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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의 발자국 - 소설가와 고생물학자의 유쾌하고 지적인 인간 진화 탐구 여행
후안 호세 미야스.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지음,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 틈새책방 / 2021년 5월
평점 :
스페인의 두 저자(후안 호세 미야스와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쓴 ‘루시의 발자국’은 소설 형식의 독특한 고생물학/ 진화 책이다. ‘소설가와 고생물학자의 유쾌하고 지적인 인간 진화 탐구 여행’이란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후안 호세 미야스란 소설가와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라는 고생물학자가 만나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은 책이다. 고생물학이라 했지만 인간에 관한 책이기에 인접 학문들의 성과가 무수히 반영되었다.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 철학, 유전학, 생리학 등등이 그것이다.
책의 서두에 아타푸에르카란 지명이 나온다. 이곳은 연천과도 관련이 있는 스페인의 구석기 명소다. 두 도시의 인연은 지난 2012년 아타푸에르카 주민들이 연천전곡리구석기축제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연천을 방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타푸에르카는 전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감수자의 말처럼 아타푸에르카 유적지는 스페인의 어떤 유적지보다도 인류 진화사에 대한 지식을 많이 던져준 유적지다. 스페인은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등의 유적들이 발견된 곳이다.
두 주인공은 프라도 박물관, 어린이놀이터, 장난감 가게, 마드리드 근교의 계곡, 성인용품점, 공동묘지, 원시인들의 동굴 벽화 등을 방문해 대화를 이어나간다. 대화의 주도권은 고생물학자가 쥐었다. 제목에 나오는 루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별칭인 루시를 말한다.
루시는 한 때 최초의 인류로 여겨졌던 존재다. 이 화석에 루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974년 미국의 인류학자 도널드 조핸슨(Donald Johanson)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화석을 발굴할 당시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르수아가는 대자연을 사원이라 하지 않는다면 달리 뭐라고 하겠습니까란 말을 한다. 후안 호세 미야스는 자신이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 중 2%가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유래했으나 그의 생각은 자신이 어릴 적 상징 능력이 부족해 연애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네안데르탈인의 속성과 연관지은 것이다.
소설가는 돈을 보고 여자 아이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여아 아이들이 내뿜는 광채에 빠져들어 여자 아이들을 좋아했으나 여자 아이들은 상징 능력을 소유한 남자 아이들을 좋아했다. 책에는 저자의 가설이 섞여 있다. 가령 농업을 여성이 발명했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고생물학자에 의하면 남성이 들소, 말,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 온종일 돌아다닌 사이 여성이 농업을 발명한 것이다.
고생물학자는 진화는 사건의 발단, 절정, 결말이 없는 카오스의 세계라 말한다. 고생물학자는 조각상을 보며 이것들은 한때는 타는 듯 뜨거운 액체였다는 말을 한다. 고생물학자는 신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 사회의 주류와 가깝다는 소설가의 말에 동의한다. 어떤 사회 구조냐에 따라 신의 성향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친사회적인 신은 사회가 수 세기에 걸쳐 충분히 복잡해지면 나타나지만 시차(時差)가 존재한다.
고생물학자의 말에는 냉정하고 예리한 면이 있다. 가령 소설가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개인의 삶이 우연의 산물이라 말하자 선생님은 모르지만 보험회사는 안다, 개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개별 개미가 어떻게 될지 잘 모르지만 개미집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는 단순히 나열된 사건들의 연속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이 그렇다.
역사에는 의미나 방향보다 패턴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韻律)을 맞춘다는 말을 했다. 소설가는 학문적으로 어렵고 딱딱한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고생물학자의 능력에 놀란다. 책에는 리처드 랭엄 이야기도 나온다. ‘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라는 책을 쓴 동물학자다. 그는 이 책에서 인류가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두뇌 크기가 커졌고 그로 인해 진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고생물학자는 뇌 크기가 어느 정도 커진 후 화식(火食)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리처드 랭엄은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의 보노보라 말했다.) 요리해서 먹은 것 때문이 아니라 에너지가 풍부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머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이 그림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했는지, 사냥과 연결된 속죄의 행동에서 비롯됐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산(多産)과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것은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일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밝힐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더 위대한 거예요.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는 구석기 시대인들이 남긴 동굴벽화에 대한 말이다.
전편을 통틀어 가장 흥미 있는 말은 지금은 조리용 용기(남비, 솥)가 일상적이지만 석기시대의 그 물건들의 출현은 혁명이었다는 말이다. 요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릇이고 그로 인해 저장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잉여, 재산의 개념이 생겼다.(325 페이지) 화폐 이전에 그런 시스템이 생겼으니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골들을 살펴보면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고 볼 생물학적 지표가 없다. 사냥과 채집을 하던 구석기인에 비해 키와 뇌가 작아졌고 농사 짓고 곡식 빻고 가축을 돌보는 등의 일을 하느라 온갖 질병을 앓았고 수명도 짧아졌다. 그럼에도 신석기인들이 살아 남아 승리한 것은 경작용 토지나 가축용 목초지가 된 땅이 자연 생태계보다 더 많은 인간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더 잘 살지는 못했지만 더 많은 자식을 낳았고 더 지속적이었다.(330 페이지)
인상적인 부분은 뇌가 커지게 된 메커니즘에 대한 논쟁(화식 때문이냐 에너지가 풍부한 음식 때문이냐)에 대해 소설가가 뉘앙스의 문제인 것 같다고 말하자 고생물학자가 우리는 그 뉘앙스에 매어 살고 있다고 말한 대목이다. 불이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었다는 사람과, 진화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할 때 불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논쟁이란 말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불의 자식일지도 모르겠다. 고생물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몸에 가장 좋은 것은 바닥에 있어요. 나무는 땅에서 영양분을 얻어요. 미네랄도, 물도, 땅에서 뽑아 올려 빛이 주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꾸지요.”(322 페이지) 처음 어떤 유형의 책인지 모르고 구입해 읽다가 소설 형식이어서 다소 실망했는데 참 인상적인 대목이 많아 만족스럽다. 소설 형식인 것을 알았다면 사지 않았을 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때로 헤아리지 않고 어떤 결정을 하는 것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