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돌봄 -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은 나를 위한 자기 치유법, 개정판
타라 브랙 지음, 김선경 엮음, 이재석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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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이 불교 교리 및 수행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는 임상심리학자 타라 브랙(Tara Brach)은 지난 20년간 자신이 학생들과 수련생들에게 강조한 한 마디는 자기 돌봄이라 말한다. 불교에서는 무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데 저자는 자아는 우리 내면의 진정한 평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정의한다.

 

문제는 고도로 발달한 사고 능력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과거의 일을 더 잘 기억하고 미래의 일을 철저하게 계획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저자에 의하면 생각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분명 가상현실이다.(45 페이지)

 

요구되는 것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각하는 것이다.(46 페이지) 저자의 책에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의 중요성이 수없이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또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깨어 있기가 아니라 그 방법 중 하나로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48 페이지)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호흡마저 잊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살아있음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54 페이지) 저자는 RAIN 수행법을 논의(제시)한다. recognize(지금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는 것), RAIN이란 allow(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저항하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investigate(지금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살피고 조사하는 것), non-identification(감정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의 머리 글자를 조합한 것이다.

 

명상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머무는 것(65 페이지)이라 말하는 저자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언급한다. 바다는 우리의 본성인 존재성이고 파도는 우리가 느끼는 흥분, 두려움, 고통, 즐거움, 생각, 분노, 행복감이다.(104 페이지) 바다와 파도가 다르듯 우리는 비유적 의미의 바다를 파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을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또한 괴로움을 느끼고 다루는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이는 성폭행 피해자 중 스스로 비난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리적 치료 예후가 더 좋다는 사실(96 페이지)을 연상하게 한다.

 

자신을 어느 정도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를 방관하지 않고 무력하게 버려두지 않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비난이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96 페이지) 반면 트라우마로 힘들 때 스스로를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배려하고 돌보도록 하는 사람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140 페이지)

 

중요한 점은 트라우마는 우리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고 모든 트라우마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DS)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34 페이지) 트라우마가 표현되는 방식도 다양하다. 분노, 자책, 슬픔, 노여움, 질투 등...(137 페이지) 저자는 완벽해지기 위한 그 무엇도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며 괴로움일 뿐으로 현재를 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상을 통해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까지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전한다. 삶에서 만나는 이런저런 고통은 단 하나의 원인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통들은 수많은 인과관계가 얽히고설켜 드러난 것이고 진행중인 하나의 과정으로 이를 인식하면 용서의 문은 느리지만 분명히 열릴 수 있다.(175 페이지)

 

저자는 용서란 상대의 나쁜 행위에 대한 특정 이야기를 내 안에서 놓아 버리겠다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똑같은 상처가 다시 저질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결심하겠다는 것이라 말한다(176 페이지) 용서는 용납이나 정당화가 아니다.

 

용서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것이다. (178 페이지) 용서는 나는 괜찮다는 자기 상처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긴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179 페이지) 진정한 용서는 내 안에서 충분히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180 페이지) 강요된 용서는 또 다른 폭력이다.(184 페이지)

 

용서가 상대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이다. 내가 용서해준다고 상대가 덜 고통스럽지도 않고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185 페이지) 불교에서 말하는 깨어남의 초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를 깨닫는 것이다.(206 페이지) 깨어 있기에 도움이 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름 붙이기이다. 이름 붙이기는 전두엽을 활성화한다.

 

이름 붙이기란 가령 자신이 화가 나면 화남이라 정의하는 것, 아프면 아픔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객관화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극복하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이다. 명상은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깨닫는 것이다.(217 페이지) 애도는 나에게 의미 있는 대상을 상실한 뒤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219 페이지)

 

저자는 마음 챙김 명상은 지금 이 순간 현존하여 나의 본성과 마주하는 명상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거듭 연습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60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아난에게 다만 스스로를 의지하고 자신이 설한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는 부처의 가르침<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환기시킨다.(261 페이지)

 

물론 이는 생명은 절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148 페이지)과 함께 음미할 말이다. 저자는 모든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실이라 말한다.(156 페이지) 음미하고 음미할 말이다. 타라 브랙의 '자기 돌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천천히 정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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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 - 품격 있는 글쓰기 지침서의 고전
F. L. 루카스 지음, 이은경 옮김 / 메멘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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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렌스 루카스의 '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의 원제는 '스타일(Style)'이다. 스타일 즉 문체란 본래 필기구 즉 글씨를 쓰는 용도의 뼈나 금속으로 된 끝이 뾰족한 물체를 의미했다.

