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만나고 이야기하라 - 내 삶에 변화를 끌어내는 핵심 전략
배정환 지음 / 미디어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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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만나고 이야기하라는 책. 가만이(가서 - 만나고 - 이야기하라) 정신을 말하는 책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지만 저자는 우리의 일에서 그런 기회는 별로 없다고 말한다. 사실 일기일회란 대단한 기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하는 사람, 만남을 다시 오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하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대부분 실수하면 다시 해도 되는 일들이 많기에 결단력 있게 시행하라는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리라. 안락지대에서 벗어나야 도전할 수 있다는 말을 명심하자. 성공은 반복되는 축적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도 명심하자. 만나고편에서 저자는 아무 기대감 없이 상대에게 다가간다면 거절 당해도 크게 아플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절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일상에서 거절 당하는 연습을 수시로 하자. 한 번 거절 당한 것은 한 번 당한 것이지 영원히 거절 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만나고편에서는 자신의 기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이야기하라편에서 중요한 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인다. 말다툼하지 말라. 적절히 질문 하고 충분히 들어주고 제대로 말하라.

 

자신의 감정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지 말자. 상대와 장소에 따라 포장하는 것도 소통의 기술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생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한다. 행동을 끌어내기 위해 사실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만 제공하면 된다.” 상대를 대화의 주인공으로 만들라. 어려운(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역질문을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질문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식으로.

 

이야깃거리를 수집하라. 많은 사람이 흥미를 느낄 만한 대화 소재를 찾아라. 인문학 책 읽기가 중요하다. 메타인지란 말이 들린다.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솔직한 것이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작점일뿐이다.

 

물론 시작점은 중요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세 가지 늪이 있다. 한 번 나에게 발생한 일이 계속 될 것이라 생각하는 영속성의 오류, 하나의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것들도 문제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파급효과의 오류, 하나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문제투성이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인격화의 오류 등이다. 진정한 리더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조화롭게 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브랜딩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강점 하나는 있다. 잘 하는 것 하나를 월등하게 만드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급속히 변하는 시대에 그 누구에게도 대체되지 않는 존재가 되려면 나만의 브랜딩이 필요하다. brand는 낙인(烙印)이란 의미도 있다. 소에게 낙인을 찍어 자기 것을 구분하듯 비슷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차이를 만들어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읽은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게 브랜딩된 나를 만들어준다. 중요한 점은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로, 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히트작이 필요하다. 나는 공부의 완성은 책 (저술)이라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면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 지금은 스펙(자격증, 학점)의 시대가 아니라 포트폴리오(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과 역량)의 시대다. 나만의 무대에서 인생을 연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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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몽골 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이경수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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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대몽 항쟁 기간 고려의 도읍지였다. 고려가 도읍을 강화로 옮겨 항전한 몽골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몽골이 고려를 치지 못한 것인지 치지 않은 것인지, 여부다. 저자는 몽골이 고려를 치지 못했다고 결론짓는다. 몽골이 고려를 본격적으로 친 시기는 1231년이다.

 

몽골은 자국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구실로 고려를 공격했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은 나라다. 대몽항쟁기 고려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으로 갯벌에 편하게 앉았고 방향 전환도 원활히 했다.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할 때 몽골은 가장 먼저 강화에 있는 성들을 파괴하도록 했다. 성곽에 대한 심적 부담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화의 성은 세 겹(내성, 외성, 중성)으로 이루어졌었다. 성곽은 강화도를 지키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 내성, 외성, 중성의 순서로 건설되어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강도(江都) 정부를 지켰다. 그러나 1259년(고종 46년) 몽골 사신의 모진 독촉 아래 파괴되고 말았다. 성곽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서 놀란 여자들이 슬피 울었다. 작업에 동원된 남자들 역시 고통의 눈물을 뿌렸다.

 

당시 몽골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총력전을 시도한다면 강화도 함락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금, 송 등과 더 큰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 온 힘을 쏟을 수 없었다. 저자는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의 지형적 특징이 몽골군에게 근본적인 난관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강화 천도(遷都)는 무신정권기에 단행되었다. 해도입보(海島入保)란 말이 있다. 해도로 백성들을 들어가게 해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다.

