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교수의 이상 시인 강의(2018915일 김수영 문학관)에서 들은 이야기 중 플로베르에 대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이상 시인 강의에서 플로베르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왜 플로베르가 현대 작가로 불리는지에 대해 들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신형철 교수는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의 불륜을 다루면서 그 행동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작가로 평가받는다는 말을 했다. 말하자면 도덕과 미학을 분리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산드라 스코필드의 '소설 어떻게 읽고 써야 하는가?'에 플로베르에 관한 다른 해석이 나온다. 플로베르는 사실상 완성본이나 다름없는 초고를 다 쓸 때까지 원고 한 장에 의술, 체조, 외교, 심리, 예술을 담으려 했다며 산드라 스코필드는 "플로베르는 첫 현대 소설을 씼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13 페이지)

 

어떤 말이 맞을까? 확언할 수는 없고 신형철 교수의 말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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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 <무예도보통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김준혁 지음 / 더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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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1027일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라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壯勇營)'은 바로 그 '무예도보통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즈음해 나온 김준혁 교수의 책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제보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서이다. 정조가 이용후생의 실용지학을 추구하는 이덕무, 백동수 등의 인물들에게 지시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또 다른 추숭작업이었다.

 

저자는 김체건, 김광택,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무예의 계보는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라 말한다.(28 페이지)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였다. 무예도보통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도세자이다.

 

15세에 처음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는 영조와 관계가 어긋남에 따라 무예서 편찬에 힘을 쏟았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현양(顯揚) 사업은 자신이 효의 군주임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자 왕권 강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조선 후기 기본 군사체제를 안정화시킬 중요한 행위인 동시에 신진무반층을 양성하려는 포석이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는 북벌을 천명했던 효종을 늘 닮고자 했고 정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닮고자 했다.

 

정조는 무기 제작 의도를 가졌던 사도세자를 계승해 1795년 윤 2월의 화성행차에서 매화포(埋火砲) 실험을 했고, 군복을 입고 다녔던 효종처럼 군복을 입고 다닌 사도세자를 계승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행차를 했다.

 

장용영 외영을 화성에 신설하고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1795년 윤 2월 화성행차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정조는 환궁 길에 병자호란의 치욕이 서린 남한산성을 방문, 승군들의 훈련을 관람하고 지뢰의 일종인 매화포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286 페이지)

 

정조는 효종이 후원에서 북벌을 위해 말타기 연습을 한 것을 좇아 본인도 청양문 앞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강조했다.(220 페이지) 정조는 평양 일대의 서북 지역의 무사들을 활용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도를 따라 서북 지역 무사들을 장용영에 소속시켜 활용하려 했다.(202 페이지)

 

의미 있는 점은 정조가 능허관만고(凌虛官萬稿)’를 편집해 사도세자가 영조와 정성왕후의 만수무강을 송축하며 쓴 '연상사(延祥辭)''장락사(長樂辭)'를 수록한 것은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를 모해할 뜻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라는 글(90 페이지)이다.

 

정조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가 사도세자의 주관으로 편찬된 것임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능허관은 사도세자의 호이다. 하늘을 높이 날다, 허공을 가르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이 호는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을 잘 드러내준다.) 즉위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조는 기존의 군왕들에 비해 더욱더 군제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142 페이지)

 

정조에게 필요한 것은 군권 장악이었고 불필요한 군영(軍營)의 통폐합이었다. 정조는 결코 나약한 버릇에 매달려 400년 동안 전해오는 임금의 권한이 자신 때문에 허물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153 페이지)

 

정조가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설치하자 반대가 심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하는 부대라는 것을 안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이다. 군대 육성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힘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치사가 서인(훗날 노론)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그들이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184 페이지)

 

정조는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론을 적극 받아들여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했다.(186 페이지) 정조는 즉위 직후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노론의 사병과도 같은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혁파하고 조선 초기 병농일치를 위주로 하는 오위체제로 군제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저자는 장용영 창설 목적을 셋으로 설명한다. 1. 친위군 강화, 2. 군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등이다. 정조가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은 봉림대군(후에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갔을 때 자신을 호위하여 함께 다녀온 8장사를 별군직으로 임명하여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199 페이지)

 

정조가 장용영 깃발에 대한 정식을 세운 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듯 장차 화성 축성을 통해 새로운 국가건설을 하겠다는 개혁 의지와 조선의 군제가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주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정조는 북벌론의 연장선상에서 오위(五衛)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북벌론과 북학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214 페이지)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굳이 수원부로 옮긴 것은 그곳이 단지 명당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터는 선조와 효종의 능침으로 정해졌던 곳이다.(221 페이지) 정조는 대부분 당색이 노론 벽파가 아닌 시파 내지 남인, 당색 없는 인물들을 장용대장으로 기용했다.

