 되풀이되는 법이라는 의미를 갖는 말이다. 신명기의 한자인 申命記에서 申이 거듭 신이니 말이 된다. 命은 규정, 가르침, 도(道), 이법(理法) 등의 의미가 있다. 요즘 잘 안 쓰지만 거듭 당부하는 것을 신신당부라 하니 어법과 맞는다. 어떻든 철 관련 자료를 찾다가 신명기 8장 9절에 이르렀다.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고 산에서는 동(銅)을 캘 것이라‘가 그것이다. 


이 구절(9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噴泉)과 샘이 흐르고”(7절)와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8절)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다. 9절 중 ’그 땅의 돌은 철이고’를 ‘그 땅에서는 돌이 철이고’로 번역해 놓은 곳도 있다. 내가 찾은 자료(책)는 ‘그 땅의 돌을 취하여 쇠를 얻을 수 있고‘라 풀이해 놓았다.


정리하면 1) ’그 땅의 돌은 철이고‘(성경), 2) ’그 땅에서는 돌이 철이고‘(인터넷), 3) ’그 땅의 돌을 취하여 쇠를 얻을 수 있고‘(책) 가운데 3)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는 제철의 원료로 쓰이는 광석을 의미하는 철광석(鐵鑛石)이란 말에도 들어맞는다.  젖과 꿀만이 아니라 철(광석)과 구리까지라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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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
유창종 지음 / 경인문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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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의문로(彰義門路) 11가길 4(부암동 302-5)에 유금(柳琴) 와당박물관이 있다. ‘와당(瓦當)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저자인 유창종 선생은 검사 출신 재야 사학자다. 저자는 많은 고고학 전공자가 알지 못하는 와당의 학문적 의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주류와 비주류 사학자들 간의 지나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주변국과의 역사 분쟁에 획기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혔다. 저자는 고대사 연구는 형사사건의 수사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몇 개의 자료만을 가지고 추리력을 동원하여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에 그렇다는 의미다. 


저자는 30년의 검사 경력을 활용하여 수사하듯 와당의 수집과 연구를 하다가 한국 고대사의 여러 논쟁에 관하여도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책을 만난 것은 알라딘의 한 중고 서점에서다.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났다. 기후 변화 관점에서 본 고구려 전쟁사와 연천이란 강의를 위해서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다. 때마침 와당은 연천 소재 고구려 3대성 가운데 하나인 호로고루에서 출토된 것이기도 해 더욱 반가웠다. 연천 호로고루 홍보관에는 고구려의 영토 상황판이 마련되어 있다. 중원 고구려비(현재는 충주 고구려비)도 표시되어 있다. 충주의 옛 이름인 예성(蘂城)이란 이름을 넣어 지은 예성문화연구회가 있다. 저자가 1978년 발견한 충주 탑평리 출토 연화문 와당을 보고 만든 모임이다. 와당은 기와 지붕을 마감하는 건축재다. 


와당은 왕권 및 국력 과시를 위한 건축물에 쓰였다. 처음에는 왕궁이나 왕이 출입하는 사찰, 왕릉에만 와당을 만들어 치장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왕권의 대행자나 지방 관서, 왕의 친인척이나 귀족의 기와집에도 사용했다. 와당은 제작 시기의 문화를 해독해야 하는 암호이자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와당은 거의 전부 출토지가 제작지이고 사용지이다. 장소적 고정성(지붕 장식용) 때문이다. 와당은 중국 서주(西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서주 이후 건융족의 침입으로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중원의 화하족이 아닌 동서남북 주변의 다른 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불렀다. 


동이족은 예맥(濊貊)계, 숙신(肅愼)계. 동호(東胡)계로 나뉜다. 예맥계는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하였다. 숙신계는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에 살던 동이족으로서 말갈, 읍루, 여진, 만주족이라 불렸으며 금나라, 청나라를 세웠다. 동호계는 말을 잘 타는 기마민족으로 선비족과 거란족, 몽골족 등으로 불렸고 북위와 요, 원 등을 건국하였다. 이 네 오랑캐 외에 북방의 흉노족이 자주 화하족을 괴롭히고 심지어 조공을 받기도 했다. 와당이 사용되는 기와집은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보다 정착생활을 하는 민족에게 더 적합할 수밖에 없다. 동이족은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의 4이(四夷)로 분류되고 종족에 따라서 9이(九夷) 즉 구려(九麗)로 구분되며 구려가 모여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설명도 있다. 


