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들리는 말이 스포일러란 말이다. 다 아는 바이지만 반복하자면 망치는 사람이란 뜻이고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를 먼저 보고 줄거리를 상세하게 말해 감상을 방해하는 사람을 이른다. 내가 이 단어의 원형(?)인 스포일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의미의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란 문장에서이다.(지금도 영어 교과서에 이런 문장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없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내게도 스포일러란 말이 자주 들리는 것은 전례를 딛고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결과이기도 하고 SNS에 자주 노출된 탓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내가 이 말에 민감한 것은 최근에는 아니지만 내가 책 서평을 꽤 상세하게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쓴 서평을 보고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다는 말이 내게 전달되기도 한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핵심을 놓치지 않고 거론해 높이 평가받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낸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싶다.

 

스포일러란 말은 두 경우로 분류될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말로 하는 경우와 글로 하는 경우다. 말로 하는 경우는 혹시 친한 사람이라면 막을 수 없어서 스포일러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 하는 경우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글로 하는 경우는 강제성이 없다. 스포일링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용이 조금만 길고 지루하면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한 인터넷 공간에서 스포일링이라니.. 넘어가면 그만일 텐데. 혹여 글이 너무 리얼하고 재미가 있어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볼 여지를 염두에 두고 그냥 넘길 수 없는가?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즉 아무리 줄거리를 상세하게 듣게 되더라도 영화를 보는 제각각의 시각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를 단지 이야기 거리를 얻으려고 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기만의 시각을 확인하고 느낌을 다듬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란 김욱동의 책이 있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을 읽는 방법을 역사 비평, 형식주의 비평, 심리주의 비평, 사회학적 비평, 신화 비평, 구조주의 비평, 포스트구조주의 비평 등으로 제시한 책이다. 물론 책이든 영화든 이런 여러 방식으로 작품을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차이나는 진술을 하는 것은 라쇼몽이란 영화에 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의 존재이고 시각은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에 맞는 편한 영화를 보려는데 줄거리를 미리 구체적으로 말하니 김이 샌다는 식으로..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다만 적어도 글로 줄거리와 의미 등을 상세히 말하는 경우에는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그대로 넘어가면 되리라.

 

나는 감동은 작가(作家)와 수용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글이나 말도 듣거나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안목이 없으면 불편하거나 평범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 상대가 말이나 글 실력이 너무 뛰어나(끝까지 읽거나 들었)다면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높게 보아야 할 것이라 말하고 싶다.

 

만일 그런 뛰어난 이야기꾼이나 문필가의 내공에 감동한 결과 그 영화를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했으니 다행인 데다가 영화까지 기대를 갖고 보게 되었으니 이중으로 감사할 일이고, 그렇지 않고 듣기는 들었지만(또는 읽기는 읽었지만) 그 결과 감상욕구가 사라졌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떤 경우에든 스포일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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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 이어 두해 째 왕릉(王陵) 연구팀에 속해 올해 첫 숙제를 했다. 융건릉(隆健陵)에 다녀오지 않아, 참가한 팀원들과 달리 소략(疏略)한 숙제를 맡게 되었다. 가지 않은 것은 지난 해 9월 동작(銅雀)에서 간 일정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또 갈 수도 있었는데 내키지 않았다. 외적 요인으로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왕릉은 궁()이나 묘()에 비해 다루기(?)가 난감하다. 신이 나지 읺는다고 해야겠다.

 

사도세자(장조)의 융릉(隆陵)과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 이야기를 각각 한 편씩 하는 숙제를, 여러 편의 글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 재편하는 형식으로 마무리짓지 못했다. 내켰다면 정조의 풍수 활용에 대해서도 썼을 것이다.

 

이종호의 책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 답사기에서 읽은 다음의 글이 마음을 풀어주었다. “능호를 건()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362 페이지) 정조의 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셀 건이지만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여겨진다.

