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리는 말투 호감 가는 말투 - 어떤 상황에서든 원하는 것을 얻는 말하기 법칙
리우난 지음, 박나영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끌리는 말투 호감 가는 말투’의 기본 메시지는 말하기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기술이라 설명한 것과 차원이 같다. 말로써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책은 교제편, 대화편, 감정편, 설득편, 강연편, 토론편, 협상편, 면접편으로 구성되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망라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원하는 것을 얻는 말하기 법칙’이란 부제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첫 지침이 상대를 배려하는 거절 기술에 대한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신데 이번에는 꼭 도와주세요.”란 말에 “물론 도와드리고 싶죠. 제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지만 과거의 경험이 오히려 속박이 될 수 있을 거 같네요. 필요하시다면 이 일에 더 적절한 사람을 추천해드릴 게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적절한 사람을 내가 상의 없이 추천할 수 있을지?


여지를 남겼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거절한다는 지침도 좋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거절이 필요하듯 지적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적은 무딜수록 좋고 간결해야 하고 문제 해결에 목적을 둔 것이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좋은 말의 출발점은 성실이라고. 칭찬을 여러 번 하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유머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외모를 유머 소재로 삼지 말아야 한다. 눈에 띄는 말은 자조(自嘲)는 매력적인 자기 조롱이라는 말이다. 사과(謝過)는 대인관계의 보완 조치다.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제때 해야 하는 것이 사과다. 성의가 있어야 한다. 군더더기 없는 사과의 기술이 필요하다. 인상적인 지침은 어색할수록 느긋하게 대처하라는 말이다.


실수로 상대를 힘들게 했다면 숨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저자는 연습하면 인사 실력도 는다고 말한다. 목소리 관리도 필요하다. 어조, 발음, 음량, 속도 등이 두루 중요하고 듣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물론 말의 양도 잘 관리해야 한다. 대화 할 때 상대의 눈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화는 주고 받아야 한다.


질문에는 대단한 효능이 들어 있다. “몸이 얼마나 아팠어요?“보다 ”몸이 잘 회복되고 있죠?“라고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자는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지만 후자는 완치의 희망을 보도록 하는 질문이다. 상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자. 경청해야 한다. 말을 재치 있게 하는 사람보다 경청하는 사람이 신뢰와 호감을 얻는다.


먼저 판단하기보다 잘 듣고 난 뒤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길 말은 기억력은 말재주가 우수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라는 말이다. 충분한 지식이 축적되어야 다양한 표현과 내용이 말로 나온다.(97 페이지) 상대의 감정을 읽을 필요가 있다. 다툴 때는 분수를 지키고 화해할 때는 방법을 지키자.


오만한 태도로 상대를 비판하지 말고 상처 주는 말을 삼가고 단점을 찌르지 말고 예전 일들을 들춰내지 말고 자세를 낮추고 사과하거나 사과를 받아들이자. 늘 침묵하지는 말자. 유머로 잔소리를 대체하자는 말이 반갑게 다가온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언어 예절을 지키자. 뛰어난 말재주가 백만 명의 군사보다 낫다고 한다. 설득해야지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 논쟁은 피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에 더 확실한 근거와 자료를 챙겨야 한다.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설득하려면 덫을 놓으라고 한다. 두 개의 선택지를 주고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경우가 해당한다. 상대가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면 더 어려운 일을 제시해 거절을 받게 하고 나서 진짜 요구하고 싶었던 문제를 꺼내 상대가 당신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자.


존중하고 배려하자. 상대를 당신 편으로 만들어라. 기억할 말은 강요는 설득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상적인 말은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감정을 나누라는 말이다.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자. 대중 앞에서 말하기는 하나의 공연예술이다. 놀라운 경험적 사실을 진술함으로써 청중의 경이감을 불러일으키자. 시작부터 질문을 제기해 생각을 자극하자.


