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깊이를 음미하는 시간입니다. 도시 이야기하다가 난데 없이 새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새는 도시 구조물의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새 날개 형태를 모방한 밀워키 미술관과 새 둥지처럼 철골이 서로 엮여 공간과 구조를 만드는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을 보며 새가 스승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밀워키 미술관은 창공(蒼空)을 배경으로 해 흰색의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고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은 가을 낙엽을 닮은 색이어서인지 답답해 보입니다. 우리는 새를 사랑하지 새가 사는 둥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많이 걸었습니다. 다리와 어깨가 비정상입니다. 이상(李箱)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폐를 폐가 칠칠치 못하다고 표현했지요. 그럼 저는 다리와 어깨가 칠칠치 못하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새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날아가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필요하겠는지요. 저는 붉은 사암(砂癌)으로 되어 붉은 성(城)이라는 아라비아 이름을 가진 알함브라 궁전이 마음에 듭니다.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필드에서도 독특한 음악을 구사한 메쯔키타(mezquita)의 recuerdos de mi tierra(‘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과 철자가 많이 비슷한 음악)을 듣습니다. 너무 피곤해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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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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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책들을 읽다 보면 개념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귀찮기도 하고 체계적이지도 못해 포기한다. 그러다가 긴 공백기를 지나 다시 다른 심리학 책들을 읽는다. 장원청의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에는 꽤 많은 개념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 유명한 머피의 법칙을 비롯 철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오컴의 면도날과 뷔리당의 당나귀, 학습된 무기력, 삶겨죽은 청개구리 효과, 플라시보 효과, 밀그램 실험, 죄수의 딜레마, 치킨 게임, 베블런 효과, 일중독 증후군, 깨진 유리창 효과 등이다. 생소한 것들도 많다. 쿨레쇼프 효과, 빌라흐 효과, 애런슨 효과, 대답 일관성의 원리, 더 큰 바보 이론, 피터의 원리, 베버의 법칙 등이다.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의 특징 중 하나는 파트별로 개념들을 나누어 놓았다는 점이다. 나를 뛰어넘어 진정한 나를 만나다, 나를 끌어올려 성공하라, 나에 대한 호감를 높여라, 투자와 소비 속에 있는 함정,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등이다.

 

이기적 편향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와 관련한 정보를 만들어낼 때 일종의 잠재적 편견이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는 쉽게 벗어던지면서 성공의 찬사는 달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는 과장되게 말하고, 불리한 부분은 무시해버린다. 따라서 이기적 편향을 자기본위적 편견이라고 부른다.

 

앵커링 효과는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얻은 첫 번째 정보에 따라 사고가 좌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의 사고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왜곡된 선입견이 생겨나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닻을 내리지 않으려면 이전 정보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과 대량으로 수집한 정보들을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는 어렵다. 그러니 후자가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을 접하면 인간은 오류와 착오, 방황, 불합리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심리학 개념 사전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그런 점들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사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가령 스트레스가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월렌다 효과에 의하면 스트레스는 양날의 칼이며 수천수만의 적을 죽일 수 있는 예리한 무기가 되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

 

칼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컴의 면도날을 보자. 번잡한 곁가지를 모두 잘라 버릴 것을 의도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적을수록 더 좋은 미니멀리즘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만사는 가능한 한 간결해야 하지만 너무 간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필요한 것은 사물의 법칙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파악한 후 조잡한 것은 제거하고 진짜는 보존하여 복잡한 것을 간소화하는 것이다. 간결한 것이 좋다고 본질을 버릴 수는 없다.

 

결론은 간결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를 보는 시간과 내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문장에 대해서도 같은 차원의 말을 할 수 있다. 짧은 문장이 좋다고 너무 단문만으로 채우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관건은 조화와 균형이다.

 

학습된 무기력에 대해 알아보자. 실패를 반복해 겪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포기하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학습된 낙관주의도 있다고 한다. 요나 콤플렉스는 욕구 단계설을 제안한 유명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정식화한 법칙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가장 완벽한 순간과 조건 아래에서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크게 용기를 낸다고 해도 상상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몹시 추앙한다.” 잘 알려져 있듯 요나란 성경의 인물이다.

