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있습니까? - 연애 감정부터 혐오까지, 격정적인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10가지 감정 지형
몸문화연구소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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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문화연구소의 감정 있습니까?’는 연애 감정, 혐오, 시기심, 수치심, 공포, 분노, 애도 등의 주요 감정들과 감정 코칭, 감정 노동 등 감정에 대한 이야기거리들을 다룬 모음집 형식의 책이다. 소장 김종갑 교수를 비롯, 김운하, 김주현, 윤소영, 윤지영, 임지연, 최은주 등 건국대 교수들과 홍익대의 정지은 교수 등이 모인 몸문화연구소는 그간 몸의 미래 미래의 몸’, ‘내 몸을 찾습니다’, ‘공간의 몸 몸의 공간’, ‘그로테스크의 몸등을 펴냈다.

 

감정을 다룬 이번 책은 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김종갑 교수(이하 교수 생략)는 감정을 외부 자극으로 인해 몸에 발생하는 변화로 정의한다.(12 페이지) 한편 요즘 화두가 된 정동(情動)이란 개념은 의식에 잡히지 않는 몸의 변화를 의미해 감정 논의에 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김종갑은 감정이란 무엇인가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데카르트의 오류를 예로 들어 감정이, 옳고 그름을 분별/ 판단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성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자질이며 능력이다.(24 페이지) 프로이트가 말한 바 감정에도 에너지 보존 법칙이 존재한다는 말은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감정은 안으로 표출되어 자신의 내부를 공격한다.(27 페이지)

 

이와 관련해 추가할 말은 리비도 경제학이란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당연히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계속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리비도 경제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246 페이지)

 

김종갑에 의하면 감정은 곧 정념(情念: passion)이다. 피하고 싶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마지못해 겪어야 하는 불행이 정념이다.(25 페이지) 김종갑이 말하는 바는 사회적 압력이 없는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지만(26 페이지) 감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서 발생하는 몸의 변화로 타자에게 나를 열어놓지 않으면 변화가 생기지 않는데 그것 즉 변화 없는 삶은 타성이고 관성이고 역사의 종말이라는 점이다.(38 페이지)

 

최은주는 대도시에서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기에서 자기가 관여하는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잭 바바렛 지음 감정의 사회학중에서)을 의미하는 감정 또는 느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이 축소되고 이성이 확대된 합리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이성의 규율에 종속하게 되었지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내밀성의 세계라는 이중 구조로서 가족 영역이 출현하였고 그로 인해 가족에 대한 기대나 감정 노동의 부담이 커졌다고 말한다.(72, 73 페이지)

 

앞에서 감정이 옳고 그름을 분별 및 판단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이성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자질이며 능력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알랭 바디우가 현대 세계의 철학에 사랑을 포함시킨 이유와 관련이 있다. 바디우는 사랑을 정념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이 단지 정념이었다면 발생만 있었을 것이지만 사랑은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계기이며 진리 과정으로 구축하는 절차다.(77 페이지)

 

김종갑이 타자에게 나를 열어놓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무변화의 삶은 타성이고 관성이고 역사의 종말이라 말했다면 최은주는 관계의 갈등을 인정하지 못하고 폐쇄적이 된다면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타인에게 완전히 확인받을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란 바우만의 말을 언급한다.(78 페이지)

 

김운하는 낭만적인 사랑 따위는 없어에서 감정 사랑관계 사랑을 이야기한다. 전자는 감정의 온도와 강도가 사랑의 본질이고 그것이 사랑과 비사랑을 나누는 유일한 잣대라는 믿음으로 대표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가 나를 때린 것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며 그의 사랑은 확실하다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96 페이지)

 

후자는 관계의 성격과 질()을 말하는 사랑이다. 김운하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무죄이고 순수한 감정은 항상 옳고 정당하다는 사고는 역사적으로 18세기 말 낭만주의 시기에야 최초로 등장한 것이라 말한다.(100 페이지) 김운하에 의하면 추구하는 이상이나 대상의 미덕이나 악덕 여부와 관계 없이 추구되는 감정과 열정 자체를 숭배하는 사상이 바로 감상주의로 치닫기도 하는 낭만주의이다.(101 페이지)

 

또한 감정의 순수성을 가치로 확립하는 순간 낭만성은 감상성과 혼동되기 시작하고 이기적 소유욕과 쉽사리 뒤섞인다.(102 페이지) 감정 사랑으로 이해되는 사랑은 언제든 감정 과잉의 감상주의나 이기적 나르시시즘이나 광적인 소유욕에 불과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으로 쉽게 변질된다.