 

장용영은 기존의 군영과 다른 직제로 편성, 운영되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에서 핵심을 국방개혁으로 꼽았다.(258 페이지)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을 특별 대우하는 한편 그들의 오만한 폐단을 막고자 하였다.(266 페이지)

 

장용영이 오군영과 모든 면에서 위상이 다르다고 생각한 정조는 그에 맞게 대우가 달라야 한다고 인식했다.(275 페이지) 정조는 특별 하사금을 주는 등 장용영의 가난한 장교나 군병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276 페이지)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쓰면서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킬 것을 지시했다.(281 페이지) 즐풍목우는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의미이다. 장용영 기병들의 진법 훈련 수준은 조선 최고의 수준이었다.

 

정조가 선대 국왕 묘소 참배 후 돌아오는 중 실시한 군사훈련은 대체로 즉흥적이었다. 의도를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289, 290 페이지) 정조에게 수원은 군사정책 개혁 및 민생안정 개혁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수원에 장용영 외영을 만든 것이다.

 

수원을 핵심 거점으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상 요지였다는 점, 교통상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등이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299 페이지)

 

장용영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정조 호위였다.(325 페이지) 정조는 화성 축조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금위영과 어영청의 번상군을 10년에 한해 매번마다 각 1초씩 감축하는 대신 포()를 부과하여 이를 화성 축조 비용으로 충당케 했다.(333 페이지)

 

정조는 이전에 한 번도 실시한 적 없는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장용영외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합동훈련을 통해 화성을 실질적으로 방어하게 한 것으로 장기적으로는 정조의 화성 거주를 위한 훈련의 의미를 갖는다.(347 페이지)

 

저자는 고위 신하들과 무인들에 비해 3배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역사상 최고의 신궁(神弓)인 무인 군주 정조의 군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이 조선을 지킬 믿음직한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말한다.(349 페이지) 저자는 백성 없는 군대는 의미가 없고 군대 없는 백성은 위태롭다고 말한다.(352 페이지)

 

장용영 군사훈련의 특징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장용영이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353 페이지) 저자는 정조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본인 재위시에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왕주도의 것이었다는 점이라 말한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이후로 60년간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는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라 말하며 정조 탓에 세도정치가 있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개혁 시스템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 정조는 이 천명(闡明)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정조는 군신공치를 실천하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강화해 의도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군주는 자신만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때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상대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신하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355 페이지) 이것이 바로 군주의 역할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정조 타계 이후 반개혁 세력에 의해 정조의 개혁 프로그램은 지워졌다.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장용영이 혁파된 것이 그 한 예이고 가장 아픈 현실이다. 이것으로 정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충분히 제거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느꼈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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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10월 4일) 건축 전공의 문화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설사시기에 역사 외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신 줄로만 알았지만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분이 과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이야기했고 물리와 수학의 관계, 건축 전공자들이 한옥 지붕에 대해 필수적으로 수업을 받는지 등을 물었다. 내가 들은 답은 전체 학점 중 한옥 부분은 3학점 밖에 되지 않는.비중 낮은 부분이지만 듣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과학에도 관심이 많으시냐는 물음에 그 분은 수학과 과학을 잘해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답을 했다. 그 영향 때문에 나는 요즘 임석재 교수의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를 읽고 있다. 사놓고 꽂아만 둔 책이다.

이 책에 차경(借景)과 장경(場景)이란 말이 나온다. 들어 알고 있지만 설명이 쉽지 않은 차경과, 거기에서 더 나아간 장경이란 개념을 익히는 것은 재미 있다. 풍경요소와 관찰자 사이가 밀접하면 차경이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장경이 된다. 장경은 관찰자가 풍경과 다른 공간 또는 다른 세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건축 용어인지 풍수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차경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함과 낯섦이 생각난다. 여기에 장경이란 개념까지...저자는 거리감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와 객석을 예로 든다. 그래야 관객은 분리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이 현실과 다른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의 차이가 의미 있게 느껴지도록 한옥을 자주 방문해 찾고 배우고 느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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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실록 기사로 조선을 만나다
송영심 지음 / 팜파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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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민초, 여성, 하층민들의 다양한 기록이 숨어 있다는 송영심. 그는 자신의 책('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리타분한 조선사가 가슴 떨리는 조선사가 된다고 말한다.

 

'조선을 담다, 조선왕조실록'(1), '조선의 왕들을 만나다'(2), '주제로 실록 속 조선을 보다'(3) 등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춘추관에 속한 여덟 명의 사관으로 구성된 사관들을 한림이라 부른다는 말에서부터 실록의 원고인 사초(史草)는 국왕 옆에서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퇴청한 사관이 집에서 내용을 정리해 생각과 사론을 정리하는 가장사초(家葬史草)로 나뉜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열거한다.

