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 전인적인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62
김광식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 역사공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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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시인, 민족주의자, 스승, 행동인이다. 김광식의 전인적인 독립 운동가 한용운은 영웅 만해가 아닌 인간 만해에 초점을 둔 책,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에 초점을 둔 책, 자료중심의 서술과 객관성 유지에 초점을 둔 책이다.

 

세 초점 가운데 인간적 면모를 중심으로 만해를 조명하면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분석할 여지가 충분한 만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른바 구강 성격, 항문 성격 등의 개념으로 만해의 삶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해의 삶은 유랑(流浪)으로 볼 수 있고 만행(萬行)으로 볼 수 있다. 만행(萬行)이란 스님이 일정한 소재를 가리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하기 위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만해가 태어난 1879(829)은 고종 16년 즉 조선왕조가 내우외환, 서세동점의 격변을 치르던 때이다. 만해의 어릴 적 이름은 유천(裕天), 호적 이름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여섯 살부터 열 살까지 한학을 수학하며 자치통감, 대학, 서경 등을 독파했다.

 

189214세때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소홀했다. 189618세때 글방 선생이 되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189719세때 의병 운동 실패로 고향을 떠났다. 189921세때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등을 전전했다. 190426세때 2차 출가했고 190527세때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다.

 

1906년 세계일주 차원에서 시베리아행을 감행했다. 러시아를 거쳐 유럽과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인제에서 서울로 올라온 만해는 백담사와 금강산 마하연의 승려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만해 일행이 도착한 블라디보스톡은 머리 깎은 승려들을 친일파 일진회원으로 보고 무조건 죽이는 관행이 있었다.

 

조선 청년 5 6명이 만해를 결박해 바다로 던지려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만해는 현장 바닷가에 있던 러시아 경관의 개입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만해는 일차 귀국했다가 1912년 만주로 떠난다.

 

만주 역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친일파나 일제의 앞잡이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만해는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다가 조선 청년들에게 총을 맞았다.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 만해는 관세음보살의 환상을 보았다. 피를 많이 흘리는 위기 속에서 만해는 자신을 뒤쫓아온 청년들에게 총을 쏠려면 또 쏴보라고 호통을 쳤다.

 

이 소리에 청년들이 달아났고 중국 사람이 만해를 헝겊 조각으로 싸주어 만해는 다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했다. 191739세때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았다. 만해는 스물 여섯에 정식 출가했다.

 

만해의 삶 자체를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 동자의 삶에 비유할 수 있다. 화엄경의 선재 동자는 진리를 찾아 53 분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 선지식이란 깨달음을 얻은 덕망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만해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랬기에 그의 깨달음과 독립을 위한 헌신, 그리고 불교 개혁을 위해 치른 노력이 더욱 값진 것이다.

 

만해의 부친인 한응준은 청주 한씨의 사족이었고 홍성군 관아의 하급 관리였다. 만해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만해의 집안은 만해의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 눈물 나는 일이다.

 

만해 집안과 비교되는 집안이 이회영 집안이다. 명동 일대에 땅 만 평을 보유한 조선 최대 부자 집안이었던 이회영 집안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자 오늘날 기준으로 600억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만해의 부친 한응준이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응준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몰락한 양반이라는 명분과 동학군을 진압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갈등했다. 만해는 부친이 정해준 대로 결혼을 했다. 아내 전정숙은 지주의 딸이었다.

 

만해는 그런 처가 덕으로 홍주 향교에 다닐 수 있었고 결혼 이후 일체 가정 일에 무관심한 채 공부만 하는 칩거생활을 했다. 만해에게 결혼 생활은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당시 만해는 매일 밤 술집을 드나들었고 이름난 술꾼들과 술을 겨뤄 모두 이길 정도로 술이 셌고 자연스럽게 과음이 잦았다.

 

이것은 의존대상이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로 바뀌었으나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던 결혼 생활 때문에 술 즉 구강적 쾌락에 의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는 학문에도 무관심하게 되었지만 생계 때문에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만해는 이때 아이들에게 까닭 없이 화를 냈고 옷이 더러워져도 잘 갈아입지 않는 등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만해 집안은 몰락해 처가로부터 양식을 얻어먹는 처지가 되기까지 했다. 만해는 어릴 적 부친의 과도한 기대와 편애 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상대적으로는 소외되었다.

