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평점 :
원당(願堂)은 무언가를 간절히 발원하는 집을 의미한다. 원당이 있는 사찰을 원당 사찰 또는 원찰(願刹)이라 한다. 왕실의 불교 신앙은 조선 시대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큰 버팀목이었다. 원당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의 심성을 담은 공간이었으며 왕실의 간절한 소원을 발원하는 곳이었다.
저자는 사찰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사지(寺誌)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진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독 왕실 구성원들에 관한 기록만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책의 제목이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왕실 원당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이해된다는 의미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조선 전기의 원당과 조선 후기의 원당이다, 석왕사(釋王寺)는 조선 왕실 원당의 1번지다. 이 사찰은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난 곳이다.
우왕은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영 딸을 왕비로 맞이했고 정치 기반을 만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이라는 강수를 선택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 당시 무학대사는 토굴에 머물며 이성계의 영달을 축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신덕왕후 강씨는 방원과 특별히 가까웠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올 당시 볼모로 잡혀 있던 강씨와 방번, 방석 형제를 구출해낸 것도 방원이었다. 강씨는 방원의 사병들을 몰수해 군사권을 약화시킨 데 이어 신권정치를 꿈꾸는 정도전과 손을 잡고 방원의 정치력을 축소시켰다.
강씨의 뒤에는 고려의 구 귀족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정도전의 영향력도 대단해 방원은 별다르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흥천사는 이성계가 세운 사찰이다. 육조거리 끝 지점이었다.(서울시의회 자리) 정릉은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방번, 방석, 이제(李濟; 사위.. 경순공주의 남편) 등을 잃었다.
이성계는 홀로 남은 막내딸 경순공주를 살리기 위해 비구니가 되게 했다. 공주의 머리를 깎을 때 태상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이제는 한때 이성계를 죽이려던 이인임의 조카다. 이버지는 이인립이다. 이런 집안이 결혼 관계를 맺은 것은 강씨의 주도에 의해서였다.
윤이, 이초가 명나라로 가 이인임을 이성계의 아버지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이색·조민수를 지지했던 윤이, 이초가 이성계 정권을 붕괴시켜달라고 주원장한테 간청했다.) 함흥차사 사건이 있다. 태종의 명으로 박순이 태조를 알현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가 태조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는 실은 신덕왕후의 친척이자 태조의 측근으로 동북면에서 군사를 일으킨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조사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태종은 정릉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했고 정릉의 석물들을 청계천의 돌다리(광통교)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다. 선조대에 신덕왕후 복원 논의가 제기되었을 당시 아무도 정릉의 위치를 몰라 곤욕을 치렀다. 신덕왕후가 복권된 것은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내원당은 조선 왕들 중 불교를 가장 싫어했던 태종이 세운 원당이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자신 무덤 근처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다. 그런 태종이 창덕궁 안에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한 인소전(仁昭殿)을 지으며 부속 불당을 지었다.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는 신덕왕후이기에 그의 소생이 조선왕조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로 인해 신의왕후 소생인 정종과 태종은 생모 추숭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의왕후를 정실부인으로 높이고 신덕왕후를 후첩으로 강등시키면 자연히 자신들은 적자가 되고 방간과 방석은 첩의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살아 있는 한 신덕왕후를 첩으로 만들 수 없었기에 그 보완책으로 생모를 추숭한 것이다. 대자암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大慈山)에 있었던 조선 전기의 암자다. 막내 아들 성녕대군의 죽음으로 더 이상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된 원경왕후 민씨가 아들 묘 옆에 지은 암자다.(소헌왕후는 아들 안평대군을 시동생 성녕대군의 양자로 보냈다.
후에 수양대군은 안평의 죄목으로 양어머니 창녕 성씨와의 간통을 들었다.) 세종은 재위 초 철두철미한 유교 군주였다. 조선 불교가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세종의 36사 정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은 재위 후반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만년에는 노골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다.
