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미래 - 소멸과 진화의 갈림길에서 책의 운명을 말하다
로버트 단턴 지음, 성동규.고은주.김승완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독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가장 오래된 기계인 책이다...도서관은 가장 구식 기관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도서관은 미래에도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도서관들은 언제나 학습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의 주요 전언(傳言)이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다. 단턴은 현재의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면 과거를 연구하면서 파악해야 하기에 책의 구성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말한다. 실제 순서는 미래, 현재, 과거이다.

 

책은 20051000만 권이 넘는 도서들을 디지털화한 구글이 미국 저자협회와 미국 출판인협회로부터 소송을 당한 사건을 전한다. 단턴은 구글이 종이책의 디지털화 작업으로 초거대 (전자) 도서관이 될 것을 예상하며 이로 인해 있게 될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제시한다. 하나는 유토피아적 열광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 접근권을 통제하는 권력의 집중에 대한 우려다.

 

정보 교환 방식의 4단계가 있다. 문자 발명, 두루마기를 대체한 코덱스, 인쇄술 발명, 전자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를 전하며 단턴은 매 시대가 나름으로는 정보의 시대였고 정보는 언제나 불안정했다고 주장한다.

 

2007년 하버드대 도서관장이 된 단턴은 하버드대 신입생 시절이던 1957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희귀 도서와 원고가 있는 하버드대의 호턴(Houghton) 도서관에서 허먼 멜빌이 가지고 있던 에머슨의 '에세이'를 사서에게 찾아 달라고 해 받은 단턴은 멜빌이 고통이란 일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것 즉 선원들이 흔히 말하듯 폭풍우처럼 사그라지는 것이라는 에머슨의 글에 경탄을 금치 못해 신랄한 메모를 해두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단턴은 그 메모를 읽으면서 에머슨의 철학이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단턴은 책을 사랑하고 더욱 구식 책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턴은 정보는 지식이 아니라 말한다.

 

과거를 알기 위해 우리는 유적을 파헤쳐야 하고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유적을 파는 작업은 역사가에게 맡겨놓고 학자들이 써놓은 책들을 이해하는 데서 만족한다고 말한다. 단턴은 책이 싼 값에 매각, 폐기되고 어처구니 없는 책 보존 실험에 사용되어 끔찍한 손상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단턴에 의하면 책의 도살자들이 어찌 된 노릇인지 도서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단턴은 1850년 이후 발전되어 온 제조공정에 따라 펄프목재로 만든 종이는 싸구려 소설책을 만드는 데 쓰이는 가장 저렴한 것조차도 내구성이 좋다고 말한다.

 

단턴은 도서관측이 공간 확보를 위해 마이크로필름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오래된 책들이 타들어가고 분해되고 썩어가고 부스러진다는 등의 과장된 거짓 표현을 하고 있음을 개탄한다. 단턴은 책의 역사는 인쇄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문화사라고까지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단턴은 세익스피어의 오리지널 텍스트는 무엇이었는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같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자신이 넘어온 영역이 대여섯 개의 학문 분야가 교차하는 지점이되 누구의 영역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지점에서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책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간다. 단턴은 독서의 심리학, 현상학, 텍스트학, 서지학 등에 대한 저술 작업이 상당수 이루어졌음에도 독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단턴은 과거 위대한 인물들의 도서 다시 읽기를 떠올려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평범한 독자들의 내적 체험에 대해서는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울 것이지만 우리는 적어도 독서가 이루어졌던 사회적 맥락의 상당 부분은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미래는 이렇듯 잔잔하고 차분하게 책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단턴의 인문학적 정서를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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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 스케치 2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김선희 지음 / 풀빛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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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선희 교수의 '동양철학 스케치 2'는 공자, 노자, 장자, 맹자, 묵자, 불교 화엄종 등을 논한 1권에 이어지는 책이다. 1권을 세 파트(1, 2, 3)로 나누었고 2권 역시 세 파트(4, 5, 6 )로 나누었다. 4부에서는 북송의 철학자들과 주희, 왕양명 등이 다루어졌고 5부에서는 변화를 모색하는 비판자들이, 6부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사상적 변용과 창조가 다루어졌다.

 

선진 시대의 유학을 이()와 기()란 개념으로 재구성해 자연과 인간, 과학과 도덕을 하나로 연결해 거대한 체계로 만든 사람들이 송나라의 철학자들이다. 신유학에 영향을 미친 사상 가운데 불교 그 가운데서도 화엄학을 빼놓을 수 없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의 연원을 추적하면 화엄학의 사상이 나온다.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와 정이 형제는 성리학의 선구자들이다. 주돈이는 태극, 장재는 기(), 정호/ 정이는 이와 기란 개념으로 성리학의 기본을 만들었다.

