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다. 서양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도 천주님을 믿고 나는 성리학을 통해 기하학과 수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정약전의 말이 기억 남는 영화다. 정약용이 주인공이었다면 감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준 스승인 ’장창대’의 아내가 나는 흑산이 좋소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남편 장창대는 “흑산이 아니라 자산(玆山)이지, 이(this) 산이지.”라는 말을 한다. 이 부분이 영화의 끝 부분이다. 알다시피 정약전은 흑산이란 말을 두려워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玆)란 글자가 이것(this)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산 즉 우리가 사는 산이지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홍어(洪魚)의 영어 단어가 skate라는 사실도 알았다.(우리 영화이지만 영어 자막을 넣은 것은 해외 팬들을 위해서이겠다.) 어떻든 지금은 영화에 대해 이 정도 말만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 ‘자산어보’를 본 곳은 광화문 씨네큐브였다. 이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미국 영화 ‘매기스 플랜‘(2017년 2월 2일)과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2019년 2월 19일), 프랑스/ 일본 영화 '파비엔느에 관한 진실'(2019년 12월 19일) 등의 영화를 감상한 곳이고,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의 포스터를 본 곳이기도 하다.

 

'인생 후르츠‘는 이선생님의 추천작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란 대사가 인상적인 영화다. 이 대사를 만난 것은 영화가 아닌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천천히 재생‘이란 책에서다. 창신동 도시재생을 주제로 해설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그러면 땅이 비옥해진다는 말은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의 시와 정서가 다르다. 나는 이 말을 지난 2017년 정동(貞洞) 해설에서 활용했다.

 

정동을 현대적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정동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이게 된 것인지 정동이 명당이기 때문에 모이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만 지금과 달랐어도 정동의 아우라는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의 영화로 인해 이런 다채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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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정; 叱正'이 아닌) 질정(質正)을 바란다는 저자의 책을 읽고 있다. 질정(叱正)은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의미고 질정(質正)은 묻고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흔히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의 叱正을 많이 쓰니 약간 기이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質正이 훨씬 뜻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강호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중국의 유명 선사인 마조의 활동무대인 강서(江西)의 강과 석두의 활동무대인 호남(湖南)의 호를 딴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강호라는 말 자체가 강과 호수 즉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강호제현이란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무슨 상징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산을 앞에 두어 산하, 산천, 산수화, 요산요수 등으로 부르지 물을 앞에 두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2019년12월 30일 아주경제 수록 강효백 교수 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 소절부터 일본식 표현' 참고) 어떻든 앞서 말한 저자의 책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눈에 띈다.

 