 

이로 인해 욕구 불만이 쌓였고 욕을 많이 했고 과도하게 술을 마셨고 남을 잘 믿지 못했다. 만해의 강직한 성격 때로는 괴팍한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 많다. 만해는 3.1 운동을 준비할 때 기독교측의 월남 이상재 선생과 논의를 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독립 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만해는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이고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 본위가 아닌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결국 두 분의 회합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만해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때 만해는 자신의 이름이 장의 위원 명부에 오른 것을 보고 수표동에 있는 장의 위원회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버렸다. 그때 펜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질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3.1 운동때 이상재 선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만해 선생과의 일화도 있다.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 사람들이 도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5백년 동안 정권을 잡아 일을 잘못 했고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를 받아 왔기 때문이라는 답을 했다. 이 이후로 만해는 다시는 도산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

 

만해는 3.1 운동때 독립선언서를 썼지만 변절해 친일파가 된 육당을 길에서 만나자 내가 아는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창씨 개명을 한 뒤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오자 네 이놈 보기 싫다며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선생은 소심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보면 크게 못마땅해 했다. 술을 한잔 하면 괄괄한 성격으로 젊은이들에게 사정 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 나 같은 존재는 독립 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을 해봐.”란 말을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축하한다고 격려했다.

 

만해는 건봉사 시절 속초에 거주하는 여연화 보살과 긴장감 넘치는 인연을 이어갔다. 저자는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였기에 만해에게 새로운 여성과의 인연 만들기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인연의 그물은 현실의 이러저러한 구속을 뛰어 넘는다고 말한다. 이 보살은 3.1 운동으로 옥에 갇힌 만해를 면회하기도 했고 출옥 후에는 선학원을 찾아왔는데 이때 만해가 호통을 쳐 내쳤다는 이야기가 있다.(37 페이지)

 

만해는 건봉사 조실(祖室)인 정만화(鄭萬化) 선사로부터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조실은 참선을 지도하는 큰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만해는 을사늑약 후인 1908년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한국 포교에 주력한 일본 조동종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만해는 일본의 불교는 물론 선진 문명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1910년 만해는 승려의 결혼 건을 들고 나왔다. 인구를 늘릴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승려 결혼이라는 불요불급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조동종 맹약을 분쇄하는 업적을 이룬다. 조동종 맹약은 우리나라의 대표 종파인 원종(圓宗)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 불교인 조동종의 도움을 얻어 불교를 발전시키겠다는 비밀 협약을 맺은 것인데 이는 결국 원종이 일본에 예속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말할 수 있다.

 

만해는 한국 불교는 임제종임을 내세웠는데 이는 명분이고 실은 조동종 예속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임제(臨濟)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로 유명한 당나라의 승려이다. 어느 곳에서든 주체적일 수 있다면 가는 서는 곳 모두가 참된 곳이라는 의미이다.

 

임제의 말 가운데 유명한 말이 또 있다.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다. 물론 임제종 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이 일로 만해는 만주로 떠난다. 이때 만해가 만난 사람들이 이시영, 이회영, 김동삼 등이다.

 

귀국길에 만해는 굴라재에서 죽다 살아나는 사건을 겪는다. 외부에서 온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당시 만주의 분위기 탓에 만해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총을 맞는다. 정신을 잃어갈 때 만해가 본 것은 어여쁘고 아름답고 절세의 미인인 관세음보살의 환상이었다. 정답고 달콤한 미소를 만해에게 던진 보살은 네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만해는 결국 목숨을 건진다.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정(坐定)하던 만해는 바람이 불어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해결하지 못하던 의문 덩어리를 풀었다. 깨달은 것이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뜨리니/ 눈속에도 복사꽃이 펄펄 날린다..” 이것이 게송(偈頌)이다.

 

이는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불교만이 아니라 민족까지 살리는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만해는 서울 종로 계동 북촌 지역 구석의 한옥을 거처로 삼았다.

 

만해가 깨달음의 게송을 만공(滿空) 선사에게 보내자 만공 선사는 날아다니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란 답을 보냈고 만해는 거북 털과 토끼 뿔이라는 답을 했다. 만해는 자기 집에 유심사(惟心社)란 간판을 걸었다. 종합 교양지 유심(惟心)’을 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만해는 불교의 정체성으로 민족과 국가의 진로를 풀고자 했다.

 

만해는 191811월 천도교의 최린(1878 1958)을 찾아가 독립에 대해 논의한다. 만해와 최린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 만난 바 있었다. 최린의 연인으로 유명한 분이 나혜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최린을 만난 것은 파리에서였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아내였는데 나혜석이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이었으나 희대의 스캔들에 휩싸여 35세에 이혼한 후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다. 남편 김우영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나혜석이 최린에게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사실이 빌미가 되어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난 것이다.

