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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세 친구 ㅣ 창비청소년문고 3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안소영의 ‘갑신년의 세 친구’ 앞부분에 백송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 어루만지곤 하던 흰 소나무 줄기의 꺼칠한 감촉이..” 주체는 홍영식(洪英植)이다. 병조참판, 우정국총판 등을 역임한 그는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모두(冒頭)의 장면은 홍영식이 죽어가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갑신년의 세 친구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을 이른다. 갑신년이란 3일 천하로 끝난 개화파의 무력 혁명인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을 이른다. 거사일을 기준으로 갑신정변의 세 친구의 나이를 말하면 김옥균 34세, 홍영식 29세, 박영효 24세였다. 홍영식과 함께 살해당한,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36세였다.
세 친구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북촌 사랑(舍廊)에 자주 모였다. 박영효는 철종의 영혜옹주(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의 결혼해 부마(금릉위; 錦陵尉)가 되었으나 아내가 석달만에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박영효가 철종 사위가 된 것은 철종 사후다.) 13세의 박영효는 소년 부마였다.(부마는 혼자 되면 재혼할 수 없는 것이 왕가의 법도였다.)
우의정 박규수(1807 - 1877)는 왕의 스승이자 젊은이들의 스승이었다. 또한 어린 고종이 따르고 의지하던 스승이었다. 박영효가 부마가 된 것도 박규수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고 고루한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내탕금(內帑金)을 쓰면서까지 김옥균, 유길준 등을 비밀리에 일본 시찰길에 오르게 한다.
통역은 유길준이 맡았다. 두어 달만에 일본어를 익혀 교지에 일본어로 글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다. 윤치호는 아버지 윤웅렬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윤치호는 집안의 반대 때문에 애를 먹었던 다른 젊은이들과 달리 서얼 출신의 무관인 아버지 윤웅렬 덕에 편히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윤치호를 만난 김옥균은 윤치호가 영어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달라졌다며 잘 생각했다고 격려한다. 김옥균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도울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는 한편 일본이 자금 원조를 해줄 용의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 당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같은 방식으로 1874년 우리나라를 개항시켰다. 미국에 당한 지 20년만의 일이다. 일본은 중국이란 호칭 대신 시나라는 호칭을 썼다.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니 두 나라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그때 임오군란이 일어난다.(1882년) 홍영식은 스물 이전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조정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 대감은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마땅해 하지 않았다. 노련한 흥선군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순목 대감은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오랑캐 왜인들의 문물을 배우겠다고 시찰단에 나선 것도 불편해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두루 갈등했다. 홍영식은 밀린 급료를 달라고 요구하는 구식 군사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영식은 반년만에 김옥균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대원군과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가 나서서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중재해 주리라 기대했다. 난으로 인해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자국민들이 죽었다.
청나라는 난리를 빌미로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장정(章程)과 조약(條約)의 차이가 있다. 청나라는 나라끼리 맺는 조약이 아닌 지방 정부에게 하듯 장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금륭위 박영효는 군란으로 입은 피해를 위로하고 사죄하는 수신사로 석달간 일본에 다녀왔다. 수신사로 가기에는 정일픔 부마(駙馬)의 신분은 너무 높았다.
서광범, 김옥균이 동행했다. 박영효는 자신이 일본 숙소에 내걸었던 우리나라 국기를 보여주었다. 청나라는 용이 그려진 제 나라 기를 본떠 우리나라 국기를 만들라고 했었다. 조선은 중국 동쪽의 좌청룡이니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리라 했다. 박영효는 조선이 변화하는 세계에 동참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은 가까운 일본에 의뢰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박영효는 이웃 나라가 문명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일본도 고립되기에 이를 방해하는 청나라를 미워하고 그래서 조선을 돕겠다는 일본의 논리를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다. 명성황후 민씨는 변복으로 궁궐을 탈출, 피신해 장호원 민응식(명성황후의 일족)의 집으로 갔다. 장호원은 지금은 경기도 영역에 속하지만 당시는 충북 충주에 속했었다.
이곳에서 민씨는 무당 박씨를 만났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살기 위해 무당이 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민씨는 난자당하기 직전에 몰렸다가 홍재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민씨를 아는 궁녀가 입짓으로 민씨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 휘장을 찢고 민씨의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속에 있던 홍재희란 사람이 이 사람은 상궁이 된 자기 누이동생이라며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긴가민가하며 머뭇거리는 군사들 사이를 뚫고 홍재희는 민씨를 업고 궐 밖으로 나갔다.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자가 박씨의 단골이었다. 여종을 통해 민씨와 박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씨는 눈치와 감언이설로 민씨의 환심을 샀다.(신명호 지음 ‘조선왕조 스캔들’ 참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난리가 진압되고 대원군이 텐진으로 끌려간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했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지난 일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나라로 끌려갔다면..) 민씨는 청나라에 의지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돌아와 한달만에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 시장)이 되었다.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였다.
