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이학사라는 출판사가 있다. 이 출판사에서 낸 ‘분류와 합류‘라는 책에 의미 있는 내용이 있어 전화로 물었다. 꽤 주목할 내용인데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 그것에 대해 물은 것이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이어서 저자들에게 물을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리고 출판사에 연수(年數) 제한 규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떻든 이해하기 어렵지만 좋은 내용을 읽을 수 있게 해준 출판사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직접 찾는 것이다. 누구든 이것 말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책 내용 중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에 대한 대비가 눈길을 끈다. 책은 이론지를 에피스테메(episteme)로, 실천지를 프로네시스(phronesis)로 정의했다. 얼마 전 읽은 모티모 애들러의 ’평생 공부 가이드‘는 에피스테메는 전문(인들의) 지식, 파이데이아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지식으로 정의했다.(173 페이지)
내가 오래전에 읽은 바로는 에피스테메는 진지(眞知), 독사(doxa)는 억측(臆測)이었는데... 한자경 교수는 오직 무명(無明)과 불각(不覺)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말하며 모른다는 자각은 우리가 개념적으로 분별되지 않는 어떤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한다.(’분류와 합류‘ 144 페이지)
여담이지만 밝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자가 분류한 것을 말하고 싶다. 명(明)은 밝을 명이고, 명(眀)은 밝게 볼 명이다. 경운궁 준명당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글자가 명(眀)이다. 나는 “우리는 개념적으로 분별되지 않는 어떤 것을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때의 밝음(지식)은 암묵적으로 안다는 의미에서 밝을 명자를 써서 명지(明知)라 표현해야지 밝게 볼 명자를 써서 명지(眀知)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명(明)은 수동적이고, 명(眀)은 능동적이다.
김상환 교수는 모든 합리적 질서는 분류에서 오지만 모든 발견과 창조는 기존 질서로 포착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나아가 기존의 질서 전체에 의문을 유발하는 분류 불가능자가 제기하는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30 페이지) 분류는 어렵고 발견과 창조는 더욱 어렵다. 단편적안 모든 발견은 큰 틀로 수렴되거나 벽돌 하나나 둘이 아닌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
최근 나는 주역(周易)의 8괘 중 태극기에 등장하는 4괘(건곤감리)와 나머지 4괘(손태간진)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뜻의 차이(건곤감리는 하늘, 땅, 물, 불을 의미하기에 거창하고 손태간진은 바람, 연못, 산, 우레를 상징하기에 덜 거창하다.)도 차이려니와 대칭의 유무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건(乾)은 가운데 양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양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곤(坤)은 가운데 음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음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감(坎)은 가운데 양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음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리(離)는 가운데 음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양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반면 손(巽)은 가운데에 양효가 있고 위에는 양효, 아래에는 음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태(兌)는 가운데에 양효가 있고 위에는 음효, 아래에는 양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간(艮)은 가운데에 음효가 있고 위에는 양효, 아래에는 음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진(震)은 가운데에 음효가 있고 위에는 음효, 아래에는 양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이런 발견(?)은 사소하다. 하지만 모든 성과는 이런 작은 발견에서 시작된다.
김상환 교수는 과학적 발견 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발견은 전혀 다른 규칙 사이를 횡단하는 비스듬한 시선 속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분류와 합류‘ 33 페이지) 김상환 교수가 한 말을 다시 음미하게 된다. 발견과 창조 이전에 분류가 있다. 물론 분류도 어렵다. 그래도 분류를 잘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분류를 통해 남다른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