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서 보낸 하루 라임 틴틴 스쿨 11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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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향금은 지리학과 국문학 등을 공부한 저자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는 그가 ‘조선에서 보낸 하루’를 쓴 지 3년만인 2018년 출간한 책으로 일제 강점기의 서울인 경성에 대한 가상 여행을 전제로 쓴 책이다.(‘~에서 보낸 하루’ 시리즈 책은 2019년 ‘가야에서 보낸 하루’까지 이어졌다.) 가상 여행이라 했지만 시간 여행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일행이 경성을 방문한 시기는 1934년 무렵의 어느 봄이다. 1930년대는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의 거대한 뿌리다. 규율, 폭력, 통제 등이 시작된 시점이다. 일행의 여행은 하루 일정의 여행이다. 한 친일파 은행장의 저택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끝나는 여행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여행기인 한편 생활사를 담은 역사책으로 규정했다.

 

일행이 본격 여행에 앞서 들른 곳은 1925년 9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된 경성역이다. 도쿄역이 아닌 루체른 역(스페인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Santiago Calatrava’가 설계. 루체른역은 1971년 화재로 사라지고 현재는 현대식 역사가 들어섰다.)을 모체로 한 역사(驛舍)다.

 

당시 경부선 시간표에 경성에서 부산 가는 기차에 상행, 부산에서 경성 가는 기차에 하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 본토가 아닌 조선이나 만주에서도 모든 것이 도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도쿄쪽인 부산 방향을 상행으로 삼은 것이다. 원래 경부선은 조선의 전통 도시인 공주와 강경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있던 중심지였고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시장이 설 만큼 교통의 요지였다. 일제는 조선의 전통 도시를 무시하고 대전에 기차역을 세우고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그 뒤 대전역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몰려와 잡화상과 여관, 술집을 열고 장사를 했다.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경부선이 지나게 되면서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제의 만주 진출의 발판이었다. 당시 일본은 1872년부터 자국에서 시행하던 좌측통행을 우리나라에도 적용했다. 본문에는 사라진 광화문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총독부 맞은편, 옛날 의정부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붉은 벽돌로 된 경기도청 건물 이야기도 나온다.(서울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경기도에 속한 경성부라는 일개 도시로 격하되었다.)

 

공조(工曹) 자리에는 체신국이, 이조(吏曹) 자리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가, 호조(戶曹) 자리에는 순사 교습소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본문에는 고종 이야기도 나온다. 개혁을 추진했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여러 열강의 간섭 때문에 개혁 추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34 페이지)

 

일제 강점 초기만 해도 조선인들은 북촌, 일본인들은 남촌에 모여 살았다. 이때 북촌과 남촌을 가르는 기준은 청계천이었다. 그러다 1926년 남산 아래의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자리로 옮김에 따라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북촌에 진입했다.(39 페이지)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분이 건축왕 정세권이다.

 

1920년대에 물이나 음식물에 들어 있는 세균에 의해 전염되는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호랑이에게 찢겨 죽는 것 같이 아프다고 해서 호열자(虎列刺)라 불린 이 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콜레라, 장티푸스 등은 위생 관념 부족 탓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수도 시설 등 인프라 부족 때문이다. 청계천은 탁계천이라 불릴 정도였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악랄하게 심문한 폭력 통치의 상징이라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식민지 경제수탈의 상징이었다.(71 페이지) 일제 강점기 학교는 규율의 제국이었다.(76 페이지)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차별과 동화라는 모순적인 정책을 펼쳤다. 모두 천황의 신민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주지 않고 차별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에게 일본어와 일본 역사, 일본 지리를 가르치며 일본식 의식주 문화를 퍼뜨리는 동화 정책을 폈다. 일제의 이런 동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 학교였다.(82 페이지) 1919년 3월 전국적인 민족 저항 운동인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무력을 동원한 무단통치에서 회유와 이간질을 곁들인 문화통치로 지배 방법을 바꾸었다.

