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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ㅣ 세창명저산책 51
양명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6월
평점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란 말.. ’고(故)로‘란 어색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므로라고 쓴 저자의 책을 만났다. 가끔 철학책을 읽고 싶은 때가 있다. 지난 해 여름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를 읽은 이래 생긴 일이다. ‘비극’과 같은 말일지 모르겠으나 ‘무의미’의 정체를 보는 관점에 따라 추구하는 존재의 힘의 모습도 달라진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말은 “철학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꿰뚫고 자기 방식으로 연결한다“는 말이다. 1913년생인 그는 2차 대전 중 포로가 되었으나 그런 중에도 철학 모임을 가졌다. 양명수 교수의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다. 해석의 갈등이란 삶의 진실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상충하는 것을 말한다.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현상학의 한계를 제기하고 해석학의 여정에 접어들었고 ’해석에 관하여‘에서 정신분석학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합리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를 하는 철학이 상징 언어와 신화로 눈을 둘려야 한다는 의미이고 철학의 기원을 철학 밖에서 찾으려는 의도의 산물로 나온 말이다. 리쾨르는 내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리쾨르는 현상학은 인간에 대해 악의 가능성까지는 말할 수 있으나 악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리쾨르가 비의지적인 것을 말한 것은 인간 행동이 욕망과 관습, 감정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했음을 의미한다. 의지란 이성적 욕망, 실천이성이다. 리쾨르가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 속에서 과오를 저지르는 인간 현실이다. 리쾨르는 헤겔보다 칸트를 좋아했다. 헤겔은 이성의 자기완성을 통한 절대지(絶對知)를,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말했다.
물론 리쾨르는 상징철학자이며 해석학자로서 칸트의 의무 윤리에 갇히지 않는다. 자연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앎을 통해 인간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현상학 전통을 중시할 때 리쾨르는 해석학을 현상학에 접붙인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리쾨르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는 의식보다 깊은 존재의 힘에 이끌린다. 리쾨르에게서 언어는 구조주의와 달리 언어에 갇히지 않는다. 돌고 도는 낱말의 의미차이로 언어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의 철학은 현상학적 해석학이라 불린다. 그러나 의식과 자기이해를 동일하게 보는 현상학과 결별한 하이데거를 취함으로써 의식철학에서 벗어났다. ’해석의 갈등‘이 말하는 갈등을 일으키는 학문들은 정신분석학, 정신현상학, 종교현상학, 신학 등이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을, 종교현상학은 거룩한 존재를, 신학은 사랑의 신을 존재의 힘으로 제시한다.
리쾨르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언어 덕분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내밀며 자신을 이해한다고 썼다. 리쾨르는 특별히 이중 의미를 지닌 언어, 곧 겹뜻을 가진 언어에 주목한다. 의미의 기원이 되는 힘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숨기기 때문이다. 일차 언어를 풀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이차 의미를 찾는 것이 해석이다.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 정체성이란 적어도 직업이나 가족사항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생명과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어떤 근원적 힘들과 얽혀서 생성된 인간의 모습들을 가리킨다. 리쾨르는 합리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지만 이성의 바탕이 되는 존재의 힘에 다가가고자 한다. 존재의 힘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언어, 그것이 상징이다. 의미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불러준다. 주체가 그렇게 상징에 이끌리며 생각해 진리를 자기 나름대로 아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을 통해 생각하는 믿음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된다.
해석을 통해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해석 이전에 전이해가 있다. 그 전이해가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믿으면서 해석하여 전이해가 구체적인 자기 이해가 된다. 믿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주체의 바탕이 되는 거룩한 존재와의 교통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룩한 존재와의 교통도 해석과 반성을 통해서 일어나는 고백이라 해야 한다. 정리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힘은 존재의 힘이고, 존재의 힘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무의미를 이기고 살게 하는 힘이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 있는 충동과 욕망에서 의미의 기원을 찾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역사의 완성을 향하는 객관 정신에서 의미의 기원을 찾고 종교현상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거룩한 존재 또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데서 의미의 기원을 찾는다. 의미의 기원이 되는 힘은 감추어져 있으며 말로 다할 수 없기에 상징으로 표현된다. 리쾨르가 말하는 존재란 삶을 가리키기도 하고 삶의 바탕을 이루는 존재의 힘을 가리키기도 한다.