 

좋은 문체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말하는 저자는 문체의 기초를 인격이라 전제한다. 글은 곧 사람이란 말은 글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격이 가장 두드러지게 저자를 말해준다는 의미이다. 인품이 좋다고 재능 없는 사람이 글을 잘 쓸 수 있지는 않지만 인품이 좋으면 훨씬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명료한 글을 쓰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이다. 간결하게 쓰는 것도 중요하다. 저자는 의심스러울 때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단락을 짧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가르친다. 물론 명료성에는 한계와 위험이 있다. 상당히 좋지만 너무 단순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일반적인 산문이라도 언어가 너무 명료하면 힘이 부족해질 때가 있다. 필요한 것은 명료성, 즐거움, 생소함(을 갖춘 글을 쓰는 것)이다. 생소함은 새로움의 다른 말이다. 간결성도 독자에 대한 예의의 한 형태이다. 실용적이면서 예술적인 경제학인 간결성은 글에 품격과 힘과 속도를 더할 수 있다.

 

저자는 좋은 작가는 무엇을 쓸지 뿐 아니라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지도 안다고 전제하며 간결하기 때문에 명료할 수 있고 명료하기 때문에 간결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양성도 중요하다. 이는 분위기, 느낌, 어조의 다양성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작가에게 필요한 요소이자 독자에 대한 예의이다.

 

저자는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대비해 설명한다. 진주는 완벽할 수 있으나 어떤 조명 아래서는 빛깔이 흐려지는 데 비해 다이아몬드는 어디서든, 어떤 희미한 빛 아래서도 눈부신 광채를 빛낸다. 저자는 품위와 우아함을 강조한다. 그것이 우리시대에 치명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낙천적 기질과 유쾌함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낙천적 기질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는 열정 없이 별다른 바를 이룰 수 없지만 그것을 자제하지 못하면 해롭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유쾌함은 위험하고 도를 넘어 부적절해질 수 있지만 낙천적 기질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194 페이지)

 

저자는 품위와 우아함을 강조한다. 그것이 우리시대에 치명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낙천적 기질과 유쾌함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낙천적 기질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는 열정 없이 별다른 바를 이룰 수 없지만 그것을 자제하지 못하면 해롭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유쾌함은 위험하고 도를 넘어 부적절해질 수 있지만 낙천적 기질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194 페이지)

 

예술가는 일반인보다 영원한 딜레마에 자주 직면한다. 열정이 없으면 가치 있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정이 있으면 잘못된 행위를 하는 데 끊임없이 빠져드는 것이다.(205 페이지) 강한 열정과 강한 자제력을 한데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저자는 시인은 어떨지 몰라도 산문 작가는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213 페이지)

 

저자는 은유와 직유 없는 문체는 태양 없는 한낮, 새 없는 숲 같다고 말한다.(258 페이지) 살아 있는 은유가 중요하다. 그것은 한 번에 두 방향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거의 두 가지를 보도록 만드는, 일종의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이다.

 

직유는 두 가지 생각을 나란히 배치하고 은유는 두 생각이 겹친다.(259 페이지) expression은 쥐어짜낸 어떤 것을 의미하고 metaphor는 그 자체가 은유다. 그림이 아이들을 즐겁게 하듯 형상화는 우리의 보다 단순한 측면을 즐겁게 한다.

