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님의 '사람, 장소, 환대'를 통해 알게 된 '자아연출의 사회학'의 저자 어빙 고프먼(사회학자)'수용소'가 번역, 출간된 것은 올 여름이다.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가 부제인 책이다.

 

지난 달 로널드 랭(정신과 의사)'분열된 자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온전한 정신과 광기에 대한 연구'가 부제이다. 한 심리학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하며 심리치료에서 기법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치료사 자신의 성숙한 인격과 마음의 건강이란 말을 했다.

 

완벽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이긴 치료자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기에 적격이라는 의미다.

 

중요한 사실은 획기적인 치료법이 아니라 내담자를 보는 치료자의 눈이 바뀌고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로널드 랭은 정신과적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비정상 환자로 볼 것이 아니라 불화(세계와의 관계에서)와 분열(자신과의 관계에서)을 경험한 사람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이는 칸트적 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비유된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치료자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를 이긴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말로부터는 선하고 올바른 행위만을 하는 사람이 군자가 아니라 실수를 반성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군자라는 공자의 관점을 떠올릴 수 있다. 칼 융의 "상처받은 치료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전환적 시각이라는 말이다. 이 말로부터는 ''라는 인식 주관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앎도 말할 수 없다는 칸트적 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에 더 비중을 둘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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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썼지만 저자의 이름을 무심히 흘려버린 책이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이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의 그 단턴이다. 서평 작성 5년만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김병익 선생의 '조용한 걸음으로'란 책을 읽고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김병익 선생에 의하면 단턴은 '미래의 책'에서 1968년에서 1984년 사이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도서 전자화를 위해 9300만 페이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1000만 달러의 책과 문서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건재를 전제한 이야기이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이 있기에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해도 복구는 시간 문제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시인을 체포하라''고양이 대학살' 말고도 단턴의 저술 목록에는 '책의 미래', '책과 혁명', '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 등 책과 관련한 읽을거리들이 꽤 있다.

 

특이하게도 단턴은 프랑스사를 전공한 미국인 역사학자이고 2007년에서 2016년 사이에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지낸 사서이다. '책의 미래'에는 도서관에 관한 유용한 자료들이 꽤 있다. 도서관 관련 자료는 아니지만 프로이트보다 푸코’, ‘책읽기에서 책쓰기로같은 흥미를 자극하는 글들도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단턴을 이야기하며 '고양이 대학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진 고양이 대학살을 다룬 책이다.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두 견습공이 인쇄소 여주인이 좋아하던 20여 마리의 고양이들을 죽인 사건이다. 견습공들은 춥고 더러운 방에서 잠을 잤고 고양이들조차 거부한 음식을 먹었던 반면 고양이들은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고 구운 새고기도 먹었다.

 

고양이들은 밤새 울어댔다. 흉내를 잘 냈던 레베이예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진짜처럼 흉내내 주인과 아내로 하여금 '미친 고양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게 했다. 두 견습공은 유쾌하게 고양이들을 죽였다. 여주인은 그들이 죽인 고양이가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것들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단턴은 견습공들은 여주인이 아끼던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실제 그녀가 마녀였다고 기소한 것이고 고양이들을 재판(견습공들은 고양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최후 의식을 치른 뒤 교수대에 고양이들을 매달았다.)함으로써 법 질서와 사회 질서 전체를 조롱했다고 썼다.

 

번역자 조한욱 교수는 견습공들의 행위를 상징의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드러나는 상징적 모독으로 설명한다. 조한욱 교수에 의하면 이는 인류학적 방법이다. 인류학은 오지의 원주민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흥미로운 생활방식을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같다는 자신들의 학문적 전제에 따른 것이다.

 

인류학은 단순화된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이 다른 복합적인 문명권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이는 과학의 환원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관건은 단 한 차례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노동자들 일반의 사고방식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인류 전체의 죄가 되고, 한 존재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는 물론 십자가 사건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삶이 모두 관계한 것이다.)이 모든 인류를 사()한 것을 알지 않는가.

