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지원센터 代理 근무(7713 17)를 앞두고 어제 간단한 미팅을 가졌다. 한옥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한옥 119 (출동) 제도를 비롯 서울시가 한옥 건축과 보존 등을 위해 시행하는 제도들도 주목할 만하다.

 

한옥 119 출동 제도는 한옥지원센터와 함께 한옥 장인이 요청이 발생한 현장으로 출동해 한옥 개, 보수를 돕는 등 긴급 사안에 대해 조치를 취해 주는 제도이다. 늘 그렇듯 해설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최준식 교수의 () 북촌 이야기를 구입했다.

 

이 책에는 한옥만이 아니라 초가(草家)도 복원해야 한다는 글 등 듣기에 따라 불편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다. 과거 대부분의 선조들이 살던 집은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김시덕 교수의 서울 선언이란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은평 한옥마을 조성 과정에서 파괴된 수많은 평민들의 무덤을 예로 든다. 저자는 우리는 왜 시민 대다수가 사는 공간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들을 함부로 없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할까, 묻는다.

 

그러고 보니 지난 달 16일 강릉 답사 때 만난 한 자원봉사자 생각이 난다. 60대 후반쯤의 이 분은 내가 그날 함께 해설자로부터 들은 이씨(李氏) 왕가의 터부를 회상하며 해설 때 활용하면 좋으리란 이야기를 하자 이해 못할 반응을 보였다.

 

터부란 나무 목자가 들어 있는 이()라는 성() 때문에 도끼를 의미하는 쇠 금() 즉 김씨를 경계해 김씨 여자를 며느리로 삼지 않으려 했다는, 공식 확인이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해 못할 반응이란 종교적 반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분은 왜 해설자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해설자가 교수여서 그랬는가? 이 날 이 분은 초면인 내게 이 말 말고도 시험 앞두고 답사를 왜 왔느냐, 이어폰으로 계속 음악을 들으면 귀에 이상이 생기지 않느냐 등의 말을 했다.

 

나는 조선 왕릉, 궁궐, 종묘, 고택 등이 주례 고공기, 풍수, 주역 등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듯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음양오행과 주역, 사주 등의 가치관에 따라 움직였으니 해설에 그런 내용을 반영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분은 상대와 뜻이 다르면 답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원칙이라며 함구(緘口)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자원봉사자가 대답할 말이 있었을까?

 

김시덕 교수는 조선왕조 중심주의를 문제 삼는다. 조선왕조 중심주의란 조선 왕조와 사대부 문화의 계승을 서울의 정체성 확립과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박제된 느낌을 서울의 고택(古宅)들에서 얻는다면 지나칠까?

 

물론 나는 얼치기이다. 조선 왕조와 사대부 문화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서민 문화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은 아니다. 고택, 사찰 등을 탐방하는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왠지 그런 고급 문화가 싫어 모임과 거리를 두고 고택 대신 민가, 사찰 대신 사하촌을 순례했다는 인병선 님(초대 짚풀 생활사 박물관장)이 생각난다.

 

나는 고급 문화의 상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짚풀이 서민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르는 것이 참 많은 입장으로는 어둔 밤길을 걷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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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2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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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과 흙비가 오는 것을 하늘의 재앙이라 하고 가뭄과 홍수로 마르거나 무너지는 것을 땅의 재앙이라고 한다면 ( )는 사람의 재앙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 저 말이 누구의 것인지 먼저 말해야겠다. 답은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내처 만일 자제가 ( )를 일삼으면 경전과 역사 공부를 울타리 밑의 쓰레기로 여길 것이고 나라의 재상이 이를 일삼으면 조정의 일을 소홀히 할 것이며 부녀자가 이를 일삼으면 길쌈하는 일을 마침내 그만두게 될 것이니 하늘과 땅 아래 그 어떤 재앙도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란 말을 하기까지 했다.

 

나는 요즘 정약용이 우려한 저것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 ) 읽기이다. ( )에 들어갈 답은 패관잡서(稗官雜書) 요즘 말로 하면 통속 소설이다. 아니 정조(正租)나 다산(茶山)의 기준으로는 소설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소설이라 해야겠다.