 

이 콤플렉스는 우리 내면의 스트레스를 균형 있게 표현하는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있지만 그 기회 앞에서 소수만이 그것을 대담하게 돌파하고 자신의 요나 콤플렉스를 인식하여 벗어던지며 기회를 잡아 성공을 얻는다. 발라흐 효과는 단점을 보완하면 강점이 됨을 말하는 법칙이다. 이 효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통 원리다. 미국의 관리학자 로렌스 피터가 제기한 이론이다. 나무통 하나에 얼마 만큼의 물을 담을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은 가장 긴 나무토막이 아니라 가장 짧은 나무 토막이라는 것이다.

 

발라흐 효과와 나무통 원리는 상관 없어 보이지만 발라흐 효과는 개인 능력 관리에 활용되며 나무통 원리는 조직에서 뒤처지는 위치에 있는 부분에 중점을 둔다. 내가 평소에 관심을 두던 개념이 뷔리당의 당나귀다. 이 당나귀는 양과 질이 같고 거리도 같은 두 개의 건초 사이에서 굶어 죽기 직전의 당나귀를 말한다. 14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뷔리당이 말한 당나귀다. 이 역설의 첫 의도는 당시의 이성주의 사조를 반박하고 자신의 믿음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면 밥을 굶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끝없는 결정장애에 빠져 위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의미했다. 물론 현실에서 양과 질이 같은 두 개의 볏짚은 없다. 저자는 선택 전에는 망설이지 말고 선택 후에는 후회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뷔리당의 당나귀 효과에 대한 제일 좋은 반격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마음에 둔 사람들에게 필요한 법칙도 있다. 문간에 발 들여놓기 효과다. 한 발씩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문간이라는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문간에 머리 들여놓기 효과는 무리한 요구부터 한 후 간단한 요구를 들이미는 것이다. 베블런 효과 즉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림을 말하는 법칙은 경제학에서 만나는 개념이지만 소비자의 심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리학 책에 등장한 것이다. 물론 수요원리가 일치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기펜의 역설도 경제와 관련된 심리를 말하는 것이다.

 

가격이 올라가도 수요가 떨어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단 시작하면 마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의 자이가르닉 효과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즉시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자이가르닉 효과가 발휘되어 일을 완성하기 전에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다. 사실 일을 계속 미루면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성공을 향한 첫 걸음은 꿈이 아니라 행동이다. 우리가 일단 시작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꿈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지고 꿈을 이룰 기회는 더 커진다.

 

저자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특별하게 보는 권위 효과를 언급하며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했다. 이는 권위 효과에 대해 지켜야 할 정확한 태도라고 한다. 침묵할 줄 알아야 좋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의 굿맨효과는 미국의 심리학 교수 굿맨이 제시한 말이다. 대화에서 침묵이 하는 역할은 수학에서 제로가 하는 역할과 같다.(0은 상당히 중요한 아니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침묵과 경청은 연결되어 있어서 경청할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말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 침묵할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말을 효과적으로 경청할 수 없다. 임금의 역할은 대체 가능하며 우수한 직원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높은 임금 외에 독특한 환경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레이니어 효과도 중요하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로젠탈 효과다. 당신이 기대한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마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이 효과는 심리적 암시에 의한 것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무거운 기대는 부담감을 줄 뿐이다.

 

마지막 챕터는 13번째 챕터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다. 이 챕터는 네 개의 법칙으로 이루어졌다. 슈와르츠의 논단, 베버의 법칙, 디드로 효과, 악어 법칙 등이다. 슈와르츠의 논단은 불행은 별난 행복일 수 있음을 말한다. 불행 중에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베버의 법칙은 행복의 본질은 일종의 민감도에 있음을 말한다. 버릴수록 행복해짐을 말하는 디드로 효과는 인간이 벗어나기 어려운 10대 심리 중 하나다. 디드로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말한다.(너무 유명해서 설명 생략)

 