 

세 개념틀을 주희가 종합했다. 태극은 만물의 최고 원리이다. ()가 인간이든 사물이든을 그것답게 만드는 원리라면 태극은 이 가운데 최고를 의미한다. 기는 물질적인 것들이고 우주를 흐르는 힘이며 변화이며 운동성 그 자체이다. 이가 우주 만물의 본질이자 근원적 규칙이라면 기는 우주 만물의 바탕 또는 재료이다.

 

기의 구체적 활동은 음양과 오행으로 나타난다. 기에는 선악이 없지만 탁한 기는 사람을 악으로 흐르게 할 가능성이 있다. 유학에서 인()은 공자 이래로 중요 개념이었다. 정호의 인은 단순히 도덕적 가치 덕목이 아니라 사랑이며 만물과 하나가 되는 단계이다.

 

주희에 의해 거대하고 일관된 사유 체계가 된 성리학은 학문 뿐 아니라 통치 원리이자 관료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철학사 속의 주희가 성리학을 완성한 사람이었다면 역사 속의 주희는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정치적 탄압까지 받았던 보통의 인간이었다. 주자학이 개인 학문을 넘어 정치를 움직이는 사상운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희의 제자들 덕분이었다.

 

성리학은 우주와 자연, 인간의 본성과 마음, 사회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 사상 체계이다. 주희는 태극을 영원하고 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희는 태극의 부분인 개별 이치들도 영원하고 완전하다고 보았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논리는 하나의 달이 강, 호수, 바다 등에 비칠 때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강에 비추어진 달이 무수하다 해서 하나의 달이 무수한 조각으로 나뉜 것은 아니다. 월인만천(月印萬川)이다. 주희는 이를 이일분수(理一分殊)라 표현했다. 만물은 하나의 원리에서 나와 각각의 사물로 나뉘었다는 의미이다.

 

태극과 이일분수(우주 전체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의 이를 부여받았다는 개념)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통치 방식을 정당화하는 효과적 모델이다. 주희는 강물은 다 같지만 국자로 담아낼 때와 사발로 담아낼 때 용량이 달라지듯 이도 그렇다고 말했다. 원리적인 차원에서 이는 모든 존재에게 똑같이 부여되지만 어떤 기와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본성이 곧 이치라는 의미의 성즉리(性卽理)는 인간의 본성에 인의예지 등의 도덕성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을 이론적으로 다시 설명한 것이다. 이는 우주의 이치이자 근원적인 선함이다. 인간은 가능성이나 원리 차원에서는 선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맑고 깨끗한 기를 타고났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기질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늘 노력해야 한다.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欲)이다.

 

주희 철학에서 성()은 마음의 본체이고 정()은 마음의 작용이다. 주희는 마음이 성과 정을 아우른다는 장재의 말을 인용한다. 마음 안에 보편의 원칙인 성과 구체적 의식 활동인 정이 들어 있고 마음은 그것을 주재한다는 말이다. 주희는 경()을 제안한다. 마음이 대상 세계와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덕적 의식을 길러나가는 과정이다.

 

또한 이미 외부 세계와 접촉한 마음이 선한 가치 기준에 합치하도록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희는 거경함양(居敬涵養)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경에 머물며 본성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대상과 접촉했든 안 했든, 앎의 문제이든 행동의 문제이든 경은 반드시 지켜야 할 수양 방법이다.

 

주희는 격물치지(格物致知)도 제안했는데 이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터득하고 축적해 나가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격물치지)과 자기 내면의 본성을 깨닫고 기르는 과정(거경함양)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날 때 인간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며 우주 안에서의 자기 위치에 올바르게 서게 된다.

 

주희가 정리한 학문이 지나칠 정도로 엄밀하고 체계적이어서 중국 사상이 주희에서 완성되었다고 보고 더 이상 철학적 탐구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모든 진리가 주자에 의해 밝혀졌으니 남은 것은 실천 뿐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왕양명은 마음이 바깥의 사물이나 일에 따라 움직이는 그 자체를 이()로 보았다. 마음 밖에서 이를 찾을 필요가 없고 오직 마음이 바깥의 일에 따라 움직이는 그 자체가 이 즉 올바름이란 의미이다. 왕양명은 내가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진정한 도덕적 실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능력인 양지(良知)가 있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양지가 모든 사람의 마음의 본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천리(天理)라고 보았다. 우리 마음에 이미 천리가 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는 심즉리(心卽理)를 의미한다.