 

김운하는 감정은 그저 사랑을 촉발하는 계기이고 사랑이라는 욕망의 기관차를 내달리게 하는 엔진이기에 사랑 구성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말은 일체유심조란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를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알고 있지만 마음은 어떤 것에 시동을 거는 것, 김운하의 어법으로는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하는 것 즉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김운하에 의하면 사랑은 윤리적인 관계 형식으로 감정의 소통뿐 아니라 공감 능력, 배려, 헌신, 용기, 절제, 심지어 결별의 윤리까지 포함하는 소통의 윤리적 관계이다.(103 페이지) 김운하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말한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소통 능력과 이성의 지혜를 말한다.

 

김운하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성을 배제하는 것, 욕망과 감정의 순수성만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샤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라 말한다.(106 페이지) 이성은 사랑을 인도하는 나침반, 사랑의 동반자이다.

 

김종갑은 혐오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니에서 지금까지의 서양 역사를 남성이 문화를 독점하면서 여성을 자연으로 비하했던 가부장의 역사로 규정했다. 김종갑에 의하면 문명의 주인공으로서 여성을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그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혐오는 관념으로서의 인간은 신처럼 위대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하늘이면서 동시에 땅이고, 멋있으면서 비루한 존재라는 이중성 또는 양가성을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부분은 남성이 챙기면서 부정적인 부분은 여성에게 투사함으로써 생겨난다. 김종갑은 남성의 여성 혐오는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남성의 여성 혐오는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말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누리다가 이제 그 몫을 챙기지 못하게 된 많은 남성들이 적대감을 여성에게 투사하거나 여성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지은은 고통스러운 질투, 존재의 시기심에서 라캉, 멜라니 클라인 등의 논의에 의거해 질투와 시기심을 구분한다.(라캉의 논의가 클라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클라인은 질투심은 한 사람이 두 사람 즉 자신의 연인과 이 연인을 사랑하는 경쟁자와 맺는 관계로, 시기심은 오직 시기하는 자와 시기받는 사람과의 관계로 설명했다.(148 페이지)

 

정지은은 너도 나도 결여의 주체임을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라캉 정신분석에 의하면 결여는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결여의 주체는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 그런데 결여를 모르는 자, 시기하는 자는 즉각적 만족과 향유를 줄 수 있다고 믿는 향유의 대상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원리상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향유의 대상을 얻기를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소유했다고 믿는 타자를 그 대상과 함께 파괴하고자 한다.(159 페이지)

 

임지연은 부끄럽습니다만..’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구분한다. 수치심이 전체 자기를 문제삼는다면 죄책감은 구체적 행동을 문제삼는다. 수치심이 숨거나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라면 죄책감은 고백하기나 사과하기로 나타난다.(169 페이지) 임지연은 수치심을 개인의 내면을 인간적으로 만들고 타자와 깊이 공감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긍정적 감정으로 취급한다.

 

박완서 작가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수치심의 긍정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나 이것만으로 부족한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수치심을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임지연에 의하면 수치심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형성되는 심리적이면서 관계적인 복합 감정이다.(170 페이지)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도 수치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을 보라. 반면 붉은 뺨을 가진 사람들‘(부끄러움을 알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고 윤리적 책임을 지려 했다.

 

윤지영은 분노의 정치학으로서의 메갈리안 현상에서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혐오하는 자는 불합리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그 현실의 판을 뒤집어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분노하는 자는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질문하는 자이고 상식적 좋음으로 통칭되는 예의범절과 효, 사회성, 효율성 등의 프레임을 깨는 자이다.(216 페이지)

 

혐오하는 자는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사태의 원인 제공자에게 분노하기보다 스스로 부조리의 재상산자가 된다. 윤지영은 메갈리안들을 분석한다. 메갈리안들은 노르웨이의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과 메르스 갤러리 사용자의 합성어로 이 호칭을 획득한 이들은 이전까지 만연해 있던 여성 혐오의 프레임을 뒤집어 패러디하며 문제적 주체들로 부상한 사람들이다.(218 페이지)

 

윤지영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단계 중 사자 단계로 메갈리안들을 설명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메갈리안들은 중력과 도덕, 상식의 무거움에 짓눌린 낙타 단계에서 벗어나 사자 단계로 돌진해나갔다. 윤지영은 메갈리안과 일베의 차이를 논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메갈리안들은 자신의 존립 자체의 항구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혐오 현상의 종식과 더불어 스스로도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베와의 공멸을 유도해내고자 하는 신적 폭력 혁명적, 법 파괴적 폭력 의 구사자들이다. 신적 폭력이란 개념은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신화적 폭력이란 개념과 함께 제시된 것으로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 법 보존적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혁명적/ 법 파괴적 폭력이다.