 

내가 읽고 있는 책(장편 경애의 마음’)의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연애보다 기승전결 뚜렷한 사건이 있을까요”..이 분은 자신이 연애 이야기를 자꾸 쓰는 건 사람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란 말을 했다. 오랜만에 사랑 소설을 읽는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경애의 마음과 함께 읽는 김용심의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를 보면 정조 시대에 패관잡서체 또는 소품체 문장을 썼다 해서 누군가 목이 잘리거나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영조 시대에 조선 왕실을 모독한 중국 역사책 명기집략(明紀緝略)’을 읽거나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문인과 책 거간꾼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으며 백여명의 주동자들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벌거벗긴 채 두 손을 뒤로 묶여 죽임(아사餓死)을 당했다.

 

물론 정조는 중국 잡서의 수입을 금지하고 관리들을 혹독하게 훈계하였지만 책을 불사르거나 관리들을 중벌에 처하지 않았다.(‘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77 페이지) 저자가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기대된다. 잘 모르지만 정조를 조선의 근대화를 막은 임금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논문에 대한 글 두 편이 생각난다. 하나는 20년도 더 전에 나온 김영민 교수의 논문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현 스님의 스님의 논문법이다.

 

김영민 교수는 문화적 예속 상태에서 자율적 비판 및 선택의 권리를 망실해 버린 채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논문이라는 글쓰기란 말을 했다.(‘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18 페이지) 반면 자현 스님은 논문은 진실에 대한 탐구이자 추리소설같은 것으로 그 자체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는 지성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을 했다.(‘스님의 논문법’ 124, 125 페이지)

 

정조는 문원보불’, ‘육영성휘’, ‘사기영선’, ‘당송팔자백선같은 책들을 펴냈는데 이런 책들이 오늘날 논문에 해당할지 아니면 교양 인문서에 해당할지는 모르겠다. 김기란은 학술논문은 본질적으로 성찰적이고 윤리적인바 기본적으로 읽기를 통한 쓰기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성격상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 학술의 장에서 지식을 구성하고 소통하는 것이라 정의했다.(‘논문의 힘’ 20 페이지)

 

김기란 저자는 논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해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연구자에게는 최악임이 분명한 반응을 얻게 될 뿐이라 말한다.(‘논문의 힘’ 44 페이지)

 

나는 해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라는 말이 키워드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조가 장려한 바른 문풍(文風)의 글을 오늘날의 인문서와 논문으로 폭 넓게 보고 싶다. 물론 폭 넓게라는 말은 느슨하게라는 말일 수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단지 문체의 문제만이 아닌 잘못된 제도 즉 과거제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의 하나로까지 넓게 생각했다.(’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80 페이지) 정조는 한문을 아는 양반들에게 대해서만 문체를 두고 닦달했다. 김용심(’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의 저자)은 정조의 정책은 문체반정이 아니라 문체순정(醇正) 또는 문체귀정(歸正)으로 불러야 맞고 중립적으로라면 문체정책이라 해야 옳다고 말한다.

 

정조 시대에는 오히려 문체순정, 문체귀정 등이라 불렸고 정조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문체반정이란 말을 썼다.(81, 82 페이지) 사실 반정(反正)이란 말은 지극히 정치적인 말이다.

 

저자는 정조가 단행한 문체반정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조의 두 개의 정체성에 근거해 분석한다. 하나는 학자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측면이다. 정조는 문체가 세도(世道)와 통한다고 보았다. 정조에게 문체는 세상 풍속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조의 의도는 감정을 휘몰아치게 해 문제를 일으키는 소설의 문체를 바로잡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다. 정조는 문체가 나빠진 원인을 세 가지로 보았다. 학문의 기본인 경학(經學)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심성에 문제가 있어서이고 명말청초 소품과 패관소설이 읽히기 때문이라 본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세 번째 것이다. 정조는 패관잡서가 사람의 이성이 아닌 비뚤어진 감성에 호소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조의 문체반정은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정조를 성리학이 말하는 도의 세상, 질서의 세상을 지켜야 하는 군왕으로 본다.(100 페이지) 정조는 플라톤의 철인 군주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문체반정을 노론의 천주교 공격에 맞설 논리 차원의 카드로 본다.(108 페이지) 정조는 사학(邪學) 즉 천주교를 없애려면 소품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110 페이지)

 

문체반정으로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은 모두 노론이었다. 문체반정으로 훌륭한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쓰고 오히려 정조의 신임을 얻고 정조와 사돈이 된 김조순이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정조 사후 세도 정치로 온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정조는 남인의 약점인 천주교를 노론의 문제점인 패관소품과 대비시킨 것이다. 사학이 흥한 것은 정학이 망했기 때문으로 이는 곧 패관소품체로 정학을 망친 노론의 탓이라는 논리이다. 저자는 문체반정이 학문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 모두와 관계했다고 본다.(113 페이지) 사실 정치와 학문을 분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식 - 권력'이란 푸코의 개념을 굳이 예시하지 않더라도.

