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 '책을 읽어라' 를 꼽은 저자가 있다. 리처드 마리우스와 멜빈 페이지다.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란 책에서 지적된 사항이다. 저 팁을 접하고 나는 좋은 서평을 쓰려면 배경 지식이 많이 필요하니 다독하라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정답은 해당 책을 읽으라는 뜻이다.

 

읽지 않은 책을 서평하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꽤 있나 보다. 사실 나도 한창 책을 많이 읽던 10년전 책 없이 서평을 써서 입상까지 한 적이 있다. 인터넷에 오른 책 소개와 신문 기사 두 편 정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서평 두 편 정도를 읽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를 파악한 뒤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해 썼다.

 

요즘은 책이 있어도 서평 쓰기가 힘들다. 내 생각도 덧붙이지만 취사선택해 요점이 되는 부분을 요약해 쓰는데도 힘이 든다. 좋은 서평이란 무엇일까? 나름대로 기준을 두었었지만 요즘에는 읽을 만하지만 선택받지 못하는 책들을 골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의 저자는 질문을 제기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진화한다는 말을 했다. 이 부분이야말로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책을 읽고 짧게라도 서평을 쓰고 고칠 부분을 고쳐야 생각을 진화시켜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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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 글쓰기의 모든 것
리처드 마리우스 & 멜빈 E. 페이지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는 리처드 마리우스와 멜빈 페이지의 공저다. 이 책을 통독하고 서평이라고 썼지만 내가 지금껏 쓴 글들(서평들)은 책의 요약에 많은 비중이 두어진 글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서평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내가 책의 주요 부분을 거의 빼놓지 않고 글에 담은 것은 공부를 위해서였다.

 

나를 위한 글을 쓴 것이다. 지금까지의 글보다 제대로 된 서평은 쓰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어떻든 이 책 이후에는 가능한 한 저자들이 제시한 서평 작성 팁과 체크리스트들을 염두에 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중요한 내용을 블로그에 저장해두어야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역사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핵심 논거나 주장을 체계화하는 과정이다.(23 페이지)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역사와 글쓰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전제하에 쓴 책이다. 역사는 직접 글로 써야 이해하기 쉽고 외우기 좋은 이야기가 된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글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써야 기억하기 좋다는 말이다.

 

제임스 그레헌(James Grehan) 교수가 말했듯 역사를 다루는 기술이란 사실과 해석을 조합해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를 말한다. 역사가는 자신이 글로 쓰는 사건의 일차 자료만이 아니라 다른 역사가들이 그 사건에 관해 쓴 글과도 항상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27 페이지) 저자들은 나눈다고 말했지만 나누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두 저자는 역사 글쓰기의 다섯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한다. 1) 주제를 명확히 제한하라. 2) 논지를 분명하게 진술하라. 3) 엄정하게 공인된 증거에 따라 단계적으로 글을 전개하라. 4)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라. 5) 마음속에 독자를 정확하게 상정하고 글을 써라.

 

역사가는 매우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더 폭넓은 문제를 탐구한다. 중요한 점은 역사 논문의 클라이맥스는 대개 마지막 정보 조각이 제자리에 맞춰질 때라는 사실이다. 그때 저자의 주장이 증명되고 지식이 인정된다.(34 페이지) 좋은 글은 일차 자료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38, 39 페이지) 역사가는 목격담이라고 해도 항상 회의적인 자세로 이야기를 검토해야 한다.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얻었다는 확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증거에 대한 독자의 확신이다.(40 페이지) 바람직한 글은 뭔가 새로운 것을 익히거나 낡은 지식도 새로이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글이다.(42 페이지) 거의 다뤄지지 않은 새로운 주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인과관계나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라고 해서 자신의 감정을 글에 마음대로 실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43 페이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논지와 다른 견해도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을 독자라고 상상하며 자신이 무엇을 읽고 알기를 원하는지 고찰한 다음 그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다. 중요한 원칙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다.(47 페이지)

 

저자들은 표절 사례로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 1921 - 1992) 이야기를 한다. 헤일리는 ‘뿌리’의 저자로 알려졌던 분이지만 증거의 대부분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의 비문에는 “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의식을 형성한 언론인이자 소설가”라고만 되어 있을 뿐 역사를 썼다고는 기록되지 않았다.

