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매일 잠언(箴言)을 보내주는 동료 해설사가 이틀째 새 내용을 보내지 않아 톡을 보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나는 ”저는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을 좋아합니다."란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입니다.’란 구절이다.

 

덧붙여 나는 이 구절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란 구절 바로 앞에 자리한 구절입니다란 말을 했다. 내가 이 구절을 만난 것은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에서다.(당연히 성경 구절은 성경에서 만나는 것이지만 어떤 책에서, 어떤 맥락에서 인용된 구절을 읽느냐도 중요하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서동욱은 얼굴이란 신성(神性)이 직접 현전하는 장소라는 말을 했다. 옛사람들은 얼굴을 얼골로 불렀다. 이 말은 얼 즉 정신이 모인 골짜기란 의미다. 얼은 정신의 줏대를 의미하는 말로 당연히 정신이란 말보다 예스럽고 깊이가 있다.

 

오늘 ‘여성이 만난 하나님’에서 또 하나의 고린도 전서 구절을 만났다. ‘여성이 기독교 신앙을 말하다’란 장에서 저자(강호숙 박사)는 교회 내 어른아이들이 배워야 할 구절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구절을 제시했다. 이 구절은 얼굴을 이야기한 구절 바로 앞의 구절이다.

 

정리하면 오래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는 구절(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의식하며 지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앞 구절(13장 12절)을 만났고 오늘 다시 그 구절의 앞 구절(13장 11절)을 만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서 과거(어릴 때)와 현재(장성한 때)를 대비했고 12절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대비했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온전히 알 것이라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부분적인 앎에 지치고 무력할 때 나는 언젠가 온전히 아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고 어려움을 이기려 애쓴다. 물론 종교적 의미와 일상의 의미는 다르지만 상통하는 바가 있다. 내가 말하는 온전한 앎이란 인식의 한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명료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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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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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박사 김광현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건축을 “공동체에 질서를 주기 위해 짓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이기적인 것)이다. 건축은 우월함을 자랑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산물이라던 건축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 되고, 건축주는 권력자가 되어 자칫 그릇된 생각과 욕망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욕망은 실재적 대상의 결여, 결여한 뭔가를 메우려는 충동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실재를 생산하는 것이라 말한다.(50 페이지) 건축은 정주(定住) 사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소나 양이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며 살 듯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살게 되었다. 한정된 커뮤니티에 귀속되던 정체성, 지역성에 근거한 공동체의 감각은 크게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앞서가는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필요를 낳는다고 말한다. 건축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한 욕망을 형상화한다, 닫힌 구조로 내향적이 되는 것은 건축의 숙명이다.(65, 66 페이지) 도시는 교통하는 정주이자 불완전한 정주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 말을 들려준다. “사람들이 살 집이 되는 인간의 공작물이 없다면 인간사는 유목민의 방랑과 똑같이 부초와 같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유목민에게 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머물 집이 없는 이동은 방랑이 된다는 의미다. 정주 사회는 땅을 기반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곳이다. 이웃 관계도 땅에 귀속된다.(73 페이지)

 

도시는 땅 위에 정주하는 동시에 특정 지역에 귀속하지 않고 사람들과 재화가 횡단, 교차하는 곳이다. 도시는 탈공동체적인 정주 사회다, 물질, 정보도 특정 장(場)에 집약될 때 다수의 신체, 재화, 정보가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꾸준히 이동할 수 있다. 신체, 재화, 정보 교환은 일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건축물이다.

 

막스 베버는 농촌사회에서는 땅이 중요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동하고 교환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 중계점에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74 페이지) 근대 건축이 근대 도시를 만든 것도 아니며 근대 도시 때문에 근대 사회가 성립된 것도 아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도시가 변화했다. 근대 사회가 시작되고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도시의 악화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근대 건축이 나타났다.(102 페이지)

 

건축하는 사람은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에 관심을 기울인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재현, 재현의 공간, 공간의 실천이라는 삼중 개념을 제시했다. 세 가지라 하지 않고 삼중이라고 한 것은 그 셋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110 페이지) 공간의 재현은 도시 계획가, 기술 관료 등 계획자가 주체가 되어 도면이나 모형으로 공간을 편성해 파악하고 계획한 공간을 말한다.