꾸짖음이든 물음과 비판이든 받을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 또는 사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질정 앞에 겸허해야 한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궁예의 성씨가 궁씨냐 김씨냐 같은 사소한 문제를 두고 따질 것이 아니라 궁예의 실패한 불교개혁의 의미처럼 무게감 있는 것들을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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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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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작이다. 성균관 박사까지 지낸 유학자 출신의 사학자인 단재는 구한말 궁녀 출신의 박자혜와 결혼한 분이다. 단재가 논한 우리 상고사는 어떤 시기보다 많이 왜곡되는 등 논란이 큰 분야다. 책은 1편 총론에서부터 2편 수두 시대, 3편 삼조선의 분립 시대, 4편 열국 쟁웅(爭雄)시대, 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 6편 고구려, 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 제국의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삼국 혈전의 시작, 9편 고구려의 대 수(隨) 전쟁, 10편 고구려의 대(對) 당 전쟁,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타깝지만 선생의 조선상고사 저술은 미완으로 끝났다. 57세에 여순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책은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생에 의하면 주관적 위치에 선 자가 아(我)이고 그 외의 모든 존재는 비아(非我)다. 선생은 아든 비아든 역사적 아가 되기 위해 두 가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속성(相續性)과 보편성(普遍性)이다. 전자는 시간적으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外寇)의 병화(兵火) 때문이 아니라 조선사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이 없어지고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사대주의적이었음을 증거한다. 선생의 읽기는 해체적 읽기의 전형이다. 선생은 김부식을 유학자로, 일연을 불교도로 언급하며 논의를 이어나갔다. 즉 김부식과 일연이라는 두 다른 세력이 화랑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삭감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화랑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유교와 불교는 외래의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물론 두 외래의 사상이 긍정적인 영향도 끼쳤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문제적임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우리의 역사가 전해진 것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중국의 사료에 적힌 내용을 자신의 책에 담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등의 정사를 사대주의적 저술로 평했다. 선생이 보인 것은 선행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일관성이다. 한편 중국에는 춘추필법이라는 역사 서술 방법이 있다. 위국휘치(爲國諱恥), 위존자휘(爲尊者諱), 위현자휘(爲賢者諱) 등이다. 위국휘치는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은 숨기는 것이다. 위존자휘는 존귀한 자의 잘못이나 수치는 감추는 것이다. 위현자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위해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렇기에 역사는 언제나 비판적으로 읽고 맥락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추론해 읽어야 한다. 기록된 부분은 여러 사료를 고루 읽어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부분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면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록되지 않은 부문은 유물이나 시대 정황 등을 미루어 읽어야 한다. 선생은 백제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 합리적 의심을 했다. 백제는 백전(百戰)의 나라이자 미수 허목이 ‘호전지국 막여벡제(好戰之國 莫如百濟’)라 평한 대국이다. 선생은 이런 나라가 작은 나라 신라를 향해 늘 화의(和議)를 구걸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읽었다. 김춘추마저 신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약하기에 오직 외원(外援)을 빌려 백제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선생이 행한 비판적 읽기의 두 가지 사례를 보자. 1) 선생은 김유신의 명성은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들은 과장한 결과 생긴 것이라 보았다. 이 부분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고구려가 중국을 비롯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힘을 소진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아니었다면 신라는 통일을 이루기 전에 소멸했을 것이다. 2) 선생은 연개소문이 중국에 정벌차 들어간 기록이 없자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곡 창고(노적가리)라고 속이고 고구려인들이 쳐들어오면 복병으로 유격했다고 한 황량대를 연개소문이 북경까지 추격했음을 알리는 유적으로 읽었다.

 

우리가 나라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한(韓)이 왕(王)을 뜻한다는 사실, 삼조선은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이란 사실 등은 새롭다. 선생의 책은 복잡한 사건들을 하나 하나 가려내 읽은 노고의 산물이다. 고구려의 원래 이름이 가우리였다고 한다. 이는 전장에 선 선두 깃발을 의미하는 말이다. 신크마리는 스승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선생의 책은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편으로 종결되었지만 총론에서 조선 이야기를 꽤 했다.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조선의 경우 세종과 세조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했다.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이 내세운 사대가 굳어지는 가운데 세종은 몽골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각종 실기에 근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골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게 아첨하던 문자와 위조한 고사(故事)에 근거해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쳤고 전대의 실록은 세상에 전포(傳布)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秘藏)했다. 물론 이 기록은 임진전쟁 중 불탔다.

 

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 강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이는 태조의 존명건국(存明建國)의 국시와 충돌했다. 이 일로 인해 여러 신하들이 끊임없이 간쟁한 데 이어 명의 압박과 경계가 심해지자 세조는 생각을 바꾸었다.

 

선생은 우리 역사는 대개 정치사들이고 문화사는 별로 없으며, 정치사 중에서는 동국통감과 동사강목 외에 고금을 두루 관통한 저작이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망만을 전했으며 공자의 춘추를 역사의 절대적 준칙(準則)으로 알고 그 의레를 흉내 내어 군왕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는 존군억신(存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중국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장하다가 끝에 가서는 자기 나라까지 배격하는 편벽됨에 이르렀고 역사를 자기 국민들이 비추어 볼 거울로서 제공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아첨하고 잘 보이려는 데 치중해 자기 나라의 강토(疆土)를 조금씩 잘라 양보함으로써 결국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했다고 비판했다.

 

국민들이 비추어 볼 거울이란 문장에 나오는 거울이란 말은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이란 김선희 교수의 책 제목을 생각하게 한다. 어떻든 단재가 든 아쉬움은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이다.

 

지난 2월 중국 대사관도 포함된 명동 해설 시간을 가졌다. 중국대사관이 있는 자리는 1882년 갑신정변 이래 청나라 군사가 사용하던 곳이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정변이 좌절된 개화파의 수장 김옥균이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 방대한 자치통감이다. 단재는 아홉 살에 그 책을 배웠다니 대단하다. 물론 선생에 의하면 자치통감은 당 태종이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부터 악성 종기를 앓은 끝에 죽었다고 썼다.