 

윤지영은 메갈리안의 미러링에 대해 논한다. 윤지영에 의하면 거울은 동일성의 궤적에서 끊임없이 이탈하는 것이다. 평면 거울, 볼록 거울, 오목 거울 등 거울들 가운데 동일성의 원리에 기여하는 것은 없다.

 

이미 대칭과 휘어짐, 맺힌 상의 상하 반전, 좌우 반전, 크기의 축소와 확대 등을 수반하는 변형의 장이 거울의 구성 원리이다. 윤지영은 메갈리안이라는 반사경(反射鏡)을 일베와의 동일체로 보는 것은 거울의 반사 원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한다.(231 페이지)

 

우리가 제대로 분노한 적이 있는가를 묻는 윤지영은 남성 혐오는 없고 단지 남근 질서에 대한 분노, 여성 혐오에 대한 분노가 있을 뿐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인상적인 말은 메갈리아 이후의 새로운 페미니즘은 메갈리안을 계승함과 동시에 넘어서고 있다는 말이다.

 

감정 있습니까?’는 몸문화연구소원들이 감정을 화두로 씨름하고 고민하면서 생각을 입 밖으로 발성하면서 2016년 한 해를 보낸 결과물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분노와 혐오, 질투와 시기심, 정서 - 사랑과 관계 - 사랑,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 일베와 메갈리안(미러링 부분), 수치심과 죄책감 등의 정치(精緻)한 구분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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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핀란드)의 춥고 어두운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듣고 났지만 더위는 그대로입니다.

그럼 우리 전통 음악을 들으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쓸쓸한 가을 풍경을 떠올리기에 좋은 아쟁이 어떨까요?

현을 마찰해 소리를 내는 찰현 악기인 아쟁은 소슬(蕭瑟; 서늘하고 으스스하다, 고요하고 쓸쓸하다)한 악기입니다.

우리의 찰현 악기는 아쟁과 해금 뿐인데 흥미로운 것은 소슬하다의 슬(瑟)이란 글자가 큰 거문고 슬자라는 점입니다.

조선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8 - 1638)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을 밤에 울리는 아쟁 소리/ 현악기 소리가 관악기 소리 같네..˝

조선의 해금 명인 유우춘이 해금을 비사비죽(非絲非竹)으로 표현한 바 있지만 장유는 아쟁 소리를 듣고 사성여죽성(絲聲如竹聲)이라 표현했습니다.(絲는 현악기를 의미, 竹은 관악기를 의미)

해금이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니라 불리는 것이나 현악기인 아쟁 소리가 마치 관악기 소리 같다고 인식된 것은 참 운치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클라리넷, 플룻, 오보에, 바순(파곳)과 금관악기이지만 음색이 목관 악기 같은 호른을 함께 묶어 목관 5중주로 부르는데요...

처음 이에 대해 알았을 때 낯선 느낌을 가졌습니다만 그 파격도 비사비죽 또는 사성여죽성의 파격에는 미치지 못한다 생각합니다.

세계 2차대전 중 프랑스의 가구 운반병으로 입대했다가 독일의 포로가 되어 괴를리츠 수용소에 억류된 채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하고 연주까지 한 올리비에 메시앙을 생각해봅니다.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메시앙은 일찍이 그렇듯 자신의 음악을 황홀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잘 이해하며 듣는 청중은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메시앙이 수용소에서 곡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장교 하우프트만 칼 알버트 브륄의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 화염 천지를 이길 곡으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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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도 발효 과정을 거쳐야 읽게 된다는 말을 최근 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 기간이 1, 2년 또는 한 두 달이려니 생각하겠지만 내게 7년 넘게 발효하고 있는 책이 있다.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장 김종갑 교수의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이란 책이다.

 

전혀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1/ 4 정도를 읽은 책이다.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구입할 때와 다르게 읽다 보니 관심 밖의 영역을 다룬 책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 이유를 알아보고 있다.

 

필자의 책들 중 지난 4혐오, 감정의 정치학을 읽었고 서평을 쓰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생각, 의식의 소음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 필자들과 함께 쓴 감정 있습니까?’를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감정 있습니까?’에 실린 김종갑 교수의 글은 충격적이다. 내가 모르는 많은 부분을 새롭게 알았기 때문이고 그런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부분적으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라 해야 맞겠다. 혐오를 다룬 부분에서 필자는 지금까지의 서양 역사를 남성이 문화를 독점하면서 여성을 자연으로 비하했던 가부장의 역사로 규정했다.

 

혐오가 발생하는 지점은 달리 있다. 문명의 주인공으로서 여성을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그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설명이다.

