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관 교수의 Let's go! 지리여행
박종관 지음 / 지오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리(地理)를 모른 채 지리(地利)만을 취하는 얄팍한 세상의 혼돈이 땅 원리에 대한 공부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말하는 책. 우리가 보는 북한산은 1억 6천만년전 지하에서 굳은 화강암이 만든 산이다. 그 이후 암석체 위의 지표면이 깎여 나가 우리 눈에 보이게 된 것이다. 절리란 한 방향으로 평행을 이루며 갈라진 틈을 말한다. 절리는 땅 위의 모든 암석에서 발견된다.

 

절리의 원인은 습곡이나 단층 등 여럿이지만 대표적인 것은 땅 속 기반암이 지표면에 노출되기 시작하면 봉압(封壓)에서 풀려나면서 부피가 팽창해 생기는 것이다. 절리는 여러 방향으로 생기지만 화강암의 경우 가로 방향으로만 탁월하게 발달한다.(여럿이 둘러 앉기 좋은 개울가의 바위) 인편상(鱗片狀) 구조라고 해야 할 것을 판상절리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계적 풍화작용 결과 암석 표면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것을 박리(剝離; exfoliation)라 한다.

 

풍화(風化; weathering)는 암석이 지표면에서 위치가 그대로인 채 지표의 영향을 받아 변질되는 것을 말한다. 나무뿌리에서 나오는 산성물질들도 암석의 화학적 풍화작용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토르/ 토어(tor)는 탑 모양의 기반암체다. 영국 남서부의 다트무어 국립공원의 화강암 지형에서 유래했다. 차별적 풍화작용 때문에 생긴다.

 

바위가 썩은 풍화토를 새프톨라이트(saptorite)라 한다. 토르/ 토어는 화강암 산지에 잘 발달되어 있다. 설악산 흔들바위도 토르/ 토어의 일종이다. 타포니(tafoni)는 풍화혈이라 한다.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바위 표면이 움푹 팬 곳을 말한다. 마이산에서 볼 수 있다. 그루브(groove)는 화강암 돔의 새로 방향으로 만들어진 홈이다. 나마(gnamma)는 가마솥 바위라 불린다. 테일러스(talus; 애추; 崖錐)는 절벽으로부터 암설(巖屑; debris)이 떨어져 쌓여 생긴 직선 단면의 원추형 퇴적지형이다.

 

석회암의 화학적 풍화작용은 주로 물과 반응해 일어난다. 물 속에서 석회질 성분이 쌓여 굳은 암석을 석회암이라 한다. 탄산칼슘이라는 석회질 성분이 50퍼센트 이상 포함된 퇴적암을 말한다. 카르스트란 유고슬라비아의 아드리아해 북부 카르스트 지방의 이름을 따온 말이다. 석회암이 오랜 세월 용식(溶蝕) 작용을 받으면 붉은 흙(테라 로사; terra rossa)가 만들어진다. 테라 로사가 붉게 보이는 이유는 석회암이 용식된 후 철이나 알루미늄 성분이 산화작용으로 붉게 변하기 때문이다.

 

붉은 흙이라고 해서 모두 테라 로사라 하면 안 된다. 적색토도 있기 때문이다. 돌리네(doline)는 카르스트지형에 발달한 움푹한 와지(窪地)를 말한다. 포노르(ponor)는 하천이 지하로 사라지는 장소를 말한다. 기존의 석회동굴이 무너져 깔때기 모양으로 깊게 패인 곳을 싱크홀(sinkhole)이라 한다. 석회암 지대에 있는 싱킹 크리크(sinking creek)는 어느 지점에서 강물이 갑자기 줄어들다가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다시 흐르는 곳을 말한다.

 

종유석(鐘乳石)은 석회동굴 천장 내부에 달린 고드름 모양의 탄산칼슘 집적체를 말한다. 석순(石筍)은 종유석에서 동굴 바닥으로 떨어진 물에 의해 만들어지는 죽순 모양의 집적체를 말한다. 필리핀 피나투보(Pinatubo) 화산은 1991년 6월, 600년만에 분화 활동을 재개했다. 마그마는 땅 속 깊은 곳에 녹아 있는 돌을 말한다. 용암(lava)은 마그마가 땅 위로 솟아나온 것을 말한다. 마그마나 용암이 굳어서 생긴 지형을 화산지형이라 한다.

 

화산에 관한 두 편의 영화를 이야기해 보자. 볼케이노와 단테스 피크다. 볼케이노는 용암을 소재로 한 영화고 단테스 피크는 화쇄류(火碎流)를 소재로 한 영화다. 현무암은 볼케이노를 만들고 유문암은 단테스 피크를 만든다. 화산암은 대개 석영, 장석, 운모, 휘석, 감람석, 각섬석 등의 광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석영이 용암 속에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따라 볼케이노처럼 용암이 활활 분출하는 화산이 되기도 하고 단테스 피크처럼 펑 하고 터지는 화산이 되기도 한다.