생동감 있게 이야기하자. 말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몸짓도 연설의 일부다.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자. 마지막까지 열정을 유지하자. 어휘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 수식어를 적절히 활용하자. 여담은 쓸모 없지 않다. 복선(伏線)이 필요하다. 복선은 만일의 경우 뒤에 생길 일에 대처하려고 남 몰래 미리 베푸는 준비, 소설이나 희곡 따위의 작품에서 뒤에 나올 사건에 대하여 미리 넌지시 비쳐 두는 서술을 의미한다.


끝까지 주제를 놓치지 말자. 퀴즈 등으로 청중의 동참을 유도하자. 짧은 시간 안에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집중 받지 못한다.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사항이나 외면 받았던 내용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 같은 기준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주관이 담겨 있는 연설이면 좋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보편적인 생각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해주면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리 보인다는 점만 인식시키면 된다.


연설이 청중의 공감을 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완벽한 연설을 위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건축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려면 정확한 설계 도면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1883년 엥겔스는 런던에서 열린 마르크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3월 14일 2시 30분 당대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사고(思考)가 영원히 멈추었다.“..


연설의 목표를 명확하게 세우자. 목적이 구체적이면 연설의 모든 문장을 유용하고 정연하게 구현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상 깊은 연설이 된다. 마지막 말이 청중의 귓전에 맴돌게 하라. 즉석 연설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자질, 지식 축적, 말하기 수준 등 종합적 능력을 키우자. 적절한 키워드를 선택하자. 논리적인 말은 토론의 비밀 무기다.


토론에서는 상대의 반론을 예측하고 준비하자. 반론에 대응하지 못하면 당신은 방패 없이 창만 들고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된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자. 선제 공격이 답이다. 메시지를 단순화하라. AREA 화법을 구사하자. assertion(주장), reason(이유 제시), evidence or example(증거, 예시), assertion(주장; 앞서 말한 내용 정리. 처음 주장 강조) 등이다.


비유와 유추를 공격에 활용하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중요한 말은 인내하면 이긴다는 말이다. 강약의 리듬을 타자. 스토리가 가진 힘을 믿자. 말로 자신을 보여주어야 취업의 문이 열린다. 간결하고 힘 있는 말하기는 예술과 같다. 말을 반복하지 말라. 이야기에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전문 분야뿐 아니라 시사나 교양의 지식 축적이 필요하다.


제한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질문 내용에 충분한 답을 할 수 없다. 질문에 자기 관점을 드러내지 못하면 배경 지식이 없거나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으로 인식된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단어 선택에 신중하라. 말의 맥락을 분명하고 일리 있게 말하자.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하자.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한다는 말에 주의하자. 간결한 자기 소개를 준비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김선희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에서 말하는 서학은 철학 및 자연과학, 그리고 종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서양 지식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동서양의 지적 조우는 예수회의 중국 진출에 따른 결과다. 예수회는 1534년 스페인 출신의 퇴역 군인 이냐시오(1491 - 1556. 스페인)가 파리대학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결성한 가톨릭 수도회를 말한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들과 다른 점을 보였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고 이교도들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교황의 명령에 따라 미지의 동양 세계로 선교를 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마테오 리치(1552 - 1610. 이탈리아), 아담 샬(1591 - 1666..독일) 등의 친숙한 인물이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번역본으로 서학을 접했다.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중국어를 배운 뒤 중국 경전을 활용해 서양 지식을 번역한 예수회 회원들의 서학서를 통해 서구 지식을 접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실학자들이 반드시 개혁적이거나 반성리학적 혹은 탈주자학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조선 유학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했다고 알려진 정약용은 성리학의 토대인 이기론의 이론적 함의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지 주희의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고 성리학의 핵심 주제들과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20 페이지) 