 

양지는 대상과의 만남 속에서 끝없이 변화하며 상황에 대처한다. 이미 결정된 규범이 있어 그것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내 마음이 올바른 이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왕양명은 격물이란 사물로 나아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왕양명에게 물()이란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을 말한다. 외부의 사물과 만났을 때 마음의 실마리를 바로잡는 것이 왕양명의 격물이다. 주희는 지()와 행()은 함께 한다고 보았고 왕양명은 지와 행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왕양명은 사람들의 도덕적 실천 능력의 순도가 같다고 보았을 뿐 실질의 계급이나 능력을 같다고 보지 않았다. 명나라 후반부는 양명학의 시대였다. 왕양명의 학문은 제자들에 의해 각 지역에서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양지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었다.

 

왕양명의 제자 왕기는 양지의 영역과 창조적 능력을 한층 더 확대 해석했다. 왕기는 양지가 사람의 양지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양지임을 더욱 강조했다. 왕간이란 제자는 자신과 천지만물은 이미 하나이기에 자신은 천지만물을 연결하는 고리와 같다고 보았다. 왕간은 백성의 일상생활이 이미 도라고 보았다.

 

성인과의 차이는 성인은 자각한다는 점이고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의 책을 불태워질 것이라는 의미의 분서(焚書), 묻어버려야 할 책이라는 의미의 장서(藏書)로 지은 이지(李摯)는 특이하다. 그는 공자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공자 그 자체가 아니라 공자를 신성시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채 그의 학설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억눌리고 제한받는 것은 사람들이 태극과 같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원을 찾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본 이지는 천지만물의 시초는 태극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음양의 두 기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지는 욕망은 천리를 지키기 위해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마테오 리치(1552 - 1610)는 푸른 눈의 유학자이다. 그가 집중적으로 전하려 한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중국 전통의 사상 및 윤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리치는 중국의 전통 유학과 신유학을 서양 철학의 개념으로 설명했고 기하학, 천문학, 수학 등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전파했고 지도, 악기, 자명종 등 새로운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유럽 대학에서 배운 기억법을 활용 단기간에 중국의 수많은 한문서적들을 익힌 리치는 중국어가 익숙해지고 경전에 능숙해지자 자신을 서양에서 온 유학자라 소개했다.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가장 크게 인정받은 것은 천문학이었다. 천문 현상을 관측하고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일은 과학 연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 통치 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천문학의 우수성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서양 선교사들의 지위는 명 이후 청에서도 보전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시경이나 서경에 빈번하게 나오는 상제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리치는 상제를 세계 만물을 지은 천주라 소개했다. 리치는 태극을 공격했다. 자신들이 믿는 인격적 존재인 천주와 다른 비인격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의 영혼 개념에 의하면 생장 능력을 갖춘 식물의 혼은 생혼(生魂), 지각과 운동 능력까지 갖춘 동물의 혼은 각혼(覺魂), 이성 능력까지 갖춘 인간의 혼은 영혼(靈魂)이다. 영혼은 육체적 기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생혼, 각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양의 혼, 혼백, 귀신은 비인격의 기()에 속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양의 혼과 차별적이다.

 

영혼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연결된다. 영혼에 관한 논쟁은 영혼을 부여하는 인격적인 신이 존재하는가란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시대에 서학은 단지 천주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여온 철학, 과학 이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성호 이익은 서학의 종교적 측면은 거부했지만 윤리적 측면은 인정했고 특히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경탄을 표했다. 왕부지는 장재를 자기 학문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장재는 태허(太虛)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다. 태허는 개별적인 것들로 나뉘기 이전의 근원적 기를 의미한다.

 

왕부지는 만물의 근원을 태극이 아니라 기로 보았다. 그에게 이는 기가 이합취산하는 내적 법칙이다. 고증학은 치밀하고 꼼꼼한 방법으로 증거를 찾아 옛 문헌의 글자와 구절을 밝히는 훈고학적 경서 연구 방법이다. 고증학이 발달할수록 대상은 점차 경서 이외의 분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의 학문적 주제와 방법의 변화를 이끈 또다른 배경은 17세기 초부터 예수회 회원들에 의해 중국에 소개된 서양 철학과 과학이었다. 고증학을 새롭게 채택한 진정한 동기는 사회를 올바르게 경영하는 고대 유학의 이념에 있었다.