 

강화도에는 갯벌이 있었다. 이는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천혜의 선물이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벅찬 장벽이다. 몽골군은 물에 대한 두려움보다 갯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105 페이지) 강화도 해안은 대개 절벽이었고 그 아래는 갯벌이었다. 유빙(流氷; 성엣장)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강화도의 지형조건이 아무리 방어에 유리하다고 해도, 강화도 수군의 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육지 백성이 일찌감치 강화도 조정을 버렸다면, 그래서 강화도 정부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로운 섬 하나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장기간의 대몽항쟁은 불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118 페이지)

 

여몽전쟁의 승자는 당연히 몽골이지만 국지적일망정 고려도 무시못할 승리를 거듭했다. 수성전만 고집하지 않고 성밖에서도 전과를 올렸다. 강화도에는 삼별초가 있었다. 그들은 고려 조정이 개경 환도를 선언하고 삼별초를 혁파하자 봉기했다. 삼별초는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되었다. 최우가 밤에 도둑을 잡기 위해 조직한 군대이지만 대정부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삼별초는 좌우별초와 신의군(神義軍)를 이르는 말이다.

 

삼별초가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선포한 곳이 강화였고 그들을 키우고 단련한 곳이 강화였다. 외포리, 염하(강하해협) 등은 삼별초가 진도로 떠나간 출항지로 추정된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며 한 것은 산성입보(山城入保), 해도입보(海島入保)를 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륙 주민은 산성으로, 해안가 주민은 섬으로 피해 보호를 받으라는 말이다.

 

저자는 고려 산성 주변은 민둥했을 것이라 말한다.(민둥하다; 산에 나무가 없다. 겸연쩍고 어색하다.) 적이 숨지 못하게 수목을 베고 암석을 치웠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포(砲)는 화약과 무관한 투석기, 불덩어리를 쏜 기계였다. 몽골이 세계로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가 의도적 잔인성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지레 겁먹고 항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런 작전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잔학한 모습에 놀라 성문을 여는 일도 있었지만 오히려 각오를 다지며 끝까지 당당하게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김윤후는 몽골의 2차 고려 침입 때는 승려였고 5차 고려 침입 때는 방호별감이었다.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 죽인 공을 인정받은 결과다.

 

고려, 하면 팔만대장경을 빼놓을 수 없다. 팔만대장경의 다른 이름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다. 저자는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다시 새기는 데에 팔만대장경 조성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팔만대장경이란 명칭은 조선에서도 있었다... 雕는 독수리 조, 새길 조란 글자다.) 초조대장경 조성 시기는 1011년부터 1087년이다. 현종과 문종 때 주로 이루어졌다. 대장경은 고려 문화의 자부심이자 믿음의 구심점이었다.

 

팔만대장경은 서문 밖 판당에 보관하다가 강화도 선원사로 옮겨 보관했고 지금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다. 고려는 송나라가 대장경을 만들자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다. 고려는 송의 제후국으로 행세했으나 안으로는 천자국의 격식을 갖추었다. 전하 대신 폐하, 세자 대신 태자를 명칭으로 사용했다. 폐하의 폐는 계단을 의미하는 말로 신하가 황제를 직접 부르지 못하고 계단 아래를 바라봐 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 황제의 호칭이 되었다. 고려는 과인 대신, 짐, 6조 대신 6부라는 명칭을 썼다.

 

고려는 송과 요(거란), 송과 금(여진)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력을 높이 샀다. 청(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전쟁을 막고자 했던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고려를 통해 학습된 결과인지도 모른다.(189 페이지) 고려는 몽골 침략(1231년), 강화 천도(1232년), 항복(1259년), 환도(1270년)를 치러냈다.

 

몽골은 대개 음력 7, 8월에 침략을 시작해 그해 말이나 다음 해 봄에 물러났다. 그런데 강화도를 공격할 때는 한창 싸워야 할 겨울에 유빙 때문에 길이 막혀 답답한 지경에 처했다. 몽골이 가을에 주로 침입한 것은 전략상 이유에 의한 것이다. 추수를 앞둔 시기이기에 해당 나라의 농민들이 수확 때문에 전투 참여에 소극적이게 되고 수확 직전의 농작물에 불을 지르거나 농작물을 짓이기면 침략당한 나라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어 몽골은 훨씬 편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말도 고려(考慮)의 대상이었다. 몽골 말들은 겨울에 강했지만 더위와 습도에는 약했다. 더우기 몽골 사람들에게 고려의 겨울은 겨울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털 등으로 만드는 몽골의 게르는 겨울이 오기 전에 갖춰야 하는 월동품목이었다. 이 시기가 홀가분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시기였다.