다산(茶山) 실학을 성리학과의 단절과 대치로 파악하는 시각을 부정한 한형조 교수(1996년 8월 8일 시사저널 수록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펴낸 한형조 교수’)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종교와 철학, 자연학과 수학, 심지어 음악과 미술 등의 다양한 영역이 뒤섞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학술 세계, 서학 앞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학(儒學)으로 서학의 세부들을 평가해 수용하든 배척했다.(22 페이지) 당시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수용한 사례도 있지만 그조차도 유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하기 어렵다.(25 페이지) 


15세기 말 인도 항로가 개척되면서 열린 대항해 시대에 따라 포르투갈의 주앙 3세는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의 거점이었던 인도 남부에 동행할 선교사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마테오 리치는 만학도였던 이냐시오가 세운 예수회 대학 출신의 인재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전통의 유학과 신유학을 스콜라 철학, 스토아 철학 등으로 설명했고 기하학, 수학, 천문학 등을 소개했고 지도, 악기, 자명종 등 발달한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아담 샬은 중국에서 뛰어난 천문학자로 활약했다. 아담 샬을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 신학, 철학, 자연학을 일방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한 학습과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 학문을 중국 지식 체계와 결합하고 절충했다.(39 페이지) 하지만 다른 수도회에서 예수회의 이런 방식을 비판하자 교황청은 예수회의 전교(傳敎) 방식을 공식 금지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도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했고 교황청은 제사를 금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황청의 제사 금지 정책을 따르다가 당국에 적발되어 참형을 당했다.(40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의 저자로 유명한 분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전임자인 루지에리가 쓴 천주실록의 한계와 문제 때문이었다.(43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Deus라는 기독교 신을 중국어 천주로 번역한 뒤 이를 중국 경전에 등장하는 지고존재인 상제(上帝)라 규정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상제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면 기독교의 신을 유일한 신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6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성리학이 고대 유학의 유신론적 전통을 끊고 사람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공격했다. 마테오 리치가 꺼내든 상제라는 개념은 예수회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신이 사제라는 개념으로 고착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제는 결국 천주로 대체되었다. 


아담 샬은 시헌력의 토대가 된 서양 역법서 ‘숭정역서’를 편찬했고 천문 관측과 역법 제정을 주관하는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활약했다.(38 페이지) 역법(曆法; Calendar)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을 말한다. 중국에서 서양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학적 지식들이 가장 활발하게 번역되던 시기는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재위; 1661 - 1722)가 청을 통치하던 17세기였다.(65 페이지) 


참고로 조선 영조와 정조, 청나라 강희제(순치제의 셋째 아들)와 옹정제(강희제의 넷째 아들)와 건륭제(옹정제의 넷째 아들), 프랑스 루이 14세 등을 하나의 틀로 보는 시각도 있음에 유의하자. 조선에서는 18세기인 영조, 정조 때 성공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18세기 말부터 개혁에 실패하고, 19세기에는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청나라의 훌륭한 황제들이었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재위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건륭제 말기부터 사회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18세기 말인 1796년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고 19세기부터 청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도 18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18세기 말부터 혼란에 빠졌다.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가 활동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루이 15세가 루이 14세의 치적을 물려받으며 유럽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루이 16세가 통치한 18세기 말에는 혼란이 발생하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이후 유럽에서는 끊임없이 혁명이 일어났다. 


지구 온도가 주요 변수다. 지구 온도는 16세기 말부터 크게 상승하기 시작해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고 18세기 말에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수확량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기온이 올라 따뜻해지면 수확량이 늘고 추워지면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량은 떨어진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는 세계사’ 참고) 


강희제의 서학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서학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강렬한 반대였다.(65 페이지) 양광선이란 사람이 아담 샬의 시헌력을 가장 집요하게 반대했다. 서양 역법과 선교사들을 신뢰했던 순치제가 사망하고 일곱 살의 강희제가 즉위해 만주족 출신 신하들의 섭정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오배(鰲拜)가 양광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아담 샬, 페르비스트(1623 - 1688. 벨기에) 등 흠천감을 주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투옥되어 고문 받았고 중국인 조력자들은 사형당했다.(70이 넘은 아담 샬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 해 사망했다.) 