 

세검정(洗劍亭)이 세검정이라 불리는 것은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때 의연하게 대처한 드라마 장면은 픽션이라 말하며 픽션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안타까운 점은 단종이 복위운동을 알고 친히 큰칼까지 내리며 격려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가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뭘까? 조광조가 중종의 공부를 독촉하고 꾸짖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만하다.(79 페이지) 조광조는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따뜻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을 불러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라 부탁했다. 먼 길 가기 쉽도록.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이다. 왕비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을,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만들 때 용마루가 있으면 아기가 탄생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저자는 왕비의 처소가 아닌데도 용마루가 없는 건물도 있어 그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세종 이전에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들도 옹주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때 공주와 옹주가 구별되었고 성종때 왕비의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딸은 군주(君主),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縣主)라 했다. 동뢰(同牢)라는 말도 있다. 공주와 부마가 치르는 첫날밤이다.(147 페이지) 첫날밤이 아니라 부부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영조의 부마)이 죽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영조가 거절했다. 정절은 지켰으나 밥을 먹으라는 아비의 청을 듣지 않아서 불효녀이기 때문이고 아비가 자식의 열녀문을 세워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4 페이지)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56 페이지) 조선에는 궁녀에서 출발해 왕비까지 된 두 여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이다.(170 페이지) 궁녀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늙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을 통해 나가 사가에서 돌보는 이 없이 생을 마쳤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그림자이자 증인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세종 대에 국가 차원에서 무당들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세종실록 참고)도 흥미롭다.(191 페이지) 유에프오 목격담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실록 내용도 있어 흥미를 끈다.

 

"강릉부에서는 8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밝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 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점 커져 3, 4 장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광해 20. 192353번째 기사 1609: 225 페이지)

 

흥미롭다. 유에프오 관련 실록도 그렇고 전체적 구성도 그렇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명공주(1603-1685)를 중종반정(1506) 이후 공주로 복권될 수 있었다고 쓴 부분(150 페이지), 익종(효명세자) 비를 신원왕후로 기록한 부분(143 페이지),

 

단종의 유배지를 청룡포로 기록한 부분(39 페이지), 나쁜 일을 많이 벌인 화완옹주를 정치력이 탁월했다고 표현한 부분(152 페이지) 등은 아쉽다. 세검정(洗劍亭)이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란 내용은 일반론과 다른데 그 부부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의아하다.(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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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루공 마카르 총서, 이와나미<岩波> 총서, 갈리마르 총서 등.. 두서 없이 생각나는 총서들이다. 이 가운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말하고 싶다. 19번 폴 뒤 부셰의 '바흐; 천상의 선율'에서 내가 들은 것은 바흐(Bach)란 말이 동유럽 방언으로 순회음악가를 뜻한다는 말이다. 시냇물이 아니라.

 

138번 주느비에브 브레스크의 '루브르; 요새에서 박물관까지'에서는 이런 말을 들었다. "태초에 이름이 있었으니 루브르(Louvre)였다. 이 지명의 직관적 혹은 음성학적 규칙에 따른 기원은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라틴어로는 루파라 혹은 루페라이고 프랑스어로 로브르 혹은 루브르라고 부른다. 색슨족 말로 성채(城砦)를 의미하는 로워의 변형일까? 혹은 나병환자 수용소를 뜻하는 레프로즈리(leproserie)의 변이형일까? 아니면 접미사 아라(ara)로 끝나는 미지의 골족 어근을 지닌 리비에르(riviere; )에서 온 걸까?

 

아니면 떡갈나무를 뜻하는 루브르(rouvre)의 첫 번째 철자 rl로 바꾼 것일까? 늑대 사냥개라는 의미의 루페리아(luperia)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무시무시한 개과의 짐승들에게 해를 입은 곳과의 관련성이 더 커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괜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고성이나 선조 샤를마뉴 대제가 거주했던 성채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요새와 관련해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어원과 관련해 두 책이 중요한 말을 했다고 해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일반적 특성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 나는 성채 또는 요새설()을 지지한다. 언어가 아닌 물적 토대에 기인한 언어이고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라깡의 루브르'에서 루브르를 의미 있게 활용했다. 그는 루브르가 늑대가 출몰하던 곳에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라 말하며 프로이트의 주요 환자였던 늑대인간을 거론했다.

 

늑대인간이란 늑대를 무서워해 붙여진 이름이다. 요지인 즉 늑대인간이라 불린 그 소년의 기억은 조작, 편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잘못된 기억도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백상현의 의도는 정신분석이 개인사 박물관(조작, 왜곡되었기에)에 메타고고학(환자의 인생이 이미 건설해놓은 개인사 박물관의 유물들을 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다시 배지하고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기에)을 행하듯 박물관 자체의 존재 의미를 묻는 것에 있었다.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이란 부제를 가진 이 책의 목차는 강박증의 박물관, 히스테리아의 박물관, 멜랑꼴리의 박물관, 성도착(性倒錯)의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루브르가 늑대와 무관하다 해서 박물관에 대해 메타고고학적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가 캐롤 던컨은 루브르는 왕의 소장품이 공공미술관으로 바뀐 최초의 사례는 아니지만 그 변형은 정치적으로 가장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미술관이라는 환상' 60 페이지)

 

루브르를 늑대와 연관짓는 것은 루브르의 루가 늑대(낭창; 狼瘡, ; 이리 랑)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루프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설명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루브르를 성채 또는 요새와 연결짓는다면 늑대와 연결지을 수는 없다.

 

이보아처럼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라는 책을 통해 루브르를 문화재 약탈과 반환의 역사로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는 왕의 소장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다가 공공미술관으로 바뀐 루브르를 왕립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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