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다. 아무도 안 읽는다는 말은 지나치게 들리지만 일리가 없지는 않다. 클레멘스의 말은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있다.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고전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클레멘스는 책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좋은 침실에서는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피부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지혜가 흡수되는 신비한 방식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클레멘스의 책을 아무도 읽지 않지는 않는다. 아니 꽤 많이 읽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만일 자신의 책보다 말이 더 많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의 109주기이다. 나는 그가 고전에 대해서나 책에 대해서 한 말보다 인생에 대해 한 말을 더 좋아한다.

 

"20년 뒤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떠나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마크 트웨인이라는 그의 필명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마크 트웨인은 배가 지나가기에 안전한 두 길 물속을 의미하는 말이다. 탐험에도 안전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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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 성서에 생애를 바친 개혁자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30
도쿠젠 요시카즈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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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젠 요시카즈(德善義和: 1932 - )마르틴 루터는 이와나미 문고로 나온 책이다. 저자는 신학박사이자 목사이다. 루터는 말에 생애를 바친 인물이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이 라틴어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자 그리스도교 교회는 스스로를 로마 카톨릭이라 칭했다.

 

중세 말 내내 교회는 라틴어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고해성사는 민중을 위하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의식 중 하나였다. 이때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였다. 민중의 마음과 성서의 가르침을 이어준 가장 친밀하며 유일한 접점이었다.

 

고해성사만으로는 불안을 해소할 수 없었다. 성직자가 대신 참회를 해주었다. 여기서 진화한 제도가 면벌부 제도였다.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며 돈을 받고 면벌부를 팔았다. 루터가 배운 아이제나흐의 성게오르크 학교는 200년 후 바흐가 배운 곳이기도 하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법대 학생이 되었다.

 

루터는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판 한가운데서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루터는 공포 속에서 성 안나(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호 성인),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살아난 루터는 서원대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수도사가 되었다.

 

이 수도회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계보를 잇는 프란치스코회 계열이었다. 은둔 수도회가 아닌 도시에서 지내는 탁발 수도회였다. 탁발은 스스로 부족한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이후 전통으로 자리잡은 행위였다.

 

저자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추진한 이유 중 하나로 수도원의 타락을 꼽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수도원의 가장 좋은 부분에 잠재한 뿌리 깊은 문제 즉 자기만족과 거만을 깨달은 결과라는 것이다.

 

루터는 개체야말로 실재이며(유명론) 실재는 의지와 능력에 의해 확인된다는 오컴의 논의에 익숙했다. 유명론(唯名論)은 인간 총체(보편)란 이름 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개개의 개체라고 보는 입장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읽음으로써 인간이란 죄 있는 존재이며 무()인 존재라서 은혜로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는 중세 철학과 신학을 지탱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1511년 루터는 수도회의 명을 받고 학적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긴다. 루터는 이곳에서 신학 연구를 계속했고 이듬해는 신학 박사가 되어 성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성서 강의를 하던 루터는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해방시켜주십시오.”라는 구절(시편 312)에 걸렸다. 신의 의로움을 분노, 심판, 벌이란 맥락에서 파악해온 루터는 신의 의로움과 인간의 구원이란 결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신의 의로움과 인간의 구원을 매개한다고 이해했다. 신의 의로움이란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의로움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의미다. 독일에는 네 개의 루터의 도시가 있다. 탄생지 아이슬레벤, 라틴어학교를 다닌 아이제나흐, 수도사의 길에 들어선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명으로 간 비텐베르크(여기서 그 유명한 95개 반박문이 내걸린다.) 등이다.

 

비텐베르크는 당시 인구 2000명의 소도시였다. 나치 시대에 유대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루터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그 죄에서 구원해주는 은혜로운 의로움에 대해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 대해서 가르쳤다.

 

루터에게 성서 강의는 성서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학생들과 나누는 활동이었다. 종교개혁이란 기본적으로 성서를 읽은 운동이다. 이는 성서를 혼자 읽는 것에서 나아가 모두와 함께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나누는 운동임을 의미한다. 그 모두에 해당하는 첫 사람들이 비텐베르크 대학 학생들이었다.