리쾨르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건너뛰고 바로 존재 이해에 귀속된 자기 이해를 말하는 하이데거를 수정한다. 나의 해석 작업을 통해서만 나는 이미 어떤 이해 안에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을 안다. 한계가 있는 각기 다른 해석 방법론에 따라 밝혀지는 각기 다른 존재의 힘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가리켜 리쾨르는 조각난 존재론이라 했다. 리쾨르는 구조주의가 사상이 되고 철학이 되는 데 반대한다. 진리를 인간 주체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언어의 신비를 말한다면 구조주의는 언어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한다. 리쾨르는 구조주의적 언어관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철학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인간 언어의 핵심은 빠롤 즉 말의 사건에 있지 않고 말하기 이전의 잠재적인 언어구조 곧 랑그에 있다. 랑그는 공시적(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늘 똑같이 작동되는 구조)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하면 통시가 공시에 종속된다. 이는 체계가 변화에 앞선다는 말이고 사건과 변화란 체계 안에 무질서가 끼어든 정도 즉 체계 안에서의 변동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언어는 차이로 이루어진 기호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리쾨르는 언어에 내재와 초월이 있다고 보았다. 내재는 폐쇄된 체계 내에서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언어의 뜻이다. 구조주의는 언어의 내재적 의미효과를 말한다. 리쾨르는 구조주의가 언어를 경험 과학으로 만드는 반면 해석학은 명상에 가깝다고 보았다. 해석이란 재해석이다. 그런 점에서 해석을 통해 찾는 의미에는 역사가 들어 있다. 해석학적 지성에는 공시가 아닌 통시가 중요해진다.
사건을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언어 사건 자체가 이미 해석이다. 우주론적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곧 통시라고 할 수 있고 현상학적 시간은 일종의 공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상학에는 구조주의와 정반대의 측면이 있지만 시간을 말하자면 공시적인 면에서 같다. 구조주의는 랑그와 빠롤을 반대로 보았지만 리쾨르는 빠롤 안에 랑그를 통합시켰다. 구조주의가 의미의 단위를 낱말 차원에서 찾는다면 리쾨르는 문장 차원에서 찾는다.
말이 무한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낱말의 사전적 의미다. 말이 무한한 의미를 갖는다면 아무것도 뜻하지 않게 되며 상징의 풍요로운 의미효과도 없다. 최소의 객관적 질서 없이 의미심장한 세계는 불가능하다. 랑그의 환경 속에서만 빠롤의 사건이 발생한다.(멋진 말이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은 정주(定住)와 유목(遊牧)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정주 없는 유목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구조주의를 해석학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보고 해석학 안에 구조주의를 통합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구조주의와 언어 현상학을 통합한다. 관념론적 현상학이 아니라 언어 현상학이다. 리쾨르에게 주체는 언어와 함께 등장한다. 선험적 환원을 통해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선험적 환원을 통해 공시적인 랑그의 세계가 생긴다. 랑그는 주체 바깥이다. 리쾨르에게 주체는 랑그가 아닌 빠롤과 함께 탄생한다. 리쾨르는 주체는 언어로부터 출현하지 않으며 다만 언어와 함께 출현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말하면서 주체가 되는데 말하는 인간은 세상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지시한다. 랑그가 빠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주체가 탄생하는 것과 같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랑그는 언어행위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무의식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표상과 언어가 터져 나오게 하는 충동의 힘을 가리킨다. 리쾨르는 욕망의 의미론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철학 안으로 끌어들인다. 데카르트는 사물을 의심해서 의식의 확실성을 확보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의심했다.
