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몽암(禁夢庵)은 영월읍에 자리한 암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하였으므로 금몽암이라 하고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썼다. 금중이 무엇일까? 한자 사전에는 궁궐 안, 궁중이라 나와 있다. ‘금중에’라는 말은 이상하다. 사전대로 궁궐 안 즉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금중에서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금중 시절에라고 하든지. 하지만 단종은 유배 중이었으니 당연히 궁궐에 있지 않았다. '금중에서'라는 말도, '금중 시절에'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금중에 대한 꿈을 꾸고라 해야 맞다.

 

탁효정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에 의하면 ’조선불교통사‘에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지덕암이란 이름의 암자였는데 단종은 그 이름을 궁궐(’금중; 禁中’)에 있을 때 꿈꾼 절이라는 의미에서 금봉사라 고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화해 시정을 요구했더니 바로 고쳤다.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이란 말을 “단종이 금중(禁中)에서 꿈을 꾸고 창건..”이라 고친 것이다. 그러나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고 고치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그나저나 고치기 전의 글을 캡쳐해 두지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고칠 줄 몰랐다. 의문의 1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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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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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願堂)은 무언가를 간절히 발원하는 집을 의미한다. 원당이 있는 사찰을 원당 사찰 또는 원찰(願刹)이라 한다. 왕실의 불교 신앙은 조선 시대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큰 버팀목이었다. 원당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의 심성을 담은 공간이었으며 왕실의 간절한 소원을 발원하는 곳이었다.

 

저자는 사찰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사지(寺誌)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진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독 왕실 구성원들에 관한 기록만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책의 제목이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왕실 원당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이해된다는 의미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조선 전기의 원당과 조선 후기의 원당이다, 석왕사(釋王寺)는 조선 왕실 원당의 1번지다. 이 사찰은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난 곳이다.

 

우왕은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영 딸을 왕비로 맞이했고 정치 기반을 만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이라는 강수를 선택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 당시 무학대사는 토굴에 머물며 이성계의 영달을 축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신덕왕후 강씨는 방원과 특별히 가까웠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올 당시 볼모로 잡혀 있던 강씨와 방번, 방석 형제를 구출해낸 것도 방원이었다. 강씨는 방원의 사병들을 몰수해 군사권을 약화시킨 데 이어 신권정치를 꿈꾸는 정도전과 손을 잡고 방원의 정치력을 축소시켰다.

 

강씨의 뒤에는 고려의 구 귀족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정도전의 영향력도 대단해 방원은 별다르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흥천사는 이성계가 세운 사찰이다. 육조거리 끝 지점이었다.(서울시의회 자리) 정릉은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방번, 방석, 이제(李濟; 사위.. 경순공주의 남편) 등을 잃었다.

 

이성계는 홀로 남은 막내딸 경순공주를 살리기 위해 비구니가 되게 했다. 공주의 머리를 깎을 때 태상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이제는 한때 이성계를 죽이려던 이인임의 조카다. 이버지는 이인립이다. 이런 집안이 결혼 관계를 맺은 것은 강씨의 주도에 의해서였다.

 

윤이, 이초가 명나라로 가 이인임을 이성계의 아버지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이색·조민수를 지지했던 윤이, 이초가 이성계 정권을 붕괴시켜달라고 주원장한테 간청했다.) 함흥차사 사건이 있다. 태종의 명으로 박순이 태조를 알현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가 태조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는 실은 신덕왕후의 친척이자 태조의 측근으로 동북면에서 군사를 일으킨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조사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태종은 정릉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했고 정릉의 석물들을 청계천의 돌다리(광통교)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다. 선조대에 신덕왕후 복원 논의가 제기되었을 당시 아무도 정릉의 위치를 몰라 곤욕을 치렀다. 신덕왕후가 복권된 것은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내원당은 조선 왕들 중 불교를 가장 싫어했던 태종이 세운 원당이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자신 무덤 근처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다. 그런 태종이 창덕궁 안에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한 인소전(仁昭殿)을 지으며 부속 불당을 지었다.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는 신덕왕후이기에 그의 소생이 조선왕조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로 인해 신의왕후 소생인 정종과 태종은 생모 추숭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의왕후를 정실부인으로 높이고 신덕왕후를 후첩으로 강등시키면 자연히 자신들은 적자가 되고 방간과 방석은 첩의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살아 있는 한 신덕왕후를 첩으로 만들 수 없었기에 그 보완책으로 생모를 추숭한 것이다. 대자암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大慈山)에 있었던 조선 전기의 암자다. 막내 아들 성녕대군의 죽음으로 더 이상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된 원경왕후 민씨가 아들 묘 옆에 지은 암자다.(소헌왕후는 아들 안평대군을 시동생 성녕대군의 양자로 보냈다.