한국은 단일민족이기보다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의 동이족 예맥계가 중심이 되어 다른 동이족, 그리고 흉노족의 여러 계파와의 이합집산으로 만들어진 민족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족(漢族) 역시 유구한 세월 동안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면서 혈연적 교류가 있었기에 순수한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역사상 중국은 여러 차례 그리고 장기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들 문화 속에는 이민족의 문화 흔적이 속속히 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황하문명은 한족들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시켜온 문명으로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4대 문명을 이룬다. 


그런데 근래 들어 황하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요하(遼河)와 대능하(大凌河) 주변에 황하문명 못지 않게 일찍 개화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요하문명의 주체는 동이족이다.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의 교류와 융합현상이 확인된 것은 와당을 통해서다. 두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한 것은 늦어도 서주(西周) 시대부터다. 요하문명의 문화주체인 동이족들은 고대부터 요하 지역에 많은 국가를 건립하고 독자적인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을 영위해왔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명확한 국경 개념도 없었고 민족 개념도 확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하 문명의 각 문화 유적이 어느 하나의 민족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고구려 최초의 연하문 와당인 국내성 왕릉 출토의 회흑색 연뢰형 연화문와당들도 당시 중국 대륙에 유행하던 구름문와당의 와당면을 구획하는 구도와 연화문 와당을 결합하여 수용하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구려의 특색이 있는 새로운 연화 문양을 창안해서 사용하였다. 427년 평양 천도(遷都)를 전후해 와당과 기와의 색상이 환원염(還元炎)으로 구운 흑회색에서 산화염(酸化炎)으로 구운 적갈색으로 바뀌면서 호쾌하고 생동감 있는 기상을 더 드러내게 되었다. 산화염으로 구웠다는 의미는 가마 안에 산소가 충분한 상태로 구웠다는 의미다. 


고구려는 중국의 어느 한 왕조의 와당 문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수용하지 않고 언제나 당시 중국에 존재하던 모든 와당문화를 종합적으로 융합하여 수용하면서 이 외래문화에 자신의 특성을 가미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집안 지역에 수없이 산재하는 고구려의 적성총을 보면 우하량의 유적과 유물을 남긴 문화 주체의 후예는 고구려일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중원의 한족들은 기본적으로 토광묘제를 답습하여 왔다. 같은 동이족 중에서 기마 민족의 성격이 남달리 강했던 동호계의 종족들은 빈번한 이동 생활 때문에 생존의 주거 건축물이라도 비교적 열악하고 사후의 묘제도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요하문명은 동이족 예맥계가 주도적인 문화주체였고 고조선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하 주변의 유적, 출토 유물과 가장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도, 요하 주변 문화의 수준에 걸맞은 문명과 문화를 계속 창조하고 향유해온 것도 동이족 예맥계이다. 그들 또는 그들의 일파가 한국인의 조상으로서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요하 문명은 고조선인의 문명이다. 중국에서 명명한 요하문명이라는 명칭보다는 고조선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 


저자는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 중 신단수 아래에 보이는 호랑이와 곰, 장천 1호분의 벽화 중 동굴에 혼자 남아 있는 곰 등이 단군신화를 표현한 것이라는 근거로 단군신화가 고구려 때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고 한 한 사학자의 견해를 탁견이라 말한다. 중국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늦어도 기원전 10세기 경에 고조선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요하문명이 발생한 요서 지역을 중심 강역으로 요동과 한반도까지 통치하는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연(燕)의 침공을 받아 강역이 축소된 뒤에도 200년 가까이 요동과 만주, 한반도를 통치하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국의 위상을 오래도록 견지한 나라였다. 


고조선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거나 정통성이 계승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점령지였던 한군현(한사군) 시대 또는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존재하던 시대로부터 시작되며 우리 민족의 뿌리조차 불명확해진다. 평양 모란봉의 기자(箕子) 묘를 발굴하였으나 벽돌 조각, 사기 조각 밖에 나오지 않았고 한반도 서북 지방이나 요동 지방에서 은상(殷商)의 유물이 거의 출토된 적이 없다.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록이 기원전 7세기 경의 ‘관자(管子)’에 등장하는데 기원전 11세기에 발생했다는 기자 동래(東來)에 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기원전 1세기 경에 이르러 한서 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시기적으로 보아서 한무제의 (고)조선정벌과 군현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고려에서 만들어낸, 사실과 다른 기록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다. 