 

저자는 정조가 아니었으면 문체반정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말한다.(115 페이지) 고전과 소설 사이의 미세한 틈과 그 사이에 잠재된 무시무시한 위험성을 한순간에 간파하는 능력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 문체반정이었다. 물론 시대를 거스르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왜 잡스럽고 한심한 소설을 읽는지 모르겠다는 정조와 지나치게 가볍고 임금 앞에서 머리만 조아리는 노론 대신들의 대비 구도는 선명했다. 박지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체를 바르게 하려는 임금의 의도에 납죽 엎드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거스르지도 않았다.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연암체라 불리든 소품체라 불리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문체가 아니라 그 문체에 담겨 있는 실용의 의미, 백성들의 삶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이로움을 찾는 일이었다.(152, 153 페이지)

 

정조가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에서 고대 유교의 아름다운 이상 정치를 꿈꾸었듯 박지원은 말뿐인 도덕보다는 백성들이 모두 넉넉하게 잘 사는 실학자의 꿈을 꾸었다.(154 페이지) 박지원과 더불어 문체반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옥이다.

 

그는 "나는 요즘 세상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위진삼당에 무에 얽매인단 말인가"란 말을 했다.(159 페이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민 가사나 판소리, 잡가, 사설시조, 위항문학 등이 나타나 활짝 꽃을 피운 것은 사람들이 틀에 박힌 고전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소통에 목말라 했기 때문일 것이다.(171 페이지)

 

이옥은 성리학의 도 우선주의를 불편해 했다. 그가, 하찮아 보이는 돌들을 갖가지 돌이 있다고 간단하게 묘사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돌들의 차이에 집중해 세밀히 묘사한 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도만이 최고라는 성리학의 획일주의에 대한 반발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 대립 구도는 이데아 대 시뮬라크르의 대립 구도를 연상하게 한다.

 

박지원과 이옥은 문체반정과 연관된 인물이지만 사상이 달랐다. 박지원이 뛰어난 해학과 재치로 우둔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글을 썼지만 이옥은 그 우둔한 백성들의 하나가 되어서 말없이 묵묵하게 그들의 모습을 기록했을 뿐이다.(187 페이지)

 

박지원이 여성들에 대한 악습을 비판했다면 이옥은 그 악습에 맞부딪히는 여성을 주제로 글을 썼다.(194 페이지) 이옥은 수천, 수만 가지 천지만물 중 가장 크고 묘하고 거짓 없고 참된 것으로 남녀의 정을 꼽았다.(196 페이지) 이옥은 여자를 솔직하고 따뜻하고 넉넉한 존재로 보았다. 그는 사람 중에 시정이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여자 말고는 없다고 보았다.(197 페이지)

 

이옥은 오직 도가 최고라는 갑갑한 유교의 세계관도, 남성만이 최고라고 떵떵거리는 가부장적 가치관도 인정하지 않았다. 저자는 정조만큼 문체 곧 글쓰기의 의미를 과대평가한 임금은 없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문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라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정조의 생각은 관념적이다. 물론 정조는 문체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문체를 과소평가했다.(206 페이지) 정조는 백성을 사랑했지만 그 백성들이 사랑하는 소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조에게 아버지는 그립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애틋한 존재였지만 그래서 더욱 아버지를 닮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정조가 고전이 아닌 살아 있는 당대의 문체를 찾아 주어야 했다고 말한다.(213 페이지) 공자가, 망해가는 주()나라를 이상 국가로 여겼듯 정조는 이미 기울어가는 성리학을 표준으로 삼았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인 즉 가장 빛나는 하나의 달인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나라를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혼자만 들린다 주장하는 귀울림도, 스스로 절대 잘못 되지 않았다는 코골이도 모두 덜 떨어진 글로 본 연암이 글쓰기에서 강조한 것은 진실이다. 연암은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병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연암이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연암은 옛것과 지금 것의 조화, 우아한 고전과 참신한 산문체의 어울림을 가장 훌륭한 문체라 보았다.(223, 224 페이지)

 

이옥은 정조나 박지원과 달리 거창한 문장론이나 문체론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쓴 글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을 뿐이다.(229 페이지) 이옥은 시가 말할 수 없는 것도 능히 말할 수 있고 시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도 또한 능히 말하려 한다는 말을 했다. 이는 성리학 뒤에 감춰진 세상의 진면모, 동시대의 현실과 상황을 쓰겠다는 것이다.(232 페이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을 되새기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철학적이란 말은 형상을 잘 드러낸다는 말이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2 페이지) 시인에게는 혼란스럽게 뒤섞인 역사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더 리얼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옥이 말한 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는 다르다. 이옥이 말한 시는 유교 경전을 말한다.

