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사람에게 묻고 말 할 사람에게 말하자. 나이가 많아진다고 저절로 지혜와 배려심이 느는 것이 아니듯 지위가 높아진다고 그렇게 책임감이 커지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늘 새기자. 나는 아집(我執)과 상투(常套), 위선(僞善)과 가식(假飾)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미워한다.

 

물론 그런 유형의 인간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고 자제하고 늘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편 없는 사람들의 말에 마음쓰지 말자. 불확실하거나 미진한 말에는 바로 반응하지 말고 묻자.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애쓰되 역지사지해야 할 때도 있음을 잊지 말자.

 

거친 감정을 알아차림으로써 외화하지 않고 사라지도록 하자. 정확함을 지향하되 그런 사유에 근거해 나가는 말이라 해도 시기나 상황, 상대의 그릇을 고려했을 때 늘 적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싫은 사람들을 탄하기보다 좋은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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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역사 속 명화 이야기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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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세력들이 종교 미술 작품들을 우상으로 규정, 파괴하는 광기의 시간을 이기고 오히려 회화 열풍을 일으켰다. 교회나 왕실 등 부와 권력을 손에 쥔 후원자의 주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스템에서 새로운 시장을 적극 개척한 결과이고 미술품 소비층이 교황이나 왕을 비롯한 교회와 세속의 권력층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산된 덕이다. 그림 소재가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일반 시민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물건, 풍경 등으로 바뀐 덕이기도 하다.

 

루터는 교회 미술에 관대했고 칼뱅은 교회 미술을 우상시했다.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던 네덜란드 화가들은 (주문과 무관하게) 미술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것으로 우상 파괴라는 광기로 인해 빚어진 새로운 시대에 대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성을 배제한 작품을 절박한 심정으로 개발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을 그림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럽의 첫 나라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새 고객층인 시민계급이 요구한 독자성은 소재의 독자성이다. 당시는 사진이 등장하기 전이어서 당연히 사실적 묘사가 관건이었다. 기법의 독자성이 요구된 것은 19세기 사진의 등장 이후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등록 기준과 인정 대상은 부동산에 한한다. 동산(動産)인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보다 훨씬 많은 관람자를 루브르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음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후의 만찬은 부동성을 인정받아 회화로서는 아주 드물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르네상스에 뒤이은 바로크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시민회화가 폭발적으로 꽃핀 것도 캔버스가 도입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동산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 궁정의 식객으로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다빈치는 프레스코가 아닌 세코 기법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렸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화는 작업 속도가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실제로 예배당에서 올려다보면 생동감이 넘치지만 화집에서 자세히 보면 놀랄 만큼 대담한 터치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확대해서 들여다보아도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수정이 자유로운 유화와 템페라를 합친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 프레스코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리는 그림이다. 프레스코는 공공 공간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부동산 회화에 적법한 기법이라면 유화는 사적 공간에서 감상하는 동산 회화에 적절한 기법으로 가까이에서 감상해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정밀 묘사가 요구되었다. 집단 초상화는 네덜란드 특유의 현상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렘브란트의 공방(工房)행을 명문 미대 진학을 위해 유명 입시 미술학원에 입학한 미대 입시 준비생의 공방행에 비유할 수 있다면 15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방행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일찍 돈벌이에 나선 소년 가장의 공방행에 비유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현금 대신 그림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페르메이르가 3년치 빵값을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치른 것이 대표적 사례다.

 

렘브란트가 운영했던 공방은 위작 혹은 모조 그림을 생산한 가짜 그림 생산 공장이다. 당시 네덜란드 대중은 그림을 구매할 때 이미 화가라는 브랜드를 중요한 기준으로 택했다. 렘브란트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화가 브랜드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 화가였다.

 

자화상은 네덜란드 회화의 본질을 대변하는 특별한 양식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미술은 신과 성인을 그렸으며 궁정미술은 왕과 귀족을 그렸다. 그에 반해 17세기 네덜란드 시민 회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림으로써 대중이 시선을 집중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삶의 현장 즉 현실이라는 점을 일깨웠다.