강희제가 오배의 섭정에서 벗어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희제는 페르비스트와 양광선에게 각각 책력을 만들어 대결하게 했다. 양광선이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반면 페르비스트의 예측은 정확했다. 양광선은 투옥되었고 페르비스트는 흠천감의 책임자가 되었다.(66 페이지) 예수회와 조선의 첫 만남은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인 정두원(鄭斗源)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담 샬이 조선 국왕에게 천리경, 자명종, 화포, 화약 등의 서양 문물과 천문 관련 서학서, 지도 등을 선물한 것이다. 


소현세자(1612 - 1645)도 아담 샬을 만났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였다. 소현세자는 9년의 볼모 생활을 했고 귀국 2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칠극(七克)이란 책이 있다. 마테오 리치와 함께 활약했던 디에고 데 판토하가 쓴 윤리서이다.(칠극이란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 등 기독교에서 모든 죄의 뿌리로 여기는 일곱 가지 죄를 말한다.) 이익, 이벽, 정약용 ,윤지충 등이 이 책을 읽었다. 이익은 이 책의 핵심을 유교의 수양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서학을 이념이나 사변적 원리로서가 아닌 실질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다만 이익은 천주교를 황당무계한 종교로 보았다.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등을 저술한 김담(金淡; 1416 - 1464)이 주도한 세종시대의 조선 과학(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사대부 출신 신하들의 권력이 국왕을 능가하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되면서 붕당정치 속에서 권력 투쟁이 심화됨으로써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계승하지 못했다. 


다행히 영, 정조 시대에 부흥의 노력이 기울어졌다. 서학중원설(西學中原說)이란 것이 있다. 서학의 기원이 본래 중국에 있었다는 설이다. 조선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서명응, 홍양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조의 스승 서명응(서유구의 할아버지)은 자신의 지적 자산을 모두 동원해 서양 천문학적 지식들이 중국 전통의 천문 역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92 페이지) 조선 지식인들은 비교적 거부감 없이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였다. 서양인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 없이 책이라는 중립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학술을 수용했기 때문이다.(94 페이지) 


남인 계열의 학술적 경향 안에서 성호 이익은 평생 퇴계를 학문과 삶의 지향으로 삼아 존숭(尊崇)했다. 부친의 유배지에서 태어나 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 이잠(李潛)이 장살(杖殺) 당하는 비극을 겪은 남인(南人) 이익은 평생 이황을 존숭(尊崇)했지만 이황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서학을 연구했다. 이익은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서 귀신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점이 문제일뿐 서양 선비들의 학문 전체를 폐기할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익은 천주, 천당지옥설 등 현실 세계를 초과하는 종교적 측면들을 제외한다면 서학을 학술적 차원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103 페이지) 이익에게 기술 진보와 활용이 중요했을 뿐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단(異端)의 글이라도 옳으면 취할 뿐이라 말했다. 그는 유학과는 다르지만 마테오 리치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 


성호는 조선에서 도통의 중심인 퇴계를 평생 흠모하며 퇴계의 철학과 삶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퇴계를 떠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부의 지적 자원을 활용해 유학을 넓히고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106 페이지) 이익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뇌주설(腦主說) 즉 뇌가 기억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학설을 받아들였다. 이익은 인간의 마음 즉 인식과 감정 같은 정신적 작용을 리(理)나 성(性)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성리학과 다른 경로를 밟았다.(108, 109 페이지) 


이익은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세 가지 영혼(식물의 혼인 ’생혼; 生魂’, 동물의 혼인 ‘각혼; 覺魂‘, 인간의 혼인 ’영혼; 靈魂’)을 생장, 지각, 의리의 마음으로 규정했다. 식물은 생혼만 있고 동물은 생혼과 각혼이 있고 인간은 생혼, 각혼, 영혼이 있다. 이익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자신의 실용적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선택과 운용의 능력을 자신했다.(123 페이지) 이익은 세상을 구제하려 한다는 예수회 회원들의 의도와 진심을 믿었다. 