 

석영 함량이 50% 미만일 경우 하와이나 제주도처럼 용암이 줄줄 흘러내리는 분화 형태를 보인다. 이 경우 검은 색의 현무암이 만들어진다. 폭발식 분출이 아닌 일출(溢出)식 분화가 일어난다. 폭발식 분화에서와 같은 화쇄류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석영의 함량이 65퍼센트 이상일 때는 마그마의 유동성이 작아 땅 속 내부 압력이 높아져 폭발식 분화(explosive eruption)를 하게 된다.

 

산성 용암은 터진다.(석영 함량이 65퍼센트 이상인 경우로 '폭발식 분화; explosive eruption'를 한다.) 밝은 계열의 화산암을 만든다. 유문암이 대표적이다. 염기성 용암은 흐른다.('일출식; 溢出式 분화; effusive eruption'를 한다.) 검은 색 계열의 화산암을 만든다. 현무암이 대표적이다.

 

파호이호이 용암은 점성이 작은 용암류다. 아아 용암은 점성이 큰 용암류다. 화구가 함몰해 본래보다 커진 것을 칼데라라 한다. 백록담은 화구호, 백두산은 칼데라호다. 물을 가지고 있는 지층을 대수층(帶水層)이라 하고, 땅 속으로 들어간 빗물이 지하수가 되었다가 지표로 다시 올라오는 샘물을 용천(湧遷)이라 한다.(湧; 물솟을 용)

 

규모와 위치에 따라 강(江)과 천(川)을 나누고 둘을 통칭해 하천이라 부른다. 강원도 태백시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는 황지(黃池)다. 우리나라는 동고서저 지형 때문에 대부분의 하천이 서해와 남해로 흐른다. 이 하천들은 길이가 길고 경사가 완만하고 동해로 흐르는 하천들은 길이가 짧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상류에서 하류로 갈수록 퇴적물의 크기는 줄어든다. 두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 선택운반설과 마모설이다. 폭포는 물이 떨어지는 힘에 의해 폭포 아래에 폭호(瀑壺)라는 물 웅덩이를 만든다. 폭호가 점점 커지면서 아래쪽으로 파들어가게 되면 윗부분의 암석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폭포는 상류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보통 물살이 빠른 곳에는 자갈밭이, 느린 곳에는 모래톱이 만들어진다. 하천 상류 지역의 지반 융기와 함께 만들어진 사행천(蛇行川)을 감입곡류천(嵌入曲流川)이라 한다. 동해안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태백산맥 때문에 해안 경사가 급하며 바닷가 면적이 좁다. 해안 발달이 미약하다는 의미다. 사빈(沙濱)이란 모래가 깔린 바닷가를 말한다. 서해안은 해안경사가 완만해 사빈이 발달했다. 동해안에서는 갯벌을 볼 수 없다. 황하나 양쯔강처럼 다량의 점토질 토사를 유출하는 큰 강이 없고 서해와 달리 폐쇄된 만(灣)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중국 서부내륙의 황토층이 황사의 근원임은 물론 갯벌의 근원이기도 하다. 남해안 곳곳에서는 자갈해안을 볼 수 있다. 모래해안보다 자갈 또는 암석해안이 더 일반적이다. 패사(貝砂) 해안도 있다. 해안단구는 동해안, 서해안에서 공히 볼 수 있다. 이는 융기(隆起)의 증거다. 우리나라 지형은 동고서저 지형이다. 예전에는 한반도 동쪽이 융기했고 서쪽이 침강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동서의 융기 차이가 동고서저 지형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바닷물이 들어온 해안을 침수해안(浸水海岸), 빠져나간 해안을 이수해안(離水海岸)이라 한다. 융기는 이수해안의 효과를, 침강은 침수해안의 효과를 갖는다. 바닷물이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은 지구와 달의 인력(당기는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지구와 달이 일직선상에 놓이면 인력에 의해서 바다 물이 부풀어오르게 되어 밀물(만조)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달과 직각방향에 있는 곳에서는 바다 물이 줄어들게 되어 썰물(간조)이 된다.

 

간석지(干潟地)는 갯벌, 간척지(干拓地)는 매립지를 말한다. 갯벌은 산에서 침식, 운반된 부유토사가 해안가에 쌓여 생긴다. 영국과 같은 고위도에서는 저수온으로 인해 바다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단 여름에 30도씨 이상이 되면 바다냄새가 난다.

 

세상은 비가 올 때 바뀐다. 지구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한다. 빗방울의 엄청난 에너지가 지표면을 때린다. 급격히 불어난 지표수는 지표면을 깎아 흙탕물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땅 속으로 침투한 빗물은 토양의 공극을 채우며 지하수가 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하수는 지표면으로 배어나와 하천이나 호소(湖沼) 등의 지표수와 합류한다. 바다로 빠져나간 물은 증발하여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지구의 물은 세상을 바꿔가며 이렇게 순환한다.