 

게다가 추상적인 구름 위에서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로 이루어진 견고한 세계로 내려오면 안도감과 안심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죽은 은유와 부정확한 은유 자제하기이다.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보자. 그는 원자를 쪼개기가 어려운 이유를 새가 거의 없는 어두운 숲속에서 새를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 표현했다. 저자는 이를 절묘한 비유라 표현했다.(273 페이지)

 

은유는 힘, 명료성, 속도를 선사하고 기지, 유머, 개성, 시적 분위기를 보탠다. 영국 소설가, 시인 조지 메러디스는 장광설을 피하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은유가 산문과 특별히 관련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295 페이지)

 

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모든 문장을 쓰면 견딜 수 없게 단조로워진다. 다양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글쓰기 방법은 심리적 측면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367 페이지) 저자는 글을 쓰기 전에, 그리고 쓰는 중간에 깊이 명상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창조의 과정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369 페이지)

 

무의식 외에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이성도 필요하다. 저자는 무의식을 위해 부화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나태해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던 일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69, 370 페이지) 저자는 무의식은 마치 마음대로 무단결석을 했다가 뜬금 없이 나타나는, 다루기 힘든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한다.(370 페이지)

 

물론 무의식이 던진 암시는 곧바로 움켜잡거나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무의식은 뚜렷한 이유 없이 주는 것을 뚜렷한 이유 없이 도로 가져갈 수 있다. 가장 빠르게 쓴 글이 최상의 결과일 수 있다. 저자는 글을 빨리 써서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글쓰기를 잘해서 글을 빨리 쓰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현명하다고 말한다.(374 페이지)

 

좋은 글쓰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된 작업이다.(378 페이지) 수정은 글을 다듬는 수단일 뿐 아니라 글을 압축하는 수단이다. 생각할 것이 있다. 누군가의 두 번째 생각, 스물 두 번째의 생각이 늘 최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겹게 정확성을 추구하면서 수정에 집착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즉흥성이 희생될 수 있다.(381 페이지)

 

생트 뵈브의 '월요한담'의 탁월함의 경우 작품을 망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들려온다. 수정 뿐 아니라 수정을 멈출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탈고하느라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나머지 동화책보다 어려운 책은 읽지 못했다고 한다.(383 페이지)

 

저자는 특정 주제에 대해 글로 쓰인 모든 것을 읽으려는 시도를 헛된 이상으로 정의하며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을 재빠르게 알아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 백 권의 책을 읽기로 했다면 오십 권까지 읽었을 때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머지 책들은 글 쓰는 중간이나 초고 완성 후에 읽어도 좋다.(383 페이지)

 

수정 단계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다 읽으면 된다.(384 페이지) 요점은 좋은 글쓰기는 지칠대로 지친 신체나 포화상태의 정신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384 페이지) 글쓰기 방법에서 핵심은 정신의 더욱 의식적인 부분과 덜 의식적인 부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38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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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과 1766년 - 조선 지성계를 흔든 연행록을 읽다
강명관 지음 / 한국고전번역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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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을유(乙酉; 1765)에서 병술(丙戌; 1766)까지 홍대용이 서장관인 그의 숙부 홍역을 따라 북경을 기행하고 와 쓴 산문이다. 홍대용은 원래 한문으로 된 '연기(燕記)'를 썼으나 후에 어머니 등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고쳐 써 '을병연행록'이라 하였다.

 

홍대용의 집안은 전통의 노론이었다. 벼슬보다 인격 수양에 열중했던 홍대용은 '논어'를 읽다가 공자를 비판하기도 했고 소론의 입장에서 노론을 엄중 비판하기도 했다. 강명관의 '홍대용과 1766'은 홍대용의 '연기''을병연행록'을 해설한 책이다.

 

'연기'의 내용과 '을병연행록'의 내용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담헌의 특징을 요약하는 말이 곧은 성품과 회의하는 정신이다. 담헌의 생에 전기가 된 사람이 실학자 나경적(羅景績: 1690 1762)이다. 담헌이 아버지 홍억(洪檍)의 부임지인 나주에서 만난 나경적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 자명종을 본떠 만들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담헌은 나주에서 나경적과 혼천의를 제작하며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접한 뒤 완성 3년 후인 1762년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에게 청의 수도 북경은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이었다.

 

경화세족만이 북경에 갈 수 있었지만 벼슬을 하지 않은 담헌이 북경에 간 것은 경화세족의 자제 자격으로서였다. 북경을 유관(遊觀) 즉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담헌은 사신단의 자제였기에 더욱 자유로웠다. 당시 조선은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입각해, ()을 무너뜨린 청()에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北伐)을 표방하고 있었다.

