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나는 칸트의 이 말을 들으면 환희의 감정으로 들어선다. 감동으로 들어서는 역치(?値; threshold) 즉 문지방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니냐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별의 먼지인 우리가 고향을 놀라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순리이리라. 그리고 사회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져도 필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필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테판 클라인의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를 번역한 전대호씨는 '철학은 뿔이다'에서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 없이 산출된 자료는 맹목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자료 없이 생각만으로 글을 쓰는 것은 공허하고, 자료를 헤아리지 않고 다루는 것은 맹목적이라는 의미로 의역(意譯)이 가능하다. 인간이 별이 남긴 먼지라는 말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대부분이 초신성이 만들어 우주에 퍼뜨린 것들이기 때문이다.(이석영 지음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 271 페이지)

 

인간이 별(이 남긴 먼지)인 것은 존재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또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별이다. 이는 물론 가치론적으로 별이라는 의미 즉 별처럼 고귀하다는 말이다. 나는 세상의 무수한 별들 그 가운데서 저술 특히 철학, 역사, 시 분야의 별들을 보고 경탄과 존경을 느낀다. 내 능력은 짧고 별들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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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 처음으로 읽는 조선 궁중음악 이야기
송지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자(孔子)가 순() 임금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음악의 일종인 소()를 듣고 석 달동안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박지원의 열하일기 '망양록(忘羊錄)'에 의하면 박지원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양 한 마리를 통째 쪄 준비해 놓고 그 손님과 진지하고도 재미 있는 음악 이야기를 하느라 양을 쪄놓은 사실을 잊었다고 한다.

 

송지원 교수는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에서 박지원이 그럴 정도로 나눈 이야기는 조선과 중국의 음악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제목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조선 성종대에는 1000여명의 음악인들이 장악원에 속해 음악을 연주했다. 조선시대에 왕실 행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장악원 음악인들이 있었다. 조선의 악()은 예()와 함께 의례의 핵심이었다. 장악원은 숭정원, 사간원, 홍문원,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과 함께 정3품 관청이었다.

 

1년 중 장악원이 가장 많이 출연하는 행사는 제사 의례이다.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는 제조(提調)였다. 당상관 두 명이 맡았는데 전문 음악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였다. 이는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정보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것과 맥락이 같다.(어의들은 진맥 외의 방법으로 임금의 몸을 진찰할 수 없었다.)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여성 음악인들을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 출현하지 못하게 했다. 인조반정 이후의 일이다. 본문에는 차비(差備)란 말이 나온다. 자비(自備) 또는 척()의 의미이고 우리 말로 잡이라 한다. 장구 잡이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조대의 화원을 자비대령화원이라 했다. 한문으로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썼다. 정조는 귀가 밝았다.

 

세종, 세조처럼 정조는 장악원 음악인들의 연주를 다그쳤다. 특히 정조는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의 선율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음악을 소홀히 연주하는 것을 지적하고 엄히 다스렸다. 정조는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온 굴씨(屈氏) 또는 굴저(屈姐)라는 궁녀가 있었다. 명나라가 쓰러져 갈 무렵 숭정제 황후의 궁녀로 일하던 여자였다. 숭정 말년에 이자성이 황도를 함락시키자 황제와 황후가 자살했다.

 

굴씨는 민간으로 몸을 피했으나 청나라 군사에 발각되었다. 청의 실권자였듼 예친왕 다르곤은 굴씨를 심양에 볼모로 있었던 소현세자에게 넘겼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온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타 장악원 소속 음악인들에게 비파를 가르쳤다.

 

이때는 조선이 전란 후유증으로 종묘/ 사직 제례악도 연주하지 못하던 때였다. 음악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굴씨는 70세까지 살다가 숙종대에 생을 마감했다. 조선은 예악정치를 구현했다. 예는 인간의 차별적 질서를 강조했고 악은 인간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했다. 종묘제례시의 춤은 제후국의 위격인 육일무였다. 일수 6, 열수 6으로 36명이 추는 춤이란 말이 있고 일수 6, 열수 8 48명이 추는 춤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팔일(八佾)'편에 주자가 주석한 내용에 본인도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른다는 글이 있다. 조선 전기는 48, 중기, 후기는 36명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묘 제례는 조상(선왕)의 혼을 만나는 기쁜 의례 즉 길례(吉禮)이다. 장례는 흉례(凶禮)이다. 이때는 진이부작(陳而不作)했다. 악대는 진설(陳設)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3년 동안 연주를 하지 않으면 제례악을 다시 연주할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새로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지므로 그런 것을 우려해 악생들의 연습은 허용했다. 궁중 연향에서 연행되는 춤을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를 드리다, 재예를 올리다란 뜻이다.