기자조선은 고조선과는 별개로 난하 유역에 존재하였던 고조선의 제후국(거수국; 渠帥國)이며 이 기자 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원래 동이족이 세운 은상(殷商)이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이 모국인 조선으로 건너온 사실을 과장하여 기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저자는 기자가 고조선의 제후로 책봉되었다는 중국 사서의 기재 내용은 허구라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한일합방의 역사적 명분으로 삼으려 한 것처럼 한나라는 기자조선이라는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 단군조선 침략과 한군현 설치의 명분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를 큰 눈으로 훑어보면 우리 역사가 이민족에 의하여 완전히 단절된 기간은 실제로는 몇십년에 지나지 않는다.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군현이 설치되었으나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단기간에 소멸하였고 낙랑군이 실질적으로 관장한 지역은 고조선의 광활한 강역(疆域)에 비하면 그리 넓지 않았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 우리 민족은 바로 고조선의 북쪽 고토에서는 부여, 고구려 등이, 남쪽에서는 신라, 백제 등이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였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치하에서도 우리 만족은 상해임시정부를 설립하여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고구려 말로 구토의 회복을 다물(多勿)이라 한다. 구토는 고조선 땅을 의미한다. 다물은 고구려의 건국 이념 중 하나다. 


한군현을 멸하고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해낸 임금이 미천왕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중원 진출이 여의치 않자 남진 정책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양 천도를 했다는 견해는 고구려의 국가적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진시황(秦始皇)과 아들 진이세(秦二世)가 진황도까지 순행(巡行)한 것은 통일위업을 과시하고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하필 진황도를 마지막 목표 지점으로 삼은 것은 그곳이 바로 진이 통일한 영역의 동쪽 끝부분이자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고토이거나 그 인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말한다. 고조선이 별 볼 일 없는 소국이었다면 황제가 직접 순행까지 하며 공략을 구상, 지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중원을 통일한 진(秦)이나 한(漢)이 문화적, 정치적으로 패권을 다투던 고조선의 옛 수도 왕검성 인근에 다녀가는 것은 야심이 넘치는 두 황제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거동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였으며 영토의 동쪽 끝, 그리고 그들이 구경하지 못한 호쾌한 바다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조선의 불로장생의 묘약을 찾는 한편 더 넓은 천하통일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저자는 평양이 중국 지역이라는 주장을 전제로 고구려가 427년 천도하여 240년 또는 160년간 수도로 사용한 것이라면 요서나 요양에서 당연히 수도에 걸맞은 왕궁 유적과 그곳에 사용된 적지 않은 분량의 와당이 출토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최근 요양 인근에서 벽화고분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중국 학자들은 중국계 유적으로 보나 한국 학자들은 고구려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유적지에서 나온 적지 않은 연화문 수막새와 암막새는 고구려 초기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와당문화는 중국에서 출현, 발전하여 한국에 전파되었으나 고구려에 이르러 와당문화는 고구려적 특성을 지니며 창의적으로 발전하여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역수출된 것으로 본다. 고구려가 중원 진출이 여의치 않자 남진 정책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양 천도를 했다는 견해는 고구려의 국가적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가 졸본에서 건국하여 유리왕 때인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장수왕 때인 427년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427년 천도하였다는 지역에 관하여 비주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중국 북경 북쪽의 조선하 유역에 있던 현재의 요서 평주 지역이라는 주장,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라는 주장, 현재의 요령성 요양현이라는 주장 등이다. 이런 요서나 요양에서 대동강 평양으로 재천도한 시기에 관하여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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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공부를 하다 보면 접하게 되는 평양(平壤) 관련 글을 검색하다가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 평양 아닌 중국 랴오닝성이란 기사에서 이관홍이란 이름을 만났다. 해수면 변화와 지질 등 자연환경 특성에 관한 과학적 고찰을 보여준 인하대 해양학과 교수다. 알라딘에서 검색을 하니 4기 지질시대 연대측정방법이란 책의 공역자 중 한 분이다. 놀라운(?) 사실은 나에게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다. 지질 책이 꽤 있는 편인데 아직 어려워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 4기 지질시대 연대측정방법이란 책이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아야겠다.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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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문화유산해설사 수업 과정 중 만난 한 경상도 출신 동료는 신라의 주령구(酒令具)를 보고 신라가 그렇게 흥청거렸을 리 없다는 말을 했다. 경주 안압지 뻘 속에서 출토된 주령구는 술을 마실 때 그 방법을 알려 주는 주사위란 의미다. 단순히 유흥(遊興)의 도구를 가지고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라를 싫어하는 나는 출토가 알려주는 사실이 아닌가요?란 말을 했을뿐이다. 나는 왜 신라를 싫어하는가? 신라가 통일을 했기에 우리가 대륙을 잃게 된 것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라가 통일을 이루었는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시도 신라를 싫어하고 고구려를 좋아했지만 연천에서 해설을 한 2020년 이래 고구려가 더욱 매력적인 나라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 475년 남진(南進; 491년 장수왕 사망) 이래 551년부터 고구려 멸망시까지 약 120년간 호로고루 아래 임진강이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하천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들어왔다. 
    신라쪽 자료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올 7월 신간으로 나온 관련 책을 알게 되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동북 경계의 변화, 7세기 후반 이후 서북 경계의 변동 등의 챕터가 있는 책이다. 
    문제는 8월 16일 한 번의 강의를 위해 구입하기에는 책값이 비싸다는 점이다. 물론 책 값보다 신라 책이기에 고구려 관련 자료를 찾는 입장에서 자료를 확보하려는 나에게는 마땅치 않은 과(過)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 열람 코너를 통해 읽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국립중앙도서관 책바다 검색을 통해 아직 어떤 도서관에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천군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는 것은 11월에 가능하다. 
    1월, 4월에 이어 신청한 7월치 세 권 중 하나를 취소하고 앞에서 말한 책으로 바꿀 수 있겠지만 8월 16일 이전에 받아보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한 권이 있다고 하니 열람하기 위해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책 하나만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 지난 달에는 ‘추가령 구조곡의 지형‘을 열람하기 위해 교보에 갔었다. 한 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였다. 그런데 가서 검색을 하니 재고가 없다는 문구가 떴다. 허탈함이 컸다. 이 책은 연천과 밀접한 추가령 구조곡에 관한 책이어서 지역의 ’달리는 달팽이‘ 서점에 주문했다. 