전체의 마지막 법칙은 악어 법칙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말하는 법칙이다. 악어 한 마리가 우리 다리를 물었을 때 손으로 악어를 밀면 발과 손을 함께 물리게 되기에 발버둥치지 말고 다리 하나만을 희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포기는 또 다른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책 제목이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인 것을 알겠다. 그래서 마지막 챕터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란 제목을 가졌을 것이다. 환경을 바꿀 수 없으면 아니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을 효율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심리학 책은 그런 지침을 주기에 유익하다. 행복이란 말이 마음을 끈다. 행복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들을 읽고 싶어진다. 물론 그의 물리학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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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법’, ‘도시의 깊이’ 등 지난 달 구입한 두 책은 건축학 전공자들의 책이다. 이 책들에서 예상하지 못한 단어들을 만났다. 랑그, 빠롤, 크러싱 팟(이상 ‘서울 해법’), 헤테로토피아, 현상학, 구조주의(이상 ‘도시의 깊이’) 등이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크러싱 팟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철학 용어다. ‘도시의 깊이’의 저자는 현상학은 너무나 철학적이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하는 것은 얼마나 깊이를 담보하는 일이겠는가. 오랜만에 리쾨르의 ‘악의 상징’을 읽는다. 리쾨르가 랑그와 빠롤을 가지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설명은 생략) 어떻든 그 작은 연결고리를 보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30년전에 읽던 책을 다시 펴본다. 흠, 죄, 허물 등의 개념이 인상적인 책이다.

 

흠은 악으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 더러워졌다고 느끼는 체험의 상징, 죄는 그렇게 더러워진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과 단절되었음을 느끼는 체험의 상징, 허물은 죄로 인해 벌어진 하나님과의 간극을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느끼는 체험이다.(일부러 ㄷㄷㄷ로 요약했다.) ‘더러워짐 - 단절 - 되돌릴 수 없음‘이 그것이다. 여유 없는 중에 조금씩이나마 읽는 이런 글로 인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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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세창명저산책 51
양명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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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란 말.. ’고(故)로‘란 어색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므로라고 쓴 저자의 책을 만났다. 가끔 철학책을 읽고 싶은 때가 있다. 지난 해 여름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를 읽은 이래 생긴 일이다. ‘비극’과 같은 말일지 모르겠으나 ‘무의미’의 정체를 보는 관점에 따라 추구하는 존재의 힘의 모습도 달라진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말은 “철학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꿰뚫고 자기 방식으로 연결한다“는 말이다. 1913년생인 그는 2차 대전 중 포로가 되었으나 그런 중에도 철학 모임을 가졌다. 양명수 교수의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다. 해석의 갈등이란 삶의 진실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상충하는 것을 말한다.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현상학의 한계를 제기하고 해석학의 여정에 접어들었고 ’해석에 관하여‘에서 정신분석학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합리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를 하는 철학이 상징 언어와 신화로 눈을 둘려야 한다는 의미이고 철학의 기원을 철학 밖에서 찾으려는 의도의 산물로 나온 말이다. 리쾨르는 내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리쾨르는 현상학은 인간에 대해 악의 가능성까지는 말할 수 있으나 악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리쾨르가 비의지적인 것을 말한 것은 인간 행동이 욕망과 관습, 감정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했음을 의미한다. 의지란 이성적 욕망, 실천이성이다. 리쾨르가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 속에서 과오를 저지르는 인간 현실이다. 리쾨르는 헤겔보다 칸트를 좋아했다. 헤겔은 이성의 자기완성을 통한 절대지(絶對知)를,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말했다.

 

물론 리쾨르는 상징철학자이며 해석학자로서 칸트의 의무 윤리에 갇히지 않는다. 자연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앎을 통해 인간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현상학 전통을 중시할 때 리쾨르는 해석학을 현상학에 접붙인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리쾨르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는 의식보다 깊은 존재의 힘에 이끌린다. 리쾨르에게서 언어는 구조주의와 달리 언어에 갇히지 않는다. 돌고 도는 낱말의 의미차이로 언어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의 철학은 현상학적 해석학이라 불린다. 그러나 의식과 자기이해를 동일하게 보는 현상학과 결별한 하이데거를 취함으로써 의식철학에서 벗어났다. ’해석의 갈등‘이 말하는 갈등을 일으키는 학문들은 정신분석학, 정신현상학, 종교현상학, 신학 등이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을, 종교현상학은 거룩한 존재를, 신학은 사랑의 신을 존재의 힘으로 제시한다.