 

재현의 공간은 주민이나 사용자가 실제로 살고 사용하면서 시간이 흘러 숙성되는 공간이다. 상황 구축이나 축제 또는 혁명처럼 규범화된 공간 재현과 충돌하는 공간의 실천이 이뤄진다. 공간의 실천이란 어떤 공간이 나타나 유지되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 수명보다 오래 견디는 무수한 건축물에 둘러싸여 산다. 건축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135 페이지)

 

노예는 노동만 한다. 그러나 공작인은 작업을 한다.(140 페이지) 산업 혁명 이후 기계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평등은 균일을 만들고 균일은 모방을, 모방은 대중을 만들었다. 대중 사회는 결국 소비 사회와 같은 말이다.(150 페이지) 현대 사회는 정보 조작으로 수요를 무한히 창출하는 소비화, 정보화 사회다.(152, 153 페이지) 권력은 건축으로 애국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공간 구조물로 사회적 관계를 분류하기도 한다.

 

지금도 구조물은 차별적인 사회를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서던 스테이트 파크웨이의 다리들을 2.6미터 높이로 낮춰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설계한 존스 비치 공원에 소수 인종이나 저소득층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가난한 이들이 탄 버스가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155 페이지)

 

권력은 저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다. 고대에는 한 사람이 지배했으나 오늘날에는 크고 작은 사회가 많은 사람을 지배한다. 플라톤은 알고 있으나 활동하지 않는 사람과 활동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구별했다. 플라톤식의 지식과 행위 분리는 모든 지배 이론의 뿌리가 되었다.(158 페이지) 기술이 계속 진보하고 이에 따라 기능도 계속 달라지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고안한 것이 균질 공간이다.(179 페이지)

 

균질 공간에서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균질 공간은 화폐 같은 공간이며 모든 기능과 용도에 대응하려는 자본주의의 공간 원리였다. 르페브르는 기능과 형태가 다른 공간을 이역(異域) 즉 헤테로토피아라 불렀다.(185 페이지) 정신병원, 감옥 등의 격리 시설, 홍등가, 묘지, 박물관, 도서관, 영화관, 전원 입사체 기숙사, 양로원, 병사(兵舍), 피난소, 유대인 거주 지구나 흑인 거주 지구 등이 근대의 헤테로토피아다.

 

양로원의 경우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지내는 공간이기에 헤테로토피아다. 근대 사회는 노동력이 발휘되어야 기능하는 사회다. 저자는 아파트가 획일적인 이유를 분양받을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생산하기 때문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용(用), 강(强), 미(美)라고 표현했다. 유용해야 하고, 내구력이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다.(285 페이지)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 높고 질 좋은 나무를 고르고, 아주 멀리서 큰 돌을 가져왔다. 기둥을 여러 개 세움으로써 가을에는 낮이 짧아져 어둠으로 들어가고 봄이 되면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의 움직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기둥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함께 세운 기둥에는 공동체의 염원과 기쁨이 차고 넘쳤다.(288 페이지)

 

땅을 딛고 빛을 받아 빛나는 수직 기둥은 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두의 바람을 담아 땅에 누운 돌을 일으켜 세우니 돌은 그야말로 존재감을 뽐내는 큰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놓인 땅과 하늘과 자연이 이미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은 눈에만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공동체 사회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구축함으로써 모두의 큰 기쁨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건축은 나무처럼 자란다고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몸처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295 페이지)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쳐다보고 마는 물체가 아니다.(296 페이지)

 

건축주는 건축가든 사용자든 건축물이 잘 자라 미래로 잘 전해지도록 공감과 공유의 기억이 풍성한 공간을 만들 책임이 있다. 저자는 건축이 존재하는 원천은 모든 이의 기쁨에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말대로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지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 매료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3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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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 - 고전에서 찾은 나만의 행복 정원
장재형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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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의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은 저자가 읽은 고전에서 길어올린 사색의 편린들을 다듬어 교훈의 형식으로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한 달에 50권 이상의 책을 읽는 분이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2장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3장 단 한 번뿐인 삶, 욕망하라. 4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5장 내 삶의 의미를 묻다. 6장 행복해지고 싶을 땐 등이다.

 

각 장에는 세부 주제가 있다. 1장에는 자아, 여행, 독서 등이 있고 2장에는 사랑, 타자, 슬픔 등이 있는 방식이다. 자아에 해당하는 작품은 헤세의 ‘데미안’이고 여행에 해당하는 작품은 라이언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다. 모두 28편의 고전이 망라되었다.