 

다나 해러웨이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서 한 말이 있다. 하나는 부족하고 둘은 너무 많다는 말이다. 백소영 교수는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을 예로 든다. 그 청소년은 자신 혼자만 있을 때와는 다르기에 한 개체라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둘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은 하나 이상이고(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하나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둘은 아니라는(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는 둘은 아니라는) 의미란 것이다.('페미니즘과 기독교적 맥락' 95 페이지)

 

다나 해러웨이의 말을 맥락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고양이 대학살의 두 견습공의 행위가 당시 노동자 일반을 대표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 같고 아니라고 하면 너무 자폐적인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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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후에는 물론 읽는 중에도 지인들에게 대단한 책이라는 말로 거듭 추천한 책이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방문객은 많으나 추천은 아주 적은 예스에서 지난 119일 게시 이후 무려 열 분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예외적인 책이기도 하다.

 

정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글도 잘 써야 하지만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도 필요함을 느끼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지금 그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읽고 있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선불교를 철학하다'란 부제를 가진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을 사려고 한다.

 

사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출간(201611) 직후부터 구입을 망설인 책이었는데 중고로 나온 책을 보고 사 읽고 뜻 밖의 성취를 이루었다. '선불교를 철학하다'는 선불교에 대한 내 몰이해 또는 편견을 깨줄 책이 될 것이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을 통해서는 공간에 대한 사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책에 현상학적 공간 개념에 대한 글이 있다. 나는 시간보다 공간에 더 관심이 크다. 물론 그 관심은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관심이기도 하고 일상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그 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산책에 비해 공간적 산책이 제한적'('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105 페이지; 옮긴이 해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같은 문인의 삶을 보며 음미하는 유의 공간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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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어야겠다. 유튜브로 정신분석가 백상현 교수의 '히스테리/ 강박증' 강의를 들었다. 그는 우울한데 원인을 모르기에 병이라는 말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이 스피노자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나 오랜만에 '언어와 비극'이란 책을 펼쳤다.

 

고진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정념(情念)의 원인을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알 수는 없고 더구나 안다고 해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을 알려고 하는 동안 만큼은 정념에서 자유롭다고 보았다. 고진은 스피노자가 인간은 결국 자연이라는 신체의 조건을 넘어설 수 없다고 보았다.

 

철저하게 인간이 동물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칸트와 대비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숭고한 것은 자기를 극복하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서이다.(백종현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250, 251 페이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의 한 구절을 읽는다.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에게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예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헤세의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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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인간 3부작 1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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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우리의 정조(正祖) 재임기(1776 - 1800)에 주요 철학서들을 쓴 독일의 철학자이다. 독일의 대학생들이 오히려 영어 번역본으로 읽는 철학자. 서울대 백종현 명예 교수가 쓴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을 상세 분석, 설명한 책이다. 칸트는 최초의 직업 철학자이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공부한 철학자이다.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50km 이상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40세 때인 1764년 사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전공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한국인 누군가가 칸트의 독일어 저서를 읽는다면 그는 눈으로는 독일어를 읽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독일어에 상응하는 한국어를 찾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 그것은 결국 한국 사상을 읽는 것이라는 말이다.(34 페이지)

 

우리의 어휘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온 것들임도 주목할 이야기거리이다. 예술, 이성, 과학, 기술, 철학 등의 말이 니시 아마네(西 周: 1829 - 1897)가 만든(서양 개념에 상응하는 말을 고안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3대 구호를 자유, 평등, 박애로 번역한 사람이 나카에 조민과 고토쿠 슈스이다.(자유, 평등, 연대가 타당하다.)

 

일본 사람들이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일 때 중국 문헌들 중 유사한 한자어를 찾아 번역어로 만들었다. 중국 사람들마저 자국어로 알고 큰 저항 없이 받아서 썼다.