 

저자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 한 정조, 그 흐름의 정점에 있던 박지원,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이옥 중 누가 옳았는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며 다만 그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갔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242 페이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저자가 정조의 역행이 조선 멸망의 빌미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정조만 문체반정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차별과 불평등을 불러오는 문체가 아닌 공평과 평등을 일으키는 쪽으로의 문체반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252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바른 문체란 말하듯, 솔직하고 쉽게 쓰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평등한 대동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듯 우리 시대의 문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258 페이지)이다. 저자가 말했듯 이제 시작이다. 이제 느릿한 박자, 문체반정, 신윤복과 김홍도, 격쟁, 정약용의 거짓말, 정조의 비밀편지 등으로 구성된 정조의 문화투쟁이란 장이 있는 백승종의 역설(逆說)‘을 읽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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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 실수(失手)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개선하려 하지 않고 후회만 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실수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의도가 개입된 행위 즉 실수가 아닌 고의적 행위는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3) 몸이 아파 힘든 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그로 인해 심난해 하고 마음 아파 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미나가 나카모토(17151746)가 주장한 출정후어(出定後語)란 개념이 있다. 붓다는 선정(禪定)에서 나와 법문을 설했다는 의미이다. 이를 붓다는 법문을 설하기 전에 언제나 명상 상태였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법을 설하기 전 언제나 명상 상태였다는 말이 와 닿는다. 아무 대책 없이 마음을 놔두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성인(聖人)도 저랬거늘..‘이라 생각할 수 있고 저랬기에 성인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현 스님은 문제점을 인식해 정리하고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추만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면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한다는 말을 한다.(‘스님의 공부법’ 91 페이지)

 

명상은 두 번째 화살을 다시 맞지 않을 수 있게 우리를 돕는 좋은 방편이다. 타라 브랙의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란 책도 보이고 문진희의 명상하라는 책도 보인다. 그간 너무 마음을 돌보지 않고 살아왔다. 명상해야겠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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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공부법 - 미치도록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자현 스님 지음, 소복이 그림 / 불광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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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공부법우리나라 인문학자 중 1년에 가장 많은 학술진흥재단 등재논문을 쓰는“(245 페이지) 자현 스님의 책이다. 또한 수십 년의 대학생활을 한 저자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 책보다 후에 나온 스님의 논문법을 읽고 깨달은 바가 꽤 있어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학과 대학원 생활에서 학점을 잘 받는 법, 논문 쓰는 법 등을 묶어 하나의 단행본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책으로 나올 수 있을지 자신도 의문이란 말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책은 잘 나왔다.

 

개인적 부분이지만 불화의 비밀‘, ’사찰의 비밀‘, ’불교미술사상사론‘, ’사찰의 상징 세계등의 책보다 논문법, 공부법 책을 먼저 읽게 된 것은 나 스스로도 의외로 여겨진다. 저자는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분으로 공부는 평생의 과제이고 공부는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란 지론을 편다.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의 교양서, 철학서들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저자의 글쓰기 내공은 오랜 세월 실력을 갈고 닦은 데서 나온다. 시중의 여러 공부법 책들과 달리 저자는 독특한 지침을 많이 제시한다.

 

자존감이 없으면 공부도 없다, 책에 있는 말을 다 믿을라치면 책이 없는 게 낫다, 성인(聖人)을 무시하라, 세상의 평가에 휩쓸리지 마라, 실패는 없고 단지 유희만 있을 뿐이다,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라, 책의 내용은 70%를 알 때 가장 재미있다, 공부는 편식이 더 긍정적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마라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평균학력이 대학원인 시대이다. 그리고 암기력이 아닌 창의력이 관건인 시대이다. 그렇기에 화두는 어떻게 창의력을 끌어낼 것인가로 수렴되고 이는 곧 내면의 조절과 직결되는 문제다.(41 페이지)

 

내면의 조절은 명상을 통해 가능하다. 명상은 정신집중을 통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모으는 방법이다.(29 페이지) 물론 명상으로 모은 강한 에너지도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하다. 그렇기에 공부와 관련해 두 가지 목적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전체를 보는 장기 안목이고 다른 하나는 이 달 안에 어느 정도까지 성과를 내겠다는 단기적인 안목이다.(32 페이지)

 

명상을 통해 좋아지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통찰력이나 직관지이다.(19 페이지) 이는 정보의 총량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리해 쓰려고 할 때 떠올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49 페이지)과 함께 새길 말이다.