 

평생 거울을 가장 자주 들여다본 화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렘브란트일 것이다. 그가 14년 동안 그린 자화상은 유화, 판화, 소묘를 망라해 무려 100여점에 달했다. 교회가 이자 금지령을 공표한 시기는 1179년이다. 당대 기독교는 무엇을 근거로 이자를 금지했을까? 레위기 25장 35 - 37절이다. 메디치 가문은 성경이 말한 이자에 대한 금기를 깨고 금융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구었다.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는 로마 교황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바치고 죄를 묻지 않겠다는 허가권을 얻어냈다.

 

로마 교황청과 교회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당대 회화에도 뚜렷이 반영되었다. 메디치 가문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이자를 이자로 보이지 않게 하는 공작’은 은행업의 모태인 환전을 교묘하게 발전시킨 수법이었다. 환전은 무거운 화폐 대신 간단한 서류를 지참하고 현지 환전상에 가서 현금화하는 시스템이다. 참된 부는 천국 곳간에 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었는데 교리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부정하면서도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교황청만큼 막대한 화폐 수입을 얻고 복잡한 재무 관리를 필요로 하는 기관은 없었다.

 

메디치가는 교황청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 코시모는 이자로 재산을 불린 파렴치한 금융업자라는 양심의 가책과 사후 영혼의 안식 문제로 두려워 하며 불안함을 덜어내고자 몸부림쳤다. 코시모가 교황에게 연줄을 대고 주기적으로 알현한 것도, 메디치 가문이 예술 지원 사업에 온 힘을 쏟은 것도 불안감을 덜어내고 영혼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절실한 바람에서 나온 행위였다. 미술사에서 17세기 네덜란드와 프랑스 미술은 똑같이 바로크 미술로 분류된다. 그러나 실제로 둘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으로 대표되는 시민 회화를 탄생시켰다. 프랑스는 짐은 곧 국가라는 말로 알려진 루이 14세의 초상화로 대표되는 왕실 미술이 주도했다.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측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론에 최고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미술에 학술로서의 권위를 부여해 체계를 갖춤으로써 전통 도제식 교육에 의존해온 길드에 대한 학술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은 새로 탄생한 아카데미가 시급히 완수해야 할 임무였다.

 

루이 14세는 아카데미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카데미는 플라톤이 아테네 교외의 성스러운 숲인 아카데모스에서 개설한 학원에서 비롯되었다. 국무장관 콜베르는 신하와 백성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군사력과 더불어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문화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간파했다. 콜베르의 일사불란한 지휘에 따라 왕실 미술은 태양왕을 자칭한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대신해 지상을 채우는 왕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장치로 화려하고 호화로운 문화력을 발휘해나갔다.

 

종교개혁 이전 왕의 권한은 교황의 중개로 신에게서 부여받은 권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함에 따라 왕들은 자신의 왕권은 신에게 직접 받은 신성한 권력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고 신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조합이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조직인데 비해 중세 길드 조합은 일을 시키는 사람 즉 스승(우두머리 장인)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당시 기도하는 사람(성직자)와 싸우는 사람(귀족)의 이중 지배를 받던 평민 노동자들은 각각의 업종에 속한 길드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각종 직업 행위에는 길드의 허가가 필요했다. 길드의 규약이 정한 몇 년의 수업을 마친 도제는 스승의 허가를 받기 위해 일종의 졸업 작품을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스승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출하는 작품을 마스터피스라 했다. 길드는 스승의 허가 없이 왕실 허가장만으로 개업하는 화공의 활동을 제한하게 해달라고 왕실에 정식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재위 기간에 펼친 예술진흥책의 중심축이 1803년 창립된 나폴레옹 미술관 즉 루브르 미술관이다. 나폴레옹이 군대를 파견한 이탈리아, 이집트,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스페인의 미술품과 출토품이 속속 루브르 미술관으로 들어와 수장고를 채웠다. 민중의 반발을 무릅쓰고 포도주세를 부활시킨 나폴레옹. 이미지로 통치하던 그의 정권을 뒷받침한 유일한 무기는 미술이었다. 하지만 미술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는 폴 뒤랑뤼엘이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상주의 그림을 부르는 게 값인 고가상품으로 변신시킨 것들이다. 미술상인 그는 악취미에 근본 없는 인테리어로 여겨지던 카브리올(‘비약; 飛躍‘을 의미) 레그와 금테 액자 조합을 역이용해 명품으로 변신시켰다.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는 구시대 루이 왕조의 궁정 취향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가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고집을 꺾고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순한 디자인 액자에 그림을 넣어 전시했다.