 

첫 작품으로 호명된 헤세의 ‘데미안’에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超人)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장의 제목인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데미안‘의 구절에서 유래했다. 이런 방식의 유기적인 구성이 이 책의 특징이다.

 

책에는 은유가 풍성하다. 은유 없이 사유는 가능하지 않다.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말,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영양제라는 말,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말, 인생은 누군가가 헝클어놓은 실타래(페르난도 페소아)라는 말 등이 모두 훌륭한 은유다.

 

물론 이런 말은 계속 쓰면 진부해진다. 새로운 은유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책에 나오는 작품 중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는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늘이 운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에 시인은 우편배달부에게 그것이 메타포(은유)라고 말한다.

 

저자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다룬 슬픔이라는 장의 제목을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로 설정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말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한 말이다. 사랑이라 했거니와 스피노자는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에 동반하는 기쁨’이라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는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증오가 선행되지 않은 사랑보다 한층 더 크다는 말도 했다.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용서일까? 어떻든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한 철학자다. 그가 말한 욕망이란 갖지 못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나타난 장애, 덫, 기회 등을 가로지르며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그것은 그가 역량 자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가난과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했다. 인간은 어느 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것처럼 평생 지속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이나 단기간에 행복해지지 않으니 평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은 기다림이기도 하다.

 

앙드레 지드는 기다림이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말했다. 괴테는 노력하는 사람만이 방황한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생애는 희망에 의해 끊임없이 기만당하면서 죽음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도 있음을 기억하자.

 

저자는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를 다룬 장에서 한 말이다. 안네는 글을 쓰는 순간에는 어떤 슬픔도 잊을 수 있었고 새롭게 용기가 솟아났다고 말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은신처에 숨어 살기 시작한 열세 살 때부터 2년 뒤 나치에 발각되어 끌려가기까지 써내려간 일기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고전 문학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관건은 입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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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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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인도(印度), 요가, 파괴적 사랑, 식이장애, 깨달음 등의 키워드로 분석할 수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인도 마이소르 아쉬탕가 요가 연구소에서 요가 아사나, 요가 철학, 산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쓴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요가 수행 자체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은 아니지만 기법보다 중요한 정신에 대해 회의하는 형식으로일망정 많은 사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요가 강사인 정윤희라는 여자로 그녀는 요한이라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윤희는 인도로 건너간다. 그녀가 단행한 것은 수행이기보다 여행이었다. 그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카르마의 문제점은 물론 요가 수행자들의 욕심 등을 불편하게 바라본다.

 

윤희는 요가에 대해 이런 의문점을 갖는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제어함으로써 요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욕망이 모두 소진되어 무력해지고 마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61 페이지) 윤희는 사랑하는 사람 요한의 난치병을 보며 그에게 그런 삶을 허락한 신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몸부림친다. 윤희는 급기야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기에 그런 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윤희는 요가 강사로서의 삶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진짜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고통스러운 아쉬탕가 요가를 그만 두지 못하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소설은 윤희가 한국에서 만난 요한과의 일을 한 챕터에 걸쳐 이야기하고 다음 챕터에서는 인도에서의 사건을 전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작품이다.

 

윤희는 교회에서 요한을 알게 된 이래 그의 작곡가로서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문에는 요가에서 가장 큰 죄악은 살인도 절도도 투기도 아닌 무지라는 말이 나온다. 무지의 늪에 빠진 사람은 끊임없이 죄악의 업보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는 드물게 만나는 것인 만큼 귀하다. 여덟을 의미하는 아쉬토와 나뭇가지 또는 단계를 의미하는 앙가의 결합어인 아쉬탕가는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서 제시된 요가의 여덟 가지 측면을 의미한다.

 

요가는 결합을 의미한다. 요한의 부모는 큰 자산가임에도 아들을 치료하느라 재산을 소진하고 요한은 몸 때문인지 병적인 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윤희는 요한의 그런 모습을 보며 요한도 맑고 환하게 빛나는 신의 아들이 아닌 더럽고 추악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윤희는 식이 장애를 앓는다. 그녀는 새벽에 요가 수련만 마치고 나면 종일 자신의 손과 입에서 음식들을 떼어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나 인도에서 그녀가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 외에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절제가 주요 미덕인 요가 수행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인 듯 하다. 윤희가 어릴 적부터 앓아온 폭식증이 재발한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면서부터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가 인도로 오며 가장 바랐던 것은 그저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정량의 음식만을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어서,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 나누고 싶지 않아서 인도 마이소르 땅까지 도망쳐온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는 요가 수행을 하는 지인 언니들의 위선(?)에 분노감을 표출한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 줄 모르고 그저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무언가를 비우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수련을 해나가는 요가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무언가 더 가지기 위해 요가까지 하는 사람들...”(232 페이지) 상당히 아픈 이야기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깊이 돌아보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요가 정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못지 않게 윤희가 앓는 폭식증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은 윤희가 인도 여행에서 도움을 받은 케이와 나누는 이야기로도 눈길을 끈다. 어차피 똑같은 수련법이라면 왜 굳이 이곳 마이소르까지 와서 매일 수련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케이의 말에 윤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논리를 들려준다.