 

악명 높았던 헌병 경찰 제도도 보통 경찰 제도로 바꾸었고 조선인의 신문 간행도 허용했고 무관만 임명하던 조선총독 자리에 문관도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기만적인 정책이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 총독 자리는 전부 현역 군인이 맡은 것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친일 지식인 양성도 당시 추세였다.(92 페이지)

 

당시 일본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즐기는 하나미(はなみ; 화견; 花見; 벚꽃놀이)를 위해 경성 시내는 벚나무 천지를 이룰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선명하게 구별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계천이 아니라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이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선이었다.(103 페이지)

 

청계천 북쪽을 북촌이라 부른다. 이름은 같지만 조선시대에 지배층이 살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과는 엄연히 다르다.(103, 104 페이지) 일제 강점기의 북촌은 종로를 중심으로 발달한 거리다. YMCA와 한성전기회사, 화신백화점 같은 근대식 건물이 간혹 보이고 넓은 거리에는 전차가 무시로 지나갔다.

 

청계천 남쪽에는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경성우편국(중앙우체국 자리, 건물은 철거됨),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전기주식회사, 혼마치호텔 같은 근대식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를 미츠코시백화점 자리에서 광화문통으로 옮긴 뒤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북촌에 진출했다.

 

북촌이 정치, 행정, 교육의 중심지였다면 남촌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일본은 경성에 반듯반듯한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만들어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한양의 골목길은 대부분 사라졌다.(105 페이지) 일제가 들여온 근대 문물과 제도는 일본인과 극소수 상류층의 조선인들만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당하며 빈곤한 삶을 떠안았다.

 

일제는 1929년, 1940년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연이어 열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박람회 및 공진회를 170여회 열었다.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의도였다. 소설가 박태원의 구보는 갑빠라는 머리 스타일을 했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종묘, 창경원 앞 대학병원, 경성운동장, 훈련원, 약초정, 본정을 지나 조선은행 앞에서 내렸다.

 

원래 구보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을 담당하던 일본인 교수 이름이었다.(114 페이지) 해부학 교실에서 실험용 해골이 사라지자 조선인은 해부학 실험 대상이라는 망언을 한 사람이다. 보통학교 시절 학교에 약을 가져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박태원을 누군가 그 일본인 이름에 빗대어 어이, 구보 박사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별명이 되었다. 박태원은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별명을 구보라 칭했을 정도였다.

 

일제는 순종이 죽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를 공원화하려는 속셈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광화문에서 안국동을 거쳐 돈화문을 지나 종묘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해 창덕궁, 창경궁, 종묘를 강제 분리시켰다.(119 페이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북촌의 상징인 종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조선 총독부가 광화문통에 자리 잡은 뒤 조금씩 바뀌었다. 1930년대 들어서서 은행, 회사 등 3, 4층의 근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백화점도 문을 열었다.(123 페이지) 본문에는 제비다방이 나온다. 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이다. 이상이 기생 출신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1933년부터 중구 다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인 1935년까지 운영한 다방이다.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와 걸어가면 만나는 농협 인근인 종로1가 33번지에 위치했던 다방으로 벽에 이상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1931년 일제 강점기에 개최된 미술 공모전인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입상한 그림이다. 이상 시인과 신명소학교 동기동창생인 구본웅의 막내 아들 구순모씨가 자신의 큰형 구환모씨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다방에 간 뒤 자신에게 이곳이라며 손으로 가리켜 보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은 인사동에 카페 쓰루(つる; 鶴)를 세우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제비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 1889 - 1923)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제비처럼 날렵하고 신출귀몰 했기에 붙은 이름이다. 제비다방이란 이름은 구본웅이 이런 글을 남긴 데서 비롯되었다. “아침 7시, 제비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1933년 이상이 폐결핵에 걸려 총독부 건축 기사 일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 갈 때 함께 한 친구가 구본웅이다.

 

구본웅은 열일곱 살 때 학교에 가다가 우연히 의열단원인 김상옥의 최후를 목격했다. 독립운동 탄압의 총본부라 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들과 대치하다 자결한 분이다.(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있다.) 박태원과 이상은 이태준, 이효석 등과 함께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에 몸 담았었다.

 

본문에는 서대문형무소 이야기도 나온다.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라는 지하혁명 조직을 이끌며 일제에 저항한 사회주의 운동가 이재유(李載裕; 1905 - 1944)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남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분이다. 독립 운동가 일송 김동삼(金東三; 1878 - 1937) 선생 이야기도 그렇다.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분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운 분이다.