 

후에 수양대군은 안평의 죄목으로 양어머니 창녕 성씨와의 간통을 들었다.) 세종은 재위 초 철두철미한 유교 군주였다. 조선 불교가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세종의 36사 정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은 재위 후반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만년에는 노골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다.

 

세종이 가장 열심히 읽은 경전은 능엄경이었다. 내불당은 세종이 독재적(?)으로 지은 궁궐 내 사찰이다. 소헌왕후는 원래 왕비로 간택된 여자가 아니었다. 왕과 거리가 먼 충녕대군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덜컥 왕이 되어 왕비가 된 경우다. 세종은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을 복권시킬 수 없었지만 아들 문종은 할 수 있었다. 다음 대이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청송 심씨 가문 자제들을 특채로 등용해 명분 사대부 집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전기에 왕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을 때마다 대신들이 문제삼으면 왕들은 선왕의 후궁들이 선왕의 명복을 비는데 내가 어찌 왈가왈부하겠는가란 대답을 했다. 인수궁과 자수궁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비구니원으로 남았다. 자수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광해군이 재건했다.

 

인수궁은 이방원의 잠저였다. 선왕의 후궁들이 출가하는 유습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영응(永膺) 대군 집안의 원당은 아차산 범굴사가 유일하다. 양주 아차산의 영응대군 묘는 홍릉 터로 낙점이 된 탓에 경기도 시흥시 군장리로 옮겨졌다. 조선 여성들이 남자에게 예속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 딸의 재산 상속권이 박탈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조선 전기에 왕실 여성들은 사찰에 가면 장 100대를 친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승려와 스캔들이 났다고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월산대군 부인(의경세자 며느리)은 조카 연산군과 간통한 사이로 알려졌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연산군이 어의까지 보낼 정도로 중병을 앓던 52세 여성이 임신을 했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임신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친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박원종에게 자신의 누나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다는 사실이나 연산군이 박씨를 극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은 반정공신으로서 매우 불리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누나가 연산군으로부터 치욕스런 일을 당해 목숨을 끊었다고 각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박씨는 불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왕실 여성들의 추문은 좁게 보면 여성과 불교에 대한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유불(儒佛) 이데올로기가 교체하는 격변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단종은 태어난 지 하루만에 생모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친어머니 같았던 할머니 혜빈 양씨를 버려야 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 혜빈은 금성대군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 세력을 계속 견제했다. 혜빈이 유배형을 받던 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갔다.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의 원당이다.(궁궐 즉 ‘궁금; 宮禁‘에 있을 때 꿈 꾸었던 절이라는 의미.) 금몽암은 태백산 기슭에 자리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앞에서 보면 ㄱ자형 건축물인데 뒤에서 보면 ㄷ자형 건축물이다. 세조 시대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공포정치기였다.

 

세조의 대표적 불사는 원각사 창건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사찰이다. 절 이름이 원각사인 것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실행한 법회가 원각법회였기 때문이다.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원각사를 기생들의 숙소인 연방원으로 만들었다.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은 김시습이 사육신과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신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김시습은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었고 전국을 방랑하며 수많은 설화와 전설,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단종 비 정순왕후와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거나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어 출가했다는 해석은 매우 단편적이다.

 

이들이 비군가 된 근원적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왕의 부인으로 또는 왕의 딸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정순왕후는 홀로 남아 비구니가 되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을 따라 순천으로 유배를 갔다.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후 유복자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비구니가 되었다.

