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기(初老期) 인지증(認知症; 치매의 순화어/ 대체어)을 앓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정희성 시인의 시 ‘새벽이 오기까지는’을 떠올린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깨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유신(維新) 정권 말기인 1978년 나온 시다. 저 한탄강은 어느 한탄강을 이르는 말일까? 철원 한탄강인지, 연천 한탄강인지 궁금하다.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쓰인 말이리라. 한탄강이 논의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인은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얼음 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냉철한 판단력과 기억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점은 마음 또는 정서가 인지(認知)작용이나 지성(知性)의 작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이다.(스피노자로부터 배우는 진실이다.) 서늘한 마음을 지향하든 유연한 마음을 지향하든 자비를 지향하든 늘 성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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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 - 웅진도독부에서 주한미군까지
이재범 외 지음 / 중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한반도에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는 길다. 삼국시기부터였으니.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김창석, 이재범 등 12명의 저자가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목차를 보니 기억이 하나 둘 살아난다. 몽골군(책에는 몽고군이라 표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명나라군, 모문룡(毛文龍)군, 정묘/ 병자호란의 청군 등을 거쳐 해방 이후 북한의 소련군과 주한미군까지 참으로 긴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내 관심은 ‘개항기 청군’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챕터의 부제는 ‘민씨 척족의 사리사욕이 불러들인 12년 재앙’이다.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서술할 사건 또는 이야기 때문이다. 발간의 변을 듣기 전에 이야기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피침(被侵)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는가?란 물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중심의 서술이어서 아쉽지만 계승범 교수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각설하고 발간의 말(‘외국군 주둔사를 펴내며‘)에서 편집부는 1906년 일제가 미 8군 기지에 군사 시설을 들이민 이래 용산기지는 1백년 가까이 우리 땅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근세 들어 이 땅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쫓겨난 민비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청국 군대를 끌어들이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외국군 주둔의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군 주둔이 정치나 군사문제뿐 아니라 우리 문화와 풍속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 외국 주둔군과 이 나라 지배집단 사이의 유착관계를 밝힌 책이다. 또한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외국군 가운데 상당수는 극소수 지배집단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걸해서 불러들인 반민족적 사리사욕의 결과였음을 밝힌 책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사관 앞에서 해설을 하게 된 나는 중국대사관과 청나라 군대의 연관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밝혀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사와 무관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다행히 이런 기사가 있다.

 

“중국 대사관 자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수립하면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1882년 이후 중국이 사용해왔다.”(2017년 6월 17일 중앙일보 기사 ‘명동 주둔 청나라 군대의 첫 임무는 대원군 유괴와 납치’)

 

‘발간의 말’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884년 7월 청국이 베트남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던 병력 4천 명 가운데 2천 명을 철수시키려고 하자 당시 민씨 척족정권의 우두머리이던 민영준은 청국 군문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철군 보류를 애걸했다. 청국 군대가 바로 부패하고 무능한 척족정권을 유지시켜주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이기에 (많은 부분을 실을 수 없는) ‘발간의 말’에 상세하게 실었을 것이다. 다음 부분을 보자.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이래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1882년 이전 외국군 주둔의 사례는 있었지만 외국군이 장기간에 걸친 주둔한 것은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계기가 되었으리라.

 

외국군 주둔은 우리 국력이 약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외세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8 페이지) 현재 용산 미군 기지의 반환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2020년 12월 11일 한겨레 신문 기사 ‘주한미군기지 12곳 돌려받는다…‘용산기지 반환’ 본격 개시‘)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발간된 지 20년 된 책이다. 최근의 역사가 반영된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다시 각설하고 우리 역사상 이민족의 침입이 가장 극심했던 왕조는 고려였다.(37 페이지) 고려는 몽골에 무릎 꿇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무신정권기이다. 당시 정권은 무신정권임에도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무신정권 집정자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기보다 사병 집단인 도방을 강화하는 데 주력한 탓이다.(38 페이지)

 

이는 앞에서 서술한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민씨척족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다. 당시 명군은 우리가 불러들인 군대다. ”침략군으로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도 말할 것도 없지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군 또한 변방의 소국을 위해 피흘려 싸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106 페이지)

 

명군은 치밀한 계산에 근거해 참전했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러했지만 임란이 진행되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 조정은 조선이 일본과 공모. 합세해 자국을 침입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107 페이지) 조선 정부는 명에게 조선이 일본의 향도(向導; 길잡이)가 아님을 증명했다. 명의 참전은 그 연후에 결행되었다.

