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케이스 - 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
이해영 지음 / 삼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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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인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 이는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 케이스에서 제시한 핵심 주장이다.

 

현 안익태의 애국가에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묻는 것이다. 그간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만든 건 1935년경이다. 그 후 2년여 만인 1937년 안익태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1938년 안익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를 초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에 의하면 당시 안익태의 애국가는 같은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빌려온 애국가 등 여러 애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열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도 안익태 작곡이 아닌 올드 랭 사인곡조의 애국가였다. ’애국가가 문제인 것은 단지 친일 부역자가 지은 곡이어서가 아니라 만주국 건국 10주년(1942)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해 만든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

 

잘 알고 있듯 만주국은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이다. 안익태 즉 에키타이 안은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며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악보를 폐기한 데 이어 현재 악보와 음원이 전해지지 않는 1938년 더블린 판 코리아 판타지를 개작해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으로 만들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꾀한 변신의 일환이다. 자작 애국가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애국으로 포장하면서 1938년부터 1944년에 이르는 친일 행적을 숨긴 것이다.

 

1965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떠난 안익태의 시신은 현재 국립 현충원에 묻혀 있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정계와 문화계 인사 등이 주도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물론 그에게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올랐다.

 

안익태는 더블린에서의 코리아 판타지초연 이후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머물렀다. 이해영 교수는 미 육군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문건인 ‘2차대전 기간 전시 독일의 외교 및 군사 정보 활동 보고서를 참고, 에하라 고이치가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에키타이 안을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1959년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고 주장한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안익태가 친일부역행위를 했다 해도 애국가를 만들 당시엔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해영 교수는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선 그 곡을 만든 이의 전 생애를 판단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흠결 없는 삶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양 출신의 안익태가 일본에 유학할 때 사용한 이름은 안에키타이(あんえきたい)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할 때는 에키타이 안(Eak-tai Ahn)이었다.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正則) 중학교를 거쳐 도쿄 구니다치(國立) 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안익태가 미국에서 유학한 뒤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1937년이었다.

 

19382월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으로 후에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진 자작곡 '교향적 환상곡 조선의 초연을 지휘했다. 같은 해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를 발표했다. 1959년 이 작품은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19437월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정식 회원(회원번호 RKK A 115.)이 되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나치 시절 괴벨스가 주도한 '음악가 조직인 제국음악원에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교관으로 포장한 베를린 지역의 첩보 총책' 에하라(江原)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프랑스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스페인으로 피신, 활동하던 그는 종전 뒤인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다. 안익태는 19553'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 지휘차 귀국했고 4월에는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는 5년 뒤 이승만의 '탄신 85회 음악회' 지휘를 위해 다시 귀국한 바 있다. 1962년에는 박정희를 예방,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

 

1930년 조국을 떠난 안익태는 25년 동안 고국을 찾지 않았고 굳이 일본 국적을 가질 일도 없었고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며 일제에 협력할 필요도 없었지만 일제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었고 에하라(江原)의 지원을 받아 유럽 무대에서 지위를 굳혔다.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봉사한 것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다. "'국가'는 한 나라의 상징"인데 "법으로 공인된 '국가'가 아님에도 그냥 관습적으로 불러왔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란 물음을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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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7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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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기본 입자를 뜻하는 쿼크(quark)라는 용어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의 주요 개념은 문학작품에서 기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쿼크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서 비롯된 용어라면 자연선택에 대한 대중의 그릇된 인식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장시 ’In Memoriam‘에서 비롯되었다. 테니슨은 이 장시에서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자연이라는 표현을 썼고 그로부터 9년 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닉 레인(Nick Lane)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테니슨의 황량한 시각은 훗날 자연선택에 대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그 표현은 모든 생명의 관계를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생생한 싸움으로 단순화시켰고 다윈이 일반적인 생존경쟁을 더욱 선호한 것처럼 여겨지게 했고 개체와 종 사이의 협동과 한 개체 안의 유전자들의 협동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했고 공생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했다.(’생명의 도약‘ 239, 240 페이지)