 

루터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성서 읽기 나눔 활동을 펼쳤다. 성서가 라틴어로 쓰인 시대에 독일어로 말해주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설교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었다. 죄를 강조하는 다른 설교자들은 필연적으로 면벌부 판매로 나아갔다.

 

면벌부는 당시 민중의 요구에 부응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불안해 하는 민중의 요구에 편승해 민중의 영혼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면벌부 시스템에는 자기 자신을 체크하는 기능이 없었다. 루터는 이를 지적했다.(75 페이지)

 

7세기경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고해성사는 초기에는 수도사들이 짊어졌던 민중의 죗값을 배려한 진지한 행위였다. 면벌부로 인해 급기야는 몸으로 직접 벌을 필요도, 대리인을 쓸 필요도 없어졌다. 95개의 논제를 통해 루터가 성직자와 신학자들에게 묻고자 한 것은 단순한 교회비판이 아니라 민중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88 페이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모두 성서의 말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는가?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통해 그렇게 물었다. 15187월 루터를 60일 이내에 로마로 소환해 이단 심판에 부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독일 민중, 제후 등이 맹렬히 반발했다. 루터는 원래 루더였다. 95개 논제를 발표한 시점부터 루터라 이름했다.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 심문,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 1521년 보름스 심문이 루터가 맞이한 3대 시련이었다. 보름스 심문은 최고재판소 판결을 의미한다.(106 페이지) 보름스 심문에서 루터는 저의 양심은 신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교황과 공의회를 믿지 않습니다.”란 말을 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루터에 대해 제국 내에서의 일체의 법적 보호를 박탈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가던 중 루터가 자취를 감춘다, 선제후 궁정 고문관들이 벌인 눈속임의 유괴극이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 은닉되었다. 루터는 작은 밧모섬에서라고 발신처를 쓴 편지를 보냈다. 밧모섬은 에개해 남동부의 작은 섬으로 요한이 이 섬에 들어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곳이다. 루터는 이 섬에서 저술을 했고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루터의 관심 대상은 성서의 문자와 어구를 얼마나 세밀하게 다루느냐가 아니라 성서에 담긴 신의 은혜로운 말 즉 복음이었다.(123 페이지) 루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종교개혁은 철학이 신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도록 해주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교회라는 제작 거점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회화는 점차 교회 밖으로 나와 시민 예술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음악도 조금 늦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단순히 교회의 추락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면 글자 그대로 리폼이었을 뿐 리포메이션이라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152, 153 페이지)

 

그것이 개혁을 넘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사람들의 신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찬송가가 그리스도교 예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 문화를 만든 것이 루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민중이 부르는 찬송가를 코랄이라 한다. 루터는 평생 약 50편의 코랄을 작사했고 그중 몇 곡은 작곡도 했다. 성서의 말에 근거한 루터의 개혁은 교회 내부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주목할 것은 학교 교육 개혁이다. 당시 독일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높지 않았다.

 

초등교육은 교회와 수도원에서 사제와 수도사들이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관계도 흥미롭다. 인간 의지에 대해서 에라스무스는 학문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루터는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였다.(197, 198 페이지)

 

루터는 죄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는 없으며 신을 따르든 악마를 따르든 의지는 노예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한층 첨예화한 결과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정도까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의 필생의 작업은 성서 번역이었다. 그는 성서의 말이 가리키는 진리를 평생 추구하고 전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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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경동교회(*)에서 410일 마태수난곡 전곡 연주회를 갖는다고 한다.(19시부터. 무료 관람) 사순절을 기념하는 특별 연주회다. 사순절이란 잘 알듯 부활절 전 40일간 금욕으로 참회하는 기간을 말한다. 40일이란 숫자는 금식과 기도로 이루어진 예수의 광야 40일을 연상하게 한다.

