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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선언 -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 ㅣ 서울 선언 1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도 서울이다, 나의 서울 답사 40년, 서울 걷기 실전편, 서울,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등으로 이루어진 김시덕 교수의 ‘서울 선언’은 찬란한 우리 문화 유산을 찬미하려고 쓴 책이거나 아픈 근대의 흔적을 반추하려고 쓴 책이 아니라 역사성과 상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건물이나 공간의 그늘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건물과 공간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쓴 책이다.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게 할 정도의 트라우마(직장에서의),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 4대문 밖을 계속 이사를 다닌 이력, 몇십 년 전부터의 서울 걷기, 전공(문헌학) 및 관심사(전쟁),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 손정목의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황두진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를 비롯한 많은 책들.. 이 요인들이 ‘서울 선언’의 탄생에 역할을 했다.
그런 한편 제행무상(諸行無常), 여실지견(如實知見), 무차별(無差別) 등은 저자의 논의를 이해하게 하는 주요 용어들이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서울은 고대, 근대, 현대가, 빈(貧)과 부(富)가, 4대문 안과 밖의 차별적 위상이 공존하는 대도시, 변화가 상존하는 역동적 공간이다.
위의 문장이 알게 하는 현실에 즉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제국(帝國)이 아닌 공화국(共和國)인 한국의 수도 서울은 그 정체성에 걸맞은 의식과 제도 등이 필요하고 모든 동네, 모든 건물이 그 모습 그대로 전부 뜻깊고 전부 읽어낼 거리가 무궁무진하다(33 페이지)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의 저택과 정자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라 말한다.
문헌학의 의미를 궁구(窮究)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저 같은 문헌학자는 어떤 문헌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 문학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를 판단하기 전에 눈 앞에 있는 문헌이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31, 33 페이지)란 문장을 보라.
저자가 인용한 인상적인 논의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의 한 부분이다. 앤더슨은 하나의 나라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지역은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연한 이유에서 특정 국가에 편입된 뒤에야 그 특정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지역들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1963년에야 오늘날의 서울이 갖추어진 것처럼 현재 서울의 역사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진다(28 페이지)는 말을 하는 저자에 의하면 현대 서울의 대부분은 1936년과 1963년 이후 서울이 된 지역들(50 페이지)이며 현대 한국 시민들의 대부분은 평민과 노비의 후손(51 페이지)이다.
백제 시대의 서울을 증언하는 삼성동 토성이 1970 – 1980년대 강남 개발 와중에 무참히 파괴된 사실을 지적(65 페이지)하는 저자에 의하면 서울의 백제(서울에 존재한 최초의 국가) 유적이 파괴된 것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도 아니고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 정부를 세운 현대 한국 시기이다.(69 페이지)
'서울 선언'에서 인상적인 또다른 부분은 저자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부터 꽤 체계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울이 자가용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121 페이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조선 시대의 구도심 사대문 안, 식민지 시대의 신도시인 명동,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한 서울 속의 외국 용산, 현대 한국의 신도시인 강남을 관통하는 406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종로 2가가 저자가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답사한 서울이라는 말(124 페이지)은 흥미를 느끼게 한다.
서울을 이야기한다면서 19세기 4대문 안팎의 한양만 이야기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 버린 사람의 어릴 적 이야기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148 페이지)라고 말하는 저자가 세 번째 장에서 첫 번째 순서로 언급한 곳은 청계천이다. 이 하천은 오늘날의 서울이 시작된 곳으로 19세기 말 그 남쪽에는 일본인들의 신도시가 만들어졌고 북쪽에는 오늘날 북촌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어떤 특정 지역이 대규모로 재개발되지 않는 한 도시 공간은 금세 바뀌는 듯 하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법(161 페이지)이라는 말, 도시는 이렇게 길고 질기게 흔적을 남긴다(163 페이지)는 말 등은 인상적이다. 한편 조선 신궁은 헐릴 만하지만 현대 한국에 세워져서 수많은 서울 사람들이 들른 남산 식물원을 헐고 조선 시대의 성곽을 복원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말(177 페이지)은 어떤가.