 

유역이란 산으로 둘러싸인 집수구역을 말한다. 땅속으로 침투(浸透)해 들어간 빗물이 지구 중력에 의해 지하수위를 향해 흘러 가는 것을 침루(浸漏)라고 한다. 비는 대기 중의 아주 작은 입자에 물 입자가 붙어 생긴다. 아차산은 계곡 좌측에는 화강암이, 우측에는 편암이 자리한다.(좌화우편) 아차산 화강암은 원래 이곳의 기반암이었던 편암을 뚫고 관입해 자리잡은 암석이다. 편암 풍화토는 화강암 풍화토보다 점토질 성분이 많아 두껍다.

 

아차산에 비가 내리면 어떻게 될까? 화강암 암벽 위로 떨어진 빗물은 긴 물줄기를 이루며 급류한다. 암반 위에서 시냇물 소리를 내며 흐르는 빗물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반면 오른쪽의 숲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가 올 때 아차산 계곡물의 대부분은 왼쪽의 화강암 암벽으로부터 흘러나간 빗물고 구성된다. 비가 오지 않을 때의 계곡물은 오른쪽 숲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날이 맑을 때의 아차산 계곡물은 비가 올 때와 달리 오른편의 편암지대로부터 서서히 흘러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차산 공원 유역 자체가 좁고 편암이 차지하는 면적도 작아 많은 양의 지하수를 계곡으로 흘려보내지 못해 실제 아차산의 계곡물은 거의 말라 있다.

 

지하수는 땅 속 토양 입자와 입자 사이의 공극이 물로 100퍼센트 포화되어 있을 때 해당하는 말이다. 지하수는 진흙층과 같은 불투수층 위에 놓여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 랜선 육아 - 교육 전문가 엄마 9인이 쓴 나홀로 육아 탈출기
온마을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원제가 ‘It Happens Every Day’이긴 하지만 같은 말로 제목을 정한 번역서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각자의 생활 조건으로 바쁜 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끼?

 

요즘 랜선 모임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나 멀티채널네트워크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공통 관심사를 감상하고 채팅하고 메신저로 소통하는 모임을 말한다. 팍팍한 시대를 반영하는 말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시대를 증거하는 말이다. 방구석이란 말도 그렇다.

 

온마을이란 팀이 만든 ‘방구석 랜선 육아’는 3, 40대의 초중등 교사들로 이루어진 교육 전문가 엄마 9인이 쓴 나홀로 육아 탈출기다. 개인적으로 리세롯 마리엣 올슨의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란 책을 읽은 바 있지만 교육과 육아는 공유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다른 부분도 있을 터이다.

 

초중등 교사 엄마들은 육아에 어떤 비결을 가질까? 책 뒷면에 이런 소개 문구가 있다. 직접 만나지 않고도 일상과 육아를 공유한다. 책은 나 홀로 육아는 힘들어(1부), 함께할수록 즐거운 동맹육아(2부), 어제의 엄마는 가고 내일의 엄마가 온다(3부), 나도 한번 육아 모임 꾸려 볼까(4부) 등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들 프로필은 인터넷 닉네임으로 소개한 데다 출신학교나 전공 등을 이야기하지 않고 책에 필요한 최소의 정보로 채웠다. 엄마의 모유 수유, 엄마의 단호함, 엄마의 후회, 엄마의 소망, 엄마의 수면 교육, 엄마의 관찰, 엄마의 확신, 엄마의 죄책감, 엄마의 육아 메이트, 엄마의 행복, 엄마의 둘째 임신, 엄마의 기록, 엄마의 고통, 엄마의 독서 같은 제목들이 인상적으로 포진된 책이 ‘방구석 랜선 육아’다.

 

책 내용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이런 게 엄마의 현실이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과연 시작했을까?” 메리 에이어스의 ‘수치(羞恥) 어린 눈’이란 책이 생각난다. 인도 타밀 부족은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우면 ‘눈(eye)’이라 부른다고 한다는 말로 문을 연 이 책은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아이가 수치를 내면화하면 그것은 평생의 삶에서 되풀이되어 울려 퍼진다고 말한다.

 

정신분석 책이기에 일반적인 상황과 얼마나 연결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엄마 역할의 중요성 즉 육아라는 지난한 과제를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진술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출산율이 계속 떨여지기만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박수칠 일이 분명하다는 점이다.(출생률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물론 용기 있게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육아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모임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과 육아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을 차근히 거친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친구가 될 것이다.”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실마리로 책은 전편을 통해 랜선 육아모임의 전모를 차근차근 설명해 놓았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오뉴파파(Onewpapa)의 육아 프로그램을 보았다. 귀엽고 예쁘고 똑똑한 여아(오뉴)의 모습에 내 아이인 듯 즐겁고 행복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숨은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엄마의 관찰’편을 보자. 이런 내용이 있다. “기관 생활을 처음 시작한 아이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얼마나 외롭고 불안하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당시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서 아이의 감정 상태를 놓치지 않아 보호자로서 아이를 대변할 수 있었다.”