 

하나의 잘못된 시초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를 우리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의 생성과 유통 과정을 통해 알게 된다. 존 캐서디는 최근 나온 시장의 배반에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 의하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것은 단 한번이고 그나마 얼버무리는 식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체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단 한번 얼버무리는 식으로 언급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 수백년 동안 주류 경제학의 모토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 ~ 1921)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읽으며 다시 한번 잘못된 기원 또는 인식의 오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크로포트킨을 무정부주의자로만 간주하는 것은 일면적 인식에 불과하다. 귀족 출신 장군의 아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사상을 지녔던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를 목격한 뒤 갖게 된 혐오감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는 꿈을 꾸었다.

 

크로포트킨은 1888년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1825 ~ 1895)의 논문에 자극받아 만물은 서로 돕는다(Mutual Aid)'라는 불후의 책을 썼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은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헉슬리에 맞서 인간은 원래 선하고 자비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또는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는 사상을 천명했다.(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헉슬리는 다윈의 핵심적인 사상보다 용어 몇 개를 가져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에 과학적인 외피를 입힌 사람이다.)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에서 다윈의 생각에 의심을 품게 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동물들이 자연의 힘 앞에 혹독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한편 수많은 개체들, 군체들 사이에서는 어김없이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게 그 모습은 생명의 유지와 종의 보존, 나아가 종의 진화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느껴졌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를 입중해주는 사례들이 너무나도 풍부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크로포트킨의 주요 논지는 인간의 삶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상호 도움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했다. 동물 세계의 개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인간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동물들 사이에서 격렬한 경쟁의 시기에는 종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착안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 야만인, 미개인, 중세의 도시인, 근대인등이 보인 다양한 상호 부조 사례를 예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크로포트킨은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면서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들이야말로 늘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예들은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발견되었다고 크로포트킨은 주장한다.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들이 전성기를 누리는 시기야말로 예술, 산업 그리고 과학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개미와 흰 개미는 홉스주의적 전쟁을 포기했다는 말을 했다. 이는 인간이 진화의 정점(定點)이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생물학자들을 중심으로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낯설거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진화과정이 고등한 형태가 오래된 원시적 형태를 단지 대체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고도로 진화한 종족 즉 몇몇 영장류만이 현존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반면 물리학자 한스 그라스만은, 진화는 발달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경험상 명백한 모순에 빠진다는 말을 했다. 내 경우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진화를 보는 시각은 하나로 고정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리프킨은 이 책에서 진화로 인해 에너지 흐름의 값이 더욱 커지고 이로 인해 환경 전체에 더 큰 무질서가 발생한다는 점을 예로 들어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한스 그라스만이 말한 진보는 지력(知力), 언어 능력, 도구 사용 능력 등의 면에서 정점(定點)에 오른 인간의 위상을 말하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리프킨의 말은 더 큰 무질서(더 큰 엔트로피 총량)에 착안(着眼)한 말이다. 