 

이 시기에는 어떤 액자에 넣어도 인상주의 회화는 꼭 사겠다는 고객이 넘쳐날 정도였기에 금테 액자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폴 뒤랑뤼엘의 판매 전략은 귀족 취미와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귀족 기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판촉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폴 뒤랑뤼엘은 비평가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자비로 인쇄 매체를 출간하고 화가의 브랜드화에 매진한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그가 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에 도전한 것은 저널리즘이 브랜드 제조 장치임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자크는 이제 비평은 비평가를 먹여살릴 뿐이라는 말을 했다. 시민이 미술 시장의 고객이 된 근대 이전에는 제삼자인 비평가의 조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회화와 조각의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사회, 그리고 교회의 주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문자의 의향에 따라 정해지는 주문 제작 방식은 미술품의 본질에 관해서 비평가라는 제삼자가 관여할 여지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기성 미술품을 전시 판매하는 시민 시장에서의 판매 역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품의 품질과 구매 여부 판단이 물건을 사는 사람 즉 고객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객의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비평가라는 바람잡이 즉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부추기는 새로운 시대의 직업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나 왕의 구체적인 주문을 받고 미술품을 생산하던 시대의 예술가들이 교회와 세속의 강력한 권력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일에 동원되고 부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대 예술가들이 권력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되어 수동적 또는 기계적으로 미술품을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나 조각품 등 미술품에 투영되는 예술가의 욕망은 교황이나 왕 등 권력자의 욕망 못지 않게 크고 강렬했다. 아니 더 크고 강렬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그들의 욕망은 자기 손으로 최고의 걸작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 그럼으로써 미술사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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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08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2-05-08 18:00   좋아요 1 | URL
앗. 네 감사합니다... 좋은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게으른 뇌에 행동 스위치를 켜라
오히라 노부타카 지음, 오정화 옮김 / 밀리언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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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 유지를 위해 목숨에 지장이 없는 한 현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려는 방어적인 뇌 구조 탓이다. 관건은 행동력의 근원이 되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측좌핵이라는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뇌는 변화를 피하는 한편 가소성(可塑性)도 갖는다. 큰 변화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작은 변화는 받아들이는 특성이다.

 

중요한 점은 양(量)에 집중해 질(質)에 이르는 것이다. 작은 것을 선택해 일단 행동하면 의욕이 뒤따른다. 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몸부터 움직이라는 조언과도 통한다. 등을 쭉 펴거나 바르게 고쳐 앉는 것만으로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앵커링 효과도 유용하다. 장소와 특정 일(또는 행동)을 연결짓는 것을 말한다.(앵커는 닻을 뜻한다.)

 

교회에 가는 것도 이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장소인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 효과다. 스스로 통제 가능한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아슬아슬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마감을 정해 VIP와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자. 바로 행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긍정적인 성공 이미지를 그리고 후자는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다.

 

불가능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뇌는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부감(俯瞰)이란 말이 있다. 높은 곳에서 구부려 전체를 보는 것이다. 미술 용어인 이를 일에 적용하면 이렇게 하면 가시적 결과나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행동을 계속 축적해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00% 예상대로 흘러가는 경우도 어긋나는 경우도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결과 목표가 아닌 행동 목표에 집중하자. 이럴 경우 하고 있는 것만으로 이루는 것이다. 할 일에 쫓길 때에라도 하고 싶은 일도 하도록 하자. 업무 시간을 15분으로 나누는 것도 유용하다. 가장 집중을 잘 하는 30분을 하루 두 번 확보하자. 인생을 바꾸려면 원대한 목표가 필요하다. 원대한 목표는 사고나 행동, 결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뇌에는 본능 행동과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낡은 뇌인 대뇌변연계와 대뇌변연계의 위에 자리하는 새로운 뇌인 대뇌신피질이 있다. 목표는 끝이 아니라 다듬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목표 완수 전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설정하자. 목표를 갱신하면 지금의 목표는 성장으로 가는 단계가 된다. '게으른 뇌에 행동 스위치를 켜라'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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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 DMZ를 걷다 - 비무장 지대의 우리 역사를 찾아서 손안의 통일 7
최동군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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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성도 육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광개토왕이 백제의 관미성 즉 오두산성을 무너뜨릴 때 육군이 아닌 수군을 보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파주시의 옛 지명은 교하(交河)다. 임진강과 한강이 교차한다는 의미다. 교하 지방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임진강과 한강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의미다.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의미다.