 

만해는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옥중 투쟁 3대 원칙이란 것이 있다. 만해는 이를 끝까지 실행했고 일본 경찰에게 당당하게 금후에도 계속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 답했다.

 

192112월 출옥한 만해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서울 포교당 인근의 안국동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선학원은 19211130일 준공된 건물이다. 선학원은 항일 불교의 중심처였다. 만해가 선학원에 머무르며 추진한 것은 불교대중화를 위해 한문 불경을 번역, 출판한 것이다.

 

만해가 불교개혁 운동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불교정책에 안주하는 주지들이었다. 만해는 정신의 고향이라 할 백담사와 서울 선학원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저자는 오세암 시절(1925년 초여름 이후)의 만해는 투사적인 인물에서 중후한 인물로 변화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1926년 봄 상경한 만해는 선학원에 머물며 회동서관에서 님의 침묵을 발간한다.(120 페이지) ‘님의 침묵은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 만해는 김억이 번역한 타고르 시집 원정(園丁)’을 읽어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김억은 소월의 스승이다.)

 

만해는 운동 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이는 좌우합작의 형태로 등장한 신간회로 나타났다.(123 페이지) 만해의 민족운동은 지엽적 문제는 제거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농민, 여성, 청년 등의 활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만해는 여성 스스로의 진정한 자각을 강조했다. 여성 자각이 여성 해방과 인류 해방의 근원이라 주장한 것이다. 만해는 여성의 속박이 전통적인 윤리, 도덕, 습관 등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려면 여성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해의 여성 운동관은 유교적, 전통적 질서를 극복하면서도 근대적인 평등 사상을 수용, 조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왔다.(128, 129 페이지)

 

만해를 찾았던 시인 신석정(1907 1974)은 만해를 거만 무쌍하면서도 다정했고 아주 붙일 맛이 두터웠고 그칠 새 없는 장광설이 인상적이라 평했다.(156 페이지) 만해는 1930년 무렵부터 종로 청진동, 사직동 등에 방을 얻고 지냈다. 혼자 살다 보니 늘 냉방에서 지냈다.

 

만해는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땐 방에서 편안히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해는 차디찬 냉돌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1934년 이후 만해는 심우장에 거처한다. 고향 홍성에서 17세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둔 만해는 55세에 다시 결혼을 했다.

 

보령 출신의 유숙원이란 분이 만해의 새 동반자가 되었다. 종로의 단성사 인근의 진성당이란 병원의 간호사였던 36세의 분이었다. 만해와 유숙원은 1933년 겨울 서울 성북구 신흥사의 불상 앞에서 간단한 의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심우장은 만해를 잘 아는 승려 김벽산으로부터 땅 52평을 넘겨받아 지은 건물이다. 이 땅은 김벽산이 초당을 지으려고 소유하던 것이다. 심우장은 정남향이 아닌 북향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만해는 심우장에서 안정을 취하며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했다. 재가승으로 신분이 변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결과이다. 유마(維摩)는 가장 뛰어난 재가불자이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그의 말이 유명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의 대사가 생각난다.

 

만해는 단 한권의 시집을 냈다. ‘님의 침묵이다. 만해는 제도권 교육을 일체 받지 않았다. 오직 그의 정신, 독서력, 정열이 그의 작가적 원천이었다.(175 페이지) 심우장 시절 만해의 문학적 행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설 집필이다. 생활 안정과 조선일보사장 방응모와의 각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다.

 

만해가 방응모와 친하게 지낸 것은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한 홍명희(1888 1968)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홍명희는 조선 승려 7천을 다 모아도 만해 하나가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만해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작품은 흑풍이다.

 

만해는 자신은 소설가가 되고 싶지도 않고 문장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연재로 인해 조선일보의 부수가 6천부가 증가했다. 만해는 소설을 통해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통한 진면목을 알리려 의도했다.

 

만해 문학의 가치는 지금은 대단한 평가를 받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조종현은 만해의 종교는 석가모니, 사상은 간디, 시는 타골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만해가 재혼으로 얻은 딸이 영숙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문만을 가르치던 만해는 딸이 신문의 일본 글자를 보고 무슨 글자냐 묻자 그건 몰라도 된다, 글자도 아니라고 말했다.