 

저자들은 표절 의혹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자기만의 글을 쓰도록 노력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빌렸을 경우에는 설령 그 내용을 변형시켰거나 자신의 말로 다르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솔직히 밝히는 것이다.(52 페이지) 출판물에서는 아무리 변형한 분량이 많다 해도, 또 아무리 많은 저작에서 변형했다 해도 직접인용의 경우에 못지않게 명확하고 정확하게 출처를 밝혀야 한다.(53 페이지)

 

직접 인용보다 변형된 인용이 더 많다. 직접 인용은 글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으로만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55 페이지)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질문을 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질문에 관해 무엇인가를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답이 무엇이든 글쓰기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64 페이지)

 

질문을 제기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진화한다.(65 페이지) 훌륭한 역사 글쓰기는 다양하면서도 서로 연관된 영향력들이 어떤 사건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고찰하며, 인물과 사건을 넓은 맥락 속에서 살펴본다.(71 페이지) 시류에 영합하는 오류는 금물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동의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보는 편리한 입장을 가지면 안된다는 의미다.

 

위대한 역사 연구는 역사적 합의에 구애되지 않고 증거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합의된 사항을 공격할 때는 증거가 필요하다.(75 페이지) 다른 증거도 마찬가지지만 통계자료를 이용해 자료 연구에 중요한 추론을 할 때는 질문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81 페이지) 훌륭한 역사가는 모든 정보자료를 맹신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첫 인상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또한 자신이 읽고 듣고 본 것에 관해 마구잡이식 질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역사가의 비판적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지시에 따라 질문하고 추론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88 페이지) 역사가의 평판을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과거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찰하지 못하고 자료를 쉽게 믿어버리는 게으른 자세와 수동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다.

 

관련 자료를 읽음으로써 질문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단 사전에 어느 정도 아는 주제를 택해야 한다. 좋은 역사가는 읽고, 읽은 것을 질문하고, 다시 읽고, 올바르게 이해하려 노력한다. 처음에 가졌던 질문을 통해 사고하고, 문제의 여러 측면을 검토하고, 주제를 자신이 글로 다룰 수 있는 범위 내로 좁혀 초점을 맞춘다.(98 페이지)

 

저자들은 “우리는 학생들에게 인터넷을 잘 활용하라고 권장하지만 오로지 인터넷만을 정보원으로 이용하는 학생을 보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한다.(105 페이지) 초기 탐구를 위해 어떤 자료를 선택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자신이 결정할 몫이다.(108 페이지) 주제를 다듬은 후에는 정보를 표시하는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좋은 역사 논문을 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이차 자료와 일차 자료의 잠재적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109 페이지)

 

신문에는 당연히 일차 자료도 있다. 좋은 역사 논문은 반드시 일차 자료를 명기한다.(117 페이지) 경험이 더 쌓이면 글쓰기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조사를 시작할 때 일찌감치 써두었던 부분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글에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127 페이지) 호기심만 고려한다면 조사를 결코 완전히 마칠 수 없다. 어느 시점에서는 호기심을 접어야 한다.(131 페이지)

 

글쓰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그렇게 바라보면 글쓰기에 관한 잘못된 신화의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신화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저자라면 아주 쉽게 논문, 책, 리포트를 쓴다는 믿음이다. 초고를 몇 차례나 써야 한다면 좋은 저자가 아니라는 신화도 있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글로 쓰기가 쉽지 않다면 두 번, 세 번 초고를 쓴다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신화도 있다.