 

칸트의 철학적 숙고 속에는 고대, 중세의 사상, 근대의 과학 사상이 두루 포함되어 있기에 그의 사상을 철학 사상사의 중앙 저수지라 부른다.(63 페이지) 칸트 이전에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본 원인, 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칸트는 존재자 자체는 인간의 앎의 영역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오직 인간 앞에 나타나 있는 것 곧 현상과 대상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신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칸트 철학의 원인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 비판) 등이다. 칸트 철학에서 순수한 이론 이성은 자연세계의 입법자이고, 순수한 실천 이성은 도덕 세계의 입법자이다.(80 페이지)

 

순전히 자력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원리의 능력을 순수이성이라 한다. 그러니 그것은 신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그런 까닭에 정확히 말하면 유사(類似) 순수 이성이다. 비판은 순수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분간하는 것이다.(83 페이지)

 

순수 이성 비판은 순수 이성의 자기 한계 규정이다. 칸트는 자연과학 지식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라 보았다. 자연과학 외에는 지식이 아니다. 사변에서는 지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의 형식을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형식으로 나누었다. 칸트에 의화면 어떤 것이 있다면 이는 공간과 시간상이라는 지평선 위에 있는 것이다. , 영혼 등은 공간과 시간상의 지평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칸트의 논의에서 그것들은 논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칸트가 뉴턴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했다고 하지만 칸트는 시공간을 관념(주관적인 것)이라 보았고 뉴턴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지성의 형식은 범주이다. 통각(通覺)이 허브(hub: )이면 범주는 스포크(spoke: 바큇살)이다. 통각은 의식의 통일작용을 말한다. 이 작용 없이는 우리는 자연 현상 세계에서 하나의 사물을 인식할 수도 없고 그 하나의 사물의 변화도 지각할 수 없다.(105 페이지)

 

칸트 철학의 한계를 말할 때가 되었다. 감각인상들이 잡다하게 주어지지만 그것들은 무엇인가가 우리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생긴다. 이것이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라 아닌가, 란 말을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의 곳곳에서 했다. 형식과 질료의 상관자로 초월적 주관과 초월적 대상을 대응시키지 않으면 칸트 인식론의 완결을 기대할 수 없다.(114 페이지) 내 생각이 감각 질료라면 그것을 체계화한 문서는 지식, 한글 프로그램은 인식 주관의 형식에 비유될 수 있다.(92 페이지)

 

실천 이성 비판과 상응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이다.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는 도덕의 문제, 현실이 아닌 이성이나 이념에서 도출되는 문제이다. 저자가 예로 들었듯 인간은 누군가 배가 고파 밥을 훔치면 열흘 굶고 안 훔칠 사람이 있겠느냐는 옹호론까지 나온다.

 

인간 행동의 원인이나 이유를 끊임없이 경험적인 세계에서 찾는 것이다. 경험 세계 밖의 신, 영혼 등을 찾던 사람들이 이 경우에는 경험적인 세계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지식의 측면에서 감각을 넘어사는 세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고,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행위면애서 끊임없이 감각적인 요인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이다.(145 페이지) 불교의 논리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를 이야기하니 집착하고 무()를 이야기하니 허무에 빠지는 사태를 경계해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있다 함은 상주(常住: 항상 존재함)에 집착하는 편견이고 없다 함은 다멸(斷滅: 끊어짐)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너 지자(智者)는 유와 무에 의지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일지 스님은 공()을 무()가 아니고 모든 현상이 상호 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말한다.('중관불교와 유식불교' 75 페이지)

 

칸트는 도덕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인간 이성에서 발원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이 자율성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 국가와 관련해 쓰이던 말이다.

 

칸트에게 의지는 선의지이다. 좋은 것을 하려 하는 것이다. 의지는 선의지이고 자유의지이다. 악한 의지는 무의지라 해야 한다. 칸트는 타자에 대해서는 행복하게 하고 나에 대해서는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보았다. 결과를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의지이다.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직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는 의지이다.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 이를 정언명령이라 한다.