 

만해는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난관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만주의 호랑이라 불렸던 김동삼은 고향 안동에서 개화운동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넘어가 군사훈련을 하면서 독립항쟁에 나섰다.

 

3.1 운동 이후에는 만주의 군 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총 단결을 위해 헌신했다. 1931년 만주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1937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만해는 유해를 인수해 심우장으로 옮기고 5일장을 치러주었다.

 

만해는 해방을 못 보고 열반의 길로 갔다. 1944629일의 일이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아픈 마음을 그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달래야 하리라. 저자는 만해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새로운 이해는 앞으로도 더욱 지속될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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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교수 백소영 님의 강의를 들었다. 장소는 함석헌 기념관이었고 주제는 '함석헌의 무교회 정신'이었다. 기획자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함석헌보다 강연자에 더 관심이 가 참석했다. 원래 일정으로는 23일에 치러야 하는 강의였으나 교수님의 착오로 한 주가 미뤄진 것이었다.

 

'함석헌보다 강연자'란 말을 했는데 그것은 최근 페미니즘 책을 두 권 낸 백 교수님의 행보와도 관련 있는 바다. 두 권의 페미니즘 책이란 공저인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20186월 출간)과 단독 저서인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20183월 출간)이다.

 

이화여대 87 학번인 백 교수님이 지난 주 제자의 주례를 섰다는 이야기가 강연 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사연은 분명 페미니즘적 맥락에서 숙고할 부분이다. 사연인즉 졸업생이 주례를 부탁해 수락하면 졸업생(신부)의 부모가 화를 내며 반대하는 경우가 있곤 했다는 것이다.(화 낼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영광으로 여길 일이 아닌지?)

 

내가 읽은 백 교수님 책인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교수님은 세속과 기독교, 그리고 신앙과 지성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합리적인 분이다. 제자 즉 졸업생의 부모가 이런 사실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이겠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식의 주례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이런 부분은 교수님의 감성과 관련한 면모를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같은 맥락에서 함석헌과 김교신을 함께 고려해 도출해낸 기독교의 초월적 역사의식이란 논문을 쓴 백 교수님은 살아 생전 함석헌 선생을 직접 뵌 분들로부터 "그건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아니거든요" 같은 반박을 접하며 생전 예수를 뵌 적이 없는 사도 바울이 예수와 실제 대면하고 함께 했던 베드로 등의 제자들 앞에서 느꼈던 소외감 같은 것을 경험했었다고 한다.

 

생전 결정적 논란의 중심에 섰던 함석헌 선생님에 대해 강연한 백 교수님은 의의로 주제의 무거움을 무색하게 할 만큼 밝고 소탈하셨다. 논란이란 무교회주의 플러스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대속 신앙) 부정으로 인해 빚어졌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속론을 믿는 무교회주의자들로부터 함석헌 선생님이 끝까지 무교회주의를 고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던 상황에서 백 교수님은 처음 뵌 고려대 교수 유희세(1919- 2018) 선생님으로부터 귀한 자료들을 얻었었다는 말을 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백 교수님의 책을 구입해 가져가 사인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백 교수님의 다음 강연에 참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내가 정리한 내용들이 오류가 아니기를..)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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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심리학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노무라 소이치로의 생각 그물에 걸린 희망 건져올리기란 책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심리학 책들을 보며 아, 내 이야기구나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생각 그물이란 일정한 틀에 박혀 생각이 돌고 도는 현상을 말한다.

 

생각 그물에 걸렸다고 꼭 정신질환에 걸린 것은 아니며 정신질환자가 반드시 생각 그물에 걸렸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책이 관심을 촉발한다. 칸트 인식론 생각이 난다.

 

칸트는 우리의 감성이 감각적으로 소재의 상황을 인식한 것을 오성이 분석, 판단한 뒤 이론이성이 양쪽을 정리해 인식으로 연결시킨다고 보았다.