 

공부에도 적용되는 바이지만 저자는 논문 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자료들을 잘 집취(集聚)하고 분류하는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의력을 통해 자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강조한다.(245 페이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유효한 지식을 짜깁기하는 것은 가장 타당하고 효율적인 학습법이지만 다만 그것은 더 높은 방식으로의 비약을 위한 학습 방식이어야 하지 그 안에 갇혀서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잃어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이런 점을 이해하고서라야 때로는 성인(聖人)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배포와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151 페이지)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논문은 기존 견해와 다른 관점의 도출로 기존 이론과 논리구조를 참을 수 없었던 누군가에 의한 부정(否定)의 결과물이기에 공부의 속성은 긍정보다 부정에 가깝다는 말(116 페이지)이 이해된다.

 

덧붙이면 중요한 점은 부정을 통해 반드시 긍정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들은 발전하고 싶다면 주변의 익숙한 것에 칼날을 겨누고 의심해야 하고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36 페이지)과도 상통한다.

 

저자는 그럼 논문을 어떻게 보는가. 저자에 의하면 논문은 합리성을 가진 거짓이다. 최대한의 자료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일 뿐 진실성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15 페이지) 저자는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서야 경전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며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용한 지식인지 판단해 학문의 최단거리를 찾는 것이라 덧붙인다.(187 페이지)

 

그런 저자에 의하면 이런 부분에서 윤리에 걸리면 안 된다. 전체를 통달하지 못한 채 가르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지만 최단거리를 찾아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 가능한 듯 하다. 저자의 글은 매끄럽기보다 내용이 좋다. 그런 저자는 문장과 글의 구성 능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답은 많이 써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이다.(219 페이지) 이는 논문 쓰는 것이 피를 말리는 작업이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 새로운 피가 솟아나오고 순환하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45 페이지)과도 통한다.

 

글쓰기에서 구상(構想)을 확립하고 하나의 주제와 관련해서 일관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216 페이지) ”많이 써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과 통하는 바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탄탄한 논리구조로 밀고 나가는 것은 여간한 내공이 아니면 쉽지 않기에 반복 훈련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216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글쓰기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한다는 점이다.(216 페이지) 글이 생각을 표현해주지만 글을 씀으로써 생각이 정리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공부는 현재의식보다 무의식이 하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 그렇기에 창의력을 증진시키려면 충분한 잠이 필요하다.(46 페이지)

 

인상적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충돌해서는 안 되고 내면에 자리한 또 다른 반대의 나를 상정해 차근차근 타당성을 설명하라는 말이다.(61 페이지) 이는 내가 할 수 있다는 무의식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무의식을 움직여 문제를 해결하게 만든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49 페이지)

 

연인끼리만 밀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와도 때로는 밀당을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마음에 들더라도 너무 일방적으로 매달리면 매력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과감히 무시할 수 있는 멋스러움도 부려봄이 마땅하다. 이런 것이 공부의 재미이며 낭만이다.(163 페이지)

 

나와 관련되어 가장 인상적인 지침은 같은 분야의 책을 10종 읽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복되어 나오는 개념들을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되고 관점들의 충돌 부분에서는 A의 타당성을 B의 문제점으로 확립하고, B의 타당성을 A의 문제점으로 변증한 뒤 양자의 견해를 종합 지양하는 새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225 페이지)

 

개론서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초학자인 동시에 대가의 기풍이다.(239 페이지) 개론서를 지속적으로 읽는 것은 잊혀지는 부분을 환기시키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공부가 어려운 것은 전체적인 판단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에 대한 이해에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이다.(235 페이지) 이제 조금 더 효율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지침에 나름의 비판적 안목을 세우기도 하며 수시로 손에 들어야 할 책이 스님의 공부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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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전인적인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62
김광식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 역사공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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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시인, 민족주의자, 스승, 행동인이다. 김광식의 전인적인 독립 운동가 한용운은 영웅 만해가 아닌 인간 만해에 초점을 둔 책,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에 초점을 둔 책, 자료중심의 서술과 객관성 유지에 초점을 둔 책이다.