이익의 서학 연구는 학파를 셋으로 분기시켰다. 친서파로 분류되는 녹암 권철신과 이가환, 이벽, 정약용, 이승훈 계열, 중도 우파 성향을 보이는 정산 이병휴 계열, 적통으로 인정받는 안정복, 신후담 계열이다. 정조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을 보고 받았으나 중인인 김범우만 귀양보냈다. 정조는 유학이 바로 서면 사교(邪敎)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유생들 사이에서는 척사(斥邪)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안정복 등은 남인 전체를 향한 외부의 공격과 의심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중심으로 회귀하려고 한 것이리라. 이벽, 정약용 등은 자연학이나 수학, 기술의 측면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철학적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학 - 천주학을 신앙으로 수용하거나 철학적 관심으로 연구했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그의 삶에서 정조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그에게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난 문을 열어 준 이벽이다. 서학서를 통해 독자적으로 서학을 연구했던 이벽은 1783년 이승훈이 서장관으로 파견된 아버지 이동욱울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다.(154 페이지) 


이승훈은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 최초였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벽은 주변 남인들에게 서교에 관한 자신의 공부와 체험을 전하며 주도적으로 서학서에 대한 토론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156, 157 페이지) 이벽은 남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권철신에게 적극적으로 입교를 권했다. 이 과정에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이 먼저 이벽을 따라 천주교로 향했다. 


정약용은 23세였던 1784년 여름 정조가 초계문신에게 내준 중용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벽을 찾았다. 이벽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천주실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중용을 새롭게 해석할 학술적 자원으로 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벽은 태극이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벽은 태극은 감괘와 리괘 즉 음과 양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벽의 주장은 마테오 리치의 주장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테오 리치에게 태극은 기독교의 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반드시 반박해야 하는 개념이었다.(159 페이지) 


이벽의 논리는 정약용에게 이어진다. 마테오 리치는 리(理)에 인격성이 없음을 집중 공격했다. 정약용은 기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리는 기에 의지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에는 인격성이 없기에 만물을 주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를 부정하고 배제한 자리에 고대 유학에 등장하는 상제라는 개념을 내세웠다.(162 페이지) 정약용은 인격성이 있는 상제는 리와 달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점은 상제가 고대 유학의 개념이란 점이다. 물론 정약용이 내세운 상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는 존재이지 인간에게 경배와 신앙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정약용은 인간에 대한 기존 논의로는 사회의 타락과 혼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65 페이지) 정약용은 성(性;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이 리(理)가 아니라(성즉리의 부정) 기호(嗜好)로 보았다. 정약용은 성을 리로, 심을 기로 규정하는 이론을 부정했다. 


정약용은 기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눈앞의 쾌락을 따르는 것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리를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일종의 도덕적 방기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인간의 대체는 성이 아니라 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한다. 정약용은 인간에게 선을 향하는 도덕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그 실천에 실패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 즉 세(勢)가 인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보고 그를 위해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을 제안했다. 


정약용은 인간이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도심과 인심의 싸움에서 도심이 이기기 때문으로 여기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이벽과 정약용의 관심은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그래서 신의 인격과 신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는 서학과 갈라질 수밖에 없다.(179 페이지) 몇몇 유학자들이 천문학을 연구하고 역법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학이나 기술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 성리학의 이론 체계 위에서 더욱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개별 지식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185 페이지) 


