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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엔 산사에 간다 - 막힌 일상을 확 풀어줄, 자연주의 도심 산사 20곳
여태동 글.사진 / 크리에디트(Creedit)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몇년째 서울 (중심의) 문화 해설을 하다 보니 몇 가지 예기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해설 포스트의 대부분은 종로구의 장소들이고 나머지는 중구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산사(山寺)라는 말에 걸맞게 대부분 산에 있는 사찰은 해설 포스트로 삼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성북을 하며 길상사를 포함시킨 적이 있고, 종로를 하며 대각사(大覺寺)를 포함시킨 적이 있다. 지방의 경우 파주 시간에 보광사를, 경주 시간에 불국사를, 화성 시간에 용주사를, 영월 시간에 법흥사를, 철원 시간에 도피안사를 포함시켰을 뿐이었다.
여태동 저자의 ’점심시간엔 산사에 간다‘는 내게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이동 도선사에서 홍은동 옥천암까지 모두 서울의 사찰, 그 가운데서도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란 점이다. 책에서 다루어진 사찰은 모두 20곳으로 내 고충과 달리 종로나 중구 외의 곳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찰 한 곳만을 해설할 수도 있지만 대개 두 시간을 하는 문화 해설에서 사찰 특집이 아닌 이상 책에서 소개된 사찰만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해당 사찰 주변의 문화 유산이나 유적지를 시간을 고려해 포함시켜야 한다. 물론 현대적인 건축물을 할 수도 있고 서울 미래유산을 포함시킬 수 있다.
스무 곳의 사찰 가운데 한 번이라도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은 견지동 조계사, 성북동 길상사, 정릉동 봉국사 등 세곳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알게 된 이래 사숙(私淑)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런 염(念)으로 존경했던 일지(一指) 스님이 지난 2004년 45세의 세수(歲首)로 입적(入寂)하신 갈현동 수국사는 특별히 관심이 간다.
책의 특징은 각 사찰의 시작 부분에 사찰의 개략적 정보와 길 안내가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점심 시간엔 산사에 간다‘는 출간된 지 13년이 넘었는데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은 저자가 종로 우정국로에 소재한 전법회관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던 불교신문 기자로 있을 때 나온 말이니 종로 중심가에서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고 관건은 ’전철 또는 지하철에서 어디’라는 말이다.
강북구 우이동을 주소지로 한 도선사(道詵寺)는 북한산의 남쪽 지역에 자리한 사찰이다.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어서 도선사다. 의아한 것은 삼각산 도선사라는 현판이 있음에도 북한산 도선사라 소개한 것이다.
두 번째 사찰은 견지동 조계사(曹溪寺)다. 너무 유명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우정국과 수송공원이 있다. 수송공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정국 건물 구석에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 있다.
세 번째 사찰은 상도동 사자암(獅子庵)이다. 이 사찰은 광화문 양편에 불을 잡는 해태를 세우고 숭례문을 지어 불기운을 막고자 한 것처럼 비슷한 목적으로 지은 사찰로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기운을 누르고자 사자 형상을 한 곳에 세웠다. 이를 비보(裨補)사찰이라 한다.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것만이 아니라 강한 기운을 제하는 것도 비보다.
네 번째 사찰은 수유동 화계사(華溪寺)다. 숭산 스님이 주석했던 인연으로 외국인들이 찾아와 수행하는 국제적 선원이다. 화계사 앞에 한신대학원이 있다.
다섯 번째 사찰은 갈현동 수국사다.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수국사(守國寺)다. 세조가 일찍 죽은 아들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를 위해 지은 사찰로 정인사(正因寺)라 불리다가 경종이 아버지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明陵)의 사찰 이름을 가져와 수국사라 했다.(경종 1년) 본문에 내가 이야기한 일지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이 반승(半僧), 반속(半俗)의 모습으로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섯 번째 사찰은 진관외동 진관사(津寬寺)다. 비구니 스님들의 주석처다. 일곱 번째 사찰은 진관외동 삼천사(三千寺)다. 조선시대에 3000명이 수행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삼천사란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했다. 임진전쟁 당시에는 스님들의 집결지였다. 서울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여덟 번째 사찰은 정릉동 심곡암(深谷庵)이다. 저자는 자신이 심곡암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지 스님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했듯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큰 복이다.
아홉 번째 사찰은 정릉동 경국사(慶國寺)다. 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암사(靑巖寺)라 불리다가 조선 명종 5년 문정왕후가 나라에 경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로 개명했다. 임진전쟁 당시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가 머물며 승병을 지휘한 사찰이다. “경국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초록 요새다. 그래서 절에 들어서면 안온하다. 어지간한 구중심처보다 더 깊은 맛을 자아내는 사찰이다.”(125 페이지)
열 번째 사찰은 구기동 승가사(僧伽寺)다. 구기동(舊基洞)은 종로구에 속한 동이다. 구기동 이북 5도청이 있는 버스 종점에서 내려 아래로 10여미터를 내려오면 승가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열한 번째 사찰은 성북동 길상사(吉祥寺)다. 책에 소개된 사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김영한(자야, 길상화 보살) 신도와 백석 시인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법정 스님 사연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소유를 덜어내는 궤적으로 설명한다.(149 페이지) 경내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최종태씨가 화강암으로 만들어 봉안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열두 번째 사찰은 신촌 봉원사(奉元寺)다. 전통 불교 의식인 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靈山齋)를 보존하고 있는 근본 도량이다. 신라말 도선 국사가 반야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고 고려말 태고 보우가 중창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삼존불을 조성하였다.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고 봉원사라는 현판도 내렸다. 사람들은 이후 봉원사를 새 절이라 불렀다. 신촌(新村)이란 이름도 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열세 번째 사찰은 구기동 금선사(金仙寺)다. 승가사에 이어 다시 만나는 구기동의 사찰이다. 고려말 또는 조선초 무학대사가 지었다고 알려졌다. 이 절은 정조와 수빈 박씨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순조를 낳은 분이 수빈 박씨다. 농산 스님이 순조로 환생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스님을 핍박하던 폐단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이 일로 매년 음력 6월 18일 순조의 탄신제가 열린다. 목정굴에서 정진하던 농산 스님이 앉은 채 열반에 들었고 굴 안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았다. 저자는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맞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본문에는 세옹지마라 나온다.)