 

칠중성은 임진강의 옛 이름인 칠중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강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칠중성은 148미터의 중성산에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감악산 입구의 설마리에는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감악산까지 말을 타고 와 훈련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임진강의 하류는 강폭도 넓고 깊어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나 상류쪽으로 갈수록 폭도 줄어들고 깊이도 얕아진다. 경순왕릉 바로 앞의 고랑포구를 지나면 배가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고랑포구에서 5킬로미터 정도 상류의 칠중성 앞 임진강은 개도 건널 수 있는 개울이라는 의미에서 술탄(戌灘)이라 불렸다. 칠중성은 바로 이런 이유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글로스터 대대는 한국전쟁 당시 6백여명의 병력으로 3만여명의 중공군을 상대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군 1개 대대가 궤멸되었지만 그들이 3일간 중공군을 붙잡아둔 덕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완벽히 방어할 준비를 마침으로써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황희는 뇌물 수수, 간통, 직권 남용 등 수많은 혐의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황희는 매번 세종의 무한대에 가까운 신임으로 가볍게 처벌받았고 헝식적인 파면 후 곧바로 복직되었다. 세종이 황희를 감싼 것은 황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다. 황희의 청백리 신화를 만든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이었다. 당시 명나라가 재상제를 폐지했는데 조선이 이를 따라 한다면 양반들에게는 기득권이 축소되는 것이기에 청백리 신화를 억지로 만들어 대외 선전용으로 활용했다.

 

저자는 숭의전을 고려의 종묘라고 말한다.(하지만 4왕을 모신 사당을 종묘라고 할 수는 없다.)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고려의 왕으로 즉위했다. 1392년 자신이 세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과 화령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물어보는 국서를 예문관에서 작성하게 했고 이듬해인 1393년 2월 15일이 되어서야 중국을 다녀온 사신에 의해 조선으로 하라는 재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양왕이 아니라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말은 석연치 않다. 한양이 아닌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고 조선이란 이름은 후에 얻었지만 실질적으로 새 왕조를 세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호를 조선과 화령 중에서 골라 달라고 한 것은 고려라는 이름(나라)을 버리고 새 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단지 새 이름을 늦게 재가받은 것뿐이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上; 임금)이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 동파리)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선조실록 내용이다. 선조가 피난 가는 장면인데 화석정을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는 없다. 한 개의 등촉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는 것이다. 화석정을 태워 선조의 길을 밝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아야겠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평양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는 고양 벽제와 파주 문산을 거친 후 화석정 아래쪽에 있던 임진나루를 건너 장단과 평산을 통과하는 길이다. 임진강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강이었음은 삼국 시대 이래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증명되었다.

 

북방 오랑캐의 침입이 있으면 한반도의 정권은 예외 없이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때 1차 저지선이 임진강이었다. 임진강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잃게 되는 6세기 중반부터 멸망할 때까지 약 120년간 고구려의 최남단 국경이었던 만큼 북쪽 강가에 고구려의 평지성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들어서 있다.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이 복원되어 있다.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대규모 병력이 개성에서 서울로 이동할 때 지금은 최단 코스가 임진각 인근의 통일대교와 임진강 철교를 건너 문산을 거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임진강을 건너야 하는 부담 때문에 약 15킬로미터를 동쪽으로 우회하여 호로고루나 칠중성 앞의 술탄을 건넌 뒤 감악산을 끼고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것이었다.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渡河)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 호로고루다.