 

강유위의 대동서의 대동은 크게 더불어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예기 예운에 나오는 말이다. 대동 사회가 평등하면서도 서로간의 애정과 책임감이 넘치는 사회라면 소강 사회는 아직 개인적 소유가 남아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이기적인 마음이 남아 있지만 예의와 제도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성리학이 정치적 통일을 이끄는 지배 이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의 성격 때문이다. 이는 형이상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의미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다스리고 관리하며 질서짓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궁극의 이치는 하나지만 그 나뉨은 다양하다는 이일분수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저자는 실학자들이 모두 근대적이었고 진보적이었다고 보는 것에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익은 농업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주장했고 정약용은 고대 유학으로 돌아가 상제를 신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정복은 조선을 소중화로,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는 화이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학파의 경우 성리학적 주제들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 성리학적 전제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익은 농업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선비들도 기꺼이 노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은 이가 아무리 선해도 기의 영향에 따라 선악이 갈린다면 이는 왜 처음부터 탁하고 어그러진 기를 생성했는가? 반문하며 이가 만물을 주재하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강조했다.

 

정약용은 이황을 높이 평가했던 이익의 영향을 받았지만 율곡의 학설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정약용은 이는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 기에 의존하는 속성일 뿐이라 보았다. 기가 독립적이고 이는 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기의 원형을 태극이라 보았다. 태극과 이의 개념을 제한적으로 축소하고 상제를 내세우는 정약용의 관점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주희는 도덕적 본성이 인간에 내재한다고 보았지만 정약용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나의 본성도 태극과 관계 없이 단지 좋아하고 싫어함의 기호(嗜好)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세계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며 그 근거는 도덕적 실천 능력이라 보았다. 이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주자학을 뒤집는 것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드물게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다. 정약용이 인간을 강조한 것은 단지 인간과 동물을 줄 세워 인간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인간의 특별함을 강조한 것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도덕적인 판단과 행위를 통해 세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희 철학은 기질의 제한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 마음의 실마리만 들여다보고 있는 정적인 학문이다. 반면 정약용은 동적이며 진취적이었다.

 

일본도 에도 시대에 유학을 받아들여 사회 운영의 원리로 삼았던 나라였다. 그들에게 유학은 여러 사상들 중 하나였다. , , 태극, , , 리 등 복잡하고 난해한 개념들의 세례를 받은 읽기였다. 여러 사상들이 인상적이었지만 주자와 정약용의 대비가 가장 좋았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렬함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단단함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하나에만 빠져들고 그래서 다시 수면에 올라오지 않는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으로 들린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고고통에 대한 자각과 반성 없이 지적 성취에 이르면 차갑고 오만해지기 쉽고 지적 성취 없이 고통에 대한 민감성만 키우면 자기와 주변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해석한 저자의 남다름을 높이 산다. 성취를 바란다. 많이 배웠다. 감사한다. 한형조 교수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를 구해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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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글 심폐소생술 - 한 줄이라도 쉽게 제대로, 방송작가의 31가지 글쓰기 가이드
김주미 지음 / 영진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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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글 심폐소생술'이란 책이다. 부제는 '한 줄이라도 쉽게 제대로, 방송작가의 31가지 글쓰기 가이드'이다. 저자는 방송 구성작가 20년 경력의 신문방송학 박사. 조금은 낯설고 막막하던 글쓰기도 거듭하다 보면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고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일과로 삼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부제에 맞게 31개의 목차(Day 1~Day31)로 구성되었다. 제목은 신선하고 목차는 부제에 부합한다. 누구나 알 만한 어휘를 사용하고 하나의 문장에 한 가지의 정보만을 담는 짧은 문장이라면 지금 당장 써볼 만하지 않은가.(20 페이지)

 

저자는 준비, 경청(관찰)의 힘, 부담감 덜어내기의 미덕을 강조한다. 저자는 몇 권의 글쓰기 책을 소개한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이 대표적이다. "모든 글은 조리법이나 공식처럼 단지 정보 자체의 전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무기로 삼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글쓰기에서 필요한 직접 경험이란 물리적 경험이 아니라 심리적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글 쓸 대상에 감정이나 정신을 이입하는 것이다. 단정짓지 않게 하는 동력이다. 딴죽 걸기와 집요한 사전 조사란 챕터는 시사적이고 교훈적이다. 저자는 누군가 글쓰기에 필요한 재능에 관해 묻는다면 무슨 일이든 오랫동안 꾸준히 연습할 수 있는 힘이라고 답해야겠다고 말한다.(74 페이지)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남들과 같지 않은 참신한 시각은 존재한다.(86 페이지) 낯설게 보기는 어렵지 않다. 늘 가까이 보던 대상이라면 한 번쯤 멀리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87 페이지) 연애에만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갖가지 요소들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면서도 글을 읽는 이들이 내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만드는 이른바 밀당의 배치가 필요하다. 애써 만든 콘텐츠가 외면 받지 않게 하려면 전문가들의 완급조절 능력인 구성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101 페이지)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앞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고 말한다. 남들이 이미 한 이야기는 식상하고 독창적인 생각은 공감받지 못할까 안절부절하지 못할 때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잡아채어 지면에 써놓는 것이다. 뭐 이런 게 쓸모가 있을까 하는 것들도 지나고 보면 좋은 이야기의 밑천이 될 수 있다.(110 페이지)