민씨 조카인 민영익은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청나라 이홍장의 참모인 묄렌도르프(목대감이라 불린)와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을 두고 왕 앞에서 언성을 높여 싸웠다. 발행하자는 목대감과, 반대하는 김옥균이 싸운 것이다. 고종은 두 사람과 두루 친한 민영익에게 중재를 해보라 명했다. 박영효는 청나라 관리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광주(廣州) 유수로 좌천되었다.
김옥균은 차관을 들여오고 공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규수 대감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젊은 양반들은 민영익의 사랑에서 자주 모였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올 태세였다. 김옥균의 일본행은 세 번째였다. 시찰단, 임오군란 사죄, 차관으로 인한 것 등..김옥균은 왕의 위임장까지 가지고 일본에 돈을 빌리러 갔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의 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박영효는 양병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박영효가 광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대 세력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왕실 인척이 사사로이 병사를 기르고 있다며 소리 높여 박영효를 규탄했다. 이 일로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도 물러났다. 울분과 실의의 나날이었다.
청나라 군사들(1500명)이 물러났으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김옥균과 벗들이 간절히 원하는 조선의 독립 자주는 청나라에 기대기로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 자주라는 말을 폭풍우 치는 거센 바다에 조각배를 타고 나아가자는 말처럼 무모하고도 대책 없는 일로 여겼다.
김옥균은 “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때를 만들어야겠지.”라 말한다. 청나라 관리들이 조정에서 거들먹거리고 청나라 상인들이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도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이 보장되는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은 상황을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청에 기운 대신들과 각 군의 영사들을 단번에 없애고 조정과 군대를 우리가 장악해야 하네. 그런 뒤 조정을 우리 사람들로 새로 꾸리고 일대 개혁을 실시해야지.“(김옥균의 말) ”그럼 다들 생각이 같은 것으로 알겠네. 이제 큰 원칙을 정한 만큼 더 이상 궁리할 것도, 다시 돌아볼 것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세. 시일을 길게 끄는 건 좋지 않으니 구체적인 방안을 빨리 내 오도록 하겠네. 다시 한 번 당부해 두지만 절대 우리 계획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네.“(김옥균의 말)
일본은 40만엔을 조선에 되돌리겠다는 자국 황제의 명을 전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일본이 요구해 받아간 돈 50만엔에서 40만엔을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조정을 뒤집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첩보를 얻고 조선 주재 일본 다케조에 공사에게 청나라에서 벗어나려는 조선 정부의 움직임을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성공하면 입지를 넓힐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는 데다가 길게 보아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꿈꾸는 맹랑한 자들이 쓰러지고 나면 조선은 더욱 호락호락해질 일이었다. 서광범은 김옥균이 일본의 차관을 얻으려 할 때 왕의 위임장이 위조된 것이라며 방해하던 공사가 태도가 달라지자 의아해 했다.
더구나 젊은 그들이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한 상황에서라니..집안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따라온 서재필도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대치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일본 공사는 공사관 병력을 지원할 수 있다는 말도 넌지시 던졌다. 조선 사람들보다 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외치고 다니는 다케조에 공사는 미덥지 않은 존재였다.
서재필은 실질적인 무력을 맡을 사관생도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종은 김옥균에게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겠다l. 앞으로의 일에 관해 너를 깊이 믿는 바이니 기어이 품은 뜻을 한번 펼쳐 보라.“고 말했다. 정변(政變) 날짜는 12월 4일로 정했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청사가 완공되었기에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각 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초대해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이인종과 행동대원들이 청사 옆 별궁에 불을 질러 소란을 일으키면 그 틈에 조선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참(斬)하기로 했다. 그리고 왕을 행궁으로 모시고 가 새로 꾸린 조정에서 정령을 반포하고 대개혁을 실시할 것이었다. 4일은 월 1회 오는 우편선 천세환이 제물포항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우편선을 통해 일본 정부에서 무슨 엉뚱한 다른 소리를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정변을 믿을 수 없는 일본과 도모한다는 것이 참 딱했다. 홍영식은 비장했다. 진정으로 자신의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이다. 갑신년 12월 3일 새벽, 거사 하루 전 운명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 위에 소복소복 흰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민영익이 칼에 맞아 위독한 상태가 된다. 예리한 일본도에 귀가 거의 잘렸고 동맥까지 상했다. 알렌이 민영익을 대수술했다.