    강의를 위해 설정한 키워드들은 전쟁, 천문, 철, 말, 수레, 성(城), 비(碑), 기후, 지질, 벽화, 해양 강국,  유목과 농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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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 고구려인들의 삶의 원형을 찾아서
    김용만 지음 / 바다출판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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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에는 고구려 관방(關防) 유적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인 호로고루 전시관 앞에 실물 크기의 모형 광개토왕릉비가 서 있다. 2002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북한 만경대창작단이 만들어 전시(북녘에서 온 고구려 특별전)한 것을 연천에 기증한 것이다. 이 비가 없었다면 호로고루를 해설할 때 장수왕을 이야기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호로고루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와 백제 공격(475) 이후 만든 강안평지성(江岸坪地城)이다. 고구려 박물관이 생긴다면 좋겠다. 김용만 씨의 책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읽는다. 나온 지 26년 된 책이다.

     

    가지고 있는 책은 2004년에 나온 책이다. 저자의 이전 작인 조선이 가지 않은 길’, ‘숲에서 만난 한국사에 이어 읽는 세 번째 책이다.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일부 담긴 숲에서 만난 한국사를 참고할 만하다. 고구려는 수레로 유명했던 국가이자 건축 선진국이었다. 고구려는 정착형 기마문명국이다.(14 페이지) 농경민의 장점과 유목민들의 기마문명의 장점도 동시에 가진 나라였다는 의미다.