의빈 성씨가 사망한 후 수빈 박씨가 후궁이 되었는데 이는 홍수 때문이었다. 화평옹주(사도세자의 친 여동생)의 남편이자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박명원(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은 못생기고 철없는 자기 딸 대신 홍수 때문에 집을 잃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먼 친척 박생원의 딸을 후궁 간택에 내보낸 것이다.(수빈 박씨; 순조 어머니. 의빈 성씨; 문효세자 어머니.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
열네 번째 사찰은 삼성동 봉은사(奉恩寺)다. 봉은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판전(板殿)이 있다. 저자는 판전을 보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가 한승원 작가의 소설 ‘추사’를 읽고 자세를 달리 했다고 말한다. “봉은사에 가면 꼭 봐야 할 나무가 있다.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부도전 옆 경사면에 서 있는 산사나무다. 수령만해도 200년이 훨씬 넘은 이 나무는 가을이면 엄지 구슬만한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한자로는 산사목(山査木)이다.”(191 페이지)
열다섯 번째 사찰은 흑석동 달마사(達磨寺)다. 서달산의 사찰로 돌이 많아 서덜서덜 다녔다고 해서 서덜산이라 불리기도 했다.(서덜: 냇가나 강가 따위의 돌이 많은 곳, 생선의 살을 발라내고 난 나머지 부분. 뼈, 대가리, 껍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열여섯 번째 사찰은 구의동 영화사(永華寺)다.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절이다.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해 화양사(華陽寺)라 불렀다. 아차산에는 이름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온달과 관련한 것이 하나, 조선 명종 때 홍계관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다.
열일곱 번째 사찰은 정릉동 봉국사(奉國寺)다.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후 무학대사가 비보사찰을 세웠다. 현종(숙종 아버지)이 태조의 두 번째 비 신덕왕후의 묘를 능묘로 정한 후 명복을 비는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하고 나라를 받는다는 의미의 봉국사라 불렀다.
사찰 중심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영락전(靈樂殿)이 있다. 봉국사의 중심 건물은 만월보전(滿月寶殿)으로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어머니 품 같은 산사 분위기를 전해주는 건물은 광응전(光膺殿)이다.
열여덟 번째 사찰은 숭인동 청룡사(靑龍寺)다. 종로구 숭인동 17 - 1 번지에 자리한 사찰이다. 단종과 비(妃) 정순왕후 송씨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사찰이다.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곧바로 난 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청룡사가 나온다. 청룡사 한켠에 정업원구기가 있고 앞에 동망봉이 보인다.
청룡사를 끼고 왼쪽으로 오르면 원각사가 나온다. 그 옆 복원된 초가 뒤뜰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왕대비에서 대역죄인이 된 정순왕후는 더는 수강궁에 머물 수 없어 삼각산 청룡사로 향했다. 정업원(淨業院)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죄업을 참회했던 정순왕후는 궁 밖으로 나서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정업원은 처음에는 내불당(內佛堂)이라 불렸으나 유생들이 항의를 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정업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궁을 나선 정순왕후는 청룡사에 머물렀다. 청룡사에 하룻밤을 보낸 단종은 다음날 정순왕후와 헤어져 한맺힌 유배길을 갔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을 다리까지 배웅했다. 이 다리는 후세에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 불렸다. 정순왕후는 청룡사 지진 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정순왕후에게 영빈전이란 작은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허경 스님은 끝내 거부하고 청룡사에서 기거하며 82세까지 살았다.
정순왕후는 입적 후 단종의 누나인 경혜 공주의 시댁인 정씨 집안의 묘역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사능리에 묻혔다.(‘사릉; 思陵‘)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정순왕후가 동망봉(東望峯)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며 동정하는 곡을 했다.
열아홉 번째 사찰은 삼성암(三聖庵)이다. 150년 정도된 사찰이다.
스무 번째(마지막) 사찰은 홍은동 옥천암(玉川庵)이다. 자하문(紫霞門) 지나 세검정(洗劍亭) 지나 흰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이다. 1990년대만 해도 생활 폐수로 검은 물이 흘렀고 연희동으로 빠지는 홍제천(弘濟川)은 먼 옛날 옥처럼 맑은 물이 흘러 옥천이라 했다. 이 계곡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옥천암에는 하얀 관세음보살이 마애불(磨崖佛)로 새겨져 있다. 조선 태조도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했다고 한다.(25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