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서평을 써 게시했다. “새로운 삶은 그저 나의 길을 함께 가며 웃는 것, 비극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운명과 자유의 놀이터다.“란 글을 인용한 뒤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뜨게 해준 김화영(金華永; 김리아로 개명) 님께 감사드린다는 말로 마무리한 서평이었다. 저자께서 이 서평을 읽으시고 당신의 다른 책(’영성, 삶으로 풀어내기‘)을 보내주셨다.

 

아침 유튜브를 통해서는 다니엘 밀리오레의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의 중요 부분을 전해 받았다. 기독교적 믿음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생각하는 신앙이고, 기독교적 소망은 피상적 낙관이 아니라 기초가 튼튼한 소망이며, 기독교적 사랑은 낭만적 순진함이 아니라 두 눈을 활짝 뜨고 빈틈 없이 살피는 사랑이라는 말이 와닿았다.(신앙이어야 하고, 튼튼한 사랑이어야 하며, 살피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이데올로기, 자기도취, 열광주의, 미신,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된다는 지적도 좋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말은 인간의 진정한 삶이 중단되는 이유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는 용기가 없어서란 말이다. 모두 독특하게 사유하려는 진지한 고민이 엿보이는 말들이다. 다소 마음이 평안해졌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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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지질 해설사 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작년 주민탐사단 답사 일정에 참여한 분으로 나는 그 분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 분은 나를 기억하셨다. 대화가 이루어진 곳은 부곡리(釜谷里) 재인폭포 지질해설사 사무소였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혼자 돌아가기 싫어 잠시 이야기하다가 귀가하려고 들렀으나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제와 다르게 바람도 잦아들었고 추위도 물러가 참 좋았다. 사무소에서 재인폭포 입구까지 오고 가고 거의 한 시간을 걸으며 중간 중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선생님이 경복궁 이야기를 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문화유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두 아들의 체험학습에 동행한 까닭에 아는 것이 많은 분이셨다. 궁궐/ 마을 해설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선생님처럼 문화 해설을 하시는 것이 아니면서 아는 것이 많은 분들을 보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해설을 하는 입장에서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 하나의 내용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그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에서 큰 내공을 발휘해야 한다. 청자(聽者)가 미처 접하지 못한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롭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새로움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다 보면 배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화의 효용은 다양하다. 연습도 되고 공유도 할 수 있고 피드백도 받을 수 있다. 공유는 구체적 내용을 알려주는 차원이기도 하고 단서 또는 영감을 주는 차원이기도 하다. 귀기울여 듣는 분, 피드백을 해주시는 분, 공감하시는 분 등을 만나면 기운이 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청자의 반응에 늘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관심사를 중심으로 적당한 분량을 전해야 한다. 최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 자신감이 큰 한 해설사에게 한 청자가 해설을 듣고 나서 ”지금 하신 말씀 말고 더는 없나요?“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해설사의 마음이 어땠을까?

 

늘 되새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빙산(氷山)처럼 큰 덩어리를 준비해 일각(一角)을 제시하고 물음이 있으면 더 들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자세로 준비해 간결(簡潔), 정교(精巧), 신선(新鮮)하게 전하기다. 새로운 내용 한 마디를 장착(裝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마을 주민들에게 묻는 것도 필요하다. 김명희 시인께서는 시인은 망원경, 현미경, 내시경, X ray 등의 시각으로 대상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해설은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내공이 동반되어야 한다. 올해는 서울에 몇 번 가지 못했다. 이제 곧 바빠질 것이다. 바쁨을 활기로 번역하고 싶다.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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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구) 문지 스펙트럼 9
박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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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첫 단어는 “어머니는..“이다. ”어머니는 다시 바느질을 하며, 대체, 그 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여본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다...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라니..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이하 소설의 어머니) 늙고 쇠약하다. ”아들은 잘 때면 반드시 불을 끈다. 그러나, 혹은, 어느 틈엔가 아들은 돌아와 자리에 누워 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아들에게는 그런 버릇이 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한 것인 줄 알았다. 박태원 작가와 나는 마지막 글자 하나만 다를 뿐이다..ㅜ ㅜ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광교(廣橋)로 향하는 구보는 한낮의 거리 위에서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쇠약임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화신상회 앞으로 가 안으로 들어간다. 구보는 인파 속에서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 한다. 구보는 거리에서 한 여자를 보고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구보는 약초정(若草町; 충무로.. 약초는 어린 풀을 의미한다.)을 지나간다.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구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경쇠약, 그러나 물론, 쇠약한 것은 그의 신경뿐이 아니다. 이 머리를 가져, 이 몸을 가져, 대체 얼마만한 일을 나는 하겠단 말인가.”