 

저자는 정보의 과잉(전달)을 피하라고 말한다. 콘텐츠를 잘 이해하고 솔직한 답변과 명확한 언어로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야 하고 객관적 시선으로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저자는 그림을 잘 그리려고 드로잉 학원을 다녔는데 소질이 없음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런데 드로잉을 배운 시간은 결국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 시간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릴 대상을 유심히 관찰한 후 전체 구도와 세부 특징을 잡아내는 드로잉의 기본은 작가에게 필요한 표현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드로잉 하듯 쓰고 그림을 감상하듯 주변을 바라본 후 쓴 글은 생생하고 세밀하다고 말한다.(142 페이지) (참고로 말하면 저자를 가르쳤던 드로잉 선생은 인체 드로잉을 잘 하기 위해 해부학을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나도 이 말을 듣고 해부학 책 서평단에 응모했다.)

 

작가는 만화가처럼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지만 그림을 읽는 눈을 가지면 좋다.(144 페이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에 정답이란 없다. 나에게 맞는 습작이란 결국 하면서 즐겁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방식이면 된다.(145 페이지)

 

저자는 일일이 설명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초보는 자신이 조사하거나 알고 있는 정보를 꾸역꾸역 밀어넣지만 경력자는 표현은 간결하게, 정보는 핵심만 전달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방송에 특별히 해당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일반 글에서도 유효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간결하게 핵심을 전해야 한다. Day22는 첫눈에 끌리는 제목 찾기이다. 제목은 정보 전달형과 관심 유도형으로 나뉜다. 관건은 제목과 내용 사이에 적당한 줄다리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범위에서 정해야 한다.(184 페이지)

 

저자는 초두효과(primacy effect)를 강조한다. 강렬한 이야기의 일부를 프롤로그에 배치하는 것이다. 핵심 장면을 프로그램 시작 부분에 다 풀어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걱정은 넣어 두어도 좋다.(189 페이지) 방송의 경우지만 맥락이나 설명 없이 주요 장면만을 공개하는 것이다.

 

저자는 빈발효과(frequency effect)를 말한다. 첫 인상이 좋지 않았어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과 행동을 보이게 되면 좋은 평가로 바뀐다는 것이다.(189 페이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대구를 이루는 것이 좋다. 저자는 글을 다 쓰고 처음과 끝부분을 떼서 대조해볼 것을 주문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려고 하면 고민만 많아지고 한 단어나 문장을 선택하기 힘들게 되어 글 쓰는 일 자체가 두려워질 수 있다.(194 페이지)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의 과정은 안주하려는 나와 싸우는 시간이며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과정이다.(200 페이지)

 

저자는 퇴고 방법으로 두괄식과 미괄식을 적절히 나누어 쓰기를 요구한다.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도 필요하다. 저자는 자신의 글을 어필하는 홍보문 쓰기 챕터에서 시의성을 고려해서 쓰고 차별성을 강조하고 기대감을 갖게 하고 정확한 정보만을 제시하라고 말한다.

 

최고로 불리는 사람들도 속내를 들여다 보면 시너지를 발휘하는 파트너들이 늘 곁에 있다.(216 페이지) 방송계에는 속된 표현으로 작가가 개떡 같이 써도 찰떡 같이 읽는 사람이 명 MC라는 말이 있지만 최고라 불리는 그들도 같이 일해 시너지를 발휘하는 제작진이나 파트너들이 늘 곁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제작진들은 MC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시공간 상황을 연출할 줄 안다는 것이다.(220 페이지)

 

참고할 이야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 이야기이다. 추사는 붓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추사는 쥐의 수염으로 만든 붓도 썼다. 추사는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일반적 견해가 아니라고 썼다.(석한남 지음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190 페이지) MC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도 최선의 성과를 낸다는 말은 일반적 견해가 아니라 할 수 있다.