 

리쾨르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언어 덕분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내밀며 자신을 이해한다고 썼다. 리쾨르는 특별히 이중 의미를 지닌 언어, 곧 겹뜻을 가진 언어에 주목한다. 의미의 기원이 되는 힘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숨기기 때문이다. 일차 언어를 풀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이차 의미를 찾는 것이 해석이다.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 정체성이란 적어도 직업이나 가족사항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생명과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어떤 근원적 힘들과 얽혀서 생성된 인간의 모습들을 가리킨다. 리쾨르는 합리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지만 이성의 바탕이 되는 존재의 힘에 다가가고자 한다. 존재의 힘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언어, 그것이 상징이다. 의미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불러준다. 주체가 그렇게 상징에 이끌리며 생각해 진리를 자기 나름대로 아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을 통해 생각하는 믿음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된다.

 

해석을 통해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해석 이전에 전이해가 있다. 그 전이해가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믿으면서 해석하여 전이해가 구체적인 자기 이해가 된다. 믿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주체의 바탕이 되는 거룩한 존재와의 교통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룩한 존재와의 교통도 해석과 반성을 통해서 일어나는 고백이라 해야 한다. 정리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힘은 존재의 힘이고, 존재의 힘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무의미를 이기고 살게 하는 힘이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 있는 충동과 욕망에서 의미의 기원을 찾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역사의 완성을 향하는 객관 정신에서 의미의 기원을 찾고 종교현상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거룩한 존재 또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데서 의미의 기원을 찾는다. 의미의 기원이 되는 힘은 감추어져 있으며 말로 다할 수 없기에 상징으로 표현된다. 리쾨르가 말하는 존재란 삶을 가리키기도 하고 삶의 바탕을 이루는 존재의 힘을 가리키기도 한다.

 

리쾨르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건너뛰고 바로 존재 이해에 귀속된 자기 이해를 말하는 하이데거를 수정한다. 나의 해석 작업을 통해서만 나는 이미 어떤 이해 안에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을 안다. 한계가 있는 각기 다른 해석 방법론에 따라 밝혀지는 각기 다른 존재의 힘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가리켜 리쾨르는 조각난 존재론이라 했다. 리쾨르는 구조주의가 사상이 되고 철학이 되는 데 반대한다. 진리를 인간 주체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언어의 신비를 말한다면 구조주의는 언어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한다. 리쾨르는 구조주의적 언어관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철학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인간 언어의 핵심은 빠롤 즉 말의 사건에 있지 않고 말하기 이전의 잠재적인 언어구조 곧 랑그에 있다. 랑그는 공시적(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늘 똑같이 작동되는 구조)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하면 통시가 공시에 종속된다. 이는 체계가 변화에 앞선다는 말이고 사건과 변화란 체계 안에 무질서가 끼어든 정도 즉 체계 안에서의 변동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언어는 차이로 이루어진 기호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리쾨르는 언어에 내재와 초월이 있다고 보았다. 내재는 폐쇄된 체계 내에서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언어의 뜻이다. 구조주의는 언어의 내재적 의미효과를 말한다. 리쾨르는 구조주의가 언어를 경험 과학으로 만드는 반면 해석학은 명상에 가깝다고 보았다. 해석이란 재해석이다. 그런 점에서 해석을 통해 찾는 의미에는 역사가 들어 있다. 해석학적 지성에는 공시가 아닌 통시가 중요해진다.

 

사건을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언어 사건 자체가 이미 해석이다. 우주론적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곧 통시라고 할 수 있고 현상학적 시간은 일종의 공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상학에는 구조주의와 정반대의 측면이 있지만 시간을 말하자면 공시적인 면에서 같다. 구조주의는 랑그와 빠롤을 반대로 보았지만 리쾨르는 빠롤 안에 랑그를 통합시켰다. 구조주의가 의미의 단위를 낱말 차원에서 찾는다면 리쾨르는 문장 차원에서 찾는다.