 

선왕의 후궁들은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살던 궁을 불당으로 개조해 살았다. 이들은 여전히 내명부 소속이어서 비구니가 되었을지언정 후궁으로서의 지위는 고스란히 유지했다. 이에 비해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집 안 전체가 몰락한 여성들은 정 업원이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남편이 대역죄로 귀양 가거나 사사 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사형을 당하거나 관노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업원 비구니로 출가를 하게 되면 역적의 부인이라 해도 관노로 끌려가지 않았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조선시대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해주 정씨 고문서 꾸러미에서 발건된 정순왕훙의 분재기에 의하면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출가한 뒤 은사인 정업원 주지 이씨에게서 물려받은 인창방(창신, 숭인동) 집에서 살았다. 오늘날 정업원 구기비(舊基碑)가 있는 곳이다. 원래 정업원은 창덕궁 인근에 있었다. 연산군이 정업원 비구니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었다.

 

인수대비의 냉혹한 지성은 아들을 단단한 군주로 만들었지만 손자를 잔인한 폭군으로 전락시켰다. 인수대비가 창건한 정인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절터조차 불분명하다. 덕종과 예종의 능 가까이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서오릉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생모의 죽음을 알고도 10년이 지나서야 끄집어냈다. 폐비의 죽음은 훈척세력을 제거할 좋은 구실이었다. 연산군 시대는 어느 때보다 언론이 발달한 시기였다. 성종이 자신과 세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의 사림들을 대거 중용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사림의 발언권은 성종조차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연산군은 폐비를 왕비로 추숭해 제헌(齊獻)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능 인근에 위치한 연화사를 능침사찰로 삼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무오사화)과 훈척(갑자사화) 세력을 몰아낸 연산군은 이후 광적으로 사냥과 여성에 몰두했다. 재위 12년만에 중종반정이 발발함으로써 연산군의 폭정은 끝이 났다.

 

궁궐 내의 암살 요소들은 내명부 손아귀에 있었다. 친모가 대비 자리에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왕의 반대 세력이 궁궐 나인을 매수해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의 반대편에 있는 경우 그 확률은 매우 높았고 이런 처지의 왕들이 단명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태실을 봉안한 사찰에도 원당을 설치했다.

 

임꺽정이 활약한 황해도 지역은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 수령으로 파견되어 극심한 가렴주구를 행한 곳이다. 평안도 평성의 안국사는 임란 당시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가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안성 칠장사는 인목대비가 아들(영창대군)과 아버지(김제남)의 위패를 모신 원당이다. 인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버지를 추숭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스스로 왕의 적통으로 탈바꿈하고자 한 것이다. 원종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 신하들은 반대했다. 성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보다 종통이었다. 봉릉사(奉陵寺)는 정원군의 묘를 수호하던 고상사를 김포 금정산으로 옮긴 뒤 이름을 바꾼 사찰이다. 봉릉사는 사실 허울뿐인 훈장이었다.

 

봉릉사는 능침사라는 격상된 칭호가 아닌 조포사(造泡寺)로 불렸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왕실 원당을 격하해 부른 호칭이다.(두부는 이동이 어려워 왕릉 수호 사찰에서 매번 공급했다.) 인선왕후 장씨는 효종의 정비(正妃)다.

 

시흥 법련사는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를 위해 지은 원당이다. 안양 삼성산 삼막사는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의 원당이다.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원당은 순천 송광사다. 도봉 내원암은 조귀인의 원당이다. 성남 봉국사는 현종이 두 딸(명선공주, 명혜공주)을 위해 지은 원당이다. 각황전은 숙빈 최씨가 자신의 기도처였던 화엄사에 시주해 지은 전각이다,

 

영조는 파주 보광사를 소령원의 수호 사찰로 지정했다. 기로소는 정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70세 이상의 친목 기구로 왕과 함께 연회를 열며 회원간 화친하는 곳이다. 조선 시대에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넷뿐이다. 기로소에도 원당이 있었다.