 

저자는 몽골이 저고여 피살 6년만에 그 사건의 당사자인 고려를 응징하겠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은 공위시대(空位時代; 칸의 자리가 빈 시대)와 관계될 것이라 판단한다. 곳곳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던 제국의 유력자들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돌아와 쿠릴타이(몽골 제국 의회)에 참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공백이 불가피했다는 의미다.

 

백성들이 섬에 입보한 상태에서도 정부가 육지 전역을 통제할 수 있었던 까닭에 몽골과의 장기전을 치를 수 있었다. 금, 송에 대한 침공 작전으로 몽골은 고려에 대해 총공세를 펼치기 어려웠고 평원에서의 기마전에는 탁월했지만 산악지방의 공성전에는 상대적으로 미숙했다. 몽골군에게 해전(海戰)에 대한 공포는 큰 한계였다.

 

저자는 몽골이 마음만 먹으면 강화도를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견해는 몽골의 군사력을 너무 높게, 고려의 수비력을 너무 낮게 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에 강화도는 청나라에게 함락되었다. 이유는 청나라가, 투항해온 명나라 수군을 활용했고 홍이포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방어체계가 많이 약해졌고 대몽항쟁 말기부터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해안선이 밋밋해져 바닷물의 흐름이 완만해진 것 등에 있다.

 

대몽항쟁 후반기에 고려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세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머물며 분탕질을 했고 조운로(漕運路)도 위협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면 소금기가 다 빠질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다는 점이다.

 

책에 화보들이 수록되었다. 그 가운데 삼랑성(三郞城)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정족산성으로도 불리는 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 안에 전등사, 고려 가궐지, 정족산 사고가 있다.

 

이 책은 몽골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드문 고려의 대몽항쟁의 근원은 육지 백성의 힘이다. 물론 그랬던 백성들이 후에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고 몽골군의 침공 소식에 기뻐할 정도로 변했다. 지방관을 죽이고 땅을 들어 몽골군에게 넘기는 일도 벌어졌다. 고려가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화의를 맺고 나라를 지탱한 것은 강화도 조정이 존속했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항전 덕분이다.(2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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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정은 타이밍이다 - 1%의 미련도 남지 않게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하는 법
최훈 지음 / 밀리언서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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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정은 타이밍이다‘는 흥미로운 책이다. 선택불가증후군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직장인이 쓴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쓴 최훈 저자는 프로결정러가 되었다고 한다. 주의할 말이 있다. 프로결심러란 말이다. 이는 결심만 할뿐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말이고 프로결정러는 선택의 어려움에 빠져 있다가 그것을 극복한 사람을 말한다.

 

저자는 선택과 결정을 하지 못해 수십 번 땅을 치고 후회했고 회사에서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고 도망치고 싶었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은 선택과 결정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고민할 시간을 마련해주고 일의 완성도를 높이며 올바른 답안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중요한 점은 후회를 두려워 하면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한 번 밖에 없는 나의 삶을 제대로 살고 싶다면 사는 동안 마주하는 수많은 중요 순간에 내가 원하는 선택과 결정을 하면 된다고. 가려야 할 것은 신중함과 결정장애 또는 신중함과 소심함이다. 저자는 최고의 선택과 결정을 위한 다섯 단어로 긍정, 심플, 확신, 완벽(주의 벗어나기), 경험 등을 꼽았다.