 

소중화 의식이란 명이 청에 짓밟히고 오염되었기에 중화 문명은 오직 조선만이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중화 의식은 허위의식이었고 북벌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청은 1백년이 넘는 동안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랑캐의 나라인 청에 가는 담헌으로서는 화이론과 소중화 의식으로 무장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헌은 청나라의 놀라운 물질문명에 충격을 받고 그들과 너무 대조적인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착잡하게 떠올린다. 담헌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서양 과학 기술을 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수준 높은 선비를 만나 대화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담헌은 중국 여행을 위해 체력 훈련도 하고 중국어도 익혔다.

 

17662월 담헌은 엄성과 반정균을 만났다. 조선 사신단의 비장(裨將) 이기성이 안경을 사기 위해 유리창(瑠璃厰)에 갔다가 둘을 알게 되어 담헌에게 소개한 것이다. 유리창은 서적, 서화, 골동품, 각종 문방구 등이 몰려있는 거대 상점가이다. 담헌은 엄성, 반정균 등과 필담을 나누었다. 담헌은 강력한 대명의리론자였고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

 

서양 과학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담헌은 청에 가기 전 그 발전상에 대해 들었지만 직접 경험하며 느끼게 된 청은 충격 자체였다. 관념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담헌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게 된다. 청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달성했다. 청의 그런 놀라운 발전상은 조선을 쓸쓸하고 가련하게 느끼게 했다.

 

결국 그 현격한 격차는 훗날 박제가와 박지원으로 하여금 북벌이 아닌 북학(北學)을 외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청이 명을 강제로 몰락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부패, 무능한 명이 스스로 반란을 초래했고 그 난을 청이 평정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원이 청의 차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홍대용과 1766')의 하이라이트는 홍대용이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나눈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상세히 소개한 부분이다. "담헌은 중국 여행 내내 중국 지식인과 만나 대화하는 일을 간절히 원하였다."(151 페이지) 물론 주자학 근본주의자 담헌과 양명학, 불교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엄성, 반정균의 사상적 기반은 판이했다.

 

그들은 수준 높은 필담을 주고 받았는데 엄격한 담헌과 달리 반정균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속내를 깊이 표현할 정도까지에 이른다. 조선의 지식인 담헌과 청의 선비이면서도 소탈한 데다가 홍대용을 변방의 조선인이라 하여 거만하게 대하지 않았던 엄성, 반정균은 곧 서로 매료되고 만다.

 

담헌은 계속 성리학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졌지만 완고하지는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이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가 된다. 담헌은 풍류와 기생에 관심을 보이는 반정균에게 여색을 멀리할 것을 충고한다. 담헌은 두 사람에게 진실한 공부를 해 속유(俗儒)가 되지 말 것을 충고했다.

 

담헌은 두 사람을 간절히 사랑하는 나머지 기대가 깊어 당부하는 것이라며 거칠고 졸렬한 말이지만 음미해볼 것이 있으니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말까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담헌은 유가의 성인인 순임금이 동이이고 문왕이 서이이며 왕후장상의 종자가 없고 누구라고 하늘의 때를 잘 받들어 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면 천하의 의로운 주인이라는 말을 듣고 사유의 변화를 일으킨다.

 

저자는 담헌으로서는 중국의 세 선비가 자신에게 설파했던 주자 학설에 대한 비판을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그 활발한 반론의 제기야말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을 한다.(245 페이지) 담헌은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김종후와 논쟁을 한다.

 

이 일은 담헌으로 하여금 화이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50 페이지) 담헌은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생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과 뿌리가 같다. 저자(강명관)의 결론은 인종과 국가, 언어를 넘어 인간으로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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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국어 학습기 - 읽기와 번역을 위한 한문, 중국어, 일본어 공부
김태완 지음 / 메멘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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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 왕의 공부의 저자 김태완의 나의 외국어 학습기는 전공인 철학 공부를 위해 여러 나라 말을 공부하게 된 저자의 외국어 공부 비결과 내공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비결이라 했지만 저자의 책을 통해서 우리는 꾸준함과 반복 학습 등을 주문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중학교 시절 이전부터 축적된 외국어 학습에 관한 경험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다. 여러 인문서들을 넘나들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공부한 경험을 넘나들며 전하는 저자의 채게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즐비(櫛比)하다.