 

말이 무한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낱말의 사전적 의미다. 말이 무한한 의미를 갖는다면 아무것도 뜻하지 않게 되며 상징의 풍요로운 의미효과도 없다. 최소의 객관적 질서 없이 의미심장한 세계는 불가능하다. 랑그의 환경 속에서만 빠롤의 사건이 발생한다.(멋진 말이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은 정주(定住)와 유목(遊牧)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정주 없는 유목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구조주의를 해석학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보고 해석학 안에 구조주의를 통합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구조주의와 언어 현상학을 통합한다. 관념론적 현상학이 아니라 언어 현상학이다. 리쾨르에게 주체는 언어와 함께 등장한다. 선험적 환원을 통해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선험적 환원을 통해 공시적인 랑그의 세계가 생긴다. 랑그는 주체 바깥이다. 리쾨르에게 주체는 랑그가 아닌 빠롤과 함께 탄생한다. 리쾨르는 주체는 언어로부터 출현하지 않으며 다만 언어와 함께 출현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말하면서 주체가 되는데 말하는 인간은 세상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지시한다. 랑그가 빠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주체가 탄생하는 것과 같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랑그는 언어행위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무의식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표상과 언어가 터져 나오게 하는 충동의 힘을 가리킨다. 리쾨르는 욕망의 의미론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철학 안으로 끌어들인다. 데카르트는 사물을 의심해서 의식의 확실성을 확보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의심했다.

 

의식은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깨어있는 것이고 나 곧 에고는 욕망을 이긴 현실을 대변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사회현실이 내 욕망을 이긴 전리품일 뿐이며 나를 알려면 내 욕망을 알아야 한다. 억압 때문에 생긴 무의미가 있는 곳에 의미가 있다. 현상학은 모든 것을 나의 의식으로 환원하는 반면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무의식의 힘으로 환원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현상학과 달리 나를 아는 것이 과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를 세우기는 했지만 나를 손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나는 이드, 초자아, 현실이라는 세 주인을 섬긴다. 칸트는 인간 내면에 주어진 선험적이고 무조건적인 도덕법을 이성 사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감성적 욕망을 버리고 이성 능력으로 순수하게 도덕법에 대한 존경심만으로 행동할 의무를 주장했다. 정신분석은 분석이기보다 해석이다. 욕망이 현실에 부딪혀 억압되고 억압된 욕망이 이드와 초자아로 분배된다. 리쾨르는 윤리를 존재욕망이라는 큰 틀에서 본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성 욕망보다 더 근원적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프로이트가 이룩한 도덕의 비신비화를 거쳐 다시 거룩의 상징이나 문화 상징에서 존재의 힘을 찾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프로이트가 말한 표상이란 언어화되지 않은 생각 등을 말한다. 해석이란 드러난 것을 통해 감추어진 삶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무의식은 표상과 정서와 증후를 통해 의식에 노출된다. 프로이트가 강조한 것은 의식이 무의식에 결정된다는 것이지만 리쾨르는 의식이 무의식을 결정하는 면도 있다고 보았다. 경험적 실재론이란 물리적으로 경험되는 충동의 실체를 가리키고 선험적 관념론이란 분석자의 해석 모델을 가리킨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앎이 경험과 함께 생기지만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의식적 분석 모델에 의해 충동의 실재가 의미 있게 밝혀지는 것이다. 충동의 경제학으로 보면 죄의식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싸움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를 프로이트의 경제학 모델이나 발생학 모델로만 풀 수 있을까?”라고 말한 뒤 원죄는 물려받은 인간 사회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상태를 말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고발하는 상징 언어라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힘을, 헤겔은 정신의 힘을 말한다. 정신이 표현된 문화와 작품을 해석하는 문화 해석의 결과로 의식은 자기를 이해한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며 자기를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의 문화 형태의 의미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이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의 직접적 자기 이해를 부정하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정신현상학은 같다. 리쾨르는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고고학으로, 정신현상학은 주체의 목적론으로 부르며 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했다.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 과거를 치유하는 것이기에 미래가 없다면 과거도 없다. 반성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생각하는 주체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나를 바탕으로 나를 생각하고 나를 통해 나를 찾는 주체를 문제로 본다. 리쾨르는 주체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선험적인 나를 상정한 자명한 실체를 상정하는 것도 비판한다. 리쾨르는 데카르트가 확실성과 정체성을 혼동했다고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지까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의식이 나의 정체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직접적 자기 인식을 인식이 아닌 느낌으로 보았다. 자기가 누군지 외부적 요소를 끌어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다. 직관을 거쳐 표상이 된 외부적 경험 자료들을 통각하여 개념의 틀로 찍어나올 때 비로소 인식이 생겨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과 나는 누구인가의 의심이 양립하기를 바란다.