 

나 홀로 서랍 속에 간직하는 일기가 아니라면 이 세상 속에서 혼자 힘으로 완결할 수 있는 글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또 다른 분야의 창작자들과 함께 걸어갈 기회를 피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 즐기다 보면 더 풍성해진 나의 글, 아니 우리의 글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228 페이지)

 

이 부분에서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여러 지침이 도움이 된다. 내게는 평소 대화하듯 입말처럼 쓰라는 말이 가장 큰 참고거리이다. 쉽고, 편하게 쓰라는 말이다. 물론 그러려면 엄청난 준비를 해 쉽게 풀어내야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 망한 글 심폐 소생술이라 해서 잘못된 글을 구체적으로 예시해 바르게 고친 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책이다.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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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비밀
자현 스님 지음 / 담앤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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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자현 스님 책을 세 권 읽었다. '스님의 공부법', '스님의 논문법'에 이어 '사찰의 비밀'을 읽는다. 목차를 눈여겨 보게 된다. 1'산문이 열리고 이름이 생기다'는 세 챕터, 2'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여섯 챕터, 3'전각의 배치와 장엄'은 아홉 챕터, 4'안에서 본 법당'은 열한 챕터, 5'수행과 의식의 상징들'은 네 챕터이다. 조금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사찰은 기도 및 수행처이지만 비보(裨補) 사찰, 역참(驛站) 사찰, 능침(陵寢) 사찰도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화성 용주사가 대표적 능침사찰이다. ()이란 이름이 들어간 곳은 능침사찰이 많고 원()이란 이름이 들어간 곳은 역참 기능을 한 곳이 많다. 사고(史庫) 역할을 한 사찰도 있다. 오대산 월정사가 그에 해당한다.

 

사찰을 나타내는 많은 명칭들 중 가장 상위 개념이 절과 가람(伽藍)이다. 절은 절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나온 말이고 가람은 인도 불교에서 절을 가리키던 상가라마에서 온 말이다. 애초 불교와 무관했던 하마비가 절에까지 확대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과 관련이 있다. 문정왕후가 절을 보호하기 위해 전국의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했다.

 

불교, 하면 화장(火葬) 즉 다비를 생각하게 된다. 화장은 유목문화의 전통이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화장 문화에 대한 저항이 오래 지속되었다. 수백년간 승려들도 화장을 하지 않았다. 사리는 화장의 결과 나오는 결정물이다. 뼈는 화장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단서이다. 초분이나 가묘(假墓) 후 뼈를 추려 골호(骨壺)에 담는 문화로 인해 성스러운 뼈<성골>와 진짜 뼈<진골>라는 인식이 생겼다.

 

사찰의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 이후 천왕문, 해탈문이 이어진다. 일주문이란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기둥의 문이란 의미이다. 일주문부터 수미산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사찰은 전체적으로 수미산의 구조를 모사하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불교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제석천(帝釋天)을 정점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수미산 중턱의 사왕(동방 지국, 서방 광목, 남방 증장, 북방 다문)천을 상징하는 것이 천왕문이다. 해탈문은 수미산 정상 입구를 상징한다. 동아시아 탑은 위아래로는 홀수, 좌우로는 짝수이다. 10층의 10은 완전수이다.

 

사찰의 중심은 금당(金堂; 주불전; 主佛殿)이다. 예전에는 금당에서 함부로 법을 설할 수 없었다. 부처님의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법을 설하는 강당이 만들어졌다. 강당은 금당의 부속 건물이다.

 

대부분의 종파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主尊)으로 모셨다. 그러나 불교에는 여러 부처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왕실과 조정에 의해 불교 종파들이 강제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대웅전(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 법당) 중심의 사찰 구조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계신 곳은 대웅전, 사리를 모신 곳은 적멸보궁임을 감안하면 부처님이 군왕급 예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은 99칸 제한을 받지 않았고 궁궐 건축에만 할 수 있었던 단청도 할 수 있었다. 법당은 꽃으로 장엄한 궁전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출처는 여불위의 '여씨춘추'이다.

 

궁궐도 사찰도 정전(正殿; 궁궐), 불보살을 모신 곳(본당; 사찰)은 둥근 기둥, 편전(便殿; 궁궐), 요사채(사찰)은 네모 기둥을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현존 고려시대 건축물들이 일곱채이다.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조사당, 강원도 강릉 객사문, 황해도의 성불사 응진전, 심원사 보광전 등이다.

 

그런데 왜 유독 불교 건물들만 남았을까?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의 경제력 차이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는 오래된 건물을 유지하기보다 새 건물을 짓고 확장하는데 전력했을 것이다. 사찰은 궁핍한 경제력 때문에 건설하기보다 보존하는데 주력했을 것이다.