 

3.1 독립운동 기념터인 선은전 광장 이야기를 보자. 선은전(鮮銀前)이란 조선은행 앞이라는 의미다. 명동역 5번 출구 한국은행 앞 인도 오른쪽이다. 광장 가는 길에 조선호텔이 있다. 일제가 철도 호텔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원구단을 철거하고 세운 호텔이다.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일제는 같은 방식으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원구단 자리에 서양식 호텔을 세운 것이다.

 

원구단이 자리한 곳은 소공동이다. 소공로는 조선 태종의 둘째 공주인 경정 공주가 살던 궁이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거리 이름이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었고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 - 1924)가 살았다 해서 하세가와마치로 불리기도 했다.(166 페이지)

 

당시 북촌에는 조선인이 세운 화신백화점이 있었고 남촌에는 미츠코시백화점을 비롯 네 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정원)은 시인 이상이 날개가 돋기를 꿈꾸었던 장소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추모하기 위해 새운 제단이다.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175 페이지)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 경성신사, 박문사를 지었다. 박문사(博文寺)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리는 절이다. 박문사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의 박문이다. 일제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다 이름까지 경춘문이라 바꾸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혼부라(ほんぶら)란 말이 있다. 현재의 충무로인 본정(本町) 즉 혼마치를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플라뇌르에 해당?)을 말한다. 동경의 긴자 거리를 헤매는 것인 긴부라에서 따온 말이다. 원래 이곳은 진고개라 불린 곳이다. 지금의 중국 대사관 뒤편의 충무로 2가 언덕길이다. 혼부라를 하던 남녀들을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에 세 명의 왕이 있었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사업으로, 정세권은 북촌의 대단위 한옥 단지 사업으로, 최창학은 삼성 금광 사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는 황금광 시대였다.

 

여행은 정동을 거쳐 경성역에서 끝난다. 이 여행은 전작인 ‘조선에서 보낸 하루’에서 한양 여행을 한 지 141년이 지난 시점인 1934년에 감행한 하루 여행이다. 일본 제국은 1868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다. 1868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해이다.

 

경성은 상업 도시이자 소비 도시였다. 당시 경성의 외국인 비중은 30%에 달했다. 당시 북촌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남촌은 불야성을 이루었었다. 여행은 설레지만 경성 여행은 역사적 무게 때문에라도 그리 편한 여행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는 230여 페이지 정도고 활자도 큰 데다가 삽화나 사진의 비중이 크지만 참고 문헌의 수가 많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꽤 알찬 책이다. 전작인 ‘조선에서 보낸 하루’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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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교리는 튤립 교리를 근간(根幹)으로 한다. 꽃의 하나인 튤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나는 튤립 교리가 인간의 속성에 모두 들어맞지는 않지만 장로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인 일반의 속성에 대체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전적 타락은 장로교의 출발점으로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으로 빚어진 결과를 의미한다.)

 

1) 전적인 타락, 2) 하나님의 무조건적 성도 선택, 3) 제한 속죄,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 5) 성도의 견인 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들의 머릿 글자들을 따서 TULIP이라 부르는 것이다. Total Deprevity(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Irresistible grace(저항할 수 없는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등이다.

 

나는 I 하나를 추가해 TULIIP 교리를 말하고 싶다. 그것은 Irrational Exuberance(비이성적 과열)이다. 코로나 확산 사태를 보면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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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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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키나리의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버클리,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마르크스,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제임스, 듀이, 로티 등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지(知)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덕은 옳은 것이다. 그러니 옳은 것은 옳은 지식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나쁜 것임을 알고 행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다이모니온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다이모니온은 내면의 신 즉 마음속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이야기하는 영적 존재다. 철학의 역할은 지금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당연한 현실에 사고의 칼날을 들이대고, 때로는 상식을 초월한 논리를 가져와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33 페이지)

 

플라톤은 변화하는 현상과 변하지 않는 원리라는 두 입장을 모두 아우른 사람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다. 즉 가지적(可知的)인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삼각형을 손으로 그릴 수는 없어도 이성적인 능력으로 완전한 삼각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마음,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상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완전한, 영원한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사랑을 에로스라 한다.(38 페이지)

 