 

얼마 전 조종산(祖宗山)이란 개념을 알았다. 물도 근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지점이 있으니 이를 일러 조종산(祖宗山)이라 한다. 이름과 개념 자체가 조금 다르지만 경기도 가평에 조종암(朝宗巖)이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선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뜻으로 쓴 글자로 오랑캐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의미다.

 

이뿐인가. 충북 괴산에는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세운 신종(神宗; 임진전쟁 당시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황제)과 의종(毅宗;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사당인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각설하고 왕실이 아닌 민간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당이란 점이 특이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숙종은 명나라 신종을 제향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개항기 청군(淸軍)을 보자.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배경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민비와 고종의 의지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하기 시작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지배하려는 청나라의 무력 기반이었다.

 

이 군대는 1884년에는 갑신정변마저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진압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우리 내부의 근대적 변혁을 저지하기도 했다.(174 페이지) 임오군란을 피해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가 고종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청국에 청병(請兵)하자고 제안하자 고종이 따랐다.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이 요청했기 때문이지만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마건충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대원군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들은 오직 일본인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뜻은 없다는 거짓말로 대원군을 안심시켰다. 물론 청은 임오군란을 사주한 인물로 대원군을 지목하고 그를 납치할 준비를 세워놓았다.(대원군이 청 군영을 방문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만류한 사람은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정현덕뿐이었다.)

 

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병력은 군란 때 파병된 3천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정부는 군란 이후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서 1년이란 한정된 기간이었지만 병력주둔권을 인정했다.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함께 주둔한 것이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싸웠고 조선측에서도 이들의 무력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개화파도 그런 세력의 하나였다. 1882년 8월 23일 청이 조선에 근대적 식민지배를 강요할 수 있는 규정(속방조항)을 명문화시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이때 개화파는 청나라와 일본 중 어느 나라를 기축으로 삼아 대외정책을 펼지를 놓고 나뉘었다. 김윤식 등 청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 사람들이 시무(時務; 온건) 개화파였고 김옥균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개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하다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제휴할 수 있는 대외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변법(變法; 급진) 개화파였다.

 

이 때문에 1884년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반청 운동의 성격도 갖는다. 1884년 1월 한 약국에 인삼을 사러 들어간 청병이 외상값을 지불하라고 독촉하는 주인을 총으로 쏴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한성순보에 중국 병범죄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러자 청 병영에서 한성순보를 발간하던 박문국에 항의하고 청 정부도 조선 정부에 엄중한 항의서를 보냈다.

 

당시 기사를 취재하고 원고 작성 등의 실무를 맡았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책임을 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4년 5월 청 상인이 관련된 이범진(李範晉) 사건이 일어났다. 부동산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전 병조판서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인 이범진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아버지다. 당시 조선 주제 청 상무공서가 사건에 개입해 공서에 천자법정이라 써 붙였다. 이를 본 조선 정부는 물론 영국 대리 총영사 애스턴도 항의했다. 조선에서 발생한 사적인 사건을 청 천자의 법정에서 재판한다는 뜻이므로 조선인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김윤식의 회고에 의하면 홍영식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서양의 제도를 흠모하고 청을 오랑캐 보듯 하며 공자와 맹자의 도(道)도 배척했으며 김옥균 등은 일본을 사사건건 흠모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주(自主)였다고 하며 청과 잘 지내는 김윤식을 가장 미워했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4월 초대 조선 주재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내한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최초의 서양 사절단이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보빙사 일행은 7월 인천항을 떠나 일본에 들렀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인 청년 퍼시벌 로웰(1855∼1916)을 고용해 보빙사에 합류시켰다.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11월 일본에 돌아온 뒤 12월 조선에 왔다. 홍영식이 로웰이 방미 외교와 산업 시찰 등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다는 별도의 보고를 고종에게 올리자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초청한 것이었다.

 

로웰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사건의 배경과 주도자들을 소개한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를 기고했다.