 

리쾨르는 후설 현상학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의미 기술. 2) 주체가 의미 생산자라는 점. 3) 선험적 환원 등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이란 의미의 세계를 가리킨다. 리쾨르가 볼 때 현상학의 말하는 주체는 언어 과학을 수용하지 못한다. 현상학은 객관적인 랑그의 세계를 모른다. 현상학에서는 주체가 세상뿐 아니라 언어까지 지배한다. 현상학의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위아래로 흐르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면서 전통이 축적되는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응집된 시간이다. 진리는 오직 현재이며 이는 신을 영원한 현재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과도 통한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11권에서 추구한 시간을 서구의 현상학적 시간의 효시(嚆矢)로 보았다. 모든 인연을 끊고자 하는 불교의 찰나라는 시간도 현상학적 시간이다. 빠롤은 주체가 공시적인 랑그를 가져다 상황과 시간에 맞게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현상학에서는 말 곧 빠롤을 공시적인 것으로 본다. 현상학에서 언어의 여러 요소는 매번 독자적인 표현행위를 하려고 경합한다. 기호의 의미가 객관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 사용될 때 뜻을 가지게 된다. 이는 현상학적 주체가 의미의 창시자일뿐 아니라 언어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리쾨르는 언어의 객관적 언어값인 랑그를 인정하고, 주체가 언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상학과 달리 내가 언어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구조주의와 달리 언어가 나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 말을 해석하면서 나의 정체가 형성된다. 이것이 해석학적 주체다. 리쾨르는 후설의 선험적 환원을 언어로의 환원으로 정의한다. 존재와 언어와 생각이 나를 이룬다. 직관을 통한 자아 인식이란 없다. 해석 없이 확실한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론의 꿈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나의 욕망을 알아야 하는데 칸트는 욕망을 일부 감춘 표상적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셈이다. 칸트는 도덕적 인간을 인간의 정체성으로 보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보는 셈이다.

 

반성이 해석이 됨으로써 해석학은 철학이 된다. 반성 이전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면서 주체가 태어난다. 후설에게서 나는 의미의 생산자이고 하이데거에게서 나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자이다. 내가 묻지만 나는 묻는 대상에 의해 이끌려 묻는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대상화해서 인식하고 통치하는 주체를 설정한 것이며 그러한 주객관계에서 실체적 자아의 확실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나는 존재가 현현(顯現)하는 자리로서 현존재이지만 존재를 묻는 자로서 나이다.

 

내가 묻지만 물어지는 것이 나의 물음을 유발했다. 리쾨르가 사용하는 존재하려는 노력이란 말은 스피노자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리쾨르가 말한 악이란 자연재앙,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고통과 불행, 인간의 죄 등이다. 현상학은 악을 자유의지의 산물로 말하지만 그러나 살다 보면 악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리쾨르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층의 언어가 인간의 잘못을 말하기 위한 상징으로 쓰였다고 보았다.

 

잘못이 금기를 어긴 것이면 의 상징이고 흠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리적 접촉이나 오염과 관련된 상징 언어들이 동원된다. 근원적인 잘못을 신과의 인격 관계 훼손에서 찾을 때에는 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도덕과 법을 어긴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의식은 허물 차원이다. 흠과 죄와 허물의 상징이 일차 상징이라고 한다면 신화는 이차 상징이다. 비극적 세계관이란 죄와 고통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악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지 않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인류사상사에서 자유의지란 개념을 처음으로 확실하게 사용한 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이지만 모든 악이 자유의지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악의 극복도 자유의지의 책임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설명한 사람은 칸트다. 존재의 힘을 사람의 의식 밖에서 찾는 리쾨르의 해석학은 악과 구원의 비의지적 차원을 찾는다.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다는 말은 상징이다.