우정국 옆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부터 쌓인 눈과 순라군들의 경계로 인해 쉽지 않았다.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청사 북쪽 초가에 불을 질렀다. 왕은 창덕궁 서쪽의 경우궁(景祐宮)으로 향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 군대가 난을 일으켰다고 속여 왕과 왕비를 오게 한 뒤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한 뒤 혁신 내각을 구성한 곳이다.(경우궁에 모셔졌던 수빈 박씨의 신위는 칠궁으로 옮겨 모셔지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들 일곱을 모신 사당이다.)
박영효가 일본 공사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 병사들을 거느리고 경우궁에 도착했다. 김옥균이 새 정부의 각료 이름을 정리해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은 허락했다. 홍영식은 우의정을 맡았다. 박영효는 전후영사를 맡았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도승지를 맡았다. 스물 한 살 서재필은 병조참판, 김옥균은 재정담당인 호조참판을 맡았다.
민씨는 왕이 파천해야 할 정도로 큰 변이 났다는데 오빠 민태호와 조카 민영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고종은 왕명을 어기고 내관 유재현을 벤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개 내관의 입놀림이 두려워 죽이기까지 한 자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윤웅렬은 자신이 형조판서에 오른 것을 보고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변 세력들은 무기가 녹이 슬어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다케조에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했다. 조선의 변란 소식을 들은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일본군과 성급히 충돌하지 말고 일단 사태를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성미가 급한 위안스카이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청의 대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감히 소란을 벌인 조선 젊은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본이나 조선 반란군들이 다시는 대국 청나라를 만만히 여기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 공격을 개시했다. 김옥균은 외국 공관이 많은 제물포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정변 세력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홍영식은 왕을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홍영식은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뜻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 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라고 말했다.
이에 박영효의 형 박영교도 끝까지 남겠다고 선언했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이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자 왕은 깜짝 놀라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김옥균은 ”신들이 나라와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음은 잘 알고 있사온데 어찌 감히 저버리겠습니까? 오늘 잠시 물러나는 것은 다른 날 다시 한 번 쓰임을 얻기 위한 것이옵니다. 신들의 충정을 잊지 마시옵고 부디 강녕하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부디 목숨을 보전했다가 후일 과인을 위해 일하라.“고 말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왕의 뒤를 따라 묵묵히 북묘로 향했다. 김옥균은 도망치다시피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10년을 보냈다. 마흔 넷의 나이가 되었다. 정변 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간 아홉명뿐이었다. 홍영식과 생도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뒤늦게 붙잡힌 사람들은 극형당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병력을 무턱대고 믿은 것, 청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낙관한 것을 가슴을 칠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강렬한 소망이 이성을 압도한 것이 너무 큰 실수였다. 일본은 갑신년 조선 정변으로 잃은 것이 없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권리를 청나라와 동등하게 갖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개 망명자에 불과해진 김옥균을 더 이상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조선 정변에 자신들이 관련되었다는 논란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옥균은 조선의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2년이 지나 일본 정부에 의해 서태평양의 섬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아열대의 섬이었다.
김옥균은 다시 홋카이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추운 북쪽 지방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던 서글픈 가난, 오랜 유배 생활로 날이 궂을 때마다 온몸이 쑤셔 오는 통증, 지사(志士)인 체해도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조롱, 그리고 자책..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다. 김옥균은 상하이 항구 부근의 여관에서 암살당했다. 이홍장을 만날 준비를 하며 읽던 ‘자치통감’을 손에 든 채로였다. 1894년 3월 28일이었다. 박영효는 가장 늦게까지 살았다. 79세인 1939년까지다.
춘원 이광수는 박영효를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연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물었다. 박영효는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렸다. 김옥균이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삼십년이 넘었을 때였다. 박영효는 홍영식은 정변을 준비했고 자신은 정변을 총지휘했다고 말했다. 1894년 박영효와 조선 망명객들은 귀국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으로 거저 얻은 결과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후 박영효는 후작 지위를 받고 두루 풍요를 누렸다. 박영효는 한때 혁명가였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을 움켜쥐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 있었다.
저자(안소영)는 고종에게 어리석고 무능한 왕이란 일본의 평가가 내려져 그대로 굳은 것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고종이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살해하려 항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세 친구(김옥균, 홍영식, 박영효)가 주된 인물이기에 고종에 대해서까지 말할 여지는 많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아쉽다. 물론 긴 글을 쓴 저자에게 감사한다.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두어 줄로 요약된 글귀로만 이들을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글(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