자연에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을 가하며 유용한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현재의 행태는 진보와 발전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루소가 자연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했다면 헉슬리는 투쟁만을 보았다는 이유로 양자를 모두 비판하며 서로 도움을 주는 종이 싸움만 하는 종에 비해 적자(適者)라고 주장하는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저작에서 경쟁에 대한 실제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다윈이 극심한 생존 경쟁을 주장한 것은 중간 변종의 절멸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따라서 절멸이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중간 형태의 절멸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은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는 주장을 펴며 인간들이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에서 예외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상호 부조가 지배적인 세계로 보았음에도 그 법칙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정글로 보고 있기에 인간만이 자연 법칙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남으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지적해야겠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는 홉스는 다윈의 직계 조상이라는 주장을 폈다. 홉스는 데이비드 흄을, 흄은 애덤 스미스를, 애덤 스미스는 맬서스를, 맬서스는 다윈을 낳았다.(‘이타적 유전자‘ 347 페이지) 한편 스미스는 밀턴 프리드먼을 낳았고(경제학), 다윈은 도킨스를 낳았다.(생물학) 리들리는 헉슬리의 능력주의에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그 잔혹한 우생학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을 한다.(리들리는 주목할 만한 생물학 이론가이다. 붉은 여왕 이론과 별개로 히틀러의 우생학은 다윈이나 스펜서가 아닌 마르크스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새롭고 논쟁적이다. 다윈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저작에 그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리들리는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본능은 북돋고 자기이익과 반사회적 행동을 추구하는 본능은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기적(또는 이타적)이라는 선언이 사람들을 그렇게(이기적 또는 이타적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전제하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간에게는 사리(私利) 추구를 향해 치닫는 천성이 있다는 진실을 숨기거나,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에는 고상한 야만인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리들리는 침팬지와 달리 남녀 평등, 평화와 배려 등의 특징을 보이는 보노보가 우리에게 조금 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을 것(‘내 안의 유인원을 쓴 프란스 드 발 교수)이라는 보노보를 둘러싼 이슈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노보에 비해 폭력적인 침팬지가 인간 본성의 모델로 결정되었기에 인간들이 폭력적이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니듯 평화와 배려를 특징으로 하는 보노보가 인간 본성의 모델이 된다고 해서 인간들이 평화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특성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지만 이타적 유전자를 말하는 리들리의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희망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세계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의 정의(定議)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상생을 위한 길은 멀어 보인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닉 레인의 책(‘미토콘드리아생명의 도약‘)과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을 정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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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건축의 발견' 서평단에 응모했다. 지난 해 한양도성 박물관 혜화전시관을 가다가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재능교육 건물을 보고 일본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책 욕심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일본에서는 19세기 말 겐치쿠(けんちく: 建築)란 말이 등장함으로써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건축가 김광현 님의 건축 책들을 읽을 생각이다. 구축 의지, 건물은 산 기하학은 땅 등이 있는 '질서의 가능성', 연상, 은유, 빛과 물체, 빛과 공간 등이 있는 '말하는 형태와 빛',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 구조주의 건축, 부분의 건축 등이 있는 '부분과 전체',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보고 높이는 시선, 높은 시선, 낮은 시선 등이 있는 '지각하는 신체', 주택은 도시다, 건축의 자연, 나무에게 배우는 것, 정원, 정원의 건축, 바람의 건축, 풍경과 경관 등이 있는 '도시와 풍경', 시간의 두 모습, 건축의 시간, 표현과 노출 등이 있는 '시간의 기술' 등이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읽고 (전체 열권의 건축 강의 시리즈 중) 여섯 권의 상기한 책을 읽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을 다시 읽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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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이란 말을 자주 하면서도 연()이란 글자에 포함된 이란 글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판단할 단'자이고 주역 괘()의 이름이고 점을 치는 것을 뜻한다 