 

상태를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 핵심이다. 상태는 무엇보다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고 알리는 것이다. ‘수치 어린 눈’의 메시지를 연상하게 된다. 책에는 이석증으로 고생하며 아이를 키운 엄마 이야기도 있다. ‘엄마의 독서‘라는 글이 눈길을 끈다. 부제는 ’아기가 깰까 봐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다. 크게 공감되는 이야기다.

 

“오늘도, 아니 육아 중 쓰는 모든 글은 ‘기승전아기’로 끝난다.”는 엄마의 글이다. 4부는 전술했듯 ‘나도 한번 육아 모임 꾸려 볼까‘로 구체적 방법론을 귀띔한 글이다. “하나하나의 인연은 생과 생이 만나는 엄청난 경험이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이어질지 모르지 않는가, 맺는 것만큼 푸는 것 역시 세심함이 필요하다.”란 글을 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다. 목적을 달성했거나 사정이 생겼다면 헤어질 수 있는 것이 삶이기에 그렇다.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한, 그리고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아기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지 않아도 읽을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 해법 - 블랙홀 서울, 땅과 건축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
김성홍 지음 / 현암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축가가 시대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졌더라도 건축물은 장소, 기술, 노동이란 기반 위에 만들어진다...건축물이 제도판에서 잉태되어 현장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역사에 비유하면 정사(正史)에 야사(野史)가 가려지는 경우다.“.. 이 인상적인 내용이 프롤로그에 담긴 책이 김성홍의 ‘서울 해법’이다. 저자는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 1895 - 1985)의 은유를 소개한다. 비담론의 넓은 바다에서 담론의 작은 섬에 갇히는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는 건축을 언어화하는 순간 깊고 풍부한 건축의 전체성은 언어의 논리로 축약된다는 것이다.

 

책은 1부 땅, 2부 제약, 3부 관성, 4부 명제로 이루어졌다. 서울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수도는 흔하지 않다. 베이징, 도쿄, 워싱턴 D. C, 런던, 파리, 베를린 모두 평지다.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였던 4대문 안과 그 밖 일부를 역사 도심이라 부른다. 이곳의 면적은 서울 전체 면적의 2.9 퍼센트(17.9 제곱 km)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는 9.7 퍼센트, 인구 밀도는 서울시 평균의 1/3이다.(42 페이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세기 말 스위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20세기 초 이를 독일에서 도입하여 도쿄, 요코하마를 재건했고 한반도, 대만 등 강점(强占) 지역에도 시행했다. 1980년대에는 이 사업을 통해 가나자와, 사이타마, 지바 등 교외 신도시를 건설했다. 일본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자국에 도입한 목적 및 배경과 경성을 포함한 강점 도시에 시행한 그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일제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편 것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함으로써 토지 경작권을 잃고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54 페이지)

 

서울의 신시가지 조성은 한양도성 밖 동북쪽 관문이었던 혜화문 밖 돈암동에서 시작되었다.(55 페이지) 구획정리사업의 정점은 강남이 탄생한 것이다. 구획정리사업은 불규칙한 필지를 곧게 펴고 잘게 나누면서 개인이 소유한 필지의 일부를 떼어 길과 공원 등의 공공용지를 확보한다.(57 페이지) 세계 도시 비교 연구를 해온 존 페포니스는 모더니즘을 둘로 나누었다. 주변 맥락과 독립된 오브제와 스펙터클한 내부 공간을 만나는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의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대면 접촉을 촉진하는 모더니즘이다.

 

저자는 성장하는 도시에만 익숙했던 한국도 서유럽과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를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69 페이지) 저자는 서울의 인구 집중화에 따른 주택난을 해결하고 부족한 도시기반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했으나 부동산 투기와 정치 비리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던 구획정리사업지구는 이제 필지 단위에서 소블록 단위의 재생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73 페이지)

 

구획정리사업은 서울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었다. 그리드 바탕 위에 작도한 경복궁 복원도가 전해오지만 조선 초기 경복궁을 이 방식으로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76 페이지) 서울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도시 집중화를 겪었다.(117 페이지) 저자는 5년제 건축학 교육을 받고 실무 수련을 마친 예비 건축사의 설계 능력을 시험으로 판단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 논리로 건축사 수를 제한하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120 페이지)

 

지난 50년간 건설사업의 성장 동력은 더 높은 용적률을 향한 집단적 욕망이었다.(128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여러 저자들이 쓴 ‘서울의 인문학’에 실린 자신의 글을 소개한다. 용적률(容積率)이란 대지면적에 대한 연면적(건물 바닥 면적의 합)의 비율을 말한다. 가령 집의 연면적이 대지면적과 같으면 용적률은 100퍼센트, 연면적이 대지 면적의 2배이면 용적률은 200퍼센트가 된다. 건폐율(建蔽率)은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1층 바닥 면적)의 비율이다. 건폐율이 50퍼센트인 집을 4층으로 지으면 용적률은 건폐율의 4배인 200퍼센트가 된다.(‘서울의 인문학’ 191 페이지. 積은 쌓을 적자다. 蔽는 덮을 폐자다.)