이데아가 영화 필름이라면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해당한다. 영혼은 이데아의 지식을 가지고 지금의 육체에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가 없어져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영혼에게 육체는 빌려 입은 옷과 같아서 임시로 잠시 머무는 숙소에 지나지 않는다.(39 페이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다. 그는 이데아는 개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체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상의 형태에 해당하는 것은 형상, 재료는 질료, 제작자는 작용, 완성된 동상은 목적(目的)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신은 선이고 궁극의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을 목표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 들면 이야기에 두서가 없어지고 비판이 늘어나고 부끄러움에 무뎌지고...“ 나는 어떤가? 두서가 없지 않다. ‘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체계를 갖추어 말하려 한다. 비판은 원래 많았다. 부끄러움에 무뎌진다는 것은 어떤가? 조금 그런 면이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에 민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리스도교의 틀을 통해 해석해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커다란 존재를 믿음으로써, 희망함으로써, 사랑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한다. 좁은 범위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교 교의를 이성의 힘으로 논증하고 체계화하는 대대적 과정에서 탄생했다.(73 페이지)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목표로 했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뛰어난 상대에게 다가가고 그 모습을 배우면서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편에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면 우리는 뜨겁다고 느끼지만 실은 차가운 것이라는. 우리는 속기 쉬운 존재다. 방법적 회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성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입장을 합리론이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래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흐름을 이었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기 거론되던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물체의 속성은 연장(延長), 정신의 속성은 사유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90 페이지) 데카르트는 정신의 속성인 사유의 자발성과 자유를 인정했지만 물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러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한 기계론과 결정론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은 연장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동할 힘을 갖지 않는다. 가령 당구대 위에 당구공이 있다고 해도 움직임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움직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처음에 공을 치는 힘이 필요하다. 데카르트는 이 역할을 신에게 부여했다.(96 페이지) 신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기에 물체 역시 항상성(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한 번 움직임이 시작되면 나머지는 영구히 운동한다. 데카르트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리스도교의 목적론에 입각한 철학과 다른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결정적 결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과 물체가 전혀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과 달리 둘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다양한 문제를 모조리 거부했다. 데카르트 이후에 남겨진 정신과 물체(물질), 기계론과 자유, 기하학적 정신과 종교적 정신 등의 분열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직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실체가 다양하게 표현된 결과다. 그러므로 세계는 얼핏 별개로 보이지만 실은 각자 어딘가는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바다라는 하나의 원리가 다양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과 우리 세계와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에 해당하며 신과 우리는 이어져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고 하나의 물체가 지닌 두 측면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과 육체는 항상 연동한다.(109 페이지)

 

그에 의하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우연은 없다. 이를 결정론이라 한다. 그러면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코나투스)가 있어서 수동성을 탈피하여 능동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인간을 성장시키는 신을 향해 이끌린다. 불행하다는 수동적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부터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至福)이 찾아온다.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백지 상태(tabula rasa) 같다고 설명했다. 로크는 우리의 마음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고 여기에 관념을 부여하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을 중시하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야말로 확실한 것이라는 견해를 인식론이라 한다.

 

버클리는 경험론의 두 번째 존재다. 흄은 경험론의 으뜸 권위자다. 칸트는 비판철학자다. 칸트는 처음에 합리론자였다가 흄의 회의론을 접하고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은, 선험적인 판단도 있다고 설명했다.(134 페이지)

 

칸트적 맥락에서 객관(서류)은 주관의 기능(정리 선반)에 의해 구성된다. 감성에 의해 대상이 부여되고 대상은 오성(悟性)에 의해 사유된다. 이를 이성이 크게 아우른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에게 이성, 신, 영혼, 자유, 우주의 끝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물자체(物自體; 인식되기 이전에 모습을 나타내는 본체; 147 페이지)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 능력이 경험 불가능한 것을 굳이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성을 비판했다. 칸트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이때만큼은 정확하게 지켜오던 일과인 산책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칸트가 ’에밀‘에 감동한 것은 그 책에 인간의 자율 정신, 자신을 제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자신의 이해나 욕망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명령에 걸맞은 행위를 했을 때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세계에도 법칙을 세웠다. 칸트는 그것을 도덕법칙이라 불렀다.(141 페이지) 저자는 헤겔 철학을 설명하며 세계는 착각의 총체로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한다.(149 페이지)

 