 

이론이성이 그 양쪽을 정리해 인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실패하면 체계 없이 늘 생각을 다시 하고 또 다시 하지 않을지? 의식과 다르게 무의식 차원에서 고통을 지향하거나 고통에 집착하는 경우도 분명 있으리라.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느 과()를 가야 하는가, 란 말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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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는 생산 체계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요인이 경제 법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읽은 지 25년이 지난 이 글은 경제학자의 글이 아니라 국문학자의 글이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만이 아니라 이윤율, 잉여가치 등의 경제용어는 물론 가변자본, 불변자본 등과 관계된 C + V + mV - (C + V)(1+r) 같은 수식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상상력과 원근법에서 읽은 도식과 욕망이란 글인데 저자 김인환 교수의 또 다른 책인 글쓰기의 방법’(2005년 출간)을 지난 달 알라딘 중고서점 건대점에서 발견하고 구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도 전작의 문제의식 및 수식 활용과 차원이 같은 글이 있다. 주역(周易) 책을 쓰기도 한 김 교수의 최근 작은 과학과 문학 : 한국 대학 복구론이다.(2018626일 출간) 나는 저자로부터 주역 관련 지식을 얻으려는 마음 이상으로 경제에 대한 수학적 기술(記述)로부터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최근 작에서 저자는 문학과 과학의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전제한 뒤 언어와 수학은 실재를 기술하는 연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지금껏 보여온 자신의 인식을 확인시켜주었다. 나에게는 문학평론가의 글 가운데 김인환 교수의 글이 가장 스타일적으로 맞는다.

 

플라톤과 조지 오웰을 대비시킨 글은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조금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경험하지 않은 많은 것을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였고, 조지 오웰은 많은 것을 경험하는 인간이 왜 그토록 무지한가라고 질문하였다.“(‘글쓰기의 방법’ 51 페이지)

 

저자는 책의 내용은 유한하고 현실의 계기는 무한하기 때문에 책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이 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책벌레가 되지 말라는 말 즉 책만 읽지 말고 자연을 관찰하고 사회를 경험하라는 말을, 그러나 경험이 독서보다 반드시 삶에 더 유효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데에 독서의 신비가 있다는 말로 논파(論破?)한다.(같은 책 115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사랑이나 우정에는 지식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지식의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같은 책 117, 118 페이지)

 

글이 마치 얼마 전 유은정의 심리학 책인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를 샀고 선안남의 심리학 책인 진짜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를 사려는 나를 설명하려는 것 같이 되었지만 그것은 아니고 이 책들은 30대 남녀 또는 여성들에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말하자면 두 책은 타자에 대한 간접 대면(對面)의 책들이다.(경험이란 말 대신 대면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적이다. 젊은 그들을 경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겠다는 의미이다.)

 

연애를 잘한다는 것은 인기 많은 남자를 많이 만나거나 끊임없이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유은정의 조언(‘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썸이 주는 심리적 이득‘: 203 페이지)이 눈에 띈다.

 

'썸이 주는 심리적 이득즉 썸타는 것이 주는 이득을 말하는 이 글에서 저자는 불같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기 세계를 포기하는 것이란 귀띔을 한다. ”책들 사이의 맥락을 고려할 것을 주문하는 김인환 교수의 어법을 빌자면 심리학 책을 읽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나와 불가피하게 이어져 무관할 수 없는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의식(儀式)을 대표하는 방편이다. , 바쁜데 불요불급한 책을 읽으려는 나의 나쁜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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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걷는다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울역사산책
유영호 지음 / 창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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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西村)’을 걷는다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통일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북한 전문가가 쓴 이례적인 책, 역사적 배경에 충실한 책이다. 책은 전체 5장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장 느리게 걸어보자 서촌, 2장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 서촌, 3장 수많은 예술가들의 둥지 서촌, 4장 도심의 살아 있는 박물관 서촌, 5장 우리가 몰랐던 서촌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서촌이란 엄밀히 말해 북촌의 일부이다. 그런데 책에서 말하는 곳이 서촌이라 불리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종로구 가회동 일대가 북촌 한옥마을로 알려지면서 옥인동 일대를 북촌이라 이름하기 어색한 까닭이었다.

 

현재 책이 말하는 곳은 경복궁 서쪽 마을이란 의미로 서촌이라 불리고 있다. 일제때 청계천이 복개(覆蓋)된 것은 조선을 대륙 침탈의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총독부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재정문제로 일부만 진행되었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스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도시설계자들은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는바 일반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한편 저자가 주시경의 집터여서 용비어천가 빌딩으로 불리는 곳을 논한 자리에서 우리는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행한 문헌이 한 외국인이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책은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쓴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이다.