 

저자는 건축은 숫자로 치환할 수 없고 치환되어서도 안 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이지만 문제는 지난 50년간 건축을 추동한 밑바닥에 용적률이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130 페이지) 인구 밀도가 높다고 용적률 게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땅값 상승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다.(133 페이지) 한양의 단층집은 수직으로 쌓을 수 없는 목구조와 온돌 결합 방식이었다. 구한말 한양은 건폐율과 용적률이 70퍼센트로 같았던 수평도시였다.

 

2016년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70퍼센트에서 145퍼센트로 2배 올랐다. 지난 100년간 서울의 시간은 용적률을 2배 올리는 과정이었다. 현재 평균 건폐율이 50퍼센트라고 가정하면 높이 평균은 2.9층이다.(145/ 50; 2.9) 저자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 - )를 소개한다. 그는 거대 도시 맨해튼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한 ‘광기의 뉴욕’이란 책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이다.

 

건축 기술은 보수적이다. 변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145 페이지) 공장에서 생산하는 완제품과 달리 건축은 땅을 딛고 있으므로 하이테크와 로테크를 모두 필요로 한다.(146 페이지) 스위스는 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건축의 나라다. 850만의 인구에 건축사, 건축 엔지니어 수는 16,000명으로 인구 5000만 명인 남한의 건축사 수에 육박한다. 기존 건축사들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건축사 합격자 수를 암묵적으로 조절하는 한국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건축학과 졸업장이 곧 건축사 자격증이 된다.(149 페이지)

 

맑스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가 시장에서 어떻게 가격으로 전환되는지를 규명하고 이론화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 가치는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사람의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맑스의 가치론은 논쟁거리다.(155 페이지) 저자는 버내큘러(vernacular)를 번역할 마땅한 우리말이 없다고 말한다. 건축에서는 평범한 집을 짓는 데 사용하는 지역 양식을 의미한다. 평범, 비공식, 비표준, 장소, 지역, 언어, 방언, 양식 등을 포괄하는 단어다. 이 단어가 사전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700년경이다. 집에서 태어난 노예, 원주민을 의미하는 라틴어 베르나(verna)에서 파생한 말이다. 영국이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방대한 식민지를 구축하던 시기다.

 

저자는 일본 신사(神祀)를 닮았다는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논쟁,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차용했다는 정봉진의 국립민속박물관 논쟁은 모더니즘의 수동적 학습자이면서 전통 현상에 대한 혼돈과 목마름을 앓았던 1세대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말한다.(168 페이지) 부여박물관 논쟁은 도리이(鳥居; とりい) 논쟁이기도 하다.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부여박물관(현 국립문화재연구소)을 보고 김중업 건축가가 일본풍이라고 비판한 데서 비롯된 논쟁이다.

 

버내큘러와 비교할 말이 제네릭(generic)이란 말이다. 제네릭 도시란 특징 없고 무미한 도시를 말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주변과 무관하게 고유한 것이 있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며 만들어낸 가공이라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는 서울을 향한 타자의 비판, 냉소, 폄하, 훈수에 대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제3의 시선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한다.(176 페이지)

 

저자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읽는 것은 필요하지만 고증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사실과 상상에 기댄 가공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록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지배자, 승자, 강자의 틀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 된다.(177 페이지) 평면도는 허리 높이에서 건물을 수평으로 자르고 위에서 바닥면을 내려다보고 그린 도면이다. 평면도는 보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가정하고 그리는 가상 도면이다. 건축가들은 2차원 평면도와 단면도를 보고 3차원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역으로 3차원 공간을 경험한 후 평면도와 단면도를 그릴 수 있다.(181 페이지)

 

서울에 2층 상가가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다. 단층이었던 상점을 2층으로 짓도록 한 조선총독부 정비령 때문에 조선 상인들이 파산하기도 했다.(215 페이지) 저자는 근린생활시설(근생)이 주택가에 침투한 사례를 열거한다. 신사동 가로수길, 강남 역삼동, 잠실 방이시장, 홍대앞 서교동, 연희동, 건대입구역 화양동 등이다. 저자는 왼쪽을 빨간 튤립이, 오른쪽은 노란 튤립이 이랑을 따라 일렬로 심어진 밭을 반(半) 자연이라 말한다.(255, 256 페이지) 사람 손을 거친 자연이라는 의미다.

 

패턴이란 자연이나 인공물에 내재하는, 확연히 구별되는 규칙성을 말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단순한 규칙이 만들어낸 집합적 패턴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랭거는 비담론적 예술을 표상 상징이라 설명했다. 저자는 건축은 언어의 세계와 느낌의 세계 사이에 교묘하게 걸처져 있다고 말한다.(258 페이지) 건물은 공간적으로 시각 예술을, 시간상으로 음악의 스케일을 능가한다.(264 페이지) 건물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내외부 전체를 움직이며 경험해야 한다.

