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의 시에서 잡답(雜畓), 역단(易斷) 등의 단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잡답(雜踏)으로 쓰인 부분을 가리키며 강의자(신형철 교수; 2018년 9월 15일 김수영 문학관)가 잡답(雜畓)이라 해야 옳다고 지적한 이 단어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북적하고 어수선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역단은 역 즉 주역점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 괴이한 천재 이상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점이 있었음을 알게 하는 단서입니다.

이상의 시에는 생활이 모자라는, 제웅처럼 자꾸만 감(減)해간다, 수명을 헐어서 전당잡히나보다 같은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꽤 많습니다.

예사롭지 않지만 기발하다기보다 일상적이면서 가슴을 치는 표현들입니다.

제 관심은 시를 외부 이론을 가져다가 분석하는 것이 어느 정도 유효하며 또 한계는 무엇인가 등에 가 있습니다.

외부 이론으로 시를 읽는 것이란 가령 이상의 오감도 같은 시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피카소의 큐비즘 기법의 그림으로 분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강의자는 제 질문에 그런 것이 요즘 유행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시인의 내면을 파악하고 전하는 데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라는 답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유형의 읽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한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조우해야 한다는 의미로 저는 들었습니다.) 그러기는 쉽지 않다는 말을 더했습니다.

제 질문과 무관한 상황에서 강의중 나온 말이 관심을 끕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라며 정확한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강의자가 인용한 말은 ‘Be yourself. everyone else is already taken.‘이란 말입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 모든 사람이 이미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다(수용되었다).‘ 정도의 말인 듯 합니다.

이 말이 어떤 상황에서 인용된 것인지 명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읽기에서든, 시쓰기에서든, 다른 문학 장르에서의 읽기나 쓰기든 독자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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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무라이란 소설을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다. ‘사무라이27년 전 나온 책이다. 알기로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 몇 해 뒤 무사(武士)이란 이름으로 나왔고 지금 두 버전 모두 절판되었다.

 

이제 와서 사무라이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품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 솔레르스, 골드만, 바르트, 라캉, 방브니스트, 야콥슨, 데리다, 푸코, 사르트르 등... 물론 이들은 작품 속에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고종석의 기자들에서 나는 사무라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전기한 사무라이의 지식인들은 프랑스인들인데 기자들에는 이런 인물들이 나온다. 마르크스, 엥겔스,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 독일 지식인들이다.

 

물론 기자들에는 프랑스 지식인들도 나온다. 바슐라르, 사르트르, 부르디외, 뒤르켕...고종석은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사르트르가 갔다. , 이제는 프랑스 문화계도 약간은 쓸쓸하겠다고 쓴 김현의 죽음에 대해 그런데 이제 김현이 갔다. 한국 비평계에 적지 않은 쓸쓸함을 남기고란 말을 했다.

 

나는 특정인에 대한 애도(哀悼)를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무라이, 그리고 기자들이 많은 지식인들을 논한 것처럼 나도 지성과 인격면에서 훌륭한 해설사 동기들을 논하고 싶다.

 

그제 동작(銅雀) 도서관에서 정조(正祖) 전문가인 김준혁 교수가 동기에게 혜람(惠覽)이란 말과 함께 이문회우(以文會友)란 말을 써준 것을 보았다. 그렇다. 이문회우란 글 또는 인문(人文)으로 친구들을 모은다는 의미이니 우리들에게 더 없이 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크리스테바를 언급한 것은 도서관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읽게 된 장미의 이름의 작가가 기호학자라는 데서 같은 기호학자인 사무라이의 작가에 생각이 미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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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다시 심우장(尋牛莊)에 간다. 성북 순례의 한 지점으로. 그곳에 가기 전에 최순우 집을 가야 한다. 오수(午睡)노인(老人)이라 자칭했던 최순우 집을 지나 만해(萬海)1933년부터 1944년 타계시까지 거했던 심우장을 가는 것이다.

 

만해는 삶의 태도와 시가 상당히 달랐던 시인이다. 그는 다혈질적이고 직선적이고 괴팍(乖愎)했지만 그의 시는 더 없이 다소곳하고 순종적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심약하기까지 했다.

 

심우장은 그의 그런 강직함과 비타협성이 잘 드러난 곳이다. 집을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한 이유가 조선총독부를 향하지 않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을 5일장으로 장사지낸 점도 그렇다. 어제 경성에서 보낸 하루의 저자 김향금 님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김동삼 선생을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는 말을 했다.(마포평생학습관 강의에서..)