 

선생은 5, 6 종의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출입하거나 무의식중에서 얻거나 고심 끝에 찾아내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눈을 상하고 도망쳐 돌아가서 30개월을 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수십 자의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선생은 ”원효와 퇴계가 만일 희랍의 강단에서 태어났다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란 말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태어났다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했다. 베르그송 철학을 읽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그런가 하면 오이켄은 나도 생소하게 느끼는 철학자다.)

 

선생은 개인은 사회라는 풀무에서 만들어질 뿐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개인이든 사회든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自性)이 성립한다는 말도 했다. 선생은 역사 읽기의 한 모범 사례를 제공했다.

 

가령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논할 것이 아니라 신라 이래 존숭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우리나라)에 새로운 불교를 성립시키려 한 것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만일 왕건이 아니었다면 궁예의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후 이를 계획하였던 궁예와 그에 적대한 왕건의 사(邪)와 정(正)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누구의 핵심 사관을 논하기보다 이름 등에 너무 크게 관심을 두었으니 그간 지엽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 대해 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재독할 날을 기다린다. 더 나아진 문제의식과 내공으로 더 깊이 이해하는 읽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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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문학 강의 : 서울의 재발견 - 시민이 행복해지려면 도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승효상 외 지음 / 페이퍼스토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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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발견’은 건축전문가, 지구과학이나 지리 전공자들, 그 밖의 인문학자들의 옴니버스 형태의 책이다. 총 아홉 장의 글과 한 편의 대담이 실려 있다. 승효상은 ‘지문의 도시, 서울‘에서 우르(Ur)를 예로 들었다. 도시의, 도회지의 등을 뜻하는 urban이 우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승효상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우르는 다스리는 사람, 시민, 생산하는 곳, 통치하는 곳 등을 갖춘 도시다. 흥미로운 점은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비판하려고 책을 썼는데 모순되게도 르네상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수많은 도시계획도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우리가 투시도법에 익숙해진 이후 얼마만큼 세상을 왜곡해 보게 되었는지를 비판하는 글로 시작하는 책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어느 페이지부터 시작해도 전체의 줄거리를 다 알 수 있어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도시는 구석을 파악하는 것으로 도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시이고 그 도시가 민주주의 도시라고 승효상은 말한다. 승효상은 달동네란 도시계획가나 건축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 세운 동네라 말한다. 달동네는 재개발의 손쉬운 대상이다. 건축(建築)은 일본식 한자로 지금은 중국에서도 이 말을 쓴다.

 

우리는 조선 시대까지 영조(營造)라는 말을 썼다. 승효상은 city는 소프트웨어, urban은 하드웨어라 말한다. 리(理)가 옥석의 결, 무늬를 의미하는데 터와 무늬의 결합어인 터무니는 원래의 땅 무늬 위에 우리가 사는 인문적 무늬를 덧댄 것이다. 승효상은 터무니를 지문(地文)이라 바꾸어 부른다.(’지문의 도시, 서울‘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어떻든 승효상은 산이 있으면 깎고 밀어서 터무니를 없애고 지은 아파트는 터무니 없는 집이라 말한다.(’리; 理’는 자연의 무늬, ‘문; 文’은 인위적 무늬다.) 우리에게 배산임수 자체가 랜드마크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는 이미지보다 서사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도시 안에 녹아 있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미학보다 윤리라는 말을 했다. 오영욱은 도시의 주요 키워드로 흔적을 들었다.

 

물론 오영욱은 도시는 기억과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했다. 오영욱에 의하면 도시의 흔적은 상처와 추억이 공존하는 도시의 자취다. 조한 건축가는 처마의 선은 구축 방식에 따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형태라 말한다. 조한 건축가는 감동의 원인은 바로 시간이라 말한다.

 

조한 건축가는 기억은 실존의 문제라 말한다. 지구과학교육과 출신의 작가 권기봉은 수선(修善)이란 모범, 으뜸 등의 의미로 한 나라의 선(善)은 수도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라 말한다. 양주동은 서울은 새벌에서 나온 말이라 설명했다. 새는 솟아 있다, 높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벌은 울타리를 의미한다. 서울은 높은 울타리 즉 성곽을 가진 도시라는 의미가 된다.