 

또한 여성 혐오는 관념으로서의 인간은 신처럼 위대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하늘이면서 동시에 땅이고, 멋있으면서 비루한 존재라는 이중성 또는 양가성을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부분은 남성이 챙기면서 부정적인 부분은 여성에게 투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부분이 있다. 생명의 기원인 여성의 몸은 동시에 죽음의 종착점이 된다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이를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 식으로는 탄생이야말로 죽음의 원인“(‘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47 페이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여성의 신비로운 능력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오로지 여성으로부터서만 기원하는가? 여성이 큰 역할을 하고 남성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부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생식(生殖)하는 것은 여성의 것이었고 문화적 변형의 작업은 남성이 독차지했다는 부분과 함께 읽을 부분이다.

 

생명의 기원이 남성의 역할에도 힘입듯 문화적 변형 작업 역시 부분적으로 여성들에 힘입은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 설령 없다 해도 이는 가부장적인(문화 독점적인,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여성 배제적인) 문화의 산물이 아니겠는지? 물론 모든 책임을 가부장적 제도와 교육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여성 혐오적 역사와 현실 그리고 철학적 배경에 대해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충격적이고 무의식 차원의 그늘과 얼룩을 감지하게 한다.

 

더욱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남성일수록, 불행한 남성일수록 여성을 혐오한다는 사실(135 페이지)은 사회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신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필자의 말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누리다가 이제 그 몫을 챙기지 못하게 된 평균 이하의 남성들이 사태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적대감을 여성에게 투사하거나 여성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제 나의 심리상담은 다음 주 월요일 16회를 대단원으로 끝이 난다. 감사하게도 내 개인적 불행을 남감히 여긴 여성 심리상담사의 은덕으로 한 주가 무료 연장되었지만 끝은 끝이다.

 

어떻든 여성 혐오는 민감한 문제여서 이를 상담의 대상으로 삼을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그리고 정신분석적 문제여서 심리상담과 어울리지 않지만 내담자들로 하여금 옵션으로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답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여성 혐오감에 괴로워 내담하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상하다는 반응 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듣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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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온이 39.6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서하라란 말로 표현할 정도로 서울의 2018년은 위대하다.

서하라는 서울 플러스 사하라인데 사하라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몽골의 대표 사막을 고비사막이라 알고 있지만 실제 그들 말로 고비가 사막이란 뜻이듯.(고비란 말도 몽골 사람에게 물었더니 곱에 가깝게 발음했다.)

한 외신은 2080년까지 더위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제 우리에게 화염 지옥이 아닌 여름을 맞는 것은 틀린 일이 된 것이다.

누진제에 기반한 전기요금제도 탓에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여름을 나는 폭염 난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당연히 합리적인 개선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알 수 있듯 밀집된 채 맞는 여름 더위는 육체적으로는 물론 감정면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것이 심리적 면역력을 약하게 하리라는 것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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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과 물리학을 공부한 존 파웰은 정확한 주파수로 작은 노력을 반복해 커다란 효과를 얻는 것이라는 말로 공명(共鳴)을 정의했다. 그네를 예로 들어 공명을 설명하는 파웰에 의하면 그네에 올라탄 아이를 뒤에서 밀 때 타이밍만 정확하게 잘 맞추면 약간의 힘만 주어도 그네를 아주 높이 밀어 올릴 수 있는데 이는 그네가 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 밀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네가 흔들리는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게 힘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92 페이지)

 

김금희 작가의 장편 경애의 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의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허수경 시인의 바다가란 아름답고도 슬픈 시가 있다. 이 시를 내 나름으로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제게 다가온 깊은 바다를 가득 잡으려 했지만 손이 없고, 손이 없기에 잡지 못하고 울려고 했지만 눈이 없고, 눈이 없기에 안기지 못하고 서성이다 돌아서는 바다를 보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혀가 없고, 결국 글썽이고 싶고 검게 반짝이고 싶었지만 손이, 눈이, 혀가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우리는 멀어지려는 그네를 때맞춰 밀어낼 수 있다. 자신의 그네를 스스로 높게 올린 뒤 시간이 되면 서서히 내려올 수 있다. 허수경 시인의 시처럼 돌아서는 누군가를 잡지도 못할 수도 있고 가지 말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음악학자 서우석 교수는 혼자 음악을 듣는 것이 소통이 끊어진 혼자만의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시작부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며 그 이야기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말을 했다.(‘물결 높던 날들의 연가’ 22 페이지)

 

각자의 그네를 홀로 밀어 올렸다가 시간이 되면 내려오는 경애의 마음랑의 이야기도 결국 타자(他者)의 이야기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지? 영문학자 김종갑 교수는 고통과 기쁨, 사랑과 미움, 질투와 칭찬, 공포 등 모든 것이 해석의 결과라는 말을 했다.(‘감정 있습니까?’ 16 페이지)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고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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