 

최고선은 칸트적 이성의 세 번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의 답이다. 칸트는 인간에게 허용될 수 있는 희망은 행실을 한 그 만큼 행복을 누림이라 말했다. 칸트는 인간의 마음씨가 도덕법칙과 항상적으로 합치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 길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칸트는 영혼의 불사성을 요청한다. 칸트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서 신의 현존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변한다.(184 페이지)

 

칸트는 현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기독교를 떠나지 않았다. 가난뱅이에다가 전형적인 훍수저였다. 촌구석에서 테어나 집안도 미천했다. 제대로 된 그림을 본 적도, 제대로 된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가 한 예술적 경험이라고는 쾨니히스베르크 지역 귀족집의 정원을 본 것이 고작이다. 학생 시절 칸트가 탁월했다는 증언은 없다. 호기심이 많고 성실했을 뿐이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교수 자리조차 45세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다. 63세에야 가난에서 벗어나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미 결혼 적령기가 한참 넘어선 때였다. 그래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늘 아플락 말락 했지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몸이 쇠약해 늘 골골했지만 섭생에 신경 써서 실제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몸으로 칸트는 80세를 살았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이란 반성적 판단력이다. 개념이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표상이다.(208 페이지) 반성이란 서로 다른 것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어떤 공통점에서 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미학(美學)은 미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라기보다 에스테틱 즉 감각/ 미감에 대한 학문이다.

 

칸트는 사상가는 무엇보다 세월에서 많은 것을 깨우치고 앞에서 미처 못 본 것을 새롭게 보고 앞서 말한 것을 뒤집어 말하는 것이 정상이라 말했다. 만약 어떤 사상가가 수십 년에 걸쳐 수십 권의 저작으 펴내면서 일관된 서술이나 주장을 편다면 그는 엄밀히 말해 사상가로 보기 어렵고 기억 장치만 갖춘 기계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칸트의 철학적 물음은 늘 "어떻게 ~이 가능한가?"이다. 칸트에게 미적 쾌감은 욕구가 없었으나 무슨 목적이 달성된 것처럼 흡족한 느낌을 말한다. 상상력과 지성이 합일하는 데서 미적 판단, 미적 쾌감이 생긴다. 내가 이 장미가 빨갛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시간상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성의 개념과 감성의 소여를 결합하는 끈이 도식이다. 이 도식을 만드는 능력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지금, 지금, 지금이라는 잡다한 시간 표상을 하나의 연속체(quantum continuum)로 만든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의 연속체로 상상함으로써 시간 지평이 열리고 그 위에 사물들이 현상하니까 비로소 지성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며 그 본질과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227 페이지) 실천이성 비판까지의 칸트를 고전주의, 판단력 비판의 칸트는 낭만주의의 일원이다.(232 페이지) 실러 등은 칸트 책들에서 '판단력 비판'만을 책으로 쳤다.

 

1794년에 이르러 칸트는 실러를 인용하면서 젊디젊은 실러의 환심을 얻기 위해 변명까지 한다. 그 엄격했던 칸트가 아름다운 영혼이란 말을 한 것이다. 독일 이상주의자들의 칸트에 대한 최대의 불만은 하나의 이성을 두고 이론이성, 실천이성 등으로 나누어 세계를 자연 세계와 윤리 세계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233, 234 페이지)

 

칸트는 판단력을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지성과 이성을 잇는 다리로 보았다. 칸트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을 간절히 바랐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이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는 철저히 인간이 동물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동물이기에 쾌락도 있고 숭고도 있다. 숭고하다는 것은 동물이라서 할 수 없는데도 무언가를 하니까 숭고한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니까 대단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자유를 가지고 있어 위대하다.

 

자연은 자유롭지 않다. 모두 필연적이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자연물이다. 인간의 일들도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존재자의 관점에서 말하고 기독교는 신의 관점에서 말하니 객관주의 철학이다. 칸트는 나를 주체로 놓고 존재세계든 당위세계든 바라보니 주관주의 철학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나는 나 일반을 지칭한다. 칸트에게 주관주의는 인간중심주의이다.

 

저자는 객관주의가 옳음을 주장하면서 손님 이야기는 들어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기 주장만 줄곧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사물 자체라는 말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했다. 말로는 신이 보기에라고 하면서 결국 너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작을 추천한다. 음미하고 또 음미할 책, 재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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