 

동양학자 조용헌은 서울은 산이 있는 도시라 말한다. 조용헌은 바위는 유독 두뇌를 혹사시키는 작업에 참 좋다고 말한다. 서울은 대도시인데도 북한산 같은 바위산이 있고 한강이 있다. 조용헌은 중국 남경은 진시황 때도 계속해서 왕이 날 것이라고 운위되던 곳이어서 진시황이 남경 사람을 등용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고려 태조가 모방한 것이라 말한다.

 

고려 태조는 금강을 반궁수(反弓水; 강 흐름이 활처럼 휘어져 땅이 움푹 들어온 곳)의 강 즉 화살로 개경을 겨누는 반역을 꾀할 곳으로 낙인찍어 그 지역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성계도 전주 사람이니 강남 사람이란 점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용비어천가’에서 아무리 강남을 견제해도 인물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 이야기를 한다. 골목이란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자동차가 생기고난 후 더 이상 골목을 만들지 않기에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로버트 파우저는 골목에는 추억과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기억은 객관적 메모리이고 추억은 애착이나 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161 페이지)

 

로버트 파우저는 골목에는 낭만과 신비주의, 이국성이 있다고 말한다. 19세기끼지 골목은 도시 흐름의 중심이었다. 골목은 어떤 면에서 개발되지 않은 곳, 자동차가 없는 곳, 옛 생활방식을 상징한다. 창신동은 오래된 서민 동네로 20세기의 모든 주택의 형태가 모여 있다. 아파트, 연립, 양옥, 한옥, 큰 집, 작은 집, 일본식 집...창신동은 주민 스스로 뉴타운을 포기한 첫 사례지다.(서촌은 서울시가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창신동 사람들이 스스로 재개발을 포기했기에 앞으로 낙후된 동네를 어떻게 서울시와 소통해 극복할 것인가가 큰 관심사다. 로버트 파우저는 서울은 파리나 빈과 다르게 골목으로 인해 계획되지 않은 랜덤성으로 빛난다고 말한다.

 

역사지리학자 이현군은 장소는 시간이 녹아 있는 시간의 지층이라 말한다. 한양이 의례, 관념 등이 중시된 도시였다면 서울은 자본주의의 도시다. 한양이 의례의 도시라는 말은 숙정문,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이 형식적으로 만든 문이라는 말과 통한다. 가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냈다. 양의 기운을 차단하고 음의 기운을 크게 하기 위한 조치다.

 

비는 용이 내려준다고 믿은 조선 사람들은 용 대신 도롱뇽을 경회루에 묻었다. 광진(廣津)은 건너면 광주(廣州)여서 붙은 이름이다. 삼전도, 송파나루는 비가 많이 오면 새 물길이 생긴다고 하여 신천(新川)이라 불렀다. 언어학 박사 유재원은 서울 언어의 변천사를 다루었다.

 

고미숙은 10년마다 대운(大運)이 바뀐다고 말한다. 1년마다 바뀌고 오늘 하루도 바뀐다고 말한다. 기획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서울의 재발견’은 흥미로운 구성의 책이다. 여러 전문가가 본 서울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 책이다. 글쓰기에 단서를 주는 책이다. 고 박원순 시장과 고미숙의 대담을 보며 한 시대가 그렇게 갔구나, 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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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패러디해 내 이야기로 쓴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재인폭포, 베개용암, 백의리층 등 연천의 지질공원들, 도서관, 숭의전, 당포성 등의 문화유적지 외에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다.

 

서울이 더 편하고 갈 곳이 많으니 문제다. 그럼 나는 서울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서촌, 정동, 부암동, 청계천, 올림픽 공원, 광화문, 인사동, 익선동, 삼청동, 혜화 등의 답사 코스와 아직 만들지 못한 코스를 찾아가는 과정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만든 코스를 찾는 것보다 새 코스를 구상하고 식사를 하고 서점을 들르는 여정을 쓰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요즘은 지인들에게 연천에 오시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에게 연천 안내를 하는 과정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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