 

그와 가까웠던 홍영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배신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주모자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과 미국으로 도피했으나 홍영식은 혼자 남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그는 대의를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여기고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고 썼다.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한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썼다.

 

갑신정변은 뒷받침할 무력 부재로 실패한 전형적인 케이스다.

 

주한 미군을 보자. 그들은 우리나라의 외국군 주둔사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들을 세웠다. 1) 최장기간(1945년 9월 이후 지금까지), 2) 주둔 규모(상시적으로 4에서 5만 병력 주둔). 3) 전 국토의 미국군 기지화. 4) 우리 동족을 겨냥.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은 안보의 담보가 아니라 안보의 교란요인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의 세력 균형자가 아니라 전쟁을 촉발시키는 평화의 파괴자로 기능했다.(3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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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슬프게 들린다. 봄인가 보다. 이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듣고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을 듣는다. 빠른 악장보다 느린 악장이 더 좋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은 듣지 않는다. 슬픔 모드로의 침잠을 경계하는 차원이다. 어떤 경우든 침잠(沈潛)은 부정적이다.

 

누군가는 봄이 슬픔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염명순 시인은 “봄날엔 모두 하늘로 오른다”고 말했다.(시 ’봄날엔‘) 가볍기 때문이다. 다른 계절은 가볍지 않아 가라앉는데 봄은 날아오르니 사라지는 것이고 그래서 써버리는 것, 흘러가는 것과 관계된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경책(警策)이 생각난다.

 

이진경 교수의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에 나오는 글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에 머문다면 우리는 보편 법칙을 얻을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기에 어디에나 적용된다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이것‘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새겨야 할 말이다. 봄 이야기 하지 말고 열심히 봄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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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세 친구 창비청소년문고 3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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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영의 ‘갑신년의 세 친구’ 앞부분에 백송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 어루만지곤 하던 흰 소나무 줄기의 꺼칠한 감촉이..” 주체는 홍영식(洪英植)이다. 병조참판, 우정국총판 등을 역임한 그는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모두(冒頭)의 장면은 홍영식이 죽어가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갑신년의 세 친구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을 이른다. 갑신년이란 3일 천하로 끝난 개화파의 무력 혁명인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을 이른다. 거사일을 기준으로 갑신정변의 세 친구의 나이를 말하면 김옥균 34세, 홍영식 29세, 박영효 24세였다. 홍영식과 함께 살해당한,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36세였다.

 

세 친구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북촌 사랑(舍廊)에 자주 모였다. 박영효는 철종의 영혜옹주(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의 결혼해 부마(금릉위; 錦陵尉)가 되었으나 아내가 석달만에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박영효가 철종 사위가 된 것은 철종 사후다.) 13세의 박영효는 소년 부마였다.(부마는 혼자 되면 재혼할 수 없는 것이 왕가의 법도였다.)

 

우의정 박규수(1807 - 1877)는 왕의 스승이자 젊은이들의 스승이었다. 또한 어린 고종이 따르고 의지하던 스승이었다. 박영효가 부마가 된 것도 박규수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고 고루한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내탕금(內帑金)을 쓰면서까지 김옥균, 유길준 등을 비밀리에 일본 시찰길에 오르게 한다.

 

통역은 유길준이 맡았다. 두어 달만에 일본어를 익혀 교지에 일본어로 글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다. 윤치호는 아버지 윤웅렬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윤치호는 집안의 반대 때문에 애를 먹었던 다른 젊은이들과 달리 서얼 출신의 무관인 아버지 윤웅렬 덕에 편히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윤치호를 만난 김옥균은 윤치호가 영어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달라졌다며 잘 생각했다고 격려한다. 김옥균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도울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는 한편 일본이 자금 원조를 해줄 용의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 당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같은 방식으로 1874년 우리나라를 개항시켰다. 미국에 당한 지 20년만의 일이다. 일본은 중국이란 호칭 대신 시나라는 호칭을 썼다.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니 두 나라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그때 임오군란이 일어난다.(1882년) 홍영식은 스물 이전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조정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 대감은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마땅해 하지 않았다. 노련한 흥선군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순목 대감은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오랑캐 왜인들의 문물을 배우겠다고 시찰단에 나선 것도 불편해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두루 갈등했다. 홍영식은 밀린 급료를 달라고 요구하는 구식 군사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영식은 반년만에 김옥균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대원군과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가 나서서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중재해 주리라 기대했다. 난으로 인해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자국민들이 죽었다.