 

죄에 대한 윤리적 세계관과 함께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모두 말하고자 한다. 원죄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와의 싸움, 그리고 도덕주의자인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이 있다. 죄는 나의 책임이지만 나의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얼핏 보면 개념적으로 모순인 원죄론은 악의 문제에서 신의 선하심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악을 고발하며 신의 은총을 희망한다. 죄를 짓는 데 대한 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생물학적인 유전을 말하는 것은 원죄론의 관심이 아니다.

 

죄를 타고난다는 말은 상징적 표현으로 세상의 구조 악 속에 사는 한 죄지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구조 악을 만든 것은 개인들이다. 죄의 깊이를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총을 말하기 위한 방편이다. 죄의 고백의 언어와 믿음의 희망의 언어가 원죄론이라는 상징 언어에 들어 있다. 현상학은 설명하지 않고 기술한다. 상징해석학은 신화를 사실로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펠라기우스나 칸트, 마르크스, 니체처럼 신화를 윤리로 바꾸는 합리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꿈을 해석하듯 신화도 해석해야 한다. 인간은 선에 대해 무지하다고 하는 성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칸트가 잇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 우연성보다는 비극성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칸트는 인간의 뿌리 깊은 악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의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신화를 사실로 보지 않는 비신화화를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신화에 들어 있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살리려고 한다.

 

증언하는 말이 글이 되었다가 그 글이 독자에게 그를 위한 말씀이 될 때 성서의 해석학적 과정이 끝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뢀이 인간의 삶을 해석하지만 인간의 실존 이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성서는 신의 말이면서 인간의 말이다. 사도 바울이나 중세의 학자들은 전자를 강조하고 현대의 비판적 지성은 후자만 강조한다. 리쾨르의 상징 해석학은 삶과 성서의 해석학적 순환을 인정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순환은 전통 신학에서 볼 때는 철학으로 보이고 현대의 비판적 지성에서 볼 때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해석의 순환이란 믿음과 이해의 순환이다. 믿으려면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믿어야 한다. 믿음이란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의 힘에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의 힘은 신화라는 상징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믿으려면 신화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 루돌프 불트만은 믿음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성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해석 작업을 거쳐야 믿음의 대상이 드러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불트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무관한 하나님 이야기는 모두 신화라고 본다. 칸트가 인식이 아닌 의지와 관련해서만 신을 말한 것처럼 불트만은 실존론적 결단과 관련해서만 신을 말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말씀을 듣는 자의 주관적 결단에 의해 밝혀지지만 그 이전에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를 거쳐야 한다. 곧바로 실존으로 가는 것은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무시한 너무 성급한 해석이론이다.

 

리쾨르는 독일 신학자 불트만의 사상에 주목하며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이 가져오는 긴장과 희망을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칸트는 신에 대해 알 수 없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의 힘에 이끌려, 그러나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자기를 이해하는 지성이 믿음과 희망의 지성이다. 저자는 도덕성을 향한 의지의 노력 없이 신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볼 때 거짓 신앙이고 거짓 종교라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인간의 뿌리 깊은 악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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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날에 눈이 내렸다. 3월에 눈이 내린다는 샤갈의 마을을 생각하게 함인가? 가볍게 흩날리는 눈 같은 음악이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메르카단테(Mercadante)의 플롯 협주곡 e minor 3악장이다.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으려고 mer까지 치니 merry christmas가 자동으로 완성된다. 


소문자로 시작해서 그런가 하고 대문자로 시작해도 Mer에서 여전히 merry christmas가 완성된다. 기분으로는 성탄절이라 하고 싶은 시간이다. 궁금한 것은 몇 단계를 거쳐 성탄절 기분이 난다고 했지만 결국 눈이 내린 것을 보고 성탄절 기분이 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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