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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건축가들 -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
김소연 지음 / 루아크 / 2017년 3월
평점 :
‘경성의 건축가들’은 철학과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소연의 책이다. 박길룡, 박동진, 강윤, 김해경, 나카무라 요시헤이 등을 다루었다. 부제는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이다. 당시 조선인은 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신무성은 총독부의 방침은 내선일체라고 부르짖었지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못마땅하기만 했다고 증언했다.
직장에서도 차별은 이어졌다. 승진이 어려웠고 건축 청부업자들도 조선인이 공사 감독을 하면 얕보았고 월급도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50퍼센트 정도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관청 취업률이 높았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였다. 조선인 건축가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회사령이 철폐된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시 건축가는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가진 기술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경운동 민병옥 가옥,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한 박길룡은 조선인 최초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 조선인 최초 조선총독부 건축기수였다. 당시 화두는 민족이었다.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의 주인인 친일 자본가 박흥식은 민족을 내세워 소비자를 끌어들였다. 박길룡은 안타깝게도 43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박동진은 해방 이후 영락교회, 고려대학교농과대학 본관 및 서관 등을 신축한 건축가다. 박길룡과 박동진은 한 살 차이다.(박길룡; 1898년생, 박동진 1899년생) 박동진은 3.1 운동에 가담한 대가를 심하게 치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獄苦)를 치르고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다가 5년이 지난 1924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박길룡이 건축가 입장에서 온돌만을 절대 유지합시다라고 했을 때 박동진은 온돌 폐지론을 주장했다. 박길룡은 절충적이고 타협적이었고 박동진은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었다. 물론 온돌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온돌은 심각하게 삼림을 훼손했다. 당시 온돌 망국론까지 등장했다.
온돌은 바닥면에서 직접 열을 받기 때문에 움직임이 둔한 좌식생활을 초래했고 그로 인해 조선인은 게을러져서 망국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에 조선에 온 일본인들이 심하게 온돌을 비판했다. 하지만 조선의 추운 겨울을 몇 번 겪은 뒤에는 ”온돌은 한겨울에 따뜻할 뿐 아니라 취사까지 할 수 있다. 여름에는 바위에 누운 듯 시원하다. 다다미보다 청소가 쉽고 먼지도 없어서 더 위생적이다.“란 말을 했다.
일본인들의 온돌 수요가 늘자 일본 민간업자들은 개량 온돌을 만들었다. 박길룡과 박동진 둘 다 좋아했던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온돌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일본의 제국호텔 욕실과 미국 주택에 온돌을 설치했다.(두 건축가가 라이트를 좋아한 것은 라이트가 설계한 건축이 형태와 기능이 지역의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88 페이지)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박동진은 온돌을 무기력한 국민성과 구태의연한 주거문화의 상징으로 여겼다. 박동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축은 전통과 인습에 얽매인 건축에 반항하는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그런데도 박동진의 대표작은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석조 건축인 지금의 고려대학교 본관인 보성전문학교 본관과 도서관이다.(박동진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을 설계하며 민족의식 운운하자 건축주인 인촌 김성수는 기술자가 도면이나 잘 그리지 무슨 인생관이냐고 말했다. 그러자 박동진이 발끈해 기술자에게도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다고 받아치자 김성수가 사과했다고 한다.: 109 페이지)
영락교회도 고딕 양식이다. ”박동진에게 고딕 양식의 석조 건축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높일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박동진이 주로 사용한 석재인 화강암은 조선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양질의 재료이면서 전통 건축의 문제점인 비내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였다. 고딕 양식 또한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한 르네상스양식과 다른 서양의 건축 양식이었다“(민현석 지음 ’서울감성여행2‘ 73 페이지) 물론 박동진은 아무리 일본기관에서 밥을 벌어먹지만 결코 민족의식에 배치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윤(姜沇)은 일제강점기 태화기독교사회관을 신축한 건축가다. 독립운동 공훈으로 200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고 2006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박인준(朴仁俊)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공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다. 가회동 윤치왕 주택이 박인준의 대표작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김세연은 건축 구조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건축가다. 경교장이 대표작이다.
박길룡과 김세연은 환상의 파트너였다. ’설계는 박길룡, 구조는 김세연’으로 통했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은 미쓰코시백화점, 화신백화점(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건물로 현재는 철거되었다.), 조지아백화점(丁子屋.; ちょうじ; 현재 롯데영플라자), 경성제국대학본관(현재 예술가의 집) 등이다. 김윤기는 조선인 최초로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사람이다. 1960년대에 다섯 번이나 장관을 역임했다.
이천승은 ”만주국으로 간 수재”라는 평을 듣는다. 해방 이후 우남회관, 조흥은행 본점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김해경은 ‘시인 이전에 건축가, 이상 혹은 김해경’이란 제목으로 편성되었다. 저자는 이상의 삶과 작품 모두 살아서는 몰이해, 죽어서는 신화가 되기에 딱 좋았다고 말한다. 이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해도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다. 모더니스트라는 것이다. 그냥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최초의, 최고의. 이상은 돌연변이 시인 취급을 받기 전까지 멀쩡한 건축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오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했다. 건축과를 수석 졸업한 이상은 건축 일을 하면서도 그림, 시, 소설을 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고희동이 이상의 학교 미술 교사였다. 이상은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백부(양아버지)가 반대했다. 이상이 건축을 전공한 것은 백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김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처음 쓴 것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앨범에서였다.
김세연이 구조계산한 미쓰코시백화점이 준공되었을 때 이상은 의주통 공사현장에서 썼던 첫 장편 소설 ‘12월 12일’을 ‘조선‘이란 잡지에 연재했다. 박길룡이 설계한 경성제국대학 본관이 완공되었을 때 이상은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조감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같은 해 자상(自像)을 그려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했다. 1933년 이상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다.
1933년 건축계를 떠나 1937년 도쿄에서 사망할 때까지 4년간의 삶은 일탈과 기행(奇行)으로 일관했다.(김해경이 일본에서 하도 이상한 행동을 해서 이상하다는 의미에서 이상이라 불렸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1936년 10월 이상은 탈출구를 찾아 일본으로 더났다. 그가 도쿄에서 얻은 것은 환멸이었고 잃은 것은 건강이었다. 1937년 2월 이상은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귀환했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한국전쟁 뒤 공동묘지가 사라지면서 유해마저 유실되었다.
장기인은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필동 한국의 집을 설계한 분이다.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설계한 건축가다. 다쓰노 긴코의 제자였던 요시헤이는 조선은행의 현장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1912년 조선은행이 준공된 뒤 나카무라는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황금정(을지로)에 나카무라 건축사무소를 열고 독립했다. 윌리엄 메렐 보리스는 YMCA 회관을 설계한 건축가다. 저자는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연이라는 말을 한다. 책처럼, 내 상태와 마음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와닿는다는 것이다.(26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