 

청나라는 난리를 빌미로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장정(章程)과 조약(條約)의 차이가 있다. 청나라는 나라끼리 맺는 조약이 아닌 지방 정부에게 하듯 장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금륭위 박영효는 군란으로 입은 피해를 위로하고 사죄하는 수신사로 석달간 일본에 다녀왔다. 수신사로 가기에는 정일픔 부마(駙馬)의 신분은 너무 높았다.

 

서광범, 김옥균이 동행했다. 박영효는 자신이 일본 숙소에 내걸었던 우리나라 국기를 보여주었다. 청나라는 용이 그려진 제 나라 기를 본떠 우리나라 국기를 만들라고 했었다. 조선은 중국 동쪽의 좌청룡이니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리라 했다. 박영효는 조선이 변화하는 세계에 동참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은 가까운 일본에 의뢰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박영효는 이웃 나라가 문명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일본도 고립되기에 이를 방해하는 청나라를 미워하고 그래서 조선을 돕겠다는 일본의 논리를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다. 명성황후 민씨는 변복으로 궁궐을 탈출, 피신해 장호원 민응식(명성황후의 일족)의 집으로 갔다. 장호원은 지금은 경기도 영역에 속하지만 당시는 충북 충주에 속했었다.

 

이곳에서 민씨는 무당 박씨를 만났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살기 위해 무당이 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민씨는 난자당하기 직전에 몰렸다가 홍재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민씨를 아는 궁녀가 입짓으로 민씨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 휘장을 찢고 민씨의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속에 있던 홍재희란 사람이 이 사람은 상궁이 된 자기 누이동생이라며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긴가민가하며 머뭇거리는 군사들 사이를 뚫고 홍재희는 민씨를 업고 궐 밖으로 나갔다.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자가 박씨의 단골이었다. 여종을 통해 민씨와 박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씨는 눈치와 감언이설로 민씨의 환심을 샀다.(신명호 지음 ‘조선왕조 스캔들’ 참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난리가 진압되고 대원군이 텐진으로 끌려간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했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지난 일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나라로 끌려갔다면..) 민씨는 청나라에 의지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돌아와 한달만에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 시장)이 되었다.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였다.

 

민씨 조카인 민영익은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청나라 이홍장의 참모인 묄렌도르프(목대감이라 불린)와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을 두고 왕 앞에서 언성을 높여 싸웠다. 발행하자는 목대감과, 반대하는 김옥균이 싸운 것이다. 고종은 두 사람과 두루 친한 민영익에게 중재를 해보라 명했다. 박영효는 청나라 관리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광주(廣州) 유수로 좌천되었다.

 

김옥균은 차관을 들여오고 공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규수 대감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젊은 양반들은 민영익의 사랑에서 자주 모였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올 태세였다. 김옥균의 일본행은 세 번째였다. 시찰단, 임오군란 사죄, 차관으로 인한 것 등..김옥균은 왕의 위임장까지 가지고 일본에 돈을 빌리러 갔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의 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박영효는 양병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박영효가 광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대 세력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왕실 인척이 사사로이 병사를 기르고 있다며 소리 높여 박영효를 규탄했다. 이 일로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도 물러났다. 울분과 실의의 나날이었다.

 

청나라 군사들(1500명)이 물러났으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김옥균과 벗들이 간절히 원하는 조선의 독립 자주는 청나라에 기대기로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 자주라는 말을 폭풍우 치는 거센 바다에 조각배를 타고 나아가자는 말처럼 무모하고도 대책 없는 일로 여겼다.