이익을 비롯한 17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책으로 서양 학문을 접했다면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연행(燕行)을 통해 서양인을 직접 대면했다. 18세기 선비들이 주장한 북학에 서학도 포함되었다. 홍대용은 천원지방설을 비판했다. 만물에 둥근 것은 있으나 모난 것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등에게 중요한 것은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들이었지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가 아니었다.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천주당(天主堂) 방문이었다.(203 페이지)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천주당은 조선인들이 경험한 문화적 충돌과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이다. 마테오 리치가 지은 남당은 북경 내 천주관 중 중심 역할을 했고 예수회가 자리잡던 곳이자 홍대용이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학 - 천주학에 대한 갈등과 의심이 증폭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충격을 입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그의 일가들이었다.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정약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고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보호하고 천주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선을 공격하라는 내용의 밀서를 중국 천주교회측에 보내다가 적발되어 조선을 큰 충격에 빠지게 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였다. 천주교를 접하고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워 참수당한 진산(지금의 충청도 지역인 전라도 진산) 사건의 주인공 윤지충은 외가쪽 6촌이었다.(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사촌이었다.) 진산 사건으로 남인에 대한 노론의 견제가 공식화되었다. 


정조가 승하하자 정국이 요동쳤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이익 문하의 남인 소장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승훈, 정약종 등은 참수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당했고 정약용은 지금의 포항 지역인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남 강진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정약용의 앞길이 막힌 것은 서학 자체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견제 때문이다. 조선에 유학에 위협이 될 실질적 이단은 없었다. 당연히 서학은 전래 초기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히지 않았다. 


정학(正學)이 밝으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그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정조에게 서학 - 천주학에 접촉한 남인들을 징계하는 일이나 소품체의 패관잡기를 막고 순수한 고문을 회복한다는 문체반정이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과 명분의 일이었다.(219 페이지) 더 나아가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정조에게는 남인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서학 - 천주학이 정치적 갈등의 핵이 되기 이전에 정조는 노론으로 기울어진 정국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학문적 자질을 정국에 활용하기 위해 남인의 소장학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 같은 인재를 등용해 신임했다. 


정조와 남인 소장학자들의 매개가 된 것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었다.(220 페이지) 양명학이나 불교는 유학의 입장에서 이단이었지만 그런 학문을 한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거나 사형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222 페이지) 채제공은 서학을 불교 서적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며 서학을 한다는 것이 정치적 탄압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했다. 채제공도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소멸할 것이라 보았다. 


당시 백성들이 급격히 천주교로 향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세도 정치 등 조선 내정의 실패와 사회적 불안에 있었지만 상층부는 이런 자신들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사특한 행위에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렸다.(229 페이지) ‘양아치새끼들’이란 시를 쓴 윤기(1741 - 1826)는 천주가 상제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인격적 존재로 추앙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다.(235 페이지) 


앞에서 17세기 지식인들과 18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18세기와 19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도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리라. 19세기 지식인들은 서학이 아니라 서양을 대면해야 했다.(243 페이지) 그들이 경험한 것은 중국과 조선을 옥죄며 다가오는 강력한 타자, 전쟁에서 중국을 압도한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 조선 앞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목전의 힘으로서의 서양이었다.(250 페이지) 


저자는 조선 지식인들 중 일부가 서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들의 사상적 지향을 쉽게 근대성이라는 틀에 넣고 평가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라 말한다.(275 페이지) 정약용의 경우 상당히 근대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구상하고 기획한 세계는 현재의 관점에서 매우 중세적인 왕도 국가 그 자체였다. 이들은 모호하거나 미완성인 자기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낯선 사유에 자극을 받았고 이를 자기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278 페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파엘 2021-03-26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21-03-26 11:54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읽어보아야겠습니다.
 

가끔 들춰보는 자료 가운데 '사이코의 섬'이란 책이 있다. 독일 통일 이전인 1943년 동독에서 태어난 신경정신과 의사 한스 요하임 마즈의 책이다. 번역 출간된 지 27년이 지났으나 이렇게 아주 가끔이지만 늘 새롭게 들춰보는 것은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본문에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내가 걸어온 직업의 길은 나 자신의 치유 시도"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더욱 현실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베드로와 바울일까? 그들은 갈등 당사자들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헷갈렸었다.