저자는 헤겔은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범신론자라고 말한다. 헤겔 철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란 스스로를 확산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셸링이 주장한 실존이란 개념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다. 그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인생은 이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의 문제에서 가장 최고의 경지를 종교에 두었다. 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연관시키는 것처럼 시간과 영원, 가능성과 필연성, 신체와 영혼 등 같이 있을 수 없는 모순된 존재들이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 단계의 실존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170 페이지)

 

니체는 진리란 그것 없이는 어느 특정한 종(種)의 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오류라고 말했다.(174 페이지)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주장한 철학자다. 이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생성의 원리를 말한다. 니체는 가치가 전도된 사상의 근원을 르상티망으로 보았다. 르상티망이란 증오나 복수심을 말한다.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플라톤주의도, 그리스도교도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를 전제로 성립된 것이므로 무(無)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매우 괴로운 삶을 보낸 사람이다. 대학 교수 지위에서 쫓겨난 데 이어 사랑에 좌절하였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친구도 잃었으며 만성적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니체의 삶 만큼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괴로움을 다시 한 번’이라는 의미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데카르트 철학 이후로 인간이라는 긍지는 그 이성적인 정신에 있었다. 이성은 사유의 정신이고 이는 곧 마음이므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이해할 수 있고 뭐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 역시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이에 상반되는 전제로 시작된 사상이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철학이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4 페이지)

 

후설은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소박한 태도에서 출발했다. 후설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를 괄호 안에 넣고 판단중지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를 세계의 스위치를 끄는 것(off)으로 표현했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있는 컵이 의식세계의 컵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순수하게 기술하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209 페이지)

 

후설은 모든 인식이 궁극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다양한 사실에서 유사성을 띤 하나의 본질이 간파된다. 본질 직관은 형상적 환원에 의해 추출할 수 있다. 후설은 자아로부터 타자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자는 자기로부터 유추된 제2의 타자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각각 독자적인 방법으로 타자에 관한 문제에 접근했다.

 

인식 작용을 노에시스, 인식 대상을 노에마라 한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노에시스), 사물(노에마)을 인식한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은 물체에 에워싸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상학적 환원 후에는 사물의 의미에 에워싸여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우리는 눈 앞의 컵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환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컵이 환각인지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한다. 거꾸로 어떻게 컵이 실재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는 것인지를 열거해나간다. 우리 각각은 자신이 의미부여하는 단계가 있고 나머지는 타자와의 공통된 이해를 얻으면 된다. 현상학은 상식적인 세계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의식이라는 무대에 무엇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현상학은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에 이르러 크게 성숙해간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도 현상학 분야에서 나름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했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환원의 생활(세계)에 대한 작용을 주장하는 후설의 후기 사상에서 출발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한 현상학적 환원의 목적은 주관과 객관의 도식을 폐지하고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며 타인의 경험까지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233 페이지)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동이라는 행위에서도 자유롭기 힘들다고 말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동물의 행동과 인간의 활동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하며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한다.(270 페이지) 맑스는 노동을 인간에 의한 물질적 생산 행위라고 인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노동력까지 상품화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하고 있다.(273 페이지)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rupture)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개념은 알튀세르가 바슐라르로부터 채용한 말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청년 맑스는 소외론에 가까운 문제 구성을 취하고 있었지만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는 그것을 방기했다고 한다. 사회가 관계의 총체라는 관점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등의 과학적 개념이 출현했다고 한다.(280 페이지) 알튀세르는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독립한 구조(중층 결정되는 존재)로 보았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에서 채택한 중층 결정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그때까지의 맑스주의에 반성을 촉구했다. 하나의 사건은 단일한 모순(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이질적인 모순(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경제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최종심급이고 정치나 문화 등의 상부구조에도 자율적인 시스템이 있어 그 자체 에너지에 의해 역사를 추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에 있는 복잡한 리비도가 분출해 의식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구조라 보았다.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적 측면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역사를 구조주의적으로 재인식했다. 알튀세르는 맑스 철학을 구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재구축했다.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애드립보다 대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파롤 즉 대화언어를 우위에 놓고 문자언어인 에크리튀르를 열등한 위치에 두었다고 설명하며 에크리튀르의 우위를 주장했다. 파롤은 타인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단순히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서구의 파롤 우선주의가 형이상학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책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나란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을 완성시킨 필자로서의 나일 뿐 자신의 방에서 끙끙거리면서 원고를 쓰는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을 쓰는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나라는 고정적 존재가 아니라 문자언어를 통해 증폭된, 시간적인 차이(원고지와 씨름하고 있을 때의 나와 완성된 책의 필자로서의 나 사이의 차이)를 살아가는 나라는 것이다.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29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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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에 자리한 라이너노트라는 음악 책 전문 서점을 티브이로 보았지요.(라이너노트; 음반 해설지) 대표는 박미리새라는 시크한 이름을 가진 여자 분이지요. 미리내(은하수)를 배경으로 해 새가 날아가는 태몽에서 비롯된 실재 이름이라네요.