 

이익대영(以杙代楹)이란 말이 있다. 말뚝으로 기둥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잘못된 인사(人事)를 비유해 쓴다. ()은 기둥을 의미한다. 주련의 주()도 기둥을 의미한다. 주련(柱聯)은 영련(楹聯)이라고 한다. 주련 문화는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해 쓴 잠()이 확대되어 기둥에까지 쓰인 것이 주련이다.

 

잠은 혼자 보려는 의미의 것이라면 주련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주려는 용도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보게 하는 주련을 한문 흘림체로 쓰는 것도, 한글로 쓰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불교는 다불보살(多佛菩薩)의 종교이다. 가섭불(과거불), 미륵불(미래불)처럼 시간적으로도 많고 약사여래(동방 약사 유리광세계 거주),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 거주) 등 공간적으로도 많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은 다르다. 대웅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대웅보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한다. 대웅보전의 경우 중앙, , 우 존재 모두 부처이다. 이때는 위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구분된다.

 

삼세불은 연등불(과거) - 석가모니불(현재) - 미륵불(미래)로 나뉜다. 삼신불은 석가모니불(작용) - 비로자나불(본체) - 노사나불(현상)로 나뉜다. 삼존불은 아미타불(서쪽) - 석가모니불(중앙) - 약사여래불(동쪽)로 나뉜다. , , , 과일, , 차를 여섯 가지 공양물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날씨가 더워 음식이 부패하기 쉬웠다. 그래서 정오 이후 공양은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사시불공은 이로 인한 현상이다. 향은 더위 때문에 냄새가 심한 인도의 기후 조건과 관계가 깊다. 향을 피워 냄새를 없앤 것이다. 반면 더위로 인해 꽃과 과일은 사철 풍부했다. 이런 문화가 종교와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 육법공양이다.

 

신라(新羅)는 계를 의미하는 실라(sila)에서, 서라벌은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서, 가야(伽耶)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서 유래했다. 아궁이는 인도의 불의 신 아그니(agni)에서 유래했다. 부처님은 시간적으로 여러 부처들이 순차적으로 계시지만 공간적으로는 한 공간에 한 부처님만 있어야 한다. 한 부처님의 구역이 삼천대천세계(10억 세계).

 

나한 또는 아라한은 산스크리트어 아르하트(arhat)를 음차한 것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격에 해당한다.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제자를 성문(聲聞)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기원 전후가 되어서야 경전이 글로 옮겨졌기에 그 이전의 공부 방법은 듣는 것 뿐이었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들어 터득한 분이란 의미이다. 이 성문 제자들은 성취 정도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나뉜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은 보살이다. 아라한은 작은 배로 제도하고 보살은 큰 배로 제도한다고 말해진다.

 

사찰의 의식구(儀式具)들은 필연의 이유로 발전했지만 단체 생활을 한 승려들의 생활과도 관계가 있다. 과거 사찰에는 수백의 스님들이 살았기에 소리를 질러 의사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신호 용구들이 발달했다. 목탁은 대표적 의식구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수행 도구이다. 과거 불교에서 징과 꽹과리도 의식구로 사용했다. 죽비는 선종의 도구이다. 죽비삼성은 죽비 예불은 간댜해서 세 번의 소리만으로 모두 끝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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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 카프카 / 카뮈 / 쿤데라 깊이 읽기
조현행 지음 / 이비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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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밀란 쿤데라... 모두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읽지 못했고 사유하지 못한 작가들이다. 조현행의 책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은 세 작가의 작품들에서 길어올린 질문들을 함께 나누며 생각할 수 있게 배치한 책이다.

 

카프카의 작품은 '변신', '소송', '()‘ 등이다. 카뮈의 작품은 '이방인', '페스트', '전락' 등이다. 쿤데라는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무의미의 축제' 등이다.

 

카프카는 우리가 실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비밀, 어둠인바 거기에 진실이 거주한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처럼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는지 묻는다. 있지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다. 이유라기보다 작가가 비인간적이고 소외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레고르를 벌레가 되게 했다고 생각한다.

 

'소송'은 법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침대에서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카프카는 법에는 지혜가 담겨 있지만 십중팔구 그것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저자는 '소송'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난해했는지 논해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보다 왜 그의 소설은 난해한가를 알고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의 난해함은 이해불가하고 수용할 수 없는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은 작가가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 두고 소설만 쓰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책이다. 친구 막스브로트에게 유고를 태워버리라 말했지만 친구는 그 부탁을 따르지 않고 출간함으로써 우리에게 명작을 선사한 셈이 되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과 같이 거대한, 다가갈 수 없는 실체였다.