 

가령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식의 문장이 머리를 수놓기도 했었다. 누가 누구에 대해 말했는지는 중요하다. 저자의 의도대로 따라야 하리라. 베드로는 베토벤으로, 바울은 바흐로 치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바흐 사후 태어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도 바흐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베토벤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베토벤은 바흐란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는 말을 했다.(독일어 '바흐; Bach'는 시내라는 말이다.) 음악학자 폴 뒤부세가 바흐란 말은 동유럽 방언으로 떠돌이 음악가라는 말을 했으니 베토벤의 말은 은유에 근거한 개인적 헌사 이상이 될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빛난다.

 

'사이코의 섬'의 저자는 예수를 건강한 사람 그 자체로 보며 그가 솔직했고 개방적이었고 진실했기에 중상(中傷)과 박해(迫害)를 받았다고 썼다. 저자는 세 체제의 공통점도 언급했다. 실재하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낙원을, 실재하는 시장경제는 더욱더 많고 새롭고 나은 상품을 통한 만족을, 실재하는 기독교는 요구에 상응하는 순종을 할 때 더 나은 저 세상 삶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왜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란 말 대신 부드럽고 온건하게 보이는 시장경제란 말을 썼는지 의문이다. 우리에게 마음의 고고학이 필요하다. 이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란 말을 생각하며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라고 말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토의(土宜)란 땅에서 나는 작물을 의미한다. 의(宜)가 마땅하다는 뜻이니 토의란 작물을 키워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땅의 순리란 뜻에서 도출된 단어이겠다. 사실 땅이라기보다 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흙에 대해 얼마나 알까? 화강암이 풍화되면 모래흙이 되고 현무암이 풍화되면 점토질 흙이 된다.(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흙' 31 페이지) 이 정도는 단순한가? 자연을 이야기할 때 하나만을 볼 수는 없다.

 

모쿠다니 구니야스는 지구에는 산과 구릉, 평야와 해저 등 다양한 지형이 있지만 달에는 그런 지형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지구와 달리 달에는 물질을 운반하는 바람과 공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 36 페이지)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강수량이 많을수록 땅위를 흐르는 빗물이 많아지고 따라서 침식이 더 많이 일어나지만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여 흙이 침식되는 걸 막아 준다고 말하며 이런 기본적인 균형은 강수량만으로 흙의 침식 속도가 결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흙' 34 페이지)

 

전자의 두 가지(물과 공기)와 후자의 두 요인(비가 하는 두 가지 일)은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협동 관계고 후자는 길항(拮抗) 관계다. 아니면 상반(相反) 관계든지. '세종실록지리지'는 흥미롭게도 토지의 비옥도를 평하며 비척상반(肥瘠相半)이란 표현을 썼다.

 

비옥함과 척박함이 반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당시는 토양 구조나 점성(粘性), 토양 색 등보다 비옥도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니 흥미롭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생긴 현실적인 기준이었다. 물론 상반이란 표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토양의 점성이나 색에 대해 상반(相半)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 - 땅과 사람의 기록으로 보는 시대상
정치영 지음 / 푸른길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영(丁致榮) 교수의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은 조선시대의 주요 지리지들을 활용해 오늘의 참고점을 모색한 책이다. 오늘날의 지역성이나 지역 구조가 과거의 그것에 기초해 형성되었기에 과거의 지역지리학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지역을 고찰하고 미래의 지역을 예측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12 페이지)

 

조선 시대에 제작된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관찬(官撰) 지리서,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의 사찬(私撰) 지리지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24년 세종이 대제학 변계량에게 지지(地誌) 및 주, 부, 군, 현의 연혁을 편찬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것에서 비롯된 책이다.

 

여지도서는 1757 - 1765년 사이에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 후기 들어 간행된 지 270년이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고치고 그간 달라진 내용을 싣기 위해 1757년(영조 33년) 홍양한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간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인식하는 데에 이원적인 인식 체계를 보였다. 산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하천을 중심으로 한 체계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산경표이고 후자의 대표적 예가 정약용의 대동수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기도의 대천(大川; 주요 하천)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꼽았다.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다.