 

마저절위(磨杵絶葦)라는 만해의 신념 또는 당부는 어떤가? 마저는 절구 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 절위는 가죽으로 묶은 끈이 세 번 끊어졌다는 공자의 위편삼절에서 유래한 말로 대나무 책의 가죽 끈이 끊어질 정도로 책을 읽으라는 의미이다.

 

임소안(林小安)이란 학자가 위편삼절의 위란 가죽이 아닌 가로(로 묶은 끈)를 의미하는 위()라고 했지만 그렇다 해도 공자의 끈질김과 만해의 당부가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만해를 읽어 만해백일장에 나갈 생각이다.

 

달인들의 틈새에서 나는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내일 심우장 방문은 나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연습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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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seuk 2018-09-1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해 백일당에서 장원하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8-09-17 08:33   좋아요 1 | URL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406번 버스를 타야겠다. 지난 8월 말 양재 시민의 숲역 인근에서 인사동까지 탔던 140번 버스와 비슷한 듯 다른 코스를 가는 406번 버스를 타면 4대문 안, 명동, 용산, 강남을 모두 지날 수 있다.

‘서울 선언‘은 이 코스의 주요 지점들인 4대문 안을 조선의 도심으로, 명동을 식민지 시대의 신도시로, 용산을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했던 서울 속의 외국으로, 강남을 현대 한국의 신도시로 설명했다.
‘서울 선언‘을 읽음으로써 확인하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궁, 능, 묘(廟) 만큼 골목과 전통 시장 등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박물관보다 규모면에서 대체로 작은 미술관을 좋아한다는 점도 그렇다.

한옥을 기와집으로 등식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그렇다. 고택 대신 민가를, 사찰 대신 사하촌을 좋아했었다는 인병선(짚풀 생활사 박물관 초대 관장) 님의 강의를 듣고 싶다.

9월 13일 마포평생학습관에서 ‘경성에서 보낸 하루‘의 저자 김향금 저자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경성역에서 출발, 북촌과 종로, 청계천변과 서대문 형무소, 선은전 광장과 남산을 거쳐 본정(本町) 거리를 지나 다시 경성역으로 돌아오는 만 하루의 여정을 강의를 통해 알아보는 시간이다.

저자는 경성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과거의 한양과 현재의 서울 사이에 놓인 다리라는 말을 한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특히 식민지 시대 다른 말로 경성에 대해 더 알아야 필요가 다분하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는 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다시 한 번 더 읽고 들으면 좋을 강의이다.

지난 5월 초 청계천 박물관에서 들은 ‘천변 풍경‘의 강연자 노지승 교수의 근대 시리즈(‘유혹자와 희생양‘, ‘영화관의 타자들‘)도 필요하다.

‘유혹자와 희생양‘은 한국 근대 소설의 여성 표상을 부제로 하고 ‘영화관의 타자들‘은 조선 영화의 출발에서 한국 영화 황금기까지 영화 보기의 역사를 부제로 한다.

그러니 저자가 경성과 서울을 주제로 한 책을 쓴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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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안국동 사옥에서 열린 한자경 교수의 신간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공적영지(空寂靈知)’ 강의를 들은 지 50여일이 지났다. 여러 내용들 중 내게도 시사점이 되는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교수님은 가장 앞 자리에 앉아 있었던 내게 가까이 오시더니 얇은 책을 내 눈에 완전히 밀착시키셨다가 거두어 가셨다.

 

누구든 대상(이 경우는 얇은 책)이 눈과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대상을 볼 수 있다. 그 책이 눈에서 너무 멀리 있을 때는 물론 눈과 밀착되어도 분별은 불가능하다.

 

교수님은 그렇게 당신 앞으로 책을 거두어 가시면서 자신이 눈에서 대상을 치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물으셨다. 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답변은 1차원적이다. 그러니 그 답변을 학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서라고 다른 말로 사물의 끝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서울을 제대로 알기 위해 서울의 동서남북 경계를 두루 탐험한 한 문헌학자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거듭 방만(放漫)해지기만 하는 공부는 지양(止揚)하고 적정 선에서 마름질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마름질이란 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치수에 맞게 재거나 자르는 일을 말한다. 마름질이 안 된 옷감은 입을 수 없고 눈에 밀착된 대상 즉 경계가 지어지지 않은 대상은 가시의 사물이 아니고 적정 선에서 마름질 되지 않고 방만하기만 한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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