 

소설에 안잠자기란 말이 나온다.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며 일을 도와주는 여자를 말한다. 드난이란 말도 나온다.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 지내며 그 집의 일을 도와줌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서해(曙海)란 말도 나온다. 새벽 서, 바다 해자다. 소설가 최학송(崔鶴松)의 호다.

 

구보는 자기 지식의 고갈을 느끼며 악연(愕然)한다. 몹시 놀란다는 의미다. 소설에는 경성역도 나온다. 동경역이 아니라 스위스 루체른역을 모방해 지은 역이다.(1925년) 경성역에는 황금광시대란 말이 나온다. 황금에 미친 시대를 말한다.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은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하여 갔다. 황금광시대. 그들 중에는 평론가와 시인, 이러한 문인들조차 끼어 있었다.”

 

구보는 일찍이 창작을 위하여 그의 벗의 광산에 가보고 싶다 생각하였다. 사람들의 사행심, 황금의 매력, 그러한 것들을 구보는 보고, 느끼고, 하고 싶었다. 소설에는 칼피스란 음료가 나온다. 구보는 외설(猥褻)한 색채를 갖기에 싫어한다. 맛도 그의 미각에 맞지 않는다.

 

칼피스(カルピス)는 1919년 미시마 카이운(三島海雲)이라는 사업가가 만든 일본 최초의 유산균 음료다. 카이운은 중국에서 교사생활과 잡화상 사업을 벌이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으로부터 군마(軍馬)조달 의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군마는 오쿠라와 미쯔이 재벌이 독점한 상태라 카이운은 미개척 지역인 몽골로 눈을 돌린다.

 

군마를 구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몽골로 향한 카이운은 몽골 유목민의 산유(酸乳)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칼피스를 만들기에 이른다. 당시 회사는 칼피스 맛을 달콤하고 시큼한 첫사랑의 맛으로 광고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승려의 아들이자 불자(佛者)였던 미시마 카이운은 칼피스를 보시(布施)의 음료로 생각하고 폐허로 변한 도쿄에서 식수를 찾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다.

 

소설에는 조달수(曹達水)란 말도 나온다. 소다수를 이르는 말로 박태원 작가에 의하면 칼피스는 타락한 연애 시대를 상징하고 조달수는 여학생 취향을 상징한다. 칼피스와 조달수론은 구보 즉 박태원의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사와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지향성을 나타낸다.

 

소설에는 임금(林檎)이란 말이 나온다. 능금을 말한다. 소설에는 다료(茶寮)란 말과 끽다점(喫茶店)이란 말, 다방이란 말이 나온다. 모두 찻집을 말한다. 광화문통 이야기가 나온다. 울가망이란 말이 나온다.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기분이 나지 않음.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삐꾸는 고약, 까시는 놀림이다.

 

구보는 자신을 구포로 발음하는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원고료라 말하는 것을 듣고 원호료라 말하지 않은 것에 경의를 느낀다. 웃음이 슬며시 새나온다. 조선호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호텔’이란 소제목으로 언급되었다. 그 앞의 경운궁 이야기는 없다.

 

소설에서 구보가 걸은 곳은 이리저리 어지럽다. 돌아오고 다시 가고...사실 간 곳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순서를 따라 읽어야 이야기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보는 다시 어머니 걱정을 한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아들을 생각하며 근심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보는 친구가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 말하는 것을 듣는다. 구보는 이에 정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한다. 마지막 부분에 회신상회가 다시 나온다. 화신백화점의 전신이다. 1931년 설립된 곳이다.(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것은 1934년이다.) 화신상회가 1931년 박흥식(朴興植)에 의해 매수되어 백화점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가장 마지막 문장은 구보가 이제 어머니가 혼인 이야기를 꺼내도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어쩌면 상당히 중요한 결론인 수도 있다. 소설에서 특별한 사건은 없고 전편은 구보의 걸음, 상념 등으로 일관하는데 여자 이야기도 한 몫 한다. 그 우회 끝에 구보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 보면 허망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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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보낸 하루 라임 틴틴 스쿨 3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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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보낸 하루’에 이어 읽게 된 책이다.(출간 연도는 ‘경성에서 ~’가 먼저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양에 가서 하루를 보낸다면?‘이란 가정 아래 걸은 한양 산책기다. 조종산(祖宗山)이란 용어가 나온다. 물에도 근원(발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점이 있는데 그런 산을 조종산이라 한다. 한반도의 조종산은 백두산이다.