의식은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깨어있는 것이고 나 곧 에고는 욕망을 이긴 현실을 대변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사회현실이 내 욕망을 이긴 전리품일 뿐이며 나를 알려면 내 욕망을 알아야 한다. 억압 때문에 생긴 무의미가 있는 곳에 의미가 있다. 현상학은 모든 것을 나의 의식으로 환원하는 반면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무의식의 힘으로 환원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현상학과 달리 나를 아는 것이 과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를 세우기는 했지만 나를 손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나는 이드, 초자아, 현실이라는 세 주인을 섬긴다. 칸트는 인간 내면에 주어진 선험적이고 무조건적인 도덕법을 이성 사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감성적 욕망을 버리고 이성 능력으로 순수하게 도덕법에 대한 존경심만으로 행동할 의무를 주장했다. 정신분석은 분석이기보다 해석이다. 욕망이 현실에 부딪혀 억압되고 억압된 욕망이 이드와 초자아로 분배된다. 리쾨르는 윤리를 존재욕망이라는 큰 틀에서 본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성 욕망보다 더 근원적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프로이트가 이룩한 도덕의 비신비화를 거쳐 다시 거룩의 상징이나 문화 상징에서 존재의 힘을 찾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프로이트가 말한 표상이란 언어화되지 않은 생각 등을 말한다. 해석이란 드러난 것을 통해 감추어진 삶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무의식은 표상과 정서와 증후를 통해 의식에 노출된다. 프로이트가 강조한 것은 의식이 무의식에 결정된다는 것이지만 리쾨르는 의식이 무의식을 결정하는 면도 있다고 보았다. 경험적 실재론이란 물리적으로 경험되는 충동의 실체를 가리키고 선험적 관념론이란 분석자의 해석 모델을 가리킨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앎이 경험과 함께 생기지만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의식적 분석 모델에 의해 충동의 실재가 의미 있게 밝혀지는 것이다. 충동의 경제학으로 보면 죄의식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싸움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를 프로이트의 경제학 모델이나 발생학 모델로만 풀 수 있을까?”라고 말한 뒤 원죄는 물려받은 인간 사회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상태를 말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고발하는 상징 언어라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힘을, 헤겔은 정신의 힘을 말한다. 정신이 표현된 문화와 작품을 해석하는 문화 해석의 결과로 의식은 자기를 이해한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며 자기를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의 문화 형태의 의미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이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의 직접적 자기 이해를 부정하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정신현상학은 같다. 리쾨르는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고고학으로, 정신현상학은 주체의 목적론으로 부르며 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했다.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 과거를 치유하는 것이기에 미래가 없다면 과거도 없다. 반성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생각하는 주체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나를 바탕으로 나를 생각하고 나를 통해 나를 찾는 주체를 문제로 본다. 리쾨르는 주체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선험적인 나를 상정한 자명한 실체를 상정하는 것도 비판한다. 리쾨르는 데카르트가 확실성과 정체성을 혼동했다고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지까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의식이 나의 정체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직접적 자기 인식을 인식이 아닌 느낌으로 보았다. 자기가 누군지 외부적 요소를 끌어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다. 직관을 거쳐 표상이 된 외부적 경험 자료들을 통각하여 개념의 틀로 찍어나올 때 비로소 인식이 생겨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과 나는 누구인가의 의심이 양립하기를 바란다.
리쾨르는 후설 현상학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의미 기술. 2) 주체가 의미 생산자라는 점. 3) 선험적 환원 등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이란 의미의 세계를 가리킨다. 리쾨르가 볼 때 현상학의 말하는 주체는 언어 과학을 수용하지 못한다. 현상학은 객관적인 랑그의 세계를 모른다. 현상학에서는 주체가 세상뿐 아니라 언어까지 지배한다. 현상학의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위아래로 흐르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면서 전통이 축적되는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응집된 시간이다. 진리는 오직 현재이며 이는 신을 영원한 현재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과도 통한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11권에서 추구한 시간을 서구의 현상학적 시간의 효시(嚆矢)로 보았다. 모든 인연을 끊고자 하는 불교의 찰나라는 시간도 현상학적 시간이다. 빠롤은 주체가 공시적인 랑그를 가져다 상황과 시간에 맞게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현상학에서는 말 곧 빠롤을 공시적인 것으로 본다. 현상학에서 언어의 여러 요소는 매번 독자적인 표현행위를 하려고 경합한다. 기호의 의미가 객관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 사용될 때 뜻을 가지게 된다. 이는 현상학적 주체가 의미의 창시자일뿐 아니라 언어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리쾨르는 언어의 객관적 언어값인 랑그를 인정하고, 주체가 언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상학과 달리 내가 언어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구조주의와 달리 언어가 나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 말을 해석하면서 나의 정체가 형성된다. 이것이 해석학적 주체다. 리쾨르는 후설의 선험적 환원을 언어로의 환원으로 정의한다. 존재와 언어와 생각이 나를 이룬다. 직관을 통한 자아 인식이란 없다. 해석 없이 확실한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론의 꿈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나의 욕망을 알아야 하는데 칸트는 욕망을 일부 감춘 표상적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셈이다. 칸트는 도덕적 인간을 인간의 정체성으로 보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보는 셈이다.
반성이 해석이 됨으로써 해석학은 철학이 된다. 반성 이전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면서 주체가 태어난다. 후설에게서 나는 의미의 생산자이고 하이데거에게서 나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자이다. 내가 묻지만 나는 묻는 대상에 의해 이끌려 묻는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대상화해서 인식하고 통치하는 주체를 설정한 것이며 그러한 주객관계에서 실체적 자아의 확실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나는 존재가 현현(顯現)하는 자리로서 현존재이지만 존재를 묻는 자로서 나이다.