 

산은 산(山)이나 봉(峰)으로 명칭이 나뉘었지만 하천은 매우 다양했다. 강(江), 천(川), 수(水), 포(浦), 탄(灘), 도(渡), 진(津) 등이다. 또한 산은 하나의 이름을 갖는 데 비해 하천은 지류뿐 아니라 본류의 경우에도 구역이나 장소마다 다른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온난습윤한 기후 조건과 함께 토양의 모재가 되는 암석 중 화성암인 화강암과 화편마암이 전 국토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그래서 토양 종류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토양 종류가 많은 편이다. 점토질 토양은 사질 토양보다 비옥하다. 오늘날은 토양 구조, 점성(粘性), 토양색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조선시대는 토양의 비옥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제주도의 토성을 부조(浮燥)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가벼워서 건조하면 바람에 날리기 쉬운 화산회(火山灰) 토양의 물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척박(瘠薄)한 땅으로 분류된 곳 가운데 삭녕, 연천, 마전 등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절대 고도보다 주변보다 우뚝 솟아 있는 땅을 산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천을 제사 장소로도 여겼다. 이런 신성한 하천을 규모와 무관하게 대천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읍치(邑治)는 수령에 의한 지방 지배 기능과 재지세력에 의한 자치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 행정적 중심지였다. 연천의 읍치는 연천군 읍내리에 있다가 1910년 연천군 차탄리로 옮겨졌다. 연천읍의 읍치는 군자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동쪽으로 차탄천을 바라보며 남동향으로 열린 골짜기 안에 들어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아(官衙)는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명당)에 자리했다. 조선은 국가 지도 이념인 유학(儒學)을 온 백성에게 보급하기 의해 1읍 1교(1邑 1校)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없어졌고 군현이 생기면 향교도 생겼다.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마을을 촌락(村落)이라 하고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마을을 도시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행정, 군사, 경제,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읍치가 도시에 가까웠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촌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을 중요시한 것은 그만큼 산이 많기 때문이다.

 

촌락은 북쪽의 산과 언덕에 기대어 산과 평지가 만나는 완경사면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했다. 이는 장점이 많다. 북쪽의 산이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아준다.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 지하 수면이 낮아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천 범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큰 강변의 평야지대보다 골짜기나 분지가 벼농사에 유리했다.

 

우리나라는 괴촌(塊村)이 많았다. 괴촌이란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을 말한다. 대다수의 촌락은 집단 이주에 의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두 가구로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졌기에 계획적인 가옥 배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지가 한정되었고 더욱 명당은 제한적이기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집촌해야 하는 벼농사 중심의 체계도 한 몫 했다.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족촌(同族村)이 많은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토지에서 나는 소산(所産)을 토의(土宜)라 했다. 토공(土貢)은 공물을 말한다. 지리지마다, 지역마다 산물의 표기가 달랐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지도서에는 미역이 나는 군현으로 55개 지역이 기록되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두 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광물 자원이 다양할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이를 이용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광물을 감정하고 탐사하는 방법이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발달하여 주요 광물인 철, 납, 아연, 금, 은 등의 광상(鑛床) 개발이 촉진되었다. 광상은 유용 광물의 집합체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지리지가 토의(土宜), 광상(鑛床) 등에 관한 항목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백성의 어려움이 컸으리라 보인다. 백토는 고령토라고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토 산지가 한 곳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지도서에는 더 많은 곳이 기록되었다.

 

경상도 진주목, 평안도 구성, 선천, 함경도 길주, 단천, 종성도호부 등이다. 송이버섯의 경우 29곳이 늘었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여지도서에서 크게 준 항목도 있다. 옻나무(354 페이지), 닥나무(378 페이지) 등이다. 조선을 문적(文籍)의 나라라 한다. 그렇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