 

한양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도시다. 한양 도성 안에는 원칙적으로 경작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날마다 필요한 먹을거리, 생활용품 등을 도성 밖에서 들여왔다.

 

북과 징으로 시간을 알리는 것을 보자. 5경 3점을 예로 들자. 5경은 새벽 3시 - 5시다. 북을 다섯 번 치고 징을 세 번 친다.(이것을 다섯 번 되풀이한다.. 경; 更, 점; 點. 경의 아래 단위인 점은 1경을 5등분한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양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구의 처, 애미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역모에 가담한 집안 여성이 노비가 될 경우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핑계는 아닌 듯 하다는 말이다.

 

양반가는 노비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갈 수 없었다. 노비는 양반가의 재산 목록 1호였다. 노비는 사고팔 수 있었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다른 이에게 기증하거나 선물할 수도 있었다. 부모 중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된다. 이를 종모법이라 한다.

 

노비 부부의 주인이 다르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어미를 따른다. 어미쪽 주인에게 아이 소유권이 있다. 노비 주인은 자기 집 남종이 다른 집 여중과 혼인하는 것을 꺼린다. 남의 재산을 불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노비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4 페이지) 원래 노비(奴婢)의 노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난 대로인 육조(六曹) 거리는 조선의 행정 타운이다. 좌우에 의정부, 한성부, 이호예병형공의 육조와 같은 관아(官衙)가 배치되었다. 큰길 후방으로는 하급 관청이나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내수사(內需司),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제용감(濟用監), 사복시(司僕寺; 병조 소속으로 말과 목장에 관한 일을 맡던 관아) 같은 관아가 군데군데 있다.

 

조선의 탈것을 보자. 초헌(軒)은 판서가 타는 외바퀴 수레다. 평교자(平轎子)는 정승이 타는 수레다. 한성부가 전국의 호적 업무(호패 발급 등)를 맡았다. 그래서 한성부에 호적청(戶籍廳)이 있었다. 마의청은 동물병원이다.

 

반수(泮水)는 성균관의 동서에서 흘러내린 물이 남쪽에서 합쳐진 물을 말한다. 중국 주나라 때 대학 주변에 물을 흐르게 한 전통을 따른 것인데 조선은 제후국이어서 반만 흐르게 한 것이다.(오늘날에는 아스팔트로 복개되었다.) 매단다는 의미의 현(懸)자를 쓰는 현방(懸房)은 푸줏간을 말한다.

 

한양에서는 반수 건너편 사람들을 반촌 사람들이라 했다. 신분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다.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라는 학자가 자신의 사노비 백여 명을 성균관에 바쳤다. 이 사노비가 반촌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입학하면 반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양 여겨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반촌 사람들은 성균관과 관련된 온갖 잡일을 하며 산다. 그들은 공자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와 유생들의 식사로 제공되는 고기를 공급하다 보니 몇몇 반촌 사람들이 소를 도살하고 고기를 판매한 것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성균관의 기숙사다. 노론 집안 유생들은 서재에, 소론과 남인, 소북 계열의 유생들은 동재에 거했다.

 

한양 사람들이 과거에 크게 유리했다. 3년마다 치르는 정규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의 경우 합격자의 30에서 40퍼센트가 한양 사람들이다. 별시는 한양 유생이 절대 유리했다. 한양 사람이 아니고서 별시 정보를 제때 알기 어려웠고 알았다 해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별시가 식년시보다 선발 인원이 많았다.)

 

별시 가운데 임금이 봄, 가을에 문묘에 참배하고 난 뒤 치르는 알성시도 있다. 1776년 규장각을 세운 뒤 정조가 규장각 각신의 사무실로 만든 것이 이문원(文院)이다. 이문원 바깥 기둥에 현판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비록 대관과 문형(文衡; 대제학)일지라도 전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오르지 말라.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문신 가운데 4품 이상은 ~ 대부, 5품 이하는 ~랑이라 한다. 정3품 이상은 당상관, 그 이하는 당하관이다. 당상은 대청 위를 말한다. 흥인문 안팎으로 연못이 두 개 있다. 동지(東池)다. 흥인문 안쪽의 연지가 있던 동네가 지금의 연지동이다.