     

    광개토왕은 즉위 초 거란을 정벌하여 소, , 말 등을 노획했다. 479년 장수왕(412-491년 재위)은 좋은 말의 산지(産地)이자 유목국가인 지두우(地豆于)를 유목제국인 유연(柔然)과 함께 분할하고자 했다. 439년 고구려는 해로(海路)를 통해 송나라에 800필의 말을 보내주었다. 북위와 적대적인 고구려가 송나라(劉宋; 420-479)가 북위를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돕기 위해 말을 보낸 것이다.(‘숲에서 만난 한국사’ 135 페이지)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 중국을 수시로 침략했다.(15 페이지) 고구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략질도 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국가였다.(42, 43 페이지) 고구려는 농경민의 장점과 유목민들의 기마문명의 장점도 가진 나라였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의 기간산업은 농업이다.(17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에 현재 남아 있는 무덤만 12,000기가 넘는다는 사실이다.(50 페이지) 무덤 만드는 것은 국내성 지역의 중요 산업이었을 것이다.(51 페이지)

     

    저자는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내성에 무덤이 너무 많아 경작지가 좁아졌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48 페이지) 유성운은 장수왕이 드넓은 만주를 놔두고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기후(한랭기 도래) 때문이라고 말한다. 5세기는 한랭화가 절정에 달한 시기다. 고구려로서는 강력한 북위(北魏)가 있는 중원(中原) 진출도 어려웠다.(‘한국사는 없다’ 103 페이지)

     

    오카모토 다카시 교수에 의하면 원래 식물들이 풍부한 곳은 환경이 약간 나빠져도 그 영향이 작지만 식물이 풍부하지 못한 곳은 환경이 나빠지면 그곳에서 살던 동물들은 생존의 위기에 빠진다. 따뜻한 곳이 추워지는 것보다 추운 곳이 더 추워지는 것이 더 심각하다. , , 오로 나뉘었던 중국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것은 280년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316년 남하하는 유목민족에 밀려 수도 장안이 함락되었다.

     

    이후 중원은 흉노, , , 선비, 갈 등 유목 민족들의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를 516국 시대(304-439)라 한다. 다섯 오랑캐 나라가 16개의 왕조를 세웠다는 의미다. 대만의 기상, 역사학자 류자오민은 그 시기 연평균 기온이 현재보다 섭씨 1도 정도 낮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 때는 중국 역사상 추위로 인한 재난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다.(‘한국사는 없다’ 101 페이지)

     

    기후 1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장기간의 평균 상태를 의미하는 기후에서의 1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상에서의 1도와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보자. 영상 30도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큰 변화가 있더라도 이를 평균하면 0(3030/ 2)가 된다. 하지만 영상 31도와 영하 29도를 오르내린다면 평균값이 영상 1(31-29/2)가 된다. 또한 1990년대에는 평균 기온이 섭씨 10도로 낮았던 특정 지역에서 섭씨 30도를 넘기는 무더운 날이 연중 7일이었다고 하면, 2020년대에는 같은 지역에서 지구온난화로 평균 기온이 섭씨 11도로 오르면서 섭씨 30도를 넘기는 무더운 날도 연중 15일로 늘어날 수 있다.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올랐다고 모든 지역이 균일하게 1도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 상당히 큰 기온 차이가 나타나도 전 지구적으로 평균하면 거의 일정할 수 있다.(남성현 지음 ‘2도가 오르기 전에’ 130, 131 페이지)

     

    고분(古墳) 축조는 단순히 노동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건축술을 가진 기술자, 도로와 수레, 각종 공구, 부장품 등과 관련한 수공업도 발달해야 가능하다. 벽화를 그리려면 최고의 화가도 필요하고 안료(顔料) 생산자와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주는 사람도 필요했을 것이다. 잉여 농산물은 물론 각종 고기, 생선 등의 공급이 원활해야 한다.(52 페이지) 안료는 물에 녹는 염료와 달리 물, 기름, 알코올 등에 녹지 않는 색소다.

     

    고구려는 말 외에 수레를 많이 사용했다. 수레는 짐을 대량으로 옮기는 데 유용하며 상업 발달, 도시 발달, 거대 건축물 축성 등 사회 전 분야 발달에 기폭제가 된다.(61, 62 페이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자를 옮기는 데 있어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고 했다.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것을 1이라 하면 말은 2, 수레는 10, 선박은 30에 해당한다.(문경호 지음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 194 페이지)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우리나라는 마을이 험준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았을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되면 길이 저절로 닦일 터,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만 걱정한단 말인가.”(2008년 그린비 출간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42 페이지)라고 말했다.