 

저자마다 글쓰기의 방식은 다르지만 빠르고 쉽게 글을 쓰는 저자는 없다. 모든 글쓰기는 - 제대로 쓰려면 - 어려운 일이다. 독자는 글을 쉽게 읽지만 그 글을 저자가 쓰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최종 원고에는 여러분 자신의 명확한 견해가 표현되어애 한다.(139 페이지) 글을 쓰고, 메모하고, 다시 읽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더욱 명료해지고 견해가 강화된다. 이 과정을 거친 글은 확고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도 쉽게 내칠 수 없다.(139, 140 페이지)

 

글쓰기 과정이 부족하면 노련한 저자는 마치 모든 조사를 마치고 나서 글을 쓰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실은 그 반대다. 경험이 풍부한 저자는 아무리 처음부터 주제에 해박하다 하더라도 글쓰기가 새로운 문제와 질문에 직면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새로운 실마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그 결과 처음에 가졌던 견해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

 

노련한 저자는 앞뒤로 오가면서 글을 쓰지만 처음 글의 일부분을 글이 완성될 때까지 유지한다.(140 페이지) 어떤 형식을 택하든 핵심은 탐구를 시작할 때부터 메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146 페이지) 한 역사가는 중시하는데 다른 역사가는 무시하는 요소에도 주의를 집중하라. 역사가와 자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라. 자신의 견해와 자료에서 얻은 견해가 반드시 달라야 한다.(147 페이지)

 

메모에서 직접 인용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고를 작성할 때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두어야 한다. 어떤 저자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좋은 글을 얻는 법이다. 끊임없이 훈련하라, 글쓰기를 시작하기가 어렵다면 짧은 시간, 이를테면 10~15분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연습을 해보라.(157 페이지)

 

인용 부호 없이 직접인용 부분을 복사해 사용할 경우에는 표절이 된다.(158 페이지) 저자는 오랜 시간에 걸쳐 글을 수정하며, 때로는 초고를 훼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158, 159 페이지) 저자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원래의 구상이 사라지고 새 구절로 대체되면 원래의 발상도 사라지기 쉬우니 전자형식의 초고를 몇 가지 판본으로 저장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다른 사람의 글쓰기를 도우면 그 과정에서 자신의 초고를 읽고 교정하는 능력도 향상된다.(165 페이지) 저자들은 상호 교정 체크리스트를 제시한다.

 

1. 글이 주제와 밀접하며 필수사항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는가? 2. 글의 취지와 주장이 명확한가? 3. 증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었고 출처를 분명히 밝혔는가? 4. 논조가 일관성 있고 공정한가? 5. 저자의 견해가 공정하면서도 선명하게 제시되었는가? 6. 불필요한 반복이 없고 깔끔한가? 7. 진부한 어구나 군더더기 없이 적절한 단어들을 썼는가? 8. 독자가 논지를 파악하기 쉽도록 명확하게 구성했는가? 9. 결론이 도입부와 어울리는가? 10. 이 글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인가? 등이다.(166 페이지)

 

역사가들이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글쓰기의 양식은 이야기, 서술, 해설, 설득이다.(170 페이지) 이야기가 없다면 역사는 죽은 학문이다. 이야기의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내용을 포함시키고 어떤 내용을 배제할지,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버릴지 판단하는 감각이다. 이야기는 증거 속의 모순을 감안해야 한다.

 

모순을 해소할 수 있으면 해소하고 없으면 솔직히 받아들여야 한다. 훌륭한 이야기는 일종의 긴장으로 시작한다. 이야기에는 클라이맥스가 필요하다. 이야기에서 클라이맥스가 될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다면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171 페이지) 역사 대중서를 보면 대개 생생한 서술로 되어 있다.(174, 175 페이지) 역사를 서술할 때 사건을 꾸며내서는 안 된다.(176 페이지)

 

해설이란 철학 사상, 사건의 원인, 결정의 의미, 참여자의 동기, 조직의 활동, 정당의 이념 등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역사 논문은 이야기와 해설의 균형이 잘 잡힌 글이다. 역사 논문은 문헌이나 사건을 분류하고 분석해 독자에게 그 의미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해설이다. 저자가 단순히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할 때에도 설명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

 

역사가를 비롯한 학자들은 설득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180, 181 페이지) 언제나 주장을 압축적으로 개진하고 되도록 글의 앞부분에 배치하라. 그 다음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주요 논점과 증거를 서술한다. 독자를 확실히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사례를 증거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인 진술을 한 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용이나 구체적인 전거를 들면 여러분의 주장을 믿을 만한 이유를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181 페이지) 경험이 부족한 저자는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글에 집어넣으려 애쓰는데 이것은 재료를 많이 넣을수록 맛있어진다는 착각과 같다.(183 페이지) 좋은 글은 간단명료한 글이다.