 

종루가 있는 시전(市廛) 거리를 운종가라 한다. 난전(亂廛)은 길거리 가게다. 좌의정 채제공이 건의해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 것을 신해통공이라 한다. 피맛길을 따라 기와집의 담장이 늘어선 주택가를 걷다 보면 이문이 나온다. 도둑을 막기 위해 동네마다 설치한 문이다.

 

18세기 중후반부터 혜민서와 활인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개인 의원과 약국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질 좋은 약재 중에서 궁중에 진상하고 남은 것이 민간으로 흘러나와 팔리기도 했다. 종묘의 오른쪽 동네와 그 아래로 종로 4가에 걸쳐 있는 시장인 배오개(이현) 시장에는 채소가, 숭례문 밖 칠패 시장에는 생선이 팔렸다.

 

배오개 시장에서 파는 채소, 과일, 약초는 한양도성 안팎에서 재배한 것이다. 원래 한양도성 안에서는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찬거리 수요가 증가하자 도성 안팎에서 채소 농업이 활발해졌다. 채소, 과일, 약초 농사가 돈벌이가 되자 양반 사대부 중에서도 채소밭을 가꾸기도 했다. 배오개 시장은 1760년 무렵 영조가 배오개 근처의 민가 수를 늘리기 위해서 시전 설치를 허가해 생겨난 시장이다.

 

마포 나루 이야기를 보자. 나루는 나룻배들이 강을 건너는 양쪽 지점을 말한다. 나루터는 배가 닿고 떠나는 곳을 말한다. 마포 나루는 경강(京江)에서도 전국의 배들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조선의 3강은 용산강, 서강, 한강이다. 5강은 3강 플러스 마포, 망원이다. 8강은 5강 플러스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다.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고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다. 서쪽인 마포에서 오는 새우젓 장수는 아침에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도성 안으로 들어오니 얼굴이 타고, 동쪽인 왕십리에서 오는 미나리 장수는 아침 햇빛을 등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니 목덜미가 탄다는 의미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남촌의 술, 북촌의 떡을 알아준다는 말이다. 대전별감(大殿別監)은 왕의 잔심부름을 하는 하예(종)이다. 무예별감(武藝別監)은 왕의 호위 무사다. 대전별감은 조선 최고의 멋쟁이다. 항상 유니폼과 같은 관복을 입어야 하는 양반들처럼 지루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시사(詩社)는 한시를 짓는 모임이다. 원래 양반들이 하는 모임인데 인왕산 기슭에 경아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천수경이 유명하다. 송석원의 주인이었다. 서민, 양반, 중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잘 그린 것이 ’조선에서 보낸 하루‘의 특징이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독서하는 여인’이란 그림이 눈길을 끈다.(윤덕희는 공재 윤두서의 아들이다.) 인정(人定)은 종을 쳐 통금을 알리는 것이다.(28번) 파루(罷漏)는 쇠북을 쳐 통금해제를 알리는 것이다.(33번)

 

한성부가 다스리는 곳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였다. 성저십리란 한양도성 밖 십 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 전기 한양은 도성 안은 도시, 성저십리는 농촌으로 뚜렷이 구별되었다. 관례적으로 한양 주민은 도성 안쪽(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만을 가리켰다. 조선 후기에는 성저십리로 한양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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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은 내륙의 제주도, 제주도는 동양의 하와이라 하지요. 하와이 말로 아아 용암은 거칠고 딱딱한 용암, 파호이호이 용암은 부드럽게 굽이치는 용암이라죠. 농담으로 용암대지를 맨발로 걸을 때 아아 소리가 나면 아아 용암이고 그렇지 않으면 파호이호이 용암이라지요.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 앞에서 본 소녀 좌상이 기억에 남는데 오늘 서울의 한 구청 앞에 설치된 '신을 신지 않은 소녀 입상(사진)'을 보았어요.

 

소녀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픈 시기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일 것입니다. 이상 시인의 '날개'의 주인공은 아내가 자신에게 주는 것이 각성제인 아스피린이라 생각하다가 문득 수면제인 아달린인 줄도 모른다고 생각하지요. 그 생각이 납니다. 아달린이 아닌 각성제로 기능할 정신의(눈에 보이기에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아스피린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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