     

    고려는 원()으로부터, 조선은 명()으로부터 말과 소를 빼앗겨 수레 대신 가마가 지배층의 운송수단이 되었다. 조선은 농업만을 중시했다. 상업이 발달했다면 운송수단으로서 수레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의 침공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도로를 만드는 것에도 반대했다. 정조대왕이 화성행차를 할 때마다 한강에 배로 임시다리를 만들었을뿐 상설 다리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수레가 아닌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나르는 상업과 교통 후진국이었다.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고 전쟁수행능력도 미약했다. 외적의 침입에 무력했다.

     

    고구려는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5세기 중반 고구려 생활상을 보여주는 무용총(舞踊塚)에는 매우 커다란 수레바퀴를 단 수레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서는 수레가 귀족의 사치품이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이었다. 전차는 평지에서 싸울 때 유리하지만 고구려는 산성이 많아 전차가 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구려를 공격해온 중국의 군대들도 전차를 많이 활용하지 못했다. 고구려 말기의 수도였던 평양 장안성(長安城)은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구획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합쳐 만든 고구려 최대의 성이다.

     

    552년부터 짓기 시작해 586년 천도한 이후에도 593년 북성을 완성할 때까지 42년간 쌓은 장안성은 고구려 사회상황과 필요성을 충분히 감안해서 만들었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가 온달을 만나 살림을 차리면서 자신이 가져온 금팔찌를 시장에 내다 팔고 밭, 주택, 노비, 소와 말, 각종 기물 등을 구입했다.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부탁한 것은 시장인의 말은 사지 말고 꼭 나라에서 내다 파는 말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시장 거리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철 산지는 요동과 두만강 유역이었다. 고구려는 대흥안령 동쪽 눈강 유역에 자리한 실위(室韋)에 철과 금을 수출했다. 철은 매우 무거운 만큼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결코 수출할 수 없는 물건이다. 튼튼한 수레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구려가 고려와 조선에 비해 강성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수레의 활용을 통한 기동성과, 상업 발달로 인한 부의 축적이었다. 부의 축적이 있었기에 많은 군대를 거느릴 수 있었고 장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고구려 최고의 스타는 추모(鄒牟)왕이었다. 주몽(朱蒙)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구려는 서해와 동해를 내해(內海)로 가지고 있던 해상제국이었다. 고구려 초기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 중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의 이점을 얻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의 해상활동 발전을 가져온 한 계기는 광개토대왕의 남진이었다.(92 페이지)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발견된 곳의 당시 행정 구역이 중원군(中原郡)이어서 중원고구려비라고 명명하였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주고구려비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영락 6(396)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관미성을 공격해 백제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는다. 한강을 따라 진격한 수군의 공격이 중심이 된 것으로 보인다. 관미성은 백제 수도 한성을 지키는 최고의 요새였다. 한반도 동남해안까지 장악한 고구려의 해군력은 백제와 신라의 사신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서해에서 통제하기에 이른다. 5세기 장수왕 시기와 말기인 7세기 고구려 해군력은 최고 절정기에 이른다. 5세기 고구려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장악하며 평화를 누렸다.

     