 

읽기 편한 글을 쓰기 위한 지침들이 있다. 1. 문단의 일관성을 유지하라. 2. 복잡한 문장을 쓰지 마라. 3. 수동형을 피하라. 4. 과거는 과거 시제로 써라. 5. 첫 문단과 끝 문단을 연결하라 등이다. 읽기에 편한 글을 쓰는 저자는 종속절을 서너 문장에 한두 번씩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글쓰기에 능한 역사가는 수동형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수동형은 문장의 중요성이 명백히 주어의 행위에 있는 경우에 사용하라.(188 페이지)

 

수식어를 통제하는 것, 대명사가 앞에 나온 명사를 제대로 가리키는지 확인하는 것, 명사의 복수형과 소유격을 정확히 표시하는 것, 일상어와 구어체를 구분하는 것, 목적격 대명사를 철저히 사용하는 것, 열거에서 등위 형태를 유지하는 것, 쉼표와 세미콜론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 인용문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 등도 유의해야 한다.

 

표현과 관련한 체크리스트가 있다. 1. 나의 이야기에 무엇을 포함시키고 무엇을 삭제해야 하는가? 2. 나의 서술이 굳건한 증거에 기반하고 있는가? 3. 서술이 감각적 경험을 일깨워주는가? 4. 나의 추론은 신빙성이 있고 명백하게 설명되었는가? 5.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는가? 6. 문장이 일관성 있고 문장이 알기 쉬운가? 7. 능동형과 과거 시제로 썼는가? 8. 결론이 도입부와 어울리는가? 9. 단어들을 적절히 사용했는가? 10. 맞춤법과 구두점이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쓰였는가? 11. 인용문이 명확하고 적절하게 구분되었는가? 등이다.

 

역사 글쓰기는 글 자료에 관한 글쓰기나 다름없다. 자료를 요약하거나 변형시켰을 경우에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하라. 그러지 않으면 표절 혐의를 받게 된다. 2~3쪽 이상의 일반 역사 논문에서는 직접인용보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차용하거나 정보를 변형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209 페이지)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는 부록 A가 눈에 띈다. 학생 연구 논문의 실례를 제시하고 평가를 제시한 것이다. 시간을 내어 논문을 읽어보고 평가도 유의해서 보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들은 독자를 신뢰하라고 말한다. 독자가 글을 읽는 이유는 저자가 얼마나 흥분하고 독선적인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사의 근본적 이념이 어떻게 미국을 넓은 세계사의 범주 안에 안착시켰는지 알기 위해서 글을 읽는 것이다.(252 페이지)

 

이어 저자들은 논문을 평가하는 체크리스트를 제시한다. 가령 글의 도입부가 저자의 주장, 글 전체를 통제하는 주요 견해를 알리고 있는가? 등이다. 부록 B는 평론 쓰기다. 평론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글이다. 평론가들은 책(혹은 다른 형태의 글)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논리와 구성, 증거와 결론, 때로는 서술 방식까지도 평가한다.(255 페이지)

 

평론은 역사 글쓰기의 특별한 형태다. 저자들은 좋은 서평을 쓰기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1. 책을 읽어라. 2. 저자를 쓸데없이 거창하게 소개하지 마라. 3. 저자의 주요한 주장이나 논지가 책을 쓴 동기임을 명심하라. 4. 저자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증거를 간략하게 요약하라. 5. 서평에 인용문을 한두 개 사용하면 글의 맛을 돋울 수 있다. 6. 문체에 관해서는 길게 언급하지 마라. 7. 책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억지로 하지 마라. 8. 저자의 주장을 검토하라, 9. 자신의 경험 - 독서, 회상, 생각, 반성 - 을 서평에 이용하라 등이다.