 

세 초점 가운데 인간적 면모를 중심으로 만해를 조명하면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분석할 여지가 충분한 만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른바 구강 성격, 항문 성격 등의 개념으로 만해의 삶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해의 삶은 유랑(流浪)으로 볼 수 있고 만행(萬行)으로 볼 수 있다. 만행(萬行)이란 스님이 일정한 소재를 가리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하기 위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만해가 태어난 1879(829)은 고종 16년 즉 조선왕조가 내우외환, 서세동점의 격변을 치르던 때이다. 만해의 어릴 적 이름은 유천(裕天), 호적 이름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여섯 살부터 열 살까지 한학을 수학하며 자치통감, 대학, 서경 등을 독파했다.

 

189214세때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소홀했다. 189618세때 글방 선생이 되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189719세때 의병 운동 실패로 고향을 떠났다. 189921세때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등을 전전했다. 190426세때 2차 출가했고 190527세때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다.

 

1906년 세계일주 차원에서 시베리아행을 감행했다. 러시아를 거쳐 유럽과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인제에서 서울로 올라온 만해는 백담사와 금강산 마하연의 승려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만해 일행이 도착한 블라디보스톡은 머리 깎은 승려들을 친일파 일진회원으로 보고 무조건 죽이는 관행이 있었다.

 

조선 청년 5 6명이 만해를 결박해 바다로 던지려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만해는 현장 바닷가에 있던 러시아 경관의 개입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만해는 일차 귀국했다가 1912년 만주로 떠난다.

 

만주 역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친일파나 일제의 앞잡이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만해는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다가 조선 청년들에게 총을 맞았다.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 만해는 관세음보살의 환상을 보았다. 피를 많이 흘리는 위기 속에서 만해는 자신을 뒤쫓아온 청년들에게 총을 쏠려면 또 쏴보라고 호통을 쳤다.

 

이 소리에 청년들이 달아났고 중국 사람이 만해를 헝겊 조각으로 싸주어 만해는 다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했다. 191739세때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았다. 만해는 스물 여섯에 정식 출가했다.

 

만해의 삶 자체를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 동자의 삶에 비유할 수 있다. 화엄경의 선재 동자는 진리를 찾아 53 분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 선지식이란 깨달음을 얻은 덕망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만해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랬기에 그의 깨달음과 독립을 위한 헌신, 그리고 불교 개혁을 위해 치른 노력이 더욱 값진 것이다.

 

만해의 부친인 한응준은 청주 한씨의 사족이었고 홍성군 관아의 하급 관리였다. 만해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만해의 집안은 만해의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 눈물 나는 일이다.

 

만해 집안과 비교되는 집안이 이회영 집안이다. 명동 일대에 땅 만 평을 보유한 조선 최대 부자 집안이었던 이회영 집안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자 오늘날 기준으로 600억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만해의 부친 한응준이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응준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몰락한 양반이라는 명분과 동학군을 진압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갈등했다. 만해는 부친이 정해준 대로 결혼을 했다. 아내 전정숙은 지주의 딸이었다.

 

만해는 그런 처가 덕으로 홍주 향교에 다닐 수 있었고 결혼 이후 일체 가정 일에 무관심한 채 공부만 하는 칩거생활을 했다. 만해에게 결혼 생활은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당시 만해는 매일 밤 술집을 드나들었고 이름난 술꾼들과 술을 겨뤄 모두 이길 정도로 술이 셌고 자연스럽게 과음이 잦았다.

 

이것은 의존대상이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로 바뀌었으나 한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던 결혼 생활 때문에 술 즉 구강적 쾌락에 의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는 학문에도 무관심하게 되었지만 생계 때문에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만해는 이때 아이들에게 까닭 없이 화를 냈고 옷이 더러워져도 잘 갈아입지 않는 등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만해 집안은 몰락해 처가로부터 양식을 얻어먹는 처지가 되기까지 했다. 만해는 어릴 적 부친의 과도한 기대와 편애 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상대적으로는 소외되었다.