 

게슈탈트 심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환경을 최대한 단순하고 정형적 형상으로 축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사물과 현상을 쉽게 지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다.(267 페이지) 도시 연구는 귀납적이다. 현상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아간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건축 연구는 연역적이다. 자신이 설정한 아이디어를 맥락화하고 합리화한다. 이미 내린 답을 역으로 검증하는 과정이다.(274 페이지)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의식 세계는 분석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물질세계와 다르며 직관만이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직관은 대상을 맴돌며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대상 안으로 곧바로 들어가 표현할 수 없는 무엇과 공감하는 것이다. 많은 장소에서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도면을 분석하더라도 도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직관과 즉물적 감각으로 단번에 도시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275 페이지) 도시계획은 집단의 욕망을 제어하고 건축설계는 개인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이질성과 역동성은 종이 한 장 차이다.(285 페이지) 동으로는 일본, 서로는 티베트, 남으로는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기후, 재료, 기술, 관습에 따라 동아시아 목구조 건축은 다양하게 갈래를 쳐왔다.(288 페이지) 우리는 고유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우수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전통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성의 토대 위에 변용과 변화가 있을 뿐이다. 고정된 전통은 우리가 만든 가공이다. 도시와 건축에서 오염된 단어가 커뮤니티란 말이다.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물리적, 심리적 경계를 만드는 설계안에 커뮤니티라는 말이 붙는다.(300 페이지)

 

저자는 서울은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정의한, 한 곳을 깊이 파는 고슴도치와 여러 곳을 살피는 여우의 모습을 지닌 다면적 브리콜뢰르 건축가를 기다린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서울 해법’은 새로운 개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책, 진지하고 묵직한 사유의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다시 들춰볼 책이다. 건축의 매력과 특성을 단편적이나마 음미할 수 있었다. 조선과 일제강점기, 근현대 한국을 연결짓는 통시적 접근법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哲學)이란 용어를 만든 니시 아마네(にし あまね; 1829 - 1897)를 한자로 쓰면 서 주(西 周)가 된다. 이로부터 주(周)나라 생각을 하게 된다. 주나라는 서주(西周)와, 서주 이후의 춘추전국시대 즉 동주(東周) 시대로 구분된다. 공자가 이상시한 시대가 서주시대고 동주시대는 무도(無道)와 패권 다툼의 혼란기였다.

 

각설(却說)하고 니시 아마네는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를 물리(物理)와 심리(心理)로 나눈 사람이다. 리(理) 개념의 추상화는 나의 오래된 관심사이거니와 지금 내가 리(理)를 논하는 것은 물리(物理)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 차원의 다짐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지질(地質)에 약한 것은 물리적 맥락 또는 이치에 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란 책의 한 챕터인 ‘심리학자이자 물리철학자’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본다는 것은 문화적 행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121 페이지)

 

핵심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한다는 점,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논할 수 있디. 하나는 “우리에게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할 것”이란 말(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폴 리쾨르의 데카르트 비판이다.

 

리쾨르는 데카르트가 했다는 직접적 자기인식은 자신을 느낀 것이지 인식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느낌도 앎의 일종이지만 적어도 ‘나’(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에 나오는 나)는 직관적 앎의 대상이 아니다.”(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95 페이지)

 

이렇게 나란 존재도 직관적 앎이 아닌 명백한 인식의 대상이거늘 물리나 지질 등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리쾨르의 말을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36 페이지)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의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이란 공언(孔言; 공자의 말)도 생각해볼 만하다. 위태로운 것보다 얻는 것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색을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체가 없고 간상체만 남아 있어 색을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심한 색맹, 어셔증후군(농아로 태어나 어른이 되면 점차 시력을 잃는), 윌리엄 증후군(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감각한 것을 양적인 체계 속으로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폐증(듣고 보고 느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상적 능력을 상실한 채 태어나는) 등의 네 가지 신경장애를 가진 사람들 즉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겸손이라는 말을 했다.(‘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242 페이지)

 

겸손은 공부에도 적용된다. 앞서 인용한 철학자 김영민은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우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라는 말을 했다.(같은 책 40 페이지) 겸손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겸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게 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들 수 있는 것이 김화영(최근 김리아로 개명) 교수의 말이다. ”혼돈은 때로 생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영혼은 반드시 혼돈의 용암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건전한 영성은 두 성역, 즉 혼란과 질서를 동시에 존중한다...혼란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질서는 우리를 통합시킨다.“(‘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172 페이지)

 