    6세기에 북쪽 물길(후에 말갈이 됨)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550년대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을 막는 사이 남쪽 지역을 빼앗겼다. 당시 고구려의 서북방지역에서는 돌궐이 새롭게 강성해져 고구려의 서북변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천하에서 벗어나 중국세력과 연합하여 큰 세력이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 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사신이 서해를 건너는 것을 중간에서 막았다.(96 페이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475년 백제가 북위(北魏)에 친서를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부탁하자 백제를 친다. 이때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다. 남진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481년 고구려는 신라의 경주 인근까지 공격했다.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녀가 결혼하는 혼인 동맹이 맺어졌다. 그 결과 고구려의 추가 남진은 저지되었다. 491년 장수왕이 사망했다. 안원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 분쟁으로 고구려의 내정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551(고구려 양원왕 7, 백제 성왕 29, 신라 진흥왕 12) 백제와 신라는 가야와 왜의 원군을 포함한 나제 동맹군을 결성하여 백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백제가 한강 하류 6개 군을, 신라가 상류 10개 군을 분할 점령하였다. 이는 나제 동맹의 최대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점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깨졌다.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던 중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612년 수나라가 백만 대군으로도 고구려에게 패한 가장 큰 원인은 군량조달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당나라는 고구려의 배후에서 군량을 보급해줄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았다. 이 결과 당나라는 겨울철에도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당에 패한 주요 원인은 신라가 당의 동맹국이 된 것, 650년 이후 서해상의 제해권을 당에 빼앗긴 것 등이다. 고구려가 제해권 장악에 힘을 쏟은 것은 바로 중계무역의 이점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송(유송)나라에 말 800필을 수출할 정도의 엄청난 배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제사와 구휼활동 만큼 중요한 것이 순수(巡狩)였다. 순수란 왕이 제후의 나라들을 돌아가며 방문하여 그 나라 사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통치영역을 직접 확인하고 고구려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중원(충주) 고구려비에는 장수왕이 친히 충주까지 내려와 신라왕에게 충성을 서약받은 사실이 적혀 있다. 왕들이 자주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사냥도 있었다. 사냥에서 짐승을 잡는 것은 실제로 적을 잡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실전과 같은 군사훈련이었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것은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것만 해도 28회가 넘는다. 고구려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군사지휘자였다.

     

    본문에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나온다. 4세기 후반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로 군사를 보내 그곳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잘못된 것이라 단정한 학자다. 그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일본열도의 정치세력들을 다 통제하지도 못해 한반도로 군사를 보낼 처지가 아니었고 일본, 천황 등의 명칭도 없을 때였다고 말했다.

     

    재이(災異) 관념은 전한(前漢) 시대 유학을 국가 지도 이념으로 만든 동중서(童仲舒)가 완성한 관념으로 인간이 악한 행위를 하면 자연이 천재지변을 일으켜 재앙을 준다는 사상이다. 천인 합일 사상에 근거하여 나라의 정치가 잘못되면 하늘이 우선 재앙을 내려 인간을 꾸짖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괴변을 일으켜 위협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일찍이 흉년이 들면 왕을 죽이는 부여의 전통을 극복하고 자연재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물질적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신라는 후기에 들어 도리어 미신적인 중국의 재이 관념을 받아들여 종교적, 정신적 대책에 중점을 두고 물질적 구원 활동은 부수적으로 취했다. 이러한 정책의 차이는 이노우에 히데오가 지적하였듯이 고구려와 신라의 기본적인 생산 양식이 다르고 사회 구성과 사회 이념이 서로 다른 데서 기인한다.

     

    고구려가 신라보다 훨씬 합리적인 대응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왕권이 일찍부터 강력했으며 고구려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력도 튼튼했기 때문이다. 비록 초기에는 식량이 모자라 양식을 아끼는 풍습을 갖고 있었지만 농경지에 확보와 농업기술의 발달 그리고 국내 외상거래의 발달 등으로 경제력이 크게 신장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능히 백성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줄 수 있었다.

     

    진대법의 시행도 고구려의 농민들이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데 일조했다. 흉년을 비롯한 각종 재해는 어느 나라들에나 있었지만 고구려는 이러한 문제에 비교적 잘 대처하였다. 호로고루 유적에서는 건물지와 기와가 발견되어 장기간 군대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여러 군사초소들의 보급대 또는 지휘소로 추정된다. 고구려 군사들의 주 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고분벽화에 그려진 무기 비율에 대한 한 조사에 의하면 철제창이 46.85%, 철도끼가 21.68%, 활이 16.78% 등이다.

     

    고구려가 철제 창이 많은 것은 기병이 주력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야와 신라는 도끼가 주무기고, 백제는 도끼와 갈고리가 주무기인 것과 차이가 난다. 고구려는 강력한 중갑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중갑기병은 기병 자신은 물론 타고 있는 말까지도 전부 철제 갑옷으로 무장했다. 가슴에 대는 갑옷 이외에도 목이나 팔, 말머리 등에도 전부 갑옷을 입혔다. 이렇게 중갑기병이 군의 주력이었던 것은 이들을 중무장시킬 엄청난 철 생산과 수공업자들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는 의미다.