 

조선은 무너진 예를 악으로 일으키려 했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은 <세종실록> '오례'로 국가례의 기틀을 마련했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로 전모를 정리했다. 맹사성은 악인이기도 했다. 장악원의 전신인 관습도감의 제조로서 맹사성의 업적은 눈부셨다. 조선 초기 궁중 음악은 그로부터 정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맹사성은 세종대의 박연과 함께 지악지신(知樂之臣) 즉 악을 잘 아는 신하로 불렸다. 박연은 세종의 뛰어난 음악 비서였다. 성종대의 장악원 제조였던 성현을 빼놓을 수 없다. 성현은 '악학궤범'의 저자이다.

 

김용겸(金用謙)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기대주였다. 김용겸은 악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읽었느냐는 정조의 물음에 그 책을 보았고 종과 석경 소리를 들으면 높고 낮음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와 악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정조는 음률과 예학에 두루 깊은 인재 김용겸을 장악원 제조로 임명했다. 김용겸은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정철조 같은 연암 그룹 구성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정조 대의 학자 출신 관료들은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음악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정조가 집권 초반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 , , 슬을 규장각에 하사한 것은 악을 중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예와 악을 함께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 시대는 문화융성기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생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사도세자를 모셨던 수은묘를 경모궁(오늘날 서울대 의대 자리)으로 승격시켰다. 경모궁의 제례를 정하고 경모궁제례악도 만들었다. 고종황제가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며 경모궁의 신주를 종묘로 옮긴 이후부터 경모궁 제례는 열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누구나 왠만큼 거문고를 연주했다.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삿된 마음을 금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거문고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거문고 음악이 예술성을 추구하거나 기교를 자랑하는 음악으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줄의 악기이지만 표현 영역은 거의 무한대인 해금은 현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관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두루<> 어울려 비사비죽(非絲非竹)의 악기 즉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닌 악기로 불렸다.(비사비죽은 18세기 유명 해금 악사 유우춘의 표현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현악기는 현을 뜯거나 튕기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음이 끊어지지만 해금은 줄을 마찰시키는 한 계속 소리가 나기에 관악기로도 볼 여지가 있어 관악기이면서 현악기라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 하다고 말한다.

 

예전에 왕이 죽으면 명기(明器) 악기라 해서 소형 악기를 만들어 왕의 무덤에 묻었다. 조선 전기부터 경종의 무덤까지 아쟁을 묻었는데 정조대 이후에는 아악기만을 묻었다. 비파(批把)라는 이름은 악기 연주법에서 유래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타는 것을 비, 안으로 끌어 당기며 연주하는 것을 파라 한다. 오늘날 비파는 비파(琵琶)로 쓴다.

 

맹사성, 박연, 정약대, 김계선 등이 대금의 명인이었다. 특히 정약대는 '정약대의 대금'(조용미 시인의 시)이란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청아하고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향해 대금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할 운명을 火印처럼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그의 귀는 10리 밖에서도 대금 소리를 잡아냈을까// 정약대는 낙타였다"

 

저자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옛 조상들은 예()와 악()을 함께 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너진 예를 악으로 바로 세우려 했다. 늘 연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장악원 악인들을 통해 연습의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 특히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던 정조를 다시 보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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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에 지나지 않지만 서촌 해설시에 빼놓지 않고 찾은 곳이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이다. 사실 해설 코스에 포함시키지 않았기에 어정쩡하게 짧게 언급하고 지난 그곳은 방문한 것이 아니라 들른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회영 선생님 전기인 '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서평단에 응모하며 한 번이라 할 것을 한 건이라 했다가 얼른 고쳤다. 이회영 선생님은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면적인 자기 희생과 헌신의 삶을 보냈다.