 

책에는 학생이 쓴 서평의 사례도 제시한다. 저자들은 책의 내용을 요약할 때 서평이라기보다 리포트처럼 요약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습관을 가지면 좋은 서평을 쓰기 어렵다.(258 페이지) 책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일일이 전달하려 하지 말라. 독자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서평 쓰기 체크리스트는 이렇다. 1. 나의 서평이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가? 2. 주요 주장이나 논지를 제대로 확인했는가? 3. 증거와 논증에 관한 나의 설명이 핵심 주장을 명확히 하고 있는가? 4. 저자의 글쓰기 양식을 정확히 파악했는가? 5. 책에 대한 나의 판단이 적절하고 올바른가? 6.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검토했는가? 7. 서평에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포함시킬 수 있었는가?(268 페이지) 등이다.

 

부록 C는 과제 글쓰기이다. 과제 글쓰기 체크리스트는 이렇다. 1. 주제의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었는가? 2. 논지를 명확히 진술했는가? 3. 자료와 증거를 확실히 밝혔는가? 4.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덧붙였는가? 5. 나 자신을 명확히 표현했는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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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일회(一期一會)’는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기회)이며,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인연)이라는 뜻이다. 기(期)는 동기(同期)라는 말에 쓰이는 그 기라는 글자다. 일기회(一器會)란 말이 있다. 아회(雅會)라는 말도 있다. 전자는 여럿이서 자신들의 음식을 가지고 가 만나는 모임을 의미하고 후자는 (글을 짓기 위한 모임이기보다) 아름다운 모임이다. 귀한 사람들이기에 일기회(一器會)로 모인다면 명실상부한 아회(雅會)가 되지 않을까 싶다. 늘 귀한 음식 대접을 받아 미안한 마음에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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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최예선은 여행은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하며 그 시대를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예술가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오후 세시, 그곳으로부터’는 공존(共存), 애도(哀悼), 사유(思惟) 등을 키워드로 여행지를 나눈 예술 답사기이다.

 

저자는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눈을 감은 1989년을 마지막으로 창덕궁은 집으로서의 온기를 잃었다고 말한다. 창덕궁에는 우리 나라 최초로 벽화가 그려진 공간이다. 벽화라고 하지만 비단 위에 그림을 그려 표구하고 적당한 위치에 부착한 그림으로 이를 부벽화(付壁畵)라 한다. 1917년 난 화재를 수습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1919년 고종 승하와 3.1 만세운동 등을 겪으며 공사가 지연되었고 1920년 말에 끝이 났다.(15 페이지)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창윤(蒼潤) 이용우(李用雨),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정재(靜齋) 오일영(吳一泳),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등이 화가로 참가했다.

 

공존의 두 번째 포스트는 소설가 구보가 걸었던 길로 그 가운데 하나인 미쓰코시 백화점(옛 동화백화점, 현재는 신세계백화점)과 경성부청(서울시청이었다가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곳)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백화점은 시인 이상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얼마전 창씨개명을 위해 경성부청에 줄을 선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저자는 신세계 백화점이 80주년이 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1933년에 개설한 미쓰코시 백화점을 자신의 원조로 생각하는 것일까?“(42 페이지) 책은 줄곧 저자의 분신인 구원씨의 현실이 나오고 그가 걸은 길이나 거리에서 이름을 떨친 과거의 인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공존의 세 번째 장소는 박경리 작가의 정릉집이다. 이 집은 박경리 작가가 원주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이 곳에서 대하소설 ‘토지’가 태어났다. ”선생이 살기 위해서 선택한 동네, 정릉. 그곳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오다가 멈추게 되는 막다른 골목 같은 동네였고, 날 것과도 같은 밤이 찾아오는 산동네였다.“(56 페이지)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을 주소로 하는 이 집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쟁중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박경리는 44세에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쓴 소설들은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

 

공존이란 키워드의 네 번째 장소는 원서동에 자리한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66 - 1965)의 집이다. 이 집에 아회도(雅會圖)가 있다.(‘아집도; 雅集圖’라고도 한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춘곡 고희동 등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아회란 글을 짓기 위(爲)한 모임, 아담한 모임 등을 뜻한다.