     

    투구, 갑옷, , 창 등으로 무장시키려면 1인당 30kg 이상의 철이 필요하다. 고구려 후기의 상시 병력이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니 이중 절반이 이와 같은 무장을 해도 4500톤 이상의 많은 철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갑옷은 전부 단조(鍛造) 작업에 의해 일일이 수공업자들이 철을 두드리고 하나하나 철편을 이어서 만들어야 한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 말을 탄 병사들은 유지비용이 일반 보병에 비해 많이 든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 보병보다는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우선 충당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군대는 생존과 직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에 인구 대비 병력수가 지금보다 월등하게 많았다. 포로, 물자 약탈, 전쟁 배상금 등 실질적인 이득이 그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수묘(守墓)역을 맡은 수묘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전체 비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은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광개토대왕 무덤에는 무려 30연호(烟戶)의 국연(國烟)300 연호의 간연(看烟)으로 구성된 수 묘인이 있었다. ()이란 단양적성비나 신라 장정 문서 등에 나오는 용례에 따라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는 대가로 국가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일반 백성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국연이란 국가의 의무를 담당하는 백성이라는 의미이고 간연은 본다, 살핀다는 의미에 국연과 짝을 이루어 기록된 점으로 볼 때 국연을 돕는 사람 쯤으로 해석된다.

     

    중요한 사실은 고구려 사회가 무덤을 중시하는 조상 숭배 사회였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오늘날의 환인현 지역)은 산간 분지였기에 밭농사가 주일 수밖에 없었다. 삼국지의 표현대로라면 힘껏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주요 이유는 교통로의 확보 때문이다. 환인 지역은 서쪽의 강력한 세력들(한 제국, 양맥, 선비)과 너무 가깝고 교통이 불편해 주변으로 뻗어나가기가 곤란했다.

     

    반면 국내성은 압록강을 끼고 있어 동남쪽으로 강계를 거쳐 부전령산 줄기를 넘어 동해안으로 진출하기도 용이했고 압록강 하류의 서해안 지역, 북쪽의 통화 지역을 거쳐 부여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용이했다. 강 건너 평안도 내륙지역으로 진출하기도 쉬웠다.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여겼다. 고구려는 동천왕 시대에 철갑옷으로 무장한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고 서천왕 때에는 숙신을 굴복시켰으며 미천왕 시기에는 요동지역을 확보하는 등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국력 정비 과정을 거치고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진정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주변 여건도 고구려 발전의 기회가 되었다. 중국에 516국시대가 열리면서 혼란이 가중되었고 유목세계의 강자인 모용선비가 중국 지역으로 이동하고 부여가 쇠퇴하면서 동방 지역에서 고구려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고구려 705년의 역사가 38년에 불과한 수나라의 역사보다 자료가 부족하다. 고구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멸망 500년이 지난 후에 쓴 '삼국사기'와 중국인이 쓴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종합해 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쓰여진 글도 대단히 수준이 높다. 이런 비문을 만들 정도의 나라라면 단순한 문자 사용 정도가 아니라 학문 수준도 대단히 높았음이 분명하다.

     

    을지문덕이 적장에게 보낸 시는 고구려 귀족들의 문학적 소양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며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경당(扃堂)에서 글 공부를 할 만큼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도 상당했다. 기록으로 드러난 것 외에도 고분벽화에는 다양한 문자 생활의 모습이 보인다. 안악 3호분에는 묘 주인공 오른쪽 옆에 있는 시종이 두 손에 문서를 들고 서서 보고하고, 왼쪽 시종은 붓을 들고 서서 묘 주인공의 말을 기록하려고 준비하는 그림이 있다.

     

    덕흥리 고분의 무덤 앞방 남벽에는 유주(幽州)의 사마, 참군, 전군록사 등의 벼슬아치들이 자리를 옮겼으니 이를 기록한다는 인사 내용이 적혀 있다. 각종 기와, 비문, 성 벽돌, 불상, 무덤 내부 등의 파편처럼 보이는 글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기록을 남겼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문자가 널리 활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학문이 매우 발달한 문화 국가였다고 기록했다.

     

    고구려 역사서는 유기(留記) 100, 신집(新集) 5권으로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은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그리고 몇몇 묘지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고구려 관련 책들을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쓴 책이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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