 

김옥균은 “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때를 만들어야겠지.”라 말한다. 청나라 관리들이 조정에서 거들먹거리고 청나라 상인들이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도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이 보장되는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은 상황을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청에 기운 대신들과 각 군의 영사들을 단번에 없애고 조정과 군대를 우리가 장악해야 하네. 그런 뒤 조정을 우리 사람들로 새로 꾸리고 일대 개혁을 실시해야지.“(김옥균의 말) ”그럼 다들 생각이 같은 것으로 알겠네. 이제 큰 원칙을 정한 만큼 더 이상 궁리할 것도, 다시 돌아볼 것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세. 시일을 길게 끄는 건 좋지 않으니 구체적인 방안을 빨리 내 오도록 하겠네. 다시 한 번 당부해 두지만 절대 우리 계획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네.“(김옥균의 말)

 

일본은 40만엔을 조선에 되돌리겠다는 자국 황제의 명을 전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일본이 요구해 받아간 돈 50만엔에서 40만엔을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조정을 뒤집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첩보를 얻고 조선 주재 일본 다케조에 공사에게 청나라에서 벗어나려는 조선 정부의 움직임을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성공하면 입지를 넓힐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는 데다가 길게 보아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꿈꾸는 맹랑한 자들이 쓰러지고 나면 조선은 더욱 호락호락해질 일이었다. 서광범은 김옥균이 일본의 차관을 얻으려 할 때 왕의 위임장이 위조된 것이라며 방해하던 공사가 태도가 달라지자 의아해 했다.

 

더구나 젊은 그들이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한 상황에서라니..집안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따라온 서재필도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대치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일본 공사는 공사관 병력을 지원할 수 있다는 말도 넌지시 던졌다. 조선 사람들보다 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외치고 다니는 다케조에 공사는 미덥지 않은 존재였다.

 

서재필은 실질적인 무력을 맡을 사관생도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종은 김옥균에게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겠다l. 앞으로의 일에 관해 너를 깊이 믿는 바이니 기어이 품은 뜻을 한번 펼쳐 보라.“고 말했다. 정변(政變) 날짜는 12월 4일로 정했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청사가 완공되었기에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각 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초대해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이인종과 행동대원들이 청사 옆 별궁에 불을 질러 소란을 일으키면 그 틈에 조선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참(斬)하기로 했다. 그리고 왕을 행궁으로 모시고 가 새로 꾸린 조정에서 정령을 반포하고 대개혁을 실시할 것이었다. 4일은 월 1회 오는 우편선 천세환이 제물포항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우편선을 통해 일본 정부에서 무슨 엉뚱한 다른 소리를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정변을 믿을 수 없는 일본과 도모한다는 것이 참 딱했다. 홍영식은 비장했다. 진정으로 자신의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이다. 갑신년 12월 3일 새벽, 거사 하루 전 운명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 위에 소복소복 흰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민영익이 칼에 맞아 위독한 상태가 된다. 예리한 일본도에 귀가 거의 잘렸고 동맥까지 상했다. 알렌이 민영익을 대수술했다.

 

우정국 옆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부터 쌓인 눈과 순라군들의 경계로 인해 쉽지 않았다.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청사 북쪽 초가에 불을 질렀다. 왕은 창덕궁 서쪽의 경우궁(景祐宮)으로 향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 군대가 난을 일으켰다고 속여 왕과 왕비를 오게 한 뒤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한 뒤 혁신 내각을 구성한 곳이다.(경우궁에 모셔졌던 수빈 박씨의 신위는 칠궁으로 옮겨 모셔지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들 일곱을 모신 사당이다.)

 

박영효가 일본 공사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 병사들을 거느리고 경우궁에 도착했다. 김옥균이 새 정부의 각료 이름을 정리해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은 허락했다. 홍영식은 우의정을 맡았다. 박영효는 전후영사를 맡았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도승지를 맡았다. 스물 한 살 서재필은 병조참판, 김옥균은 재정담당인 호조참판을 맡았다.

 

민씨는 왕이 파천해야 할 정도로 큰 변이 났다는데 오빠 민태호와 조카 민영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고종은 왕명을 어기고 내관 유재현을 벤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개 내관의 입놀림이 두려워 죽이기까지 한 자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윤웅렬은 자신이 형조판서에 오른 것을 보고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변 세력들은 무기가 녹이 슬어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다케조에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했다. 조선의 변란 소식을 들은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일본군과 성급히 충돌하지 말고 일단 사태를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성미가 급한 위안스카이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청의 대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감히 소란을 벌인 조선 젊은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본이나 조선 반란군들이 다시는 대국 청나라를 만만히 여기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 공격을 개시했다. 김옥균은 외국 공관이 많은 제물포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정변 세력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홍영식은 왕을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홍영식은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뜻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 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라고 말했다.