세종이 가장 열심히 읽은 경전은 능엄경이었다. 내불당은 세종이 독재적(?)으로 지은 궁궐 내 사찰이다. 소헌왕후는 원래 왕비로 간택된 여자가 아니었다. 왕과 거리가 먼 충녕대군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덜컥 왕이 되어 왕비가 된 경우다. 세종은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을 복권시킬 수 없었지만 아들 문종은 할 수 있었다. 다음 대이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청송 심씨 가문 자제들을 특채로 등용해 명분 사대부 집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전기에 왕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을 때마다 대신들이 문제삼으면 왕들은 선왕의 후궁들이 선왕의 명복을 비는데 내가 어찌 왈가왈부하겠는가란 대답을 했다. 인수궁과 자수궁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비구니원으로 남았다. 자수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광해군이 재건했다.
인수궁은 이방원의 잠저였다. 선왕의 후궁들이 출가하는 유습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영응(永膺) 대군 집안의 원당은 아차산 범굴사가 유일하다. 양주 아차산의 영응대군 묘는 홍릉 터로 낙점이 된 탓에 경기도 시흥시 군장리로 옮겨졌다. 조선 여성들이 남자에게 예속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 딸의 재산 상속권이 박탈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조선 전기에 왕실 여성들은 사찰에 가면 장 100대를 친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승려와 스캔들이 났다고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월산대군 부인(의경세자 며느리)은 조카 연산군과 간통한 사이로 알려졌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연산군이 어의까지 보낼 정도로 중병을 앓던 52세 여성이 임신을 했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임신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친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박원종에게 자신의 누나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다는 사실이나 연산군이 박씨를 극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은 반정공신으로서 매우 불리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누나가 연산군으로부터 치욕스런 일을 당해 목숨을 끊었다고 각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박씨는 불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왕실 여성들의 추문은 좁게 보면 여성과 불교에 대한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유불(儒佛) 이데올로기가 교체하는 격변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단종은 태어난 지 하루만에 생모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친어머니 같았던 할머니 혜빈 양씨를 버려야 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 혜빈은 금성대군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 세력을 계속 견제했다. 혜빈이 유배형을 받던 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갔다.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의 원당이다.(궁궐 즉 ‘궁금; 宮禁‘에 있을 때 꿈 꾸었던 절이라는 의미.) 금몽암은 태백산 기슭에 자리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앞에서 보면 ㄱ자형 건축물인데 뒤에서 보면 ㄷ자형 건축물이다. 세조 시대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공포정치기였다.
세조의 대표적 불사는 원각사 창건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사찰이다. 절 이름이 원각사인 것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실행한 법회가 원각법회였기 때문이다.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원각사를 기생들의 숙소인 연방원으로 만들었다.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은 김시습이 사육신과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신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김시습은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었고 전국을 방랑하며 수많은 설화와 전설,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단종 비 정순왕후와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거나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어 출가했다는 해석은 매우 단편적이다.
이들이 비군가 된 근원적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왕의 부인으로 또는 왕의 딸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정순왕후는 홀로 남아 비구니가 되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을 따라 순천으로 유배를 갔다.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후 유복자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비구니가 되었다.
선왕의 후궁들은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살던 궁을 불당으로 개조해 살았다. 이들은 여전히 내명부 소속이어서 비구니가 되었을지언정 후궁으로서의 지위는 고스란히 유지했다. 이에 비해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집 안 전체가 몰락한 여성들은 정 업원이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남편이 대역죄로 귀양 가거나 사사 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사형을 당하거나 관노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업원 비구니로 출가를 하게 되면 역적의 부인이라 해도 관노로 끌려가지 않았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조선시대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해주 정씨 고문서 꾸러미에서 발건된 정순왕훙의 분재기에 의하면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출가한 뒤 은사인 정업원 주지 이씨에게서 물려받은 인창방(창신, 숭인동) 집에서 살았다. 오늘날 정업원 구기비(舊基碑)가 있는 곳이다. 원래 정업원은 창덕궁 인근에 있었다. 연산군이 정업원 비구니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었다.