 

이어 신병주 교수의 참모로 산다는 것에도 응모했다. 이 책에는 정도전, 서거정, 김종직, 조광조, 남명 조식, 이이, 송강 정철, 허목, 정약용 뿐 아니라 송시열, 한명회, 세조, 신숙주, 임사홍, 이귀 등 싫어해 애써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당첨되면 진흙탕 같은 시간을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정도전, 조광조, 조식, 정약용, 김종직, 허목 등만 따로 집중적으로 읽을 시간이 올 거라 기대한다. 독서 친구는 요즘 일제 치하의 독립 운동가 전기 및 송우혜 작가의 '못 생긴 엄상궁의 천하', '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 '왕세자 혼혈 결혼의 비밀', '평민이 된 이은의 천하' 등을 읽고 있으니 나도 이 두 책('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참모로 산다는 것’)으로 송우혜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겠다.

 

이 두 책은 내 역사 지식을 늘려줌은 물론 그것들을 조각조각난 채 내 머릿 속에서 부유(浮遊)하는 역사 지식들과 연결시켜 줄 것이다. 우선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먼지처럼 모인다면 후에 산삭(刪削: 필요 없는 글자나 구절을 지워 버림)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지만 나에게 서평단 응모는 투수의 불펜 피칭과 같은 것이다. 즉 실전 등판을 위한 연습이다. 물론 나는 불펜 피칭도 전력으로 한다. 그래서 서평단 당첨 비율이 높은지도 모르겠다. 본 게임에 지장을 줄 수도 있지만 어떻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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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님의 이른 죽음이 波浪처럼 여겨집니다. 저와는 전화 몇 번, 톡 두 세 번 하고 댓글은 비교적 많이 주고 받은 정도인데 참 슬프네요. 그녀의 장례식에 다녀온 사람이 너무 많은 책을 처리하느라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 한다는 글을 썼더군요.

 

그녀가 읽다 둔 책들을 유품이라 할 수 있을까요? 타계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 없어 그녀의 톡에 '잘 지내시나요?'란 글을 남겼습니다. 슬프고 허망합니다. 요즘 읽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우리가 불상이나 하늘의 별을 보면서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성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별 관계도 아닌 사람의 죽음을 보며 슬픔과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제 안에 슬픔과 허망함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어떤 점이 그 두 감정을 자극한 것일까요? 다시 언급한 책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책은 아치(我痴)라 표현했더군요. 아치의 전형은 의식으로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 인정하지만 자아의식 때문에 무의식 차원에서는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네요.

 

이 책은 명상서답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잘 안 되네요.. 그녀가 아픔 없는 곳에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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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1-1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투의스케치북님, 그장소님 부고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알라딘 서재에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다들 몰랐을거예요.
마음 아픈 일 먼저 아시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때는 충격이 너무 커서 거기까지는 말씀드리지 못햇어요.
늦었지만,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9-01-13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장소님과는 페북을 함께 해서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허망한 일이네요.. 감사합니다.. ㅜㅜ

보물선 2019-01-14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알았어요.... 너무 놀래서 오전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벤투의스케치북 2019-01-1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뜻 밖의 일이지요.. 슬픈 사연이고요.. ㅜㅜ
 

    

"...반가하지 않아도 사유할 수 있지만 반가하면 사유가 잘/ 진행된다는 걸 당신도 아는지 사유의 형식이 사유를 돕기/ 는 하지만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걸/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겠지 늘 반가상처럼 앉아 있겠지..."

 

조용미 시인의 '당신은 학을 닮아 간다'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사유의 형식이 사유를 돕기는 하지만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걸 아느냐 묻는다. 시인이 말한 사유의 형식은 반가 자세를 말하는 듯 하다. 반가(半跏)는 책상다리 자세이다.

 

서광 스님의 '단단한 마음 공부'에 이런 말이 있다. "좌선 자세를 하고 척추를 곧게 세워 보십시오. 호흡을 자연스럽게 두세 번 한 다음 몹시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려서 열심히 미워해 보십시오. 잘 안 될 것입니다."(103 페이지)

 

자세가 감정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의 글이다. 사실 이런 상관 관계는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는 그러니 이제는 어떤 자세가 어떤 감정과 밀접한지 등에 대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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