 

이에 박영효의 형 박영교도 끝까지 남겠다고 선언했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이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자 왕은 깜짝 놀라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김옥균은 ”신들이 나라와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음은 잘 알고 있사온데 어찌 감히 저버리겠습니까? 오늘 잠시 물러나는 것은 다른 날 다시 한 번 쓰임을 얻기 위한 것이옵니다. 신들의 충정을 잊지 마시옵고 부디 강녕하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부디 목숨을 보전했다가 후일 과인을 위해 일하라.“고 말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왕의 뒤를 따라 묵묵히 북묘로 향했다. 김옥균은 도망치다시피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10년을 보냈다. 마흔 넷의 나이가 되었다. 정변 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간 아홉명뿐이었다. 홍영식과 생도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뒤늦게 붙잡힌 사람들은 극형당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병력을 무턱대고 믿은 것, 청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낙관한 것을 가슴을 칠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강렬한 소망이 이성을 압도한 것이 너무 큰 실수였다. 일본은 갑신년 조선 정변으로 잃은 것이 없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권리를 청나라와 동등하게 갖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개 망명자에 불과해진 김옥균을 더 이상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조선 정변에 자신들이 관련되었다는 논란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옥균은 조선의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2년이 지나 일본 정부에 의해 서태평양의 섬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아열대의 섬이었다.

 

김옥균은 다시 홋카이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추운 북쪽 지방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던 서글픈 가난, 오랜 유배 생활로 날이 궂을 때마다 온몸이 쑤셔 오는 통증, 지사(志士)인 체해도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조롱, 그리고 자책..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다. 김옥균은 상하이 항구 부근의 여관에서 암살당했다. 이홍장을 만날 준비를 하며 읽던 ‘자치통감’을 손에 든 채로였다. 1894년 3월 28일이었다. 박영효는 가장 늦게까지 살았다. 79세인 1939년까지다.

 

춘원 이광수는 박영효를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연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물었다. 박영효는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렸다. 김옥균이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삼십년이 넘었을 때였다. 박영효는 홍영식은 정변을 준비했고 자신은 정변을 총지휘했다고 말했다. 1894년 박영효와 조선 망명객들은 귀국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으로 거저 얻은 결과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후 박영효는 후작 지위를 받고 두루 풍요를 누렸다. 박영효는 한때 혁명가였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을 움켜쥐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 있었다.

 

저자(안소영)는 고종에게 어리석고 무능한 왕이란 일본의 평가가 내려져 그대로 굳은 것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고종이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살해하려 항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세 친구(김옥균, 홍영식, 박영효)가 주된 인물이기에 고종에 대해서까지 말할 여지는 많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아쉽다. 물론 긴 글을 쓴 저자에게 감사한다.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두어 줄로 요약된 글귀로만 이들을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글(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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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주문한 책을 받으러 가는데 친구 고선생님으로부터 “햇살이 좋아서 봄이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란 톡이 왔다. 순간 재양(載陽)이란 말을 떠올렸다. 절기가 비로소 따뜻해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제 몸이 날아갈 듯 심한 바람이 불며 날씨까지 몹시 추웠으나 오늘은 바람도 잦아들었고 따뜻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강원도 여행길에 오른 친구 한선생님이 속초의 강풍을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재양이란 말에서 유래했지만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 재양(載陽)치다란 말이다. 풀 먹인 명주나 모시를 반반하게 펴서 말리거나 다리는 것을 뜻한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양(陽)이란 글자가 나왔으니 반대어인 음(陰)이 들어가는 글자와 음(陰)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는 단어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음택(陰宅)이란 글자와 명당(明堂)이란 글자다. 글자상으로는 그늘과 밝음이란 차이가 있다.

 

무덤인 음택을 밝을 명자를 쓰는 단어인 명당이란 단어로 논하는 것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고선생님은 28일 내 해설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마무리로 전했다. 내가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고 말하자 고선생님은 그냥 나를 만날 수 있어서 더 좋다고 답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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