 

윤희는 아쉬탕가 요가를 접하고 새벽마다 똑같은 순서의 수련을 반복하다보니 차이란 반복되는 것들의 차이고, 반복이란 차이 나는 것들의 반복이라는 ‘차이와 반복‘의 철학이 받아들여지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삶과 철학과 요가가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 같다고 말하는 윤희는 회의(懷疑)하고 시달리니 어쩐 일인가?

 

새로운 깊이, 몸으로 부딪치는 현실의 접면이란 말을 차이와 반복의 문제의식으로 읊조린다. 요가라고 불리는 원초적 선정(禪定) 수행(일지 스님 지음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참고)이란 말도 아울러.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소설이 재미를 찾아가게 하는 것 만큼 수행과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드물게 느끼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차문디 언덕이란 남인도의 옛 도시 마이소르에 자리한 언덕이다. 이곳에 1001개의 돌계단과 함께 그 위에 차문디 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있다. 차문디 언덕 계단을 오르며 동행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맨발로 산을 올라가는 고행이나 단식 또는 시바 신의 이름을 거듭 염송하는 것과 맞먹는 영적인 공덕을 가진다.(에리얼 글룩리크 지음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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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 교수의 과학 논문 쓰는 법
원병묵 지음 / 세로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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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 교수의 과학 논문 쓰는 법‘은 몇해 전 읽은 김기란의 ‘논문의 힘’에 이어 읽는 두 번째 논문 책이다. 나에게 논문 쓰기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이기에 참고용으로 읽은 책이다. “논문 쓰기는 delicate tension 과정의 연속”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delicate tension은 칸딘스키의 작품 이름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연구가 완결되어 데이터 정리가 가능한 상태에서 일주일만에 논문을 완성하여 투고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연구자는 논문 쓰기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논문 작성에는 일정한 글쓰기 훈련이 필요하며 이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과학 논문은 과학적 주제를 다룬 '논리를 갖춘' 글이다. 논리적 사고의 구조화가 논문 쓰기를 통해 우리가 진짜로 배워야 할 기초 역량이다.

 

논문 쓰기는 아주 능동적인 작업이다. 저자는 과학이라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탐험가라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언제든 길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이라면 논문은 연구에서 얻은 해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글이다.

 

연구가 우수해야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연구를 잘 한다고 논문을 잘 쓰는 것은 아니며 논문을 잘 쓴다고 연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논문을 왜 쓰는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언제까지 써야 하는가이다. 사안이 정확하고 명확하면 굳이 힘주어 주장할 필요가 없다.

 

과학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글이고 매끄러운 글은 그 다음이다. 논문 쓰기는 주장할 내용이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차근차근 글로 풀어 쓰는 과정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자신의 연구를 초등학생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논문을 쓰려면 무엇보다 연구 주제(글감)가 좋아야 한다.(43 페이지) 그 이후 주제가 잘 드러나도록 구성(틀잡기)을 잘 해야 한다.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 결론을 예상하고(초기의 예상이 결국 틀리는 경우도 많지만) 연구의 핵심 내용과 연구 방향을 포함하여 전체 틀을 잡아 보는 훈련을 하면 연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힘을 집중할 수 있다.

 

연구 노트에 적은 연구 내용을 참고하여 핵심 주제나 결론을 하나의 짧은 문구로 표현하는 훈련은 추후 논문 제목을 정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의외의 결론에 도달하면서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마무리되는 연구와 논문은 얼마든지 존재한다.(45 페이지) 수많은 원인으로 논문 작성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을 왓슨 증후군이라 한다.