 

*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 - 1987)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 설립을 주도한 강원용 목사 중심의 전도조직이었던 '선린형제단'이 간도 용정과 한반도 북부에서 활동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 장충동 현재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경동교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예수의 광야 40일을 권력은 밖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책에 의하면 계시받은 자의 삶(공생애)을 시작하기 전 예수는 살던 공간을 떠나 바깥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48 페이지)

 

이 부분을 활용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도서관 이야기를 썼다.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이후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가 고행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물론 기독교 국교화 이후 기독교가 초심을 잃고 권력자의 종교가 되어간 사실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사안이다.

 

예수가 13세에 부처의 법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에 갔다가 29세에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니콜라스 노토비치 지음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참고) 논란이 많은 이야기다. 예수의 13세에서 29세까지의 시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예수의 인도행이 사실이라면 광야의 40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간적으로나 내용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쓴 이사전(The Life of saint Issa)’을 번역한 책이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흥미로운 점은 이사전(The Life of saint Issa)’이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책이란 사실이다. 영지주의는 예수의 탄생을 육을 빌어 나타난 가현(假現) 즉 헛깨비(그 자체가 아닌 형상)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영지주의는 여성을 생사의 근원, 우주의 어머니, 신성한 창조의 진리를 내포한 존재로 본다. 페미니즘과 영지주의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통하는 부분과 소원(疏遠)한 부분도 있으리라. 영지주의에는 여성의 육체를 긍정하고 남녀 평등성을 회복하려는 현실적인 여성해방운동적 성격이 없다.

 

영지주의는 젊은 시절 내 관심의 주요 대상이었다. 현상학이나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의 영향으로 내가 영지주의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肉體), 영혼(靈魂), ()으로 이루어졌다.

 

영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육체는 세상에 버려지고 영혼은 인식(gnosis)을 획득한 다음 환생을 통해 충만으로 들어간다.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영혼은 세상 종말까지 다른 육체들 속에서 윤회한다.(마들렌 스코펠로 지음 영지주의자들’ 16 페이지)

 

철학자 강미라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프랑스의 거의 모든 대학의 철학과에서는 베르크손을 비중있게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들의 지적 배경에는 후설 뿐만 아니라 공통적으로 베르크손도 있다.

 

강미라에 의하면 그들의 영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무리지만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관계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 몸을 객관화하는 대신 살아 있는 몸으로 파악함으로써 생명체로서 목적이 있는 운동을 하는 능동적인 몸을 이해할 수 있다.(‘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74 페이지)

 

영지주의에서 만날 수 있는 창조주로서의 신()이 데미우르고스다.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를 본()으로 하여 본의 모방물을 만들어내는 곳이 코라라면, 코라는 이데아를 지향하는 감성계의 사물들이 생성, 소멸하는 장소로서 이데아라는 영원성이 실현되는 현실적 장소다.(‘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 41 페이지)

 

하이젠베르크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파라데이그마라는 설계도를 따라 물질 공간인 코라를 빚어 세상을 만들 때 설계도대로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보고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해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플라톤은 보편자가 개별자보다 앞서며,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을 통해 비로소 읽히고 이해된다고 보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인식이 작동되기까지는 개별적인 것이 먼저 알려지고, 그 개별적 이해를 바탕으로 보편자 인식에 이른다고 보았다.

 

플라톤 철학을 계승한 어거스틴은 계시와 선험을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재구성한 아퀴나스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경향에 힘입어 다분히 경험적이고 귀납적이었다.(이영진 지음 철학과 신학의 대화’ 30 페이지)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펼쳤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플라톤에게 진짜는 형상이고 현실은 형상들을 불완전하게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이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형상을 구현(具顯)한다고 보았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1 페이지)

 

플라톤이 창조 신화를 통해 공간이 설명하는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간은 현실적 사물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 42 페이지)

 

나는 내가 영지주의에서 페미니즘과 현상학으로, 또는 구조주의에서 현상학으로,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등으로 확실히 전향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진영의 장점을 두루 취하겠다는 의미이기보다 세상이 역동적이기 때문에 두루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마태 수난곡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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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국가와 무궁화에 대한 연이은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는 강효백 교수님의 책 가운데 꽃은 다 함께 피지 않는다가 있다. 이 책에 사