 

하늘이니 건()이고 그것을 건()으로 바꿀 법도 하다. 지난 해 나온 박현모 교수의 정조평전의 부제가 생각난다. ‘말 안장 위의 군주라는 부제다. 이 부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주는 물론 늘 목숨을 위협 받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군주 정조를 상징하는 절묘한 중의적인 말이다.

 

나는 정조(正祖)로부터 주역(周易)의 하늘 곧 건괘(乾卦)를 연상한다. , 하면 용()이 생각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원찰 용주사(龍珠寺)를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보이는 안산(案山)을 여의주로 인식하였고 그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박정해 지음 사찰에서 만나는 불교풍수참고) 용주사 자체가 정조의 깊은 관심 속에 입지선정이 되고 건설된 사찰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임기봉 교수의 임금의 도시를 읽고 풍수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풍수는 자연친화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차원 말고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과 감응(感應)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주관적이다. 표면은 발복(發福)이고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명당을 고른 정조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 차원과 무관한 경우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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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0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창정궤(明窓淨机)는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書案)을 말한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なつめ そうせき: 夏目漱石>가 좋아했다고 한다. 가끔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텅텅 비어 정결한 방, 절간 같은 방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글이 생각난다.(‘바람을 담는 집수록 책이 없는 방, 절간 같은 방’ 186 페이지)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을 의미하는 명창정궤에서 정갈하다는 의미는 김화영 교수가 말한 것처럼 책이 없는 책상이라기보다 서너 권의 책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화영 교수는 어쩌다가 묵어가는 시골 여관방, 주전자와 물그릇과 재떨이가 전부인 금욕적인 방, 그리하여 마침내 책이 그리움이 되는 오후를 그렸지만 나는 서너 권의 책이 있는 방을 만든다면 그 책은 어떤 책들이 될까?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이런 구상(構想)은 모든 음악이 없어져도 바흐의 평균율만 있으면 복원이 가능하다는 말에 영감을 받은 결과다. 책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는 아무래도 알베르또 망구엘 류의 사람이리라.

 

보르헤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각 장애인이 된 채 국립 아르헨티나 도서관장이 된 보르헤스는 그 사건을 자축하기 위해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기막힌 아이러니를 시로 썼다.(알베르또 망구엘 지음 밤의 도서관’ 283 페이지)

 

그런 보르헤스가 책은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한 작가인 반면 제자 망구엘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하는 사람이다.(2018827 교수신문 수록 김정규 시인 글 서재를 해체한다는 것에 대하여참고)

 

나는 사실 펴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는 책들조차 과감히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금욕적인 방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깨끗하게 방을 정리하리라 마음 먹을 뿐이니 나는 바벨탑 무의식의 소유자일 수 밖에 없다. 쌓아서 구원에 이르려는 또는 이를 수 있다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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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
허금행 지음 / 경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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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 수필문학, 시문학으로 등단한 허금행님의 수필집이다. 저자는 현재 뉴욕에 거주한다. 표제작은 수필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었다. 고교 2학년 때 만난 의과대학 본과 1학년의 남편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편은 미국 산부인과 자격시험으로 전문의가 된 후 곧바로 뉴욕신학대학에 입학해 목회학 박사가 되었다. 남편이 끝없이 공부만 할 동안 집안 건사는 아내인 저자의 몫이었다. 남편은 네 번째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 저자에게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많이 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을 천사의 말이라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일 때문에 힘들어 한 남편을 위해 운영하던 화랑도 닫았다. 저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말한다. 자신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한 것이 사랑 장이었구나 란 말을 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느니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란 구절들로 이루어진 장이 사랑 장이다.

 

이 사랑은 종교적 사랑이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숭고한 사랑이다. 저자는 중학교 2학년에 덜 익은 정포도라는 글을 써내 문예반에 들어간 후 글쓰는 일을 줄곧 해왔다. ‘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란 글에 저자가 사랑은 흐르고 미움은 고인다는 시를 썼다는 대목이 있다. 플라톤은 말은 흐르고 글은 남는다고 하며 그렇게 흐르는 말이야말로 신성하고 빠른 것이라 했다. 이 말을 저자의 말에 대입하면 사랑은 빠르고 신성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가?