 

사도세자를 경종의 궁인들 손에 크게 한 영조의 의도는 자신의 떳떳함을 드러내보이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소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사도세자는 열 살 때 아버지 영조에게 경종을 죽였냐고 물었고 영조는 새파랗게 질려 아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용주사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원당이다. 의빈 성씨는 정조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한 여자였다. 북한산 승가사는 효창원의 조포사다. 효창원은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곳이다. 남양주 내원암은 수빈 박씨의 기도처였다. 수빈 박씨는 순조의 생모다.

 

충남 예산 보덕사는 왕기 서린 명당을 내준 부처님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남원군 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운 사찰이다. 여주 대법사는 명성황후 민씨의 어머니 이씨가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순정효황후는 대각사의 용성 스님에게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각사 신도였던 최 상궁과 엄 상궁이 자신들이 모시던 황후를 용성 스님에게 소개한 것이다. 대각사는 최 상궁이 사저를 보시해 조성한 절이다. 옹성 스님의 한글 역경 사업은 왕실 여성들의 보시에 힘입은 결과 이루어졌다. 순정효황후는 용성 스님에게 법명과 계를 받고 비구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강릉 백운사에는 순정효황후의 마지막 상궁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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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착한 그림, 선한 화가
공주형 지음 / 예경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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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박수근이 아내가 된 김복순씨에게 한 청혼을 착한 청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주형은 박수근론으로 박사가 되었고 일간지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로 미술평론을 하고 출강하고 있다.

 

박수근 화백은 1965년 52세로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대 멀어, 멀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은 경기도 포천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고향 양구로 옮겨졌다.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어 한 화가였다.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창신동 집을 마련했다.

 

타계할 때까지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색은 흰색이었다. 박수근은 미국인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흰색을 자주 언급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다. 석가에게 보리수가 있었고 뉴턴에게 사과나무가 있었듯 박수근에게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어린 수근에게는 마땅한 화구가 없었다. 그래서 수근은 뽕나무 가지를 태워 직접 목탄을 만들기도 했다. 양구 보통학교 언덕에 있던 느릅나무를 보고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를 꿈꾸었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박수근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수근의 상심을 달래준 사람들이 해외의 인물들이었다.

 

밀러 부인은 박수근에게 “서울 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박수근은 후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어 자신이 국전에서 정실(情實) 인사 때문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박수근은 국전 심사를 맡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존의 전쟁이 시작된 그해 수근은 혜화동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이상우의 주선으로 미군 범죄수사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수근은 페인트칠하는 노무자 대우를 받고 일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수근은 부두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수근은 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피엑스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수근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아내는 박수근에게는 흰쌀로 정성껏 지은 밥을 내놓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옥수수와 보리쌀로 지은 밥을 내놓았다.

 

박수근이 태어난 1914년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화를 처음 소개하고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발족하는 등 서양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때였다. 12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장프랑수아 밀레; 1814 - 1875)의 '만종(1857 - 1859년 사이 그림)'을 본 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1904 - 1969)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 '만종'이 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농민 부부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슬프고도 무서운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감자 바구니 아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밀레 생존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으면서까지 피폐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밀레가 장례식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 감자바구니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했다. 나무관 하나만으로는 그림 전체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1940년대 박수근은 평양에 있었다. 춘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미요시(三吉)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이직하면서 마련해준 일자리 때문이었다. 그즈음 박수근은 흠모하던 이중섭도 만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도 그때였다.

 

박수근은 받을 돈을 재촉하지 못하고 남에게 받은 것은 버스표 한 장이라도 꼭 갚았다. 가난한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타계 직전까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박수근 그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마거릿 밀러, 마리아 핸더슨, 실리아 짐머맨 등이 박수근의 후원인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은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다. 박수근은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소도 그렸다.

 

1957년 박수근은 국전 낙선을 계기로 시작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반복은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수근이 세상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가장 떳떳한 수단이었고 수근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수근은 이렇게 청혼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의 아내는 춘천여고를 졸업한 후 철원무진공사의 직원과 금화군의 수의사에게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난한 화가를 택했다. 수근은 종종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두 살 아래의 이중섭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이라 불렀다. 수근은 바탕칠도 대충 하지 않았다. 수근이 처음부터 그림에 특유의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박수근의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화강암의 효과를 나타내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거칠지만 소박하다.