 

어제 눈이 침침하다는 글을 쓴 데 이어 "하늘을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땅바닥에 나뒹굴며 매달려 간다/ 몸이 시커멓게 멍든다/ 고통이 공중을 가득 채운다/ 훨훨 날아오르는, 새털 같은 생이란 없다..."란 구절이 있는 이성목 시인의 '노을 속으로'란 시에 대해 해설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주역 프로그램을 켜니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와 수기익(垂其翼)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명이(明夷)란 밝음을 손상당했다는 뜻이다. 눈이 침침한 것을 명이라 해도 좋으리라 

 

수기익은 새가 날개를 아래로 드리운 것을 말한다. 힘 없는 상황, 날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오래 전 반경환 평론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모든 시인의 모험은 어떠한 출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시의 언어에 그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써 시를 쓴다."('행복의 깊이' 68 페이지) 붉디 붉은 피로써 시를 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성목 시인은 "그림자가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새는 하늘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가 놓았을까/ 발톱이 박힌 곳마다/ 붉게 핏물이 스며 나온다.."는 말을 했다. 노을('노을 속으로'란 제목의)과 새가 만든 붉은 핏물을 교차시킨 발상이 인상적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눈이 침침하지만(명이; 明夷) 마음은 밝다.(; ). 날개를 드리웠지만 그것은 상승(上昇)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것이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 시중(時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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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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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을 부제로 한 책이다. 출간 8년이 넘은 책이다. 김용만 저자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그간 선비를 지나치게 개인에 초점을 맞춰 보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선비를 보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1) 어떤 인물이 당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고 더 나은 가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 2) 그의 삶이 시공을 초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지, 3) 그 사람의 직책이나 지위에 부여된 기대(임무, 사명)에 얼마나 부응했는지 등이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선비들이 몸 담았던 사회의 모습과 그들이 주도했던 정치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비정신만을 분리해 일방적으로 다루고 찬미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식민사관과의 관계이다.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민사관에 대항해 당쟁이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당쟁을 무조건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당쟁을 그렇게 치열하고 극단적으로 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조선 선비들은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자당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물고 뜯고 싸웠다.

 

당쟁 이야기가 주가 아니기에 넘어가고 진경문화론과 식민사관과의 관계를 논하자. 진경문화론 역시 당쟁론처럼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다. 조선 선비들은 권리만 추구했고 의무나 책임은 나 몰라라 했다. 때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도 자파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무시했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이는 조선 국왕을 중국 천자의 대리인으로 여긴 것과 관계있다.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은 중국 천자라 생각한 결과이다. 개인적으로 따뜻한 인품을 보인 선비들이 제도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노비에 개인적 인정을 보인 이황이 노비 해방을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이다. 조선 선비들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재산가들이었다. 안빈낙도란 말은 가진 자의 유유자적, 음풍농월을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정치를 담당할 학식과 교양을 갖춘 유일한 계층인 선비들이 정치가 타락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만 깨끗하겠다고 은퇴해서는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중앙 정계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개입하는 정치 행위를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 이론은 검증된 적이 없다. 세자 책봉 과정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발생한 이성계 집안은 콩가루 집안인데 이성계가 수신, 제가를 잘 했다고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주희의 이론 적어도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부분은 금과옥조로 받아들일 것이 결코 아니다.

 

덕치, 교화, 왕도(王道) 등은 정치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역사상 승자는 늘 패자(覇者)였다. 저자는 이상향의 효시인 요순시대는 실존이 확인되지 않은 상상 속 시대라 말한다. 계승범 교수의 책에는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정치 현장에서는 문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옛 것만을 근본주의식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개인 차원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권력구조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조선 국왕이 두 차례나 반정으로 쫓겨난 것은 왕의 친위부대가 부재한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기 수신은 제대로 하지 않고 정쟁을 일삼으면서 왕에게만 수신(修身)을 강조한 이중적인 존재들이었다. 군자와 소인을 가른 공자의 생각은 현실성이 없는 관념적인 것이다. 아니 중세적 양단 논리이다. 조선 선비들은 노비 제도 등으로 귀천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예의와 염치를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저자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았던 공자와 맹자 등은 어떻게 예의와 염치를 실천했는지 묻는다.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은 1801년의 공노비 해방 조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한 박지원도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148 페이지)

 

조선 후기에 국내의 상공업 발전을 중시함으로써 비교적 가장 현실성 있는 국방강화책을 제시한 박제가도 양반의 군복무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76 페이지)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조선 선비들은 상업으로 이익을 남기는 행위를 소인배의 행동으로 간주했다. 혹자는 지금 기준으로 과거를 본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백성을 배불리 먹인 후에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 맹자를 생각해보라. 정치의 3대 요소를 경제, 군사, 백성으로부터 얻는 신뢰라고 언급한 공자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말한 세 가지를 제대로 수행하려다가 시세를 잘못 만나 아쉽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자기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에만 몰두했기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나는 조선이 상공업을 천시해 가난의 길을 자초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조선 선비들이 숭상하는 맹자의 이론 즉 당시 기준으로 문제삼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신들은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늘 왕을 가르치려고만 했고 천재지변의 책임도 왕에게만 전가했다.(117 페이지)

 