 

이로 인해 욕구 불만이 쌓였고 욕을 많이 했고 과도하게 술을 마셨고 남을 잘 믿지 못했다. 만해의 강직한 성격 때로는 괴팍한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 많다. 만해는 3.1 운동을 준비할 때 기독교측의 월남 이상재 선생과 논의를 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독립 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만해는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이고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 본위가 아닌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결국 두 분의 회합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만해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때 만해는 자신의 이름이 장의 위원 명부에 오른 것을 보고 수표동에 있는 장의 위원회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버렸다. 그때 펜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질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3.1 운동때 이상재 선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만해 선생과의 일화도 있다.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 사람들이 도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5백년 동안 정권을 잡아 일을 잘못 했고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를 받아 왔기 때문이라는 답을 했다. 이 이후로 만해는 다시는 도산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

 

만해는 3.1 운동때 독립선언서를 썼지만 변절해 친일파가 된 육당을 길에서 만나자 내가 아는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창씨 개명을 한 뒤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오자 네 이놈 보기 싫다며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선생은 소심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보면 크게 못마땅해 했다. 술을 한잔 하면 괄괄한 성격으로 젊은이들에게 사정 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 나 같은 존재는 독립 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을 해봐.”란 말을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축하한다고 격려했다.

 

만해는 건봉사 시절 속초에 거주하는 여연화 보살과 긴장감 넘치는 인연을 이어갔다. 저자는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였기에 만해에게 새로운 여성과의 인연 만들기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인연의 그물은 현실의 이러저러한 구속을 뛰어 넘는다고 말한다. 이 보살은 3.1 운동으로 옥에 갇힌 만해를 면회하기도 했고 출옥 후에는 선학원을 찾아왔는데 이때 만해가 호통을 쳐 내쳤다는 이야기가 있다.(37 페이지)

 

만해는 건봉사 조실(祖室)인 정만화(鄭萬化) 선사로부터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조실은 참선을 지도하는 큰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만해는 을사늑약 후인 1908년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한국 포교에 주력한 일본 조동종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만해는 일본의 불교는 물론 선진 문명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1910년 만해는 승려의 결혼 건을 들고 나왔다. 인구를 늘릴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승려 결혼이라는 불요불급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조동종 맹약을 분쇄하는 업적을 이룬다. 조동종 맹약은 우리나라의 대표 종파인 원종(圓宗)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 불교인 조동종의 도움을 얻어 불교를 발전시키겠다는 비밀 협약을 맺은 것인데 이는 결국 원종이 일본에 예속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말할 수 있다.

 

만해는 한국 불교는 임제종임을 내세웠는데 이는 명분이고 실은 조동종 예속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임제(臨濟)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로 유명한 당나라의 승려이다. 어느 곳에서든 주체적일 수 있다면 가는 서는 곳 모두가 참된 곳이라는 의미이다.

 

임제의 말 가운데 유명한 말이 또 있다.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다. 물론 임제종 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이 일로 만해는 만주로 떠난다. 이때 만해가 만난 사람들이 이시영, 이회영, 김동삼 등이다.

 

귀국길에 만해는 굴라재에서 죽다 살아나는 사건을 겪는다. 외부에서 온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당시 만주의 분위기 탓에 만해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총을 맞는다. 정신을 잃어갈 때 만해가 본 것은 어여쁘고 아름답고 절세의 미인인 관세음보살의 환상이었다. 정답고 달콤한 미소를 만해에게 던진 보살은 네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만해는 결국 목숨을 건진다.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정(坐定)하던 만해는 바람이 불어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해결하지 못하던 의문 덩어리를 풀었다. 깨달은 것이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뜨리니/ 눈속에도 복사꽃이 펄펄 날린다..” 이것이 게송(偈頌)이다.

 

이는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불교만이 아니라 민족까지 살리는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만해는 서울 종로 계동 북촌 지역 구석의 한옥을 거처로 삼았다.

 

만해가 깨달음의 게송을 만공(滿空) 선사에게 보내자 만공 선사는 날아다니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란 답을 보냈고 만해는 거북 털과 토끼 뿔이라는 답을 했다. 만해는 자기 집에 유심사(惟心社)란 간판을 걸었다. 종합 교양지 유심(惟心)’을 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만해는 불교의 정체성으로 민족과 국가의 진로를 풀고자 했다.

 

만해는 191811월 천도교의 최린(1878 1958)을 찾아가 독립에 대해 논의한다. 만해와 최린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 만난 바 있었다. 최린의 연인으로 유명한 분이 나혜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최린을 만난 것은 파리에서였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아내였는데 나혜석이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이었으나 희대의 스캔들에 휩싸여 35세에 이혼한 후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다. 남편 김우영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나혜석이 최린에게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사실이 빌미가 되어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난 것이다.

 

만해는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옥중 투쟁 3대 원칙이란 것이 있다. 만해는 이를 끝까지 실행했고 일본 경찰에게 당당하게 금후에도 계속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 답했다.