 

일주일만에 논문을 쓰는 순서는 이렇다. 1일; 제목과 초록(抄錄) 작성. 2일; 그림과 표 완성. 3일; 문헌 탐색과 정리. 4일; 서론 작성. 5일; 본론 작성. 6일; 결론 작성. 7일; 전체 조율 및 논문 초고 완성 등이다.(제목, 저자, 초록, 서론, 본론, 결론, 참고)

 

학술지 논문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며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래서 학술지 논문은 길이가 짧은 편이다. 박사 논문은 통상 다수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며 여러 학술지 논문을 종합한 내용으로 구성되기에 짧게 쓰기가 어렵다.(48, 49 페이지) 논문 쓰기의 본질은 끊임없는 연습(혼자 하는 글쓰기)과 훈련(논문 지도 받는 것)이다.

 

저자는 학술지 논문과 학회 초록 작성을 지도하면서 또는 시험 답안을 채점하면서 학생들의 글쓰기 수준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 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시에 재미있고 유익하게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논문의 제목은 상품의 브랜드와 같다. 초록(抄錄)은 1) 연구 주제의 일반적 배경과 이슈. 2)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 3) 연구의 핵심 방법과 결과. 4) 주요 결과의 상세 요약. 5) 연구의 기여와 전망 등을 쓴다.(77 페이지) 서론(序論)은 초록의 확장이다. 선행 연구를 설명하는 문구 바로 뒤에 해당 문헌 번호를 인용하는 것이 좋다.

 

문장이 다 끝난 후에 인용하면 어디까지가 선행 연구인지가 모호해진다. 표절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행 논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문장을 완전히 새로 쓰는 편이 좋다.(89 페이지) 표절 검사 프로그램으로 조사했을 때 중복성이 보통 15퍼센트 이내이면 괜찮다. 논문의 본론은 결과와 논의를 포함한 부분이다.

 

결과를 설명하는 문단은 두괄식 전개가 좋다. 본론에는 결과와 함께 내 연구의 결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학문의 계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101 페이지) 결과와 논의를 적을 때는 사실 그대로 적는 것이 좋으며 지나친 형용사나 부사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102 페이지) 논문은 주장하는 글이지만 결과가 명확하면 주장하지 않아도 결과가 스스로 빛난다.

 

논문은 결과를 사실 그대로 적고 논의하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차분히 서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의 논문은 하나의 결론을 강조한다. 결과는 연구에서 얻은 주요 데이터를 말한다. 결론은 연구의 최종 종착점이다. 대부분 짧은 논문의 결론은 하나다. 초록에서는 결론이 뒤에 나오지만 결론 부분에서는 곧바로 결론부터 쓴다.

 

초록은 결론을 얻기까지의 목적과 과정을 먼저 서술하고 결론을 요약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결론 내용을 먼저 서술하고 그 결론을 얻게 된 주요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면 된다.(106 페이지) 결론에서는 이전 연구의 한계를 명시하며 현재 연구의 최종 성과를 확정한다. 결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앞으로의 연구 전망을 서술한다.

 

연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면 좋을지, 어떤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지, 향후 연구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적어 주면 후속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 논문은 연구 내용이 압축되어 있고 용어와 내용이 전문적이라 관련 분야 연구자라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논문은 재빨리 읽고 핵심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인 말하기는 논문을 쓰는 순서와 맥락이 같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면 논문 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 무슨 이야기든 핵심을 먼저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배경지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청중을 천재라 가정하지 말라. 어떤 이야기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이야기의 핵심 결론을 한 번 더 요약 강조하고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추가될 수 있을지 전망과 예측을 곁들이면 좋다. 박사 주제는 되도록 빨리 잡는 것이 좋다. 초반에 박사 주제의 방향을 잘 잡으면 길이 스스로 열린다. 좋은 주제를 찾으려면 선행 문헌 조사가 거의 완벽해야 하고 학문의 흐름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 박사 주제와 연관 지으라.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종착점에 도달할 수도 있기에 모든 경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연구 노트를 성실하게 적으면서 아이디어의 흐름을 잘 이어가라. 연구실 밖에서도 훌륭한 연구 활동이 가능하다. 가끔은 온전히 쉬는 것이 연구에 더 큰 도움에 되기도 한다. 다른 분야의 학문에도 관심을 기울이라.

 

다른 인접 학문에 대한 관심은 더 넓은 기회를 열어 줄 것이다. 모든 일에 자신을 믿으라.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 온 것으로도 충분히 잘한 것이다. 젊은 동료들과 소통하라. 도움받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 언젠가는 젊은 동료들에게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적절한 휴식을 취하라. 확신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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