 

저자는 희망의 속삭임이란 장에서 청각 장애로 평생 장애자 수혜금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한다. 지금은 청각이식수술을 받고 최신형 보청기로 말 뿐 아니라 음악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일상을 글로 옮긴다. 시를 쓰는 것이다. 미국의 지하철에서 경험한 풍경도 적어놓았다.

 

나무 이야기, 꽃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 저자의 글에는 수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이런 말들이다. ”지나온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다고 나를 다독거린다.“, ”나는 이 돌층계를 끝까지 오르면 거기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덫에 걸린 나를 탈출시켜야 한다.“,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어떤가!“..

 

.‘탈출을 꿈꾸며란 시가 눈에 띈다. ”거울 면에서 멀어질수록/ 멀어져 가는 또 하나의 나는/ 오늘을 탈출하고 싶은 진정한 나이다/ 겨울비가/ 숲속에서 떠도는 어제/ 숨어버린 벌판의 바람과 그림자를 위하여/ 차갑게 흔들릴 때 나는 없어지고 싶어한다/ 시간에서 멀리 잡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내부에서 밖으로 나와 무너지고 부서져 아무것도 아닐 때까지/ 스스로 부딪쳐 산산조각 흩어지는 나는/ 그대로 갇혀 있는 저 안의 흔적을/ 탈출시킨다/ 밤 깊은 저 너머로“(외우고 싶다.)

 

저자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전주에서 여중 1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동기 생각이 난다. 저자는 고교를 이화여고에서 다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서예가이신 아버지 앞에서 먹을 갈고 붓글씨 연습을 했다.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시 아니면 안 쓴다는 대책 없는 고집으로 물리쳤다. 저자는 이를 후회되는 일이라 말한다.

 

글씨가 활자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는(물론 지금도 그러리라.) 저자를 보며 나도 늦었지만 붓글씨를 연습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이렇게 늦은 나이에 붓글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여성운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가 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일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며 아무리 남자들이 무슨 말을 해도 뒤집어질 수 없는 가장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어떤 모임에 나가든지 좋아하는 시를 복사해 나가서 함께 읽곤 한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도 그 시들 중 하나다. 저자는 아직도 시를 많이 읽는 사람에게서는 향내가 난다는 생각을 깊이 새긴다. 누군가가 저자의 글에 잡글이나 쓰면서...“란 토를 달았다.(너무 무례하다.) 저자는 단정하고 네모나고 메마른 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나다운 잡글을 쓸 것이라 말한다. 이어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한다. ”잘라내야 할 것을 적당한 시기에 제대로 잘라내야 글도 사람도 이 세상도 풍성해지는 것이거늘, ...“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자탄으로 읽힌다. 저자에게 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이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날은 많이 힘들 때라고 한다. 시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두려움과 함께 심한 두통이 엄습한다. 대학 때, 시를 꺼내기 위해서는 아주 깊은 우물 속 같은 험하고 외로운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체험을 했다. 시로부터 도망쳤지만 끝내야 할 때가 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글들을 읽었다.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글이고 생각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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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교황이다. 그의 조카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로부터 '군주론'을 헌정받은 우르비노의 공작이다.

 

바티칸 도서관 글을 쓰는 중에 내 관심을 끈 것은 비밀문서고가 아니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였다. 마키아벨리와 로렌초 데 메디치, 레오 10세처럼 이리저리 얽힌 인맥이었다. 도서관으로부터까지 비밀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두서 없이 분량을 늘린 책이다. 인문적 맥락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진 교황청을 로마로 옮긴 그레고리우스 11세와 로마 복귀를 촉구한 페트라르카 식의 이야기.

 

그렇다고 건축을 이야기할 내공도 없는 사람들의 책. 저자 개인의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연결한 책..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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