 

일기회(一器會)를 그린 그림이다. 일기회란 여럿이 각각 음식을 한 그릇씩 가지고 모여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일행은 각자의 집에 모일 때마다 모임 이름을 달리 정했다. 원복소집, 남원속집, 동원세모 식으로. 오세창 선생 집에 모인 모임은 한동아집이라 했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 유학을 떠나 서양화의 기법을 배워온 예술가다. 1950년대 말 춘곡은 삼대가 함께 살아온 원서동 집을 떠나 제기동의 양옥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존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장소는 창신동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 - 1965)의 집이다. “1910년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과 한국은행을 거쳐 1920년대 조선총독부, 경성역, 경성부청 등 대규모 공사 중에서 창신동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89 페이지)

 

창신동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낙산의 남쪽 줄기다. 창신동이 원래 토막집 천지는 아니었다. 동대문과 가까운 평지에 고풍스런 한옥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백남준이 태어나 자란 곳도 창신동 한옥이었다. 박수근이 창신동에 산 시기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의 주인공 화가였던 박수근은 “수많은 여인들을 캔버스에 그렸는데, 모두가 다 아내의 분신이었다. 빨래 하는 아내, 푸성귀를 파는 아내, 머릿수건을 쓰고 물을 긷는 아내, 노상을 걸어 다니는 아내, 아이에게 앞섶을 열어준 아내...”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박수근을 해외 전시회에 등장할 수 있게 해준 분들이 미국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리아 헨더슨, 첫 상설 화랑인 반도화랑을 세운 실리아 지머맨, 마가렛 밀러 부인 등이다. 박수근이 전쟁 후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피엑스에서 초상화 등을 그려주며 가장 역할을 한 이야기가 ‘나목(裸木)’에 나온다.

 

땅이 아닌 집만 소유한 박수근 가족은 땅 주인이 철거를 강요하자 집을 포기하고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했다. 창신동 집은 그렇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박수근의 집터‘를 알리는 얇은 표석 하나만이 남았다.(100 페이지) 박수근의 아호(雅號)인 미석은 고향의 바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흰색 아연으로 화폭을 겹쳐 칠하며 캔버스에 돌을 입힌다. 태초에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바위가 되기까지 얼마나 장대한 세월이 흘렀던가. 돌은 시간이었다.”(101 페이지)

 

애도의 첫 번째 장소는 윤동주의 시작(詩作) 공간이다.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 봄부터 1942년 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다. 연희전문학교는 소나무숲이 울창한 언덕에 지어졌다. 1917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에 작은 목조 건물로 출발한 학교였다. 저자는 “어떤 희망이 윤동주를 현해탄 너머 먼 곳으로 이끌었을까? 그것 또한 문학의 힘이었을까?”라고 말한다.(115 페이지)

 

애도의 두 번째 순서는 나혜석의 수송동 시절에 대한 글이다. 수송동에는 미술학사(美術學舍)가 있었다. 나혜석이 여성의 서양화 교육을 위해 1933년에 설립한 미술 교육기관이다. “수송동 미술학사가 있던 곳은 오래된 골목으로, 조계사와 학교 등이 있어서 변화무쌍했던 종로 거리에서도 옛 건물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위치였다.(133 페이지)

 

나혜석은 자신의 이혼 과정을 서술한 ’이혼고백서‘를 잡지 삼천리에 게재하고 천도교 수장인 최린을 정조유린 혐의로 고소함으로써 스스로 세간의 지탄과 조롱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134 페이지) 문헌에 기록된 미술학사 자리에는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종로 3가 기형도(1960 - 1989)의 공간은 전편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공간이다. 기형도가 서른의 나이로 죽은 곳은 낙원상가의 한 극장이었다. 후배 박해현 기자에 의하면 기형도가 쓴 원고들은 긎고 지운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방에는 원고 습작을 하던 파란색 노트와 알약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즈음 기형도는 자주 두통을 호소했고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입안에 약을 털어 넣었다.