 

카프카가 법학과에 간 것도 아버지의 바람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에게 글쓰기는 도피처였다. 그가 보험회사에 취직한 것도 글쓰기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은 성의 부름을 받고 토지측량사로 임명된 주인공 K가 마을 공동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존재와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K는 성에 진입하지 못한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가 소송에 휘말려 법의 정의를 찾아 나서지만 진실을 찾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듯 ''k는 성의 부름을 받고 일하러 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해명을 요구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전해듣지 못한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성은 높은 곳에 있거니와 중요한 사실은 그 이미지가 오랜 시간을 거쳐 전승된 무수한 말들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내가 기를 써서 도달하려고 하는 성은 오랜 시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추상적 관념이 아닌가 묻는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왜곡이나 문제는 없었는가 묻는다.(81 페이지)

 

저자는 k가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K의 불복종적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84 페이지) 저자는 여러분이 만들고 싶은 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몇 가지가 있지만 프라이버시를 위해 침묵하겠다.

 

카뮈는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했다. 카뮈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기에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치를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카뮈의 중요한 개념이 부조리이다. 부조리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에서 생겨난 틈에서 발생하는 불편감, 낯섦을 유발하는 것들이다.

 

부조리의 인간과 부조리한 인간은 다르다. 전자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세계와 불화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세계와 타협하고 화해하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카뮈가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 부조리의 인간은 깨달은 자, 거부하는 자, 반항하는 자이다.(105 페이지)

 

외람(猥濫)되지만 이 부분에서 나를 떠올리게 된다. 책 읽는 나, 무언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나. 그것은 기존의 통로와 다른 새 길을 만들려는 것이고 나에게서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유래한 생각을 정리해 보이려는 것이다.

 

카뮈는 육체가 내린 판단도 정신이 내린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는 말을 했다. 부조리에 맞선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반항이다. 카뮈에 의하면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121 페이지) '이방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부드러운 무관심이란 구절이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인간인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카뮈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부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카뮈는 그 세계에 익숙해지는 삶은 노예의 삶이라 말했다.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싸운 그 만큼 이긴 것이다. 베케트가 말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락'은 카뮈의 마지막 장편이다. 이 작품은 자살하는 여자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 하는 한 변호사의 참회와 심판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쿤데라는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난 데 이어 시민권을 박탈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쿤데라는 '농담'을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한 소설로 읽는 것에 강력 항의한 작가이다. 소설은 다의적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하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1945년부터 20여년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쓴 '농담'은 한 마디로 농담하지 말라는 명령을 담은 소설이다. 1948년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한 시기이다. 작품의 주인공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에게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농담조의 편지를 썼다가 대학에서 쫓겨나 탄광으로 끌려가 노역을 치르게 된다.

 

쿤데라는 "우리가 열망해 왔던 것, 우리가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것, 이제 우리의 죽음까지도 바치려는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떨 것인가?" 묻는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무수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성에 대해 물은 카프카를 연상하게 한다.

 

'농담'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만든 신념에 매몰된 두 주인공(루드비크, 야로슬라프)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쿤데라는 인간은 자신의 개념 자체를 잃어버릴 것이고 파악도 이해도 불가능한 인간의 역사는 의미를 상실한 도식적 기호 몇 개로 축소될 것이라 말했다.

 

저자는 '농담'을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인생이 고약하게 꼬인 남자의 이야기라 말하며 농담이나 유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눠 보자고 말한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난다고 말하고 싶다.

 

쿤데라는 영원회귀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 표현한 니체를 염두에 두고 그렇다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취하는 중용이고 균형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여주인공 테레자는 사랑 없는 섹스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엄마로부터 낙태해줄 의사를 찾지 못해 나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으로 항상 책을 끼고 다니며 읽는다.

 

그녀는 책을 읽으며 자신이 도달하려는 세계를 그린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지었다." 후에 그녀는 영혼이 없는 육체적 관계라는 가벼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빨래를 하면서도 욕조 곁에 책을 두었던 테레자에게 책은 어떤 의미였을까 묻는다. 저자는 쿤데라가 인생의 무의미를 인정하자고, 그리고 소소하게 보이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고 말한다. 이는 부조리하기에 의미를 찾아내자고 한 카뮈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쿤데라가 전생에 걸쳐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사소하기에,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그럴 것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대단한 것들은 우리가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나고 가치 있다. 생이 허망하고 덧없음을 알기에 쿤데라는 아니 모두는 그 작고 하찮은 시뮬라크르 같은 진실을 긍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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