내가 묻지만 물어지는 것이 나의 물음을 유발했다. 리쾨르가 사용하는 존재하려는 노력이란 말은 스피노자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리쾨르가 말한 악이란 자연재앙,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고통과 불행, 인간의 죄 등이다. 현상학은 악을 자유의지의 산물로 말하지만 그러나 살다 보면 악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리쾨르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층의 언어가 인간의 잘못을 말하기 위한 상징으로 쓰였다고 보았다.
잘못이 금기를 어긴 것이면 흠의 상징이고 흠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리적 접촉이나 오염과 관련된 상징 언어들이 동원된다. 근원적인 잘못을 신과의 인격 관계 훼손에서 찾을 때에는 죄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도덕과 법을 어긴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의식은 허물 차원이다. 흠과 죄와 허물의 상징이 일차 상징이라고 한다면 신화는 이차 상징이다. 비극적 세계관이란 죄와 고통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악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지 않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인류사상사에서 자유의지란 개념을 처음으로 확실하게 사용한 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이지만 모든 악이 자유의지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악의 극복도 자유의지의 책임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설명한 사람은 칸트다. 존재의 힘을 사람의 의식 밖에서 찾는 리쾨르의 해석학은 악과 구원의 비의지적 차원을 찾는다.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다는 말은 상징이다.
죄에 대한 윤리적 세계관과 함께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모두 말하고자 한다. 원죄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와의 싸움, 그리고 도덕주의자인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이 있다. 죄는 나의 책임이지만 나의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얼핏 보면 개념적으로 모순인 원죄론은 악의 문제에서 신의 선하심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악을 고발하며 신의 은총을 희망한다. 죄를 짓는 데 대한 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생물학적인 유전을 말하는 것은 원죄론의 관심이 아니다.
죄를 타고난다는 말은 상징적 표현으로 세상의 구조 악 속에 사는 한 죄지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구조 악을 만든 것은 개인들이다. 죄의 깊이를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총을 말하기 위한 방편이다. 죄의 고백의 언어와 믿음의 희망의 언어가 원죄론이라는 상징 언어에 들어 있다. 현상학은 설명하지 않고 기술한다. 상징해석학은 신화를 사실로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펠라기우스나 칸트, 마르크스, 니체처럼 신화를 윤리로 바꾸는 합리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꿈을 해석하듯 신화도 해석해야 한다. 인간은 선에 대해 무지하다고 하는 성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칸트가 잇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 우연성보다는 비극성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칸트는 인간의 뿌리 깊은 악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의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신화를 사실로 보지 않는 비신화화를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신화에 들어 있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살리려고 한다.
증언하는 말이 글이 되었다가 그 글이 독자에게 그를 위한 말씀이 될 때 성서의 해석학적 과정이 끝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뢀이 인간의 삶을 해석하지만 인간의 실존 이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성서는 신의 말이면서 인간의 말이다. 사도 바울이나 중세의 학자들은 전자를 강조하고 현대의 비판적 지성은 후자만 강조한다. 리쾨르의 상징 해석학은 삶과 성서의 해석학적 순환을 인정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순환은 전통 신학에서 볼 때는 철학으로 보이고 현대의 비판적 지성에서 볼 때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해석의 순환이란 믿음과 이해의 순환이다. 믿으려면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믿어야 한다. 믿음이란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의 힘에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의 힘은 신화라는 상징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믿으려면 신화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 루돌프 불트만은 믿음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성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해석 작업을 거쳐야 믿음의 대상이 드러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불트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무관한 하나님 이야기는 모두 신화라고 본다. 칸트가 인식이 아닌 의지와 관련해서만 신을 말한 것처럼 불트만은 실존론적 결단과 관련해서만 신을 말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말씀을 듣는 자의 주관적 결단에 의해 밝혀지지만 그 이전에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를 거쳐야 한다. 곧바로 실존으로 가는 것은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무시한 너무 성급한 해석이론이다.
리쾨르는 독일 신학자 불트만의 사상에 주목하며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이 가져오는 긴장과 희망을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칸트는 신에 대해 알 수 없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의 힘에 이끌려, 그러나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자기를 이해하는 지성이 믿음과 희망의 지성이다. 저자는 도덕성을 향한 의지의 노력 없이 신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볼 때 거짓 신앙이고 거짓 종교라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인간의 뿌리 깊은 악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