 

저자는 데니스 그레고리의 ’내 머릿속 원숭이 죽이기’란 책을 소개한다. 사람의 머릿속에 살며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고 나의 삶에 간섭하고 쓸데없는 생각들을 점점 많이 만들어내는 원숭이를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숭이는 내 자아이기에 없앨 수는 없지만 통제할 수는 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그렇기에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예상 외로 말하기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선택과 결정을 어려워 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없기에 확신에 찬 말을 함으로써 선택과 결정을 쉽게 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불확실한 말습관이 결정장애를 낳는다.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주어로 하는 말을 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선택 후 일어날 일을 두려워 하지 말자. 선택과 결정 앞에서 당당해지자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말이 결정하지 않으면 기회는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 결정러는 프로 분석러다. 저자는 철저하게 고민해야 할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1) 나의 선택과 결정이 기회와 연결되는지 여부, 2) 가능하면 비용이 적게 드는지 여부, 3) 어떤 것이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4) 나의 선택이 지금 시기에 적합한지 여부, 5) 자신이 원하는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등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때로 포기도 현명한 선택이란 점이다. 중요한 점은 포기가 실패는 아니라는 점이다. “선택과 결정이 어렵다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힘에 부친다면 마음 편하게 포기하라. 새로운 기회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온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다.”(153 페이지) 책을 읽으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이 있다. 명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기를 충분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해야 현명한 선택, 결정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을 알아야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에는 뜻 밖에 정조(正祖) 이야기가 나온다. 일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신중하게 하여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작은 일을 함부로 하게 되면 큰일도 함부로 하게 된다. 큰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작은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최선의 선택은 실천이다.

 

저자는 자신이 고려하거나 고민하는 요소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정, 선택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선택, 결정을 어려워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기도 선택이고 결정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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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22년 1월 28일)은 제가 이틀째 강화도(江華島) 투어를 다녀온 날입니다. 덕진진(德津鎭)의 공조루(拱潮樓), 광성보(廣城堡)의 안해루(按海樓)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조루는 바닷물이 팔짱을 낀 모습으로 돌아드는 곳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이름으로 해석됩니다.(拱; 팔짱낄 공) 안해루는 바닷물을 어루만지는 곳의 누각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按; 누를 안, 안마할 안)

 

공조루는 표현이 문학적일뿐 아니라 바닷물이 8자로 돌아드는 형국이 연출되기에 이름과도 어울리는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보(堡)는 일정 규모를 가진 부대 단위나 지휘소를 말합니다. 병사 주둔지, 창고 등도 포함됩니다. 돈대(墩臺)는 경사면을 절토(切土; 흙을 깎아내림)하거나 성토(盛土: 흙을 쌓음)하여 얻은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을 말합니다.

 

용진진(龍津鎭)의 참경루(斬鯨樓)는 고래를 벤다(잡는다)는 의미의 누각입니다. 고래는 조선을 함락시켰던 청나라를 의미합니다. 석모도(席母島), 보문사(普門寺),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星壇) 등은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성곽에서 물이 흘러내리도록 홈을 판 돌을 의미하는 누조석(漏槽石)을 보고 조선 궁궐을 오래 해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습니다.(槽; 구유 조) 드넓게 탁 트인 서해의 수평선을 보고 700여 미터의 김포 강화 해협을 보니 감회가 특별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지 못한 교동도(喬桐島)를 언제 가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교동도는 연산군이 왕 자리에서 내려와 유배를 간 곳으로 유명합니다. 구름에 뜬 섬이라는 의미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습니다. 현재의 이름인 교동도의 교는 높을 교자입니다. 구름에 떴으니(높이 있는 것이기에) 높을 교자를 썼을 것입니다.

 

재인폭포 근무 후 박대표님을 뵈었습니다.(2022년 1월 29일) 로드맵과 비전을 제시하는 특유의 위의(威儀; 무게가 있어 공경할 만한 거동, 예법에 맞는 몸가짐)에 고개만 끄덕이던 저는 두 가지의 맞장구를 쳤습니다.

 

1) 지성인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이리로도 저리로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를 포용할 수 있는 경계에 자리한다는 말씀에 저는 중국 전국 시대의 철학자 장자(莊子)의 도추(道樞)라는 말을 했습니다. 도추는 도의 지도리(경첩)란 말로 ”이 지도리에 섰을 때 어떤 것들의 상대성이 보이고 그것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다. 어떤 능선도 아닌 산의 정상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산의 여러 능선들(해법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다.“란 말입니다.