 

이 화풍의 시작은 박수근이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 기법을 연구한 후 완성한 일명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였다.(이코노미톡 뉴스 수록 기사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마티에르, 알고 보니 경주 마애불과 석탑이 원천’) 고향 양구의 화강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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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재생 - 공간을 넘어 삶을 바꾸는 도시 재생 이야기
정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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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체다. 도시가 생명체라면 도시 재생은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진단이다. 도시 재생은 크게는 국토 재생이고 작게는 지역과 마을 재생이다. 어쩌면 내 몸 재생까지 포함되는 개념이 도시 재생이다.

 

도시 재생이란 말에 나는 풍수의 비보(裨補)를 생각한다. 정동(貞洞) 해설을 할 때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杜甫)의 구절을 인용한 기억이 난다. 정동을 현대적 의미의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그곳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인지 명당이기 때문에 모인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정동을 이루는 아우라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체(整體) 관념이란 것이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몸의 원리를 말하는 개념이다. 정(整)은 완전성을 의미하는 integrity와 뜻이 통하는 말이다. 저자는 도시를 살리는 일에서도 정(整)과 integrity가 핵심이라 말한다.

 

1970년대 브라질 쿠리지바 시장을 역임한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는 큰돈을 들이는 대규모 프로젝트 대신 작은 비용으로 침을 놓듯 작은 변화를 주어 영향을 확산시키는 방식을 도시 침술(urban acupuncture)이라 표현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집을 지을 때에도 마음대로 짓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짓기에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아 만든 도시가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조화롭게 보인다.

 

재개발이 도시를 물건이나 상품처럼 대하는 것이라면 도시재생은 생명 다루듯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저자는 도시재생이란 말보다 삶터 재생이란 말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블랙홀처럼 사람을 빼앗아가는 수도권, 대도시, 신도심보다 사람이 빠져나가는 지방, 시골, 구도심을 먼저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외연 확장보다 중요한 것은 내부 재구축이다. 삶터 되살림의 속도는 "천천히"다. 현시대는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재개발은 맞지 않다. 도시재생 시대의 개발은 개발 단위를 단지에서 필지로 줄이고 새로 만드는 대신 고쳐 써야 한다. 이렇게 작은 단위로 도시를 살리면 작은 설계사무소와 동네 자영업자도 참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메시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 차근차근 천천히와 정반대인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지금은 개발시대가 아니다.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개발시대에 맞는 말이다.

 

재개발에는 철거형만 있지 않다. 남길 곳을 최대한 남기면서 재개발 하는 수복형도 있고 오랜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존형 등이 있다. 그간 우리나라는 철거형이 지상 목표였다.

 

1965년 재개발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세운상가가 첫 재개발 대상이었다. 주택재개발이 시작된 배경에는 무허가 주택 확산이 있다. 현저동, 홍제동, 아현동, 공덕동, 후암동, 한남동, 숭인동, 창신동, 흑석동, 노량진, 청계천, 중랑천, 정릉천 주변 등 판잣집에 무허가 건축물이 들어섰다.

 

1961년 당시 무허가 주택은 4만채가 넘었다. 이에 서울시는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뒤 주민들을 서울 외곽의 새로운 주거지로 이주시켰다. 도봉동, 구로동,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신림동, 마천동, 거여동, 신정동, 창동, 쌍문동, 가락동 등 외곽 공유지역에 재정착촌이 마련되었고 이주자들은 10 ~ 20평 규모의 작은 대지에 약간의 건축자재를 지원받아 스스로 집을 짓고 살았다.

 

1960년대 말에는 교외 지역 국공유지가 고갈되자 재정착지로 이주시키는 대신 무허가 주택지에 공공아파트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1970년에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서른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고 1971년에는 광주(廣州; 현 성남시) 단지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하여 광주대단지 사건을 일으켰다.