 

편지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소설가 강석경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낸 것이었다. ”나는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은 채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종로3가의 길모퉁이에 서 있다.”(149 페이지)

 

애도의 네 번째 장소는 2014년 5월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 -ㅔ 1973)의 기일에 열린 추모행사장 이야기다. 추모행사장은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한 권진규의 아틀리에였다. 조각가 권진규가 타계한 것이 1973년이니 41주기였다. 아틀리에는 조각가가 타계한 후 30년 넘게 닫혀있다가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창작 공간인 그곳을 사용할 작가를 모집하는 공적 게시물이 보인다.

 

애도의 다섯 번째 공간은 사라진 박물관들이다. 저자는 박득순(朴得錞; 1910 - 1990)의 ’서울풍경‘(1949년 작품)이란 그림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쟁이 터진 후의 서울은 다시는 이 풍경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 폭풍 전의 고요함, 파괴되기 직전의 우아함을 본다고 덧붙였다.(172 페이지)

 

그림에는 조선총독부라 불리다가 미 군정이 들어와 중앙청으로 사용하게 된 웅장한 석조 건물도 있다. 1995년 철거된 건물인데 사람들은 철거된 잔해들을 기념품이라며 가져갔다.(174 페이지) 저자는 그날 이후 사람들은 건물을 삭제함으로써 기억도 말소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옅어지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활동이 반작용처럼 등장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의 어느 하찮은 순간 하나도 삭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중앙청 건물의 적절한 장소로의 이전이었다. 어떻든 중앙청 이야기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경복궁 이야기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내내 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거대한 홍보관 역할을 했으며 총독부박물관과 미술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근정전은 전몰 병사를 위한 참배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17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덕수궁에 있는 미술관과 석조전을 제외하고 모든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이 사라졌다. 해방 직후 적산(敵産)을 불편해 했던 민심 때문에 철거한 것도 아니고 전쟁으로 파괴된 것도 아니다. 국립박물관, 공예전시장, 국립미술관, 장서각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에 궐역을 수복하고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정부의 이념으로 철거되었다. 이제 이들은 옛 신문에서 그 이름을 복기해야만 하는 잊혀진 박물관들이다.(185 페이지)

 

돈암동은 저자가 신혼을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부부가 모두 혜화동을 좋아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하자고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돈암동이었다는 것이다.(191 페이지) 돈암동은 박완서 작가가 살았던 곳이다. 전쟁 직전에 광화문 쪽에서 돈암동으로 옮겨와 매일 전쟁 하듯 살다가 종전 즈음에 결혼하여 떠났으니 3년 정도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동은 박완서의 여러 소설에서 반복재생될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박완서 작가의 돈암동 시절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돈암동에는 검은 기와를 얹은 오래된 조선한옥집이 있었다. ’그 남자의 집‘의 그 남자 현보의 집이었고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지섭의 집이었고 ’나목‘의 주인공 이경(李炅)의 집이었다. 서대문구 현저동은 박완서 작가가 피난해 살던 곳이다. 현저동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좁다란 초가들이 켜켜이 들어선, 도시빈민층이 살던 달동네라고 표현된 곳이다.

 

제목(’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와도 관련이 되는 ’오후, 세 시 학림다방‘편은 전혜린을 위한 장이다. 전혜린은 절친 이덕희와 함께 명동 은성주점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봉구, 김승옥 등도 은성의 단골이었다. “학림과 은성, 돌체, 그리고 모나리자 같은 다방과 카페는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던 안식처였다.”(219 페이지)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학교가 대학로에 있던 시절에 학림은 문리대 25강의실이라 불릴 만큼 서울대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던 아지트였다.”(220 페이지)

 

학림은 지난 해 나도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가 본 곳이다. 일 때문에 박** 팀장님을 만난 자리였다. 고풍스러운 곳이다.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저자 역시 이런 말을 한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2층 다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속은 없지만 왠지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225 페이지)

 