 

저자는 조선이 전조후시(前朝後市)를 완전히 따르지 않고 시장을 궁궐 뒤가 아닌 종로와 남대문로에 세웠다는 점, 성곽을 네모나 원으로 짓지 않고 산을 기준으로 분지에 성을 지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이 같은 유교문화권이었지만 자기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성곽 축조의 관념을 보유했다고 말한다.(62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영추문(迎秋門)이 경복궁의 대문들 중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복원된) 문이라는 사실도 접하게 된다.(82 페이지) 이 역시 일본의 조선 궁궐 훼손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슬픈 역사는 영추문 앞 보안여관에도 깃들어 있다. 서정주 시인이 투숙한 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한 보안여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건너온 부락(部落) 즉 부라쿠(ぶらく)란 말은 신분적사회적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동네의 고유 명칭을 부락으로 명명한 것 역시 영추문 사건처럼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이다.(85 페이지)

 

오감도의 시인 김해경이 이상(李箱)이란 필명을 쓰게 된 사연이 역사적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서촌을 걷는다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가 구본웅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들어간 김해경에게 사생상(寫生箱: 화구畵具를 담는 상자)을 선물했다. 가난했던 김해경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필명에 상자를 의미하는 상()을 넣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앞 글자는 흔한 성씨이되 사생상이 나무이니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를 사용하기로 했다.

 

연애로 이름을 알린 이상은 후에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을 세 번째 여자로 맞는다.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 뒤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와 결혼했다. 그녀는 김환기 사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변동림의 이복 언니가 변동숙이고 변동숙의 호적상 증손녀가 발레리나 강수진이다.(101 페이지) 구본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였다.

 

이상의 집과 2 3분 거리에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노천명의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의 집이 있고 바로 옆에 그의 화실이 있다. 이상범의 집 처마 아래로 누하동천(樓下洞天)이란 친필 편액이 보인다.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115 페이지)

 

서촌의 또 다른 명소인 대오서점 이야기도 흥미롭다. 대오서점은 조대식, 권오남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이름이다. 자식들을 교육시킨 서점인 대오서점을 지금은 다섯 째 딸이 북카페로 리모델링 해 계승하고 있다.

 

서촌의 맛집 골목인 통인시장은 일본인의 생활 편의를 위해 만든 시장이다. 통인시장의 일부가 옥류동천 상류의 물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본래 통인시장은 일본이 19416월 효자동 일대에 살고 있던 자국인들을 위해 개설한 제2공설시장이다.

 

서촌에서 가장 많이 방문객이 몰리는 곳은 옥인동이다. 옥류동과 인왕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옥인동 면적의 반 이상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 윤덕영이다. 그의 저택인 벽수산장은 16천평의 대지를 차지했었다.

 

박노수 미술관은 윤덕영이 시집간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기도 하다. 벽수산장 본채와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박노수 미술관이 있다.(132 페이지) 자수궁(慈壽宮)은 문종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문종이 선왕 세종의 후궁들을 거처할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다. 후에 성종의 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가 빈()으로 강등된 후 거처했고 중종 비 단경왕후도 궁에서 쫓겨난 뒤 생활했다.

 

재혼할 수 없었던 왕의 후궁들은 비구니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자수궁은 5천여명의 여승을 수용한 국내 최대 승방이었다.(164 페이지) 자수궁 터인 군인아파트 정문을 마주보며 서 있는 세종아파트는 사회주의자 이명건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명건은 친구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1948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란 호를 가졌다. 김원봉의 고모부가 지어주었다.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란 의미이다. 민족해방 운동을 위해 중국에 가는 그들에게 이국땅에서도 조국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167 페이지) 이명건의 동생이 화가 이쾌대이다.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곳은 옥인동 보안수사대이다. 조선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과 윤덕영의 가옥 바로 옆이다.(195, 196 페이지) 마지막 5장은 우리가 몰랐던 서촌이다. 전체 다섯 장(), 44편의 글 가운데 40번째 글이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이다.

 

()은 기를 육인데 같은 자로 육()이 있다. 김포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를 모신 능)에 가면 인종의 어머니가 묻혔던 육경원(毓慶園)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육경원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흥경원(興慶園)이 합쳐져 장릉이 된 것이다.

 

마지막 44번째 글은 혈흔처럼 남은 인조반정의 역사 창의문(彰義門)’이다.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는 모습이 개성의 자하동을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 창의문은 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경복궁의 두 팔에 해당하므로 길을 열지 말고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함에 따라 늘 폐쇄되어 있었는데 어명에 의하지 않고 창의문을 출입한 경우가 단 한 번 있었으니 바로 인조반정을 말하는 것이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이루어진 인조반정으로 명청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과 대북파가 제거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력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역사의 계승과 세월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게 된다. 이렇듯 서촌 순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역사를 배우는 현재적 의미이리라. 역작(力作)임을 실감하며 책을 덮는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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