 

서울시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도심재개발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제기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이 주요 계기가 되었다. 시청 앞에서 존슨 대통령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맞은 편인 북창동과 남산 자락의 무허가 주택의 적나라한 모습이 텔레비전 보도를 통해 미국까지 전해지자 재미 교민사회에서 대통령에게 도심 환경 개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서울시가 도심재개발을 서울시정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 이후 22층의 더플라자호텔이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 서울광장 뒤편의 낙후한 화교 집단거주지였던 지금의 북창동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병풍 모양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1970년대 말 북한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북한의 포격 사정 거리 안에 있는 서울에 과도하게 인구가 집중되는 것은 불리하다는 주장에 제기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재개발 활성화 정책이 마련되었다. 1983년 서울시는 670%였던 도심재개발 용적률을 1,000%로 늘렸다.

 

산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로 인해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서울의 아름다운 산, 언덕과 강변 풍경이 아파트로 인해 훼손되었다면 서울 도심부의 역사문화유산들은 재개발로 인해 지워졌다. 2000~2010년대는 개발 역풍 속에 맞이한 재생시대다.

 

역풍이란 선거로 인해 빚어진 현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2006년 선거 때 뉴타운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단체장들이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는 바로 그 뉴타운 때문에 우수수 떨어졌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들은 뉴타운과 재개발의 대안으로 도시재생을 들고 나왔다.

 

새 길이란 큰 회사들만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개발프로젝트가 아닌 스몰 프로젝트, 건물을 헐고 짓는 하드웨어보다 사람을 불러모으는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에 돈을 쓰는 것을 말한다. 외연 확장을 그만두고 도시 안의 빈 곳을 채우고 혁신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도시를 살리려는 도시재생이 도시를 파괴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일본의 경우 재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인구 감소 우려 때문이다. 사람이 없어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는 제도는 지역부흥협력대이고, 세수 격차로 재원 고갈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방에 돈을 보내는 제도는 고향납세제도다.(100 페이지) 모두 일본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일본은 꽤 오래전부터 사람과 돈을 지방에 보내는 사업을 지속해왔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 시작이 늦었다고 서두르기보다 차근차근, 천천히 제대로 하면 좋겠다.“(103 페이지) 문제는 일자리다. 마을(지방,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아두려면 그곳에만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생하지 않으면 재생이 아니다.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 주거환경관리사업 등을 시행하면서 주어진 예산으로 주민공동이용시설을 신축해도 사업 종료 후 운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해법은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다.(156 페이지)

 

도시재생에서 젠트리피케이션도 문제이지만 듀플리케이션(복제)도 문제다.(179 페이지) 저마다 자기 지역에 맞는 재생이어야 하는데 성공 사례를 따라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뒤 학업과 취업 때문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U 턴이라 한다.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J 턴이라 한다. 고향이 아닌 시골로 가는 것을 I 턴이라 한다.(214 페이지)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은 선진국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20대와 30대의 90% 이상이 헬조선론에 동의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빈부격차와 부의 불균형, 높은 실업률, 낮은 취업 기회, 고용 불안정, 고물가, 일상화된 경쟁구도, 저녁이 없는 삶 등이 이유다.

 

소득 향상이 행복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깨진 지 오래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심층구조와 기본골격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픈 도시는 우리의 책임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지금처럼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의 도시계획은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와 결핍을 이어주는 도시계획이어야 한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윈프레드 커란Winifred Curran과 트리아나 해밀턴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수도권에 전 인구의 반 이상이 몰려 사는 극단의 경쟁 국가 한국의 숨통이 도시재생과 함께 조금씩 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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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조용헌, 로버트 파우저, 이현군 등이 쓴 ’서울의 재발견’과 정석이 쓴 ‘천천히 재생’,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에서 공히 추천받은 도서가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이다. 도시, 미국 등을 키워드로 한 책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이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 한 권이다. 이 책에 미국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이클 카츠Michael B. Katz가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Why American Cities Don‘t Burn’(2013년)란 책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분노를 담은 책이다. 책의 의미를 원래 불타야 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 설명한 저자는 사실 미국의 도시는 민권 운동기 이전에도 불탔었다고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은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Ruth Glass; 1912 - 1990)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다. 박진빈 교수의 책에는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도 나온다.

 

Winifred Curran과 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1. 젠트리피케이션. 2. just green enough. 3.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의 3. 5% 룰(최소 3.5%의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법칙). 4. 도시재생이 최근 내가 생각하는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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