 

'맹자'에 기록된 북학이란 말은 전국시대 남쪽 초나라 태생의 진량(陳良)이라는 사람이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유학을 배운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 이 일로 연유하여 북쪽의 청나라에 가서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을 북학파라 불렀다는 말.( 41 페이지)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사유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66, 67 페이지), 에른스트 카시러는 언어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보았고 이 통로를 상징형식이라 규정했다는 말, 그렇게 심볼의 어원인 희랍어 symbole는 두 조각으로 나뉜 막대기 하나를 의미하였다는 말.

 

두 친구가 저마다 둘로 나뉜 막대기 조각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가 자식에게 물려준다. 물려받은 두 자식은 조각을 서로 맞춰보고 들어맞으면 선조의 우정 관계를 인정하고 우정을 이어나간다. 낯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이 선천적으로 하나로 묶인 관계임을 나타내는 제 3의 매개가 상징이라는 것이다.(72, 73 페이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괴테가 한 말이다.(87 페이지)

 

본문에 역()에 대한 글이 나온다. 형태로는 일()과 월()을 합한 글자이고 뜻으로는 교역(交易), 변역(變易)을 의미하고 황하(黃何)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성인이 본받아서 만든 것이다.

 

저자는 언어에 문법을 맞춰야지 문법에 언어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문법을 먼저 공부하고 언어를 읽고 쓰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한문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한문에는 문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도 만용이지만 문법에 얽매이는 것은 여행을 한다고 지도를 보며 한 발짝도 떼어놓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134, 135 페이지)

 

저자는 요즘 출판계와 독서계에 가독성이라는 망령이 지배해 수사적 장치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으려고만 한다고 지적한다. 만연체, 화려체, 간결체, 우유체, 강건체......문장의 개성을 살려주던 문체가 사라지니 주어 하나에 목적어와 부사 성분을 두고 술어 하나만 달랑 남는 천변일률의 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152, 153 페이지)

 

저자는 어떤 언어든 쉬운 것은 없다며 아주 일상적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외국어를 많이 배우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한 나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해당 문화의 정수를 담은 문학작품을 읽으려면 잠심(潛心)하여 오랜 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201 페이지)

 

발화자와 수용자가 메시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에 해석이 개입한다. 번역이든 해석이든 나의 선()이해가 전제되기에 오해는 숙명적이다. 이때 말하는 오해란 틀린 이해,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을 100퍼센트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하지 못하고 나의 선이해라는 프리즘으로 투과하여 반영한다는 말이다.(206, 207 페이지)

 

저자는 외국어는 최소 2년 멈추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계적 훈련의 힘을 믿으라고 말한다. 단어를 외운다고 해서 반드시 언제라도 생각나도록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쓰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번역서 부분이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보면 어김 없이 번역도 헤맨 부분이라는 말을 한다. 본문에는 우리말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일본어라고 특별히 다른 초특별 고속도로는 없다는 말도 있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아무리 쉬운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옮기려면 내 언어가 얼마나 졸렬한지, 내 표현 역량이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깨닫게 되며 번역 과정을 거치면 우리말 실력도 쑥쑥 늘게 된다고 말한다.(244 페이지)

 

부록으로 한문, 중국어, 일본어 번역의 실례를 들어 놓기까지 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소통, 그리고 외국어 공부의 가장 큰 동기는 외국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고 대표적으로 외국 소설 등을 원문으로 읽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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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함석헌 기념관에서 이경교 시인의 강의('근대적 자각과 시적 인간')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난학(蘭學)과 일본의 독서운동, 그리고 근대화란 챕터를 들은 한 청자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론하며 불편감을 표했습니다.

 

국가 구성원의 독서 수준의 차이가 소설 및 문화 수준의 차이를 낳았다는 견해에 정치적 반응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의 강국들로부터 선진 문명과 문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입니다.

 

우리의 이 시기는 세도정치로 나라가 근대화의 도약 가능성을 스스로 폐기한 이후의 시기임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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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8-10-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학 덕분에 일본의 서양 의학 기술이 훨씬 앞당겨진 계기가 되었죠...그 자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론할 것까진 없었던듯 한데..그 점에 공감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10-22 11:08   좋아요 0 | URL
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