 

호로고루를 중심으로 주변의 고랑포와 술탄 일대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 전투 기사가 나오고 한국전쟁 때에도 중공군이 넘어올 정도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은대리성은 지리적으로 추가령 구조곡에 접해있다.

 

구조곡(構造谷)은 단층 지형이 만들어낸 선형 골짜기이므로 예로부터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말갈족이 추가령 구조곡을 이용해 빈번하게 침입해온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원산을 잇는 경원가도였고 근대에는 경원선 철도가 개통될 만큼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에 수심이 얕은 마여울을 끼고 있는 은대리성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대전리 산성(매초성)은 동네 전체가 산성이어서 마을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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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기, 40대를 바꾸다
양민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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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의 하나인 책 쓰기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마흔을 이야기한다. 마흔 즈음은 자신을 브랜딩하기에 최적의 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꼭 마흔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보통 사람이 책을 쓰는 시대다. 책을 써야 할 이유는 많다. 나에게는 책을 씀으로써 지식 생산자가 된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들린다. 저자는 성장과 스킬이 성공과 스펙보다 위대하다고 말한다.

 

스펙은 학력, 경력, 자격증 등의 조건을 갖추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인 반면 스킬은 지속적으로 그 분야의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저자는 흙수저가 성공하는 여섯 가지 키워드로 책, 블로그, 유튜브, 재테크, 사업, 꾸준함을 꼽았다. 책 한 권의 힘은 열 장의 이력서를 이기는 힘이 된다.

 

책을 쓸 때 가장 필요한 것이 풍부한 독서량이다. 한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책은 40세 이후 지속 가능한 삶의 디딤돌이다. 저자는 책 한 권을 쓴다고 인생이 180도 달라지지는 않지만 최소한 60도 이상은 달라진다고 말한다. 책 쓰기는 연공서열이 아니다. 책은 나이가 많다고, 경험이 많다고 무조건 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마흔 전이나 후에 자신의 책 한 권을 갖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것임을 강조하며 만일 책 출간으로 큰 영향력이나 수익 창출이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로 나아가는 데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책 쓰기를 요리에 비유한다. 어떤 요리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만 막상 시작하면 탄력이 붙어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주제가 중요하다. 차별화할 수 있는가? 타깃 독자는 누구인가? 자신만의 강점과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인가? 시대 흐름과 맞는가? 자신의 주제를 통해 독자의 니즈와 원츠를 해결할 수 있는가? 저자는 양질의 첫 책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초고에 너무 많은 정성을 들이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쓸 내용이 많으면 잘 쓸 수 있다. 간절하고 꾸준해야 충실하게 쓸 수 있다. 필요한 자료만 잘 모아둔 사람이 유리하다.

 

문장 하나에 한 가지 의미만 담는다. 접속사는 가능한 한 줄이고 주어와 서술어를 일치시킨다. 단어 사용의 묘미를 살린다. 논리적인 인용 자료 및 이미지를 선택한다. 중복 표현이나 문체 반복을 피한다. 타깃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듯 쓴다.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걷기와 산책으로 기분을 전환한다. 체력 관리를 잘 해야 좋은 집필로 이어진다. 출간 기획서에 들어가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저자 소개, 핵심 개념, 타깃 독자, 주요 내용, 예상 목차 및 구성, 차별화 및 강점, 유사 도서 및 경쟁 도서, 출간 시기, 홍보 전략. 저자가 말하는 출판은 기획출판이다.

 

저자들은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에 따른 메시지를 선정해야 한다. 비슷한 주제의 책이라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는 오로지 그 저자만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다. 저자는 스스로 이런 것들을 물으라고 말한다. 왜 책을 쓰려 하는가? 어떤 장르의 책을 쓸 것인가? 책을 쓰고 난 후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그 분야의 독자의 니즈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원고를 완성할 수 있는 집필력이 있는가?

 

기존 경쟁 도서와 다른 나만의 지식과 경험이 있는가?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주제와 메시지는 무엇인가? 출판사로부터 기획출판을 제안받을 수 있을까? 본문은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쉽게 써야 한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다독과 자료 수집이 경쟁력이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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