저자는 평소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국의 사례를 인용하면서도 서얼 허통의 경우에는 침묵한 이유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 말한다.(139 페이지) 이 역시 당시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행일치, 높은 도덕성 등은 당시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이런 이상한(선택적) 함구는 이황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즉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서얼 차별을 정당화했지만 서얼을 차별하지 않은 중국이 어떻게 나라의 근본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굳게 함구한 것이다.(145 페이지)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면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다.(234 페이지)

 

조선의 유교화는 17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배타적으로 진행되었다.(235 페이지) 저자는 동서고금의 인류사에서 타자의 지배하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손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이 종교적(의례적) 율법들을 더욱 교조화해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237 페이지)

 

조선의 지배층이 외교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청나라를 새 종주국으로 받아들였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를 영원한 군부(君父)로 간주하며 더 철저하고도 애틋한 정을 보였다.(236 페이지) 타자란 청나라를 말하고 지배란 그들의 세력권하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저자는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는 정치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해 정체성 위기를 맞을 경우 전통문화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말한다.(239 페이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전통문화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거의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경우 사회풍속 차원에서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를 고수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는 일제의 침략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키려 했다. 조선 선비들의 가장 큰 실수는 명, 청 교체기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명이 망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소중화를 외치며 자신들이 만든 상상 속의 명질서(明秩序) 속에서 정저지와(井底之蛙)식 정책과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이다.(241 페이지)

 

저자는 한국문명의 쇠퇴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선비들이 애국자로 평가받게 된 현실을 비극으로 표현한다.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현실과 극명하게 대조된 위정척사 운동으로 인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권 상실의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을 애국자로 변신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타락한 유교문화와 부패한 양반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를 놓쳤다.(242 페이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조선 멸망의 원인을 명분론적 사대주의와, 민생을 외면한 당쟁이라 지적했다. 우리 스스로도 그런 점을 원인으로 결론낼 수 있는 상황인데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외세의 식민사학자들이 지적했으니 더구나 악의적으로 했으니 그에 대한 반동 또는 반발로 사대주의는ᅵ 의리 있는 행동으로, 당쟁은 붕당정치로 미화한 것이다.

 

피해란 우리가 그들로부터 민족적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반동으로 청산해야 할 과거를 미화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쟁이 없었던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당쟁은 대를 이어가며 전국을 무대로 300년 이상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바(187 페이지)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에서 배제된 탓에 소멸되었지만 이는 긍정적인 종결이 아니다.

 

당쟁은 급기야는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 근대의 물결을 맞아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일본에 먹히는 결과를 낳았다.(185 페이지) 앞서 진경문화론이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니 이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 식민사관이 없었다면 진경문화론이 탄생했을까?

 

정선(鄭敾; 1676 - 1759)의 진경산수화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우리가 17, 18세기에 문화적 자주의식을 가졌는지 회의하는 학자도 있다.(한정희 지음 '한국과 중국의 회화' 217 페이지) 한정희 교수는 18세기 한국회화의 창의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회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한동안 팽배해 있는 와중에도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한정희 교수는 금강산을 찾고 그린 것은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자아의식이나 국가의식의 발로라기보다 세속에서 잠시 떠나 초속(超俗)의 진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심진(尋眞)의 경지이며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신선의 마음이 되어보려는 일종의 신선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논의를 소개한다.

 

우리의 문제는 선비정신과 유교문화 자체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을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일망정 미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를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단재 신채호는 주목된다.

 

저자는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유교의 폐해와 사대주의를 한국문명의 쇠퇴와 조선 멸망 원인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그들의 해석과 같이 과감하게 유교의 폐해를, 특히 사대주의를 국운 쇠퇴의 주원인으로 지적한 신채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 신채호야말로 식민사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인 사학자가 아니었을까? 라고 말한다.(244 페이지)

 

필요한 것은 소신이고 부분이 아닌 전체성을 보는 것이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적 시각을 갖는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적극 추천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통쾌함을 느꼈다. 핵심을 너무도 정확히 논리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통쾌(痛快)라는 말을 생각한다. 통쾌의 통은 통할 통자가 아니라 아플 통자이다.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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