김영민 교수의 말대로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정(補正; 모자람을 보태고 잘못을 바로잡음)의 노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는 ’데카르트가 인간이 모든 것을 의심해도 사유(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유 주체인 인간이 자신을 자동적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설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해설사가 해설 내용을 느낌이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그리고 해설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허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보다 나부터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시의 깊이 - 공간탐구자와 함께 걷는 세계 건축 기행
정태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태종의 ‘도시의 깊이’는 헤테로토피아, 현상학, 구조주의, 바이오미미크리, 스케일 등의 개념으로 도시와 건축을 분석한 책이다. 치과 의사 출신의 건축학부 조교수(助敎授)로 자신을 건축으로 세상을 읽는 공간탐구자로 소개하고 있다. '도시의 깊이'는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을 연상하게 하는 책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저자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되는 행위의 공공 공간,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SNS 공간, 이질적이고 다양한 OO방(房)들이 즐비한 도시 풍경, 청계천으로 대표되는 인공 자연 같은 한국적 특이 공간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일상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로 무덤만 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architecture(건축)이란 말을 분석한다. 그것은 처음 또는 근원을 의미하는 arche와 장인(匠人)을 의미하는 tectron의 결합어이다. 그러니 건축이란 근원을 아는 장인의 기술이란 의미가 된다.(‘건축을 위한 철학’ 11 페이지) 미트로비치에 의하면 건축 과정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연결시킴으로써 장소를 만들어낸다.(‘건축을 위한 철학’ 158 페이지)

 

정태종 저자의 책은 공간과 장소들이 인상적인 건축 도시들을 찾아나선 여행의 산물이다. 중간 중간에 주요 건축 양식들에 대한 지식이 소개된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취향은 덤이다. 가령 ”개인적으로 가에다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나 ’청교도‘ 등 벨칸토 오페라를 좋아해서 기회가 되는대로 공연을 보러간다.“(55 페이지)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문화 공간을 즐거운 헤테로토피아로 소개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201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장이 담양 소쇄원에서 영감을 얻어 대나무와 자작 합판, 스틸 등으로 제작한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 1941 - )의 공간 조형물인 ’신명(晨明)‘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된다.(신명이란 새벽녘을 의미한다.)

 

저자의 책은 전방위적이다. 가령 바르샤바편에서는 사람들이 옛 소련이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문화과학궁전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듯 하다고 말하다가 그 건물 앞 건널목이 피아노 건반 모양임을 덧붙이며 바르샤바에서 쇼팽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만 사람들을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마음을 구석구석 위로해준다고 말한다.(74, 75 페이지)

 

본문에 의하면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한 사람은 크리스티안 노베르크 슐츠로 공간의 개념을 인간의 실존 즉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무는 거주 감각으로 정의했다. 알베르트 페레즈 고메즈는 감각적 속성과 신체감 등을 사고하며 대상과의 상황을 실험하고 구축해 신체로 체험하는 것을 현상학적 건축이라 주장했다.(80 페이지)

 

현상학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다. 그것은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 정보를 이용한다. 조금은 추상적인 진단일 수 있지만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색이 다양해서인지 건축은 색에 대해서는 주인공으로 나서기보다 배경이 되어 사람을 품으려고 한다는 말도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건축은 미술과 달리 색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82 페이지) 우리는 시각으로 대부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물론 가장 민감한 감각은 후각이다. 저자가 말하는 도시란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면 작동 시스템이 달라지는 장소다. 그런데 ”커피는 오감 그 자체.“(91 페이지)란 말은 무슨 뜻일까?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건축 이야기만 하면 재미가 덜할 것이다. 그래서 해당 도시의 유명 아이템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자는 스콜과 태풍과 오토바이 소리와 매연 등 다양한 현상학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 호찌민 시를 어떤 감각보다 초콜릿 커피 향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회랑은 어느 시대에나 사랑받는 건축 어휘였다. 조선 시대 왕궁도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저자는 건축은 패션이라 말한다.(95 페이지) ”빛의 교회, 물의 절, 명화의 성당 등 일본 현상학적 건축설계를 대표하는 안도 다다오”(98 페이지)란 말을 통해서도 현상학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스위스의 피터 줌터가 설계한 쾰른의 콜룸바 박물관은 오래된 폐허 위에 설계되었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서울 도심부인 종로를 재개발하면서 발굴된 유적의 경우 대부분 박물관으로 옮기고 흔적만 남기거나 유리를 이용하여 시각적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 반면 콜룸바 박물관은 폐허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자연과 교류하게 하면서 역사의 지층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102 페이지)

 

저자는 전기와 건축을 인류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한다. 낮의 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밤의 빛으로 살아난다.(103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에딘버러의 밤은 새로운 활동으로 활발해지는 곳이다. 이를 읽으며 여름 밤 정동(貞洞)이나 혜화(惠化) 답사 시간을 떠올린다.

 

빛은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다는 최고의 매체다. 제주의 바다에서는 빛보다 물이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 불, 공기, 대지를 떠올린다. 뒤집힌 자연의 반전을 경험하고 하늘을 내려다보는 신(神)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키타에 있는 미술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읽으며 나는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는 카뮈의 문장을 생각한다.