사유의 세 번째 순서는 ’부박한 세상에 외치다 - 성북동 심우장(尋牛莊)과 노시산방(老?山房)‘이다. 만해 스님은 총독부가 있는 방향으로는 얼굴도 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북향의 집을 지었다. 북사면(北斜面; 북쪽으로 향해서 비스듬하게 경사진 면)의 대지에는 북향으로 집이 앉혀지기 마련이어서 기와집의 배치가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성북동에 북향으로 앉은 집이 많다.(234 페이지)

 

“성북동은 적당한 경사가 있고 숲과 나지막한 집이 있고 좁지만 걷기 좋은 길이 있다.”(237 페이지) 근원 김용준은 자신을 노시선인이라 불렀다. 아랫 동네 물가의 수연산방에 살던 친구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유의 네 번째 순서는 ’나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하느니 -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 열전‘이다. 김수근은 장충동 경동교회, 대학로의 예술극장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아비와 아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이기려 한다. 이긴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갈등과 극복은 분명 사회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아버지 죽이기‘라는 오래된 테마를 건축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리라. 건축이란 앞선 결과물을 파괴하고 되살리고 수정하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면서 수천 년을 이어온 것이 아니던가.”(250 페이지)

 

2011년 가을, 서울 옥션에 최초로 부동산이 미술품 경매에 등장했다. 건축가 김중업이 친구인 이정호의 의뢰로 1968년경에 지은 가회동 주택이었다... 300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3층 건물인 이 집은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관저로 잠시 사용되었고 1983년에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20년간 집을 소유하던 주인은 큰 규모의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

 

집주인은 예술품처럼 건축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집을 소유하기를 자랐다. 요구 조건은 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이 집은 주인을 만나지 못해 경매에서 유찰되었다.“

 

이 장에서 읽을 만한 내용은 부여박물관을 설계한 김수근(1931 - 1986)에게 김중업(1922 - 1988)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다. 즉 김중업은 부여박물관 정문이 일본 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인 도리이(鳥居; とりい)를 모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중업은 일본 신사 도리이의 변형이자 그로테스크한 조형이라고 공격하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모방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김수근은 백제의 선도, 일본의 공간도 아닌 현대건축가로서 건축 언어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256 페이지)

 

이 내용을 전하며 건축가 ’조한’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적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또한 형태적 차용이나 모사는 옳지 않은 것일까? 다시금 부여박물관을 봐야할 것 같다. 공간론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다시금 한국적 건축이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원불교신문‘ 2015년 7월 24일 칼럼 ’부여박물관 한국적 건축, 그 논쟁의 현장‘ 참고)

 

저자는 문제의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도 한다. 사유의 다섯 번째 순서는 서촌이다. 저자는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269 페이지) 인왕산을 서쪽의 산 즉 서산이라고 부른 바는 있지만 조선시대에 서촌이라는 지역은 서대문, 서소문 근처를 말했다고 한다.(270 페이지)

 

저자는 여항(閭巷)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이어진 가난하고 평범한 동네라고. 서촌에는 조용히 머물다 오기 좋은 화가의 아틀리에가 두 곳이나 있다. 청전 이상범과 남정 박노수의 공간이다.(285 페이지) 최예선의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생각거리들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책이다. 감사하다. 다만 글씨가 작아 읽기 불편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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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살짝 내리더니 곧 갰다가 코스 점검을 위해 하는 순회 마지막 부분에 조금 세게 내렸습니다. 등산화를 신고 참 많이 걸은 날이었습니다.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정독도서관에서 서울도서관까지, 서울도서관에서 명동성당까지...서울도서관에서 명동성당까지는 군데 군데 작은 착오들이 있어 코스를 되풀이해 이리저리 참 많이 걸었습니다.

 

백팩을 메고 다섯 시간 이상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고 전철을 이용하는 90분 중 한 시간 이상을 선 채 왔더니 팔다리가 두드려 맞은 것 같습니다. 매일 30분씩 등산화를 신고 저녁 산책을 하면 근육 운동이 저절로 될 것 같습니다. 2019년 1월 8시간이나 한양도성을 걸을 때도 무거운 등산화를 신었는데 당시보다 오늘이 더 힘들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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