 

오늘 조류학자(ornithologist)의 심정으로 사실상 첫 탐조(探鳥)길에 오르는, 그리고 서울 해설 코스를 구상하는 제게 영감으로 다가오는 동네고 서점이고 이름이네요. 어제 박씨 성을 가진 영민한 여자 영어 강사 분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꿈 작업에 속하는 응축과 치환을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오늘 아침 같은 박씨 성을 가진 세련되고 이지적인 분을 보게 되어 행복하네요. 참고로 피곤 탓인지 어제 저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꾸었는데 새가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꿈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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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급등 사유 없음 - 세력의 주가급등 패턴을 찾는 공시 매뉴얼
장지웅 지음 / (주)이상미디랩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주가급등 사유 없음’은 아주 전문적인 책이다. 저자 장지웅은 인수합병 분야의 전문가다. 저자는 이 책을 단순화시켜 접근한 책으로 소개한다. 어려운 용어를 알려거나 가르치려 하지 말고 어려운 용어들이 대략 어떤 의미인지 알면 족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한 요소만 따라가는 투자는 단기적인 운에 편승한 위험한 습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그리고 주가의 상승 이유는 찾기 쉽지만 주가가 왜 저점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머무는지, 어느 시점에 어떠한 이유로 저점에서 벗어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가 상승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식적인 근거를 나열하거나, 검증이 어려워 모호한 영역인 세력이라는 용어를 아무 종목에나 갖다 붙이는 경우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주식과 투자를 대하는 요령을 귀띔한다. 비유도 적절히 한다. 밀푀유나베, 사랑 등등...어떤가? 저자의 말은 가슴 아프기도 할 것이다. 가령 차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나만큼은 잃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은 결국 쓰디쓴 투자 실패로 되돌아온다는 말...

 

주식도 심리에 좌우되고 더구나 맹목적이기 쉽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냉정해야 한다. 세력 이야기도 하자. 세력들은 사전 작업을 위해 1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 입장(43 페이지)하고 세력주는 폭락장도 버틴다(48 페이지)는 말. 세력에게 있어 시너지나 경영은 아무 의미도 없고 누가 하든 상관 없고 오직 M&A를 수단으로 자본 차익을 챙기는 것이 목적이다.(69 페이지)

 

개인 투자자만 주가의 등락에 마음 졸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기는 길은 분명 있다.(71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과도한 망상과 자신감에 사로잡혀 복용법을 어기고 남용할 거라면 당장 이 책을 덮으라고. 그런 분은 평생 주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다른 용어는 모르더라도 메자닌 채권이란 말은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메자닌 채권이란 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메자닌)을 가진 채권이다. 메자닌이란 원래 이탈리아어로 건물 1층과 2층 사이의 라운지를 말한다.

 

이제 다시 세력 이야기를 하자. 세력이 종목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가총액의 규모다. 기준은 2천억이다.(89 페이지) CB(Convertible Bond; 전환사채)와 BW(Bond with Warrant;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한다고 해서 전부 세력주는 아니다. 핵심은 흐름 속에서 기회비용에 집착하는 세력의 통일성이 드러나는가에 있다.(103 페이지)

 

구체적인 예를 보자. 주당 1,000원에 거래되는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주가가 폭락해 담보가치가 떨어지니 채권자가 반대매매로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채권자가 회수도 안 하고 느긋하면 십중팔구 꿍꿍이가 있는 세력주다.(119, 120 페이지)

 