 

192112월 출옥한 만해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서울 포교당 인근의 안국동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선학원은 19211130일 준공된 건물이다. 선학원은 항일 불교의 중심처였다. 만해가 선학원에 머무르며 추진한 것은 불교대중화를 위해 한문 불경을 번역, 출판한 것이다.

 

만해가 불교개혁 운동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불교정책에 안주하는 주지들이었다. 만해는 정신의 고향이라 할 백담사와 서울 선학원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저자는 오세암 시절(1925년 초여름 이후)의 만해는 투사적인 인물에서 중후한 인물로 변화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1926년 봄 상경한 만해는 선학원에 머물며 회동서관에서 님의 침묵을 발간한다.(120 페이지) ‘님의 침묵은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 만해는 김억이 번역한 타고르 시집 원정(園丁)’을 읽어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김억은 소월의 스승이다.)

 

만해는 운동 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이는 좌우합작의 형태로 등장한 신간회로 나타났다.(123 페이지) 만해의 민족운동은 지엽적 문제는 제거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농민, 여성, 청년 등의 활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만해는 여성 스스로의 진정한 자각을 강조했다. 여성 자각이 여성 해방과 인류 해방의 근원이라 주장한 것이다. 만해는 여성의 속박이 전통적인 윤리, 도덕, 습관 등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려면 여성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해의 여성 운동관은 유교적, 전통적 질서를 극복하면서도 근대적인 평등 사상을 수용, 조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왔다.(128, 129 페이지)

 

만해를 찾았던 시인 신석정(1907 1974)은 만해를 거만 무쌍하면서도 다정했고 아주 붙일 맛이 두터웠고 그칠 새 없는 장광설이 인상적이라 평했다.(156 페이지) 만해는 1930년 무렵부터 종로 청진동, 사직동 등에 방을 얻고 지냈다. 혼자 살다 보니 늘 냉방에서 지냈다.

 

만해는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땐 방에서 편안히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해는 차디찬 냉돌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1934년 이후 만해는 심우장에 거처한다. 고향 홍성에서 17세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둔 만해는 55세에 다시 결혼을 했다.

 

보령 출신의 유숙원이란 분이 만해의 새 동반자가 되었다. 종로의 단성사 인근의 진성당이란 병원의 간호사였던 36세의 분이었다. 만해와 유숙원은 1933년 겨울 서울 성북구 신흥사의 불상 앞에서 간단한 의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심우장은 만해를 잘 아는 승려 김벽산으로부터 땅 52평을 넘겨받아 지은 건물이다. 이 땅은 김벽산이 초당을 지으려고 소유하던 것이다. 심우장은 정남향이 아닌 북향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만해는 심우장에서 안정을 취하며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했다. 재가승으로 신분이 변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결과이다. 유마(維摩)는 가장 뛰어난 재가불자이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그의 말이 유명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의 대사가 생각난다.

 

만해는 단 한권의 시집을 냈다. ‘님의 침묵이다. 만해는 제도권 교육을 일체 받지 않았다. 오직 그의 정신, 독서력, 정열이 그의 작가적 원천이었다.(175 페이지) 심우장 시절 만해의 문학적 행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설 집필이다. 생활 안정과 조선일보사장 방응모와의 각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다.

 

만해가 방응모와 친하게 지낸 것은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한 홍명희(1888 1968)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홍명희는 조선 승려 7천을 다 모아도 만해 하나가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만해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작품은 흑풍이다.

 

만해는 자신은 소설가가 되고 싶지도 않고 문장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연재로 인해 조선일보의 부수가 6천부가 증가했다. 만해는 소설을 통해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통한 진면목을 알리려 의도했다.

 

만해 문학의 가치는 지금은 대단한 평가를 받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조종현은 만해의 종교는 석가모니, 사상은 간디, 시는 타골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만해가 재혼으로 얻은 딸이 영숙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문만을 가르치던 만해는 딸이 신문의 일본 글자를 보고 무슨 글자냐 묻자 그건 몰라도 된다, 글자도 아니라고 말했다.

 

만해는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난관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만주의 호랑이라 불렸던 김동삼은 고향 안동에서 개화운동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넘어가 군사훈련을 하면서 독립항쟁에 나섰다.

 

3.1 운동 이후에는 만주의 군 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총 단결을 위해 헌신했다. 1931년 만주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1937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만해는 유해를 인수해 심우장으로 옮기고 5일장을 치러주었다.

 

만해는 해방을 못 보고 열반의 길로 갔다. 1944629일의 일이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아픈 마음을 그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달래야 하리라. 저자는 만해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새로운 이해는 앞으로도 더욱 지속될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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