 

저자는 벚꽃이 피는 봄에 오면 모네의 그림인 ’왼쪽을 바라보는 파라솔을 든 여인’처럼 흩날리는 벚꽃과 바람 사이에 담긴 멋진 박물관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112, 113 페이지) 상당히 시적인 문장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돔 이노(dom ? ino)라는 개념을 보자. 기존의 내력벽으로 하중을 해결하던 것을 기둥으로 대체하여 벽체를 자유롭게 하여 다양한 평면구성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저자는 ”나는 도시의 모나드이고 나의 활동은 매 순간 새로운 사건으로 도시에 새겨진다. 매 순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모나드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개념이다. 저자는 서울 도심부를 서울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 장소로 그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자연스럽게 섞인 곳으로 정의한다.(134 페이지)

 

저자는 현대 건축의 중심으로 구조주의를 든다. 저자에 의하면 한강은 강남과 강북의 명확한 경계가 된다.(153 페이지) 한강진역과 이태원역 사이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뮤직 라이브러리를 볼 수 있다. 저자는 보이드(void) 공간을 언급하며 소통을 설명한다. 이태원과 한강을 나누어 한쪽만 사용하던 기존 공간에 도넛처럼 구멍을 뚫어서 양쪽 공간이 하나로 엮이는 새로운 위상학적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154 페이지)

 

저자는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강추한다. 압도적인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저자는 건축 어법 또는 어휘라는 말을 사용한다. 건축에서도 예측 가능한 어휘는 실망감을 준다. 프로젝트마다 새로울 수는 없지만 동선에 따른 설계는 지속적으로 새 공간과 의외성을 만들어야 한다.(161 페이지)

 

저자는 자연을 개발하기보다 적절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필요하면서도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건축의 필요성을 논한다.(163 페이지) 컴퓨터를 이용한 변수조정으로 다양한 형태를 디자인하는 파라메트릭(parametric) 디자인이 대세인 듯 하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건축은 형태보다 관계에 중점을 둔다.

 

"건축에는 관계를 통한 구조주의적 디자인과 시각적인 현상학적 디자인이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168 페이지)라 말하는 저자는 학교, 감옥, 병원같이 공간의 자율적 관리가 필요한 프로그램에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이 활용됨을 언급한다. 이 기법은 시각적 권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시적 권력에까지 활용되고 있다.

 

저자의 책을 통해 프랭크 게리가 파라메트릭 건축물을 설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칸 센터 파리란 건축물이다.(게리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다.) 바이오미미크리는 재닌 베뉴스가 처음 도입했다. 그는 자연에 대해 배우기보다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건축가다. 새 날개처럼 보이는 밀워키 미술관, 새 둥지처럼 철골이 서로 엮여 공간과 구조를 만드는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 등이 관심을 부른다.

 

저자의 책을 통해 단위 유닛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리좀(rhizome)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카쇼 쿠로카와가 유리 루버를 이용해 만든 국립신미술관이 투명하다 못해 푸른 청자를 만들어낸 듯 하다고 설명하며 그가 청자를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저자 자신의 눈에 청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올림픽공원의 엄지손가락 형태의 조각품을 보고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렇게 세련되고 현대적인 공간에 누구나 들어오도록 하는(무임승차하게 하는) 의미로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저자는 한 가지를 위해 명확하게 재단해 종이 오리기가 근대건축에 비유된다면 가위 없이 종이를 접어 형태를 만드는 것(오리가미;おりがみ)은 현대건축에 비유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루버를 일본 특유의 엿보기(노조꾸; のぞく) 문화와 연결짓기도 한다. 루버(louver)는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광선은 투과시키기 위해 설치하는 판자를 말한다.

 

저자는 지난 역사의 장식을 배제하는 것만이 현대 건축의 길이 아니라 말한다.(217 페이지) 현대 건축가들은 장식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장식과 동시에 구조와 공간이 되는 디자인을 만들어낸다.(218 페이지) 알함브라는 붉은 사암으로 인해 붙은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아랍어다. 아랍에 의해 침략받은 스페인의 무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이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예로 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설명한다. 저자는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도시는 그날의 자신을 보여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스케일편(다섯 번째 챕터)에서 베네치아를 미로 같은 리좀 도시로 정의한다.

 

개발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비용 문제로 개발이 늦어지는 탓에 오히려 전통이 남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일수록 현대 건축물이 많은 것도 그렇다. 저자는 군나르 아스풀룬드가 설계한 스톡홀름 공공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로에서 입구로 연결되는 길의 낮은 계단과 벽에 건축가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도서관이다. 건물 어디에도, 심지어 공공 건물 홈페이지에도 건축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이 없고 개관식에 건축가를 초대하기는커녕 언급조차 안 하는 나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한다.(269, 270 페이지)

 

저자는 사람들이 바이칼 호수를 기억하지 그 호수가 자리한 이르쿠츠크라는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제 인류는 자연 속의 도시, 도시 속의 자연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라 말한다.(285 페이지)

 

책을 다 읽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건축 전공자의 책이지만 건축 이야기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건축 이야기도 결국 삶 이야기이리라. 현상학이란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제시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건축 구조 역학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