인수대비의 냉혹한 지성은 아들을 단단한 군주로 만들었지만 손자를 잔인한 폭군으로 전락시켰다. 인수대비가 창건한 정인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절터조차 불분명하다. 덕종과 예종의 능 가까이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서오릉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생모의 죽음을 알고도 10년이 지나서야 끄집어냈다. 폐비의 죽음은 훈척세력을 제거할 좋은 구실이었다. 연산군 시대는 어느 때보다 언론이 발달한 시기였다. 성종이 자신과 세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의 사림들을 대거 중용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사림의 발언권은 성종조차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연산군은 폐비를 왕비로 추숭해 제헌(齊獻)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능 인근에 위치한 연화사를 능침사찰로 삼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무오사화)과 훈척(갑자사화) 세력을 몰아낸 연산군은 이후 광적으로 사냥과 여성에 몰두했다. 재위 12년만에 중종반정이 발발함으로써 연산군의 폭정은 끝이 났다.
궁궐 내의 암살 요소들은 내명부 손아귀에 있었다. 친모가 대비 자리에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왕의 반대 세력이 궁궐 나인을 매수해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의 반대편에 있는 경우 그 확률은 매우 높았고 이런 처지의 왕들이 단명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태실을 봉안한 사찰에도 원당을 설치했다.
임꺽정이 활약한 황해도 지역은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 수령으로 파견되어 극심한 가렴주구를 행한 곳이다. 평안도 평성의 안국사는 임란 당시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가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안성 칠장사는 인목대비가 아들(영창대군)과 아버지(김제남)의 위패를 모신 원당이다. 인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버지를 추숭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스스로 왕의 적통으로 탈바꿈하고자 한 것이다. 원종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 신하들은 반대했다. 성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보다 종통이었다. 봉릉사(奉陵寺)는 정원군의 묘를 수호하던 고상사를 김포 금정산으로 옮긴 뒤 이름을 바꾼 사찰이다. 봉릉사는 사실 허울뿐인 훈장이었다.
봉릉사는 능침사라는 격상된 칭호가 아닌 조포사(造泡寺)로 불렸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왕실 원당을 격하해 부른 호칭이다.(두부는 이동이 어려워 왕릉 수호 사찰에서 매번 공급했다.) 인선왕후 장씨는 효종의 정비(正妃)다.
시흥 법련사는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를 위해 지은 원당이다. 안양 삼성산 삼막사는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의 원당이다.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원당은 순천 송광사다. 도봉 내원암은 조귀인의 원당이다. 성남 봉국사는 현종이 두 딸(명선공주, 명혜공주)을 위해 지은 원당이다. 각황전은 숙빈 최씨가 자신의 기도처였던 화엄사에 시주해 지은 전각이다,
영조는 파주 보광사를 소령원의 수호 사찰로 지정했다. 기로소는 정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70세 이상의 친목 기구로 왕과 함께 연회를 열며 회원간 화친하는 곳이다. 조선 시대에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넷뿐이다. 기로소에도 원당이 있었다.
사도세자를 경종의 궁인들 손에 크게 한 영조의 의도는 자신의 떳떳함을 드러내보이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소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사도세자는 열 살 때 아버지 영조에게 경종을 죽였냐고 물었고 영조는 새파랗게 질려 아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용주사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원당이다. 의빈 성씨는 정조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한 여자였다. 북한산 승가사는 효창원의 조포사다. 효창원은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곳이다. 남양주 내원암은 수빈 박씨의 기도처였다. 수빈 박씨는 순조의 생모다.
충남 예산 보덕사는 왕기 서린 명당을 내준 부처님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남원군 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운 사찰이다. 여주 대법사는 명성황후 민씨의 어머니 이씨가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순정효황후는 대각사의 용성 스님에게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각사 신도였던 최 상궁과 엄 상궁이 자신들이 모시던 황후를 용성 스님에게 소개한 것이다. 대각사는 최 상궁이 사저를 보시해 조성한 절이다. 옹성 스님의 한글 역경 사업은 왕실 여성들의 보시에 힘입은 결과 이루어졌다. 순정효황후는 용성 스님에게 법명과 계를 받고 비구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강릉 백운사에는 순정효황후의 마지막 상궁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