평양에서 미션 스쿨 계통의 숭의 여학교로 개교했다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한 학교(181 페이지)인 숭의여자대학은 1953년에 서울에서 다시 개교할 때 정부로부터 일본이 남긴 경성 신사 터를 학교 부지(敷地)로 제공받았다.(183 페이지)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한 학교가 신사 터에 세워져서 식민지 시대에 대해 정신적인 복수를 완수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케이스라고 저자는 말한다.(183 페이지)
이 부분을 보며 생각한 것은 1905년 을사 늑약, 1907년 고종 퇴위, 1910년 한일강제병합 등이 논의되었고 후에 이완용 별장으로 사용된 태화관(泰和館)에서 3.1 독립 운동 선언을 한 사례이다.
현지인이 언제나 현지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어떤 경우는 그 지역에 관심을 갖고 찬찬히 조사한 외부인이 현지인보다 더 잘 알 수 있다(255, 257 페이지)는 말은 또 어떤가. 저자는 서울과 그 주변의 경기도 일부 지역까지를 대서울이라 부른다.(311 페이지)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는 빈민과 노동자들을 서울의 끝으로 밀어내서 그들과 그 밖의 서울 시민들을 분리하려 했지만 서울의 끝에서 봉기한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현대 한국의 역사를 크게 전진시켰다. 현대 한국의 변화는 언제나 서울의 땅끝에서 시작되었다.(313 페이지)
4장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문제 많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싶어 하는 이유를 묻는다.(363 페이지) 그리고 아파트 단지에 의해 바뀌기 전의 서울은 자연스럽고 그 후의 서울은 인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묻는다.(371 페이지)
‘서울 선언’의 놓칠 수 없는 미덕 중 하나로 불편한 말들이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의 기와집만 한옥입니까? 초가집은 한옥이 아닌가요? 20세기에 만들어진 북촌의 개량 한옥은? 뗏집은? 너와집은? 또는 가난한 한국 시민들이 만든 토막집은? 하코방은?”(373 페이지) 같은 말이 우선 그렇다.
또한 “식민지 시기에 일본군 성 노예로 희생당한 여성들의 추모 시설을 서대문 형무소에 함께 건설하자는 주장에 대해, 그녀들의 희생을 기리면 ‘우리 민족이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한 민족이기보다 일제에 의해 수난당한 민족’이라는 ‘왜곡된 역사 인식을 관람객들에게 주게 된다면서 남성 위주의 독립 운동 관련 단체들이 반대 움직임을 전개한 적도 있”다는 말(384 페이지)도 그렇다.
저자가 중점 비판하는 부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잊고 싶은 것은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일을 태연히 하는 사람들의 행태이다.(383 페이지) 근대 한반도 주민들의 한옥 집단 거주지였던 북촌 한옥들을 조선 시대 양반들의 거주지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도 그 하나이다.
마지막 장(4장)의 마지막 부분(3. 역사 왜곡에서 서울을 지켜라)은 지금이 마치 조선시대인 것처럼 현대 한국을 잠식하는 사례들이 나열된다. 조선 왕릉 자체도 아닌 그 주변 묘역을 확장, 복원한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만들어진(1966년 설립) 태릉 선수촌을 철거한 사례, 조선 왕조의 의례 공간인 사직단을 확장, 복원하기 위해 1968년부터 운영해온 종로 도서관을 철거하려 한 사례 등이다.
‘서울 선언’은 서울을 다룬 책들 가운데 단연 독특한 책이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설득력이 있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아니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뛰어난 책이다. ‘전쟁의 문헌학’ 같은 저자의 다른 책 등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어야겠다. 앞서 가는 사람들 뒤에서 서울을 걷고 걸으며 기록하는 일을 하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