 

2) ‘강화도 서편의 고려산 산자락에 심도학사(尋道學舍)라는 수행센터가 있습니다. 이 센터의 주인인 종교학자가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뒷받침하는 제목이고 글이지요.’ 이 말에 대표님은 (부끄럽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 공부한 것을 실천해 지식인을 넘어서는 지성인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강화 고려산에 올라 서해를 내려다본 것이 지난 2013년입니다. 이때 마음에 품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저 작은, 구체적이지 않은 생각이지만 내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란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그 생각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시간 앞에 선 것 같습니다.

 

”과장된 평가로 들뜨게 하여 이미 나이 든 나를 빠리로 유혹하고, 논문지도 교수와 그곳 작가들을 소개해주고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는 지적 방랑의 길로 이끌어주셨던 교수 겸 문학평론가 고(故) 알베레스 선생님을 생각하면서“란 글로 ‘다시 찾은 빠리 수첩’이란 책의 머리 부분을 장식한 시인겸 철학자, 프랑스 문학자 박이문 교수가 생각납니다. 이 분의 고백은 그대로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렵고 생소한 공부의 길에 함께 해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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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강화 평화 시민 연대 회원분들께 재인폭포 해설을 한 지난 18일은 작은 이정표 하나가 세워진 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날 해설은 의뢰는 1주일 전에 받았지만 수술(19)을 하루 앞둔 18일 아침 820분 서초구의 서울 성모병원에 도착해 코로나 검사를 받고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잠시 구상을 하고 한 해설이었다.

 

이날 해설에서는 강화, 김포 분들을 고려해 김포 - 강화 해협 이야기와 몽골군의 고려 수도인 강화도 공격(1236), 몽골 군사와 혼연일체가 되어 극대화된 전투능력을 보인 몽골 말, 소 한 마리를 잡아 가루를 내어 양의 오줌보에 담으면 부피가 크지 않지만 한 병사의 1년치 식량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들이 강화도를 함락시키지 못한 이야기 등을 했다.(내 해설을 들은 분들은 15분 이상의 강화 분들과 한 분의 김포 분이었다.)

 

이 점이 남다른 점이었다. 즉 재인폭포든 베개용암이든 연천의 지질명소만 이야기하던 관례를 지양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또는 예우 차원에서 연천 이야기 사이 사이에 방문객들의 고향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가 서울에서 문화 해설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님에도 어떤 곳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느끼지 않지만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강화도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주목할 부분은 더 있다. 주차장 옆의 프롬나드(걷기) 조형물을 보며 직립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 뒤 연천과 강화, 김포의 공통점인 DMZ 접경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살고 있는데 용암이 덮쳐온 것인지, 아니면 용암이 지나간 뒤 구석기인들이 정착한 것인지 물으며 걷기의 중요성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했다. 짐승의 발자국을 의미하는 자귀라는 말과 짐승을 잡기 위해 그들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자귀 짚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프롬나드 조형물을 보며 이 말을 하려 했었다. 구석기인들이 자귀 짚을 때 살금살금 걸었을까요, 아니면 직립한 사람들이었으니 넓고 힘차게 걸음을 떼어놓았을까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덧붙일 말은 청나라가 침략해온 병자호란(1636년 이후) 당시 강화도의 군사들은 고려 당시의 몽골군을 생각하며 자만했다는 말이다.

 

청나라는 투항해온 명나라 수군을 대거 동원했고 홍이포(紅夷砲)라는 장거리 대포가 있었다. 또한 고려 당시 힘을 발휘했던 성곽들이 형편 없이 무너진 탓도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조선은 패했다.

 

강화에는 조선이 청나라에 함락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김상용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김상용 순절비도 있다.(김상용은 병자호란 패전으로 청나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산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란 시조를 지은 김상헌의 형이다.) 강화도는 지주들의 폭압적 수탈 사례와 소작쟁의 등이 없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고려산에 올라 서해 바다를 내려본 지난 2013년 이후 9년만에, 그리고 강화 스토리 워크 행사에 참여해 성공회 성당, 고려궁지,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 조양방직 등을 둘러본 지 3년만에 다시 강화도를 밟게 되었다.(고려산에 올라 서해를 바라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9년전 일이라니 놀랍다.) 2013, 2019년 모두 좋았지만 이번에는 투어란 이름의 공부여서 마음 가짐이 다르다. 함께 하는 분들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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