일반적인 자금 출처는 회사 유보금, 증자, 담보대출, CB나 BW, 주주출자 등 다섯 가지인데 세력은 어떤 방식을 택할까? 예상과 다르게 세력은 다소 생소하게 신사업은 보통 주식교환이나 교환사채를 발행해 추진하고 신규투자는 보유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133 페이지) 저자는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먼저 소개한 뒤 독자들의 주식 투자에 대한 다양한 이해도를 고려하여 세력의 작전 시나리오를 큰 그림에서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모두(冒頭)에서 전문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단순화시켜 접근했다는 말처럼 설명을 쉽고 상세하게 해준 덕분에 스토리텔링을 대하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는 설명한 이야기를 큰 무리 없이 잘 따라오고 있다면 다시 탄탄한 스토리로 머릿속에 정리해보자고, 가치투자나 보수적인 투자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주의하고 피해야 할 패턴을 확실히 숙지하는 기회로 삼길 권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세력들은 금감원 앞에서도 당당할 만큼 진화한다.(195 페이지) 안심스럽게도(?) 저자는 세력이 실패하는 여섯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전부 옮기기보다 두 가지를 든다면 그 하나는 기존 대표이사나 최대주주가 실권을 내놓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대표이사와 최대주주가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 있을 때다.(202 페이지)

 

책 제목처럼 저자는 ‘아무도 모른다. “주가 급등 사유 없음”’이란 말을 한다. 테마나 재료가 붙어서 주가가 급등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밖에서 바라보는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다. 중요한 말을 보자. “주식시장이란 테마와 명분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 가격이라는 숫자로 바로 환원되는 신기한 곳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처음 주식을 접했을 때 대표이사나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으면 욕심 없고 착한 사람이고, 그런 리더가 이끄는 회사라면 분명 직원들이 신바람 나게 일하도록 해줄 것이고, 실수해도 눈감아주는 가족 같은 회사일 것 같았고, 당연히 충성스러운 직원들도 많아 실적 역시 아주 좋으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주식시장 무서운 줄 몰랐던 시절이라고 말한다.(223 페이지)

 

주식과 관련된 소문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식에 발을 담근 이라면 구구절절 사연이 많을 것이다. 주식 이야기 중 세력과 작전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 흥미로운 소재다. 영화 같은 배신 이야기를 사람들은 특히 재밌어 한다.(235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세력이란 부정적이고 불법적인 의미의 세력도 있지만 주로 합법적인 M&A 판을 만드는 세력이다.(236 페이지)

 

종결부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주식 관련 책을 몇 권 읽지 않은 가운데 ‘주가급등 사유 없음’은 가장 인상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잘못된 상식에 함몰되어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준다는 의미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영화 이야기를 한다. ‘아수라‘, 절박하고 비루한 인간들의 삶이 모여들어 끝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스토리의 영화다.

 

“세력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아수라의 한복판으로 말려 들어간다.”(293 페이지) “M&A와 세력에게 있어 개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시세차익을 만드는 건 번외편일 뿐이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거래 담당자 등 수많은 관계에서의 수 싸움이 본편에 가깝다. 결국 세력도 별 수 없는 비루한 인간이기에 각개 전투로 몸부림치고,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혈투를 벌이며 살아간다.”(295 페이지)

 

참으로 드라마틱한 말이다. ’세력보다 지저분한 마귀라는 존재’라는 챕터를 보자. 세력은 최대한 자본시장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며 시장의 규칙을 따른다. 마귀는 법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대신 책임을 뒤집어씌울 바지사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귀가 조직폭력배 부류는 아니다. 마귀 중에는 사채업자가 많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마귀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마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실형을 받지 않도록 세팅을 해놓았다거나 형을 살더라도 그 이후를 책임져줄 만큼 큰 금액을 제시하는 등의 약속이다.

 

“검찰이 구형의 기준으로 삼는 자본시장법은 애매한 부분이 정말 많다. 그래서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도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미공개정보이용, 시세조종, 주가조작, 시장질서 교란, 자금유용, 횡령, 배임 등 자본시장법 관련 위반 사례가 현실에서 뚜렷하게 입증되는 경우는 드물다.(318 페이지)

 

저자는 다시 시작이니 모든 시장참여자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며 이제부터는 세력에 당하지 말고 당신이 돈을 위해 세력을 고용하는 투자자로 건승하길 응원한다고 말한다.(331 페이지) 참 독특한 책이고 교훈적인 책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차근한 마음으로 다시 읽어야겠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주식 관련 전문가가 결코 아니지만 저자의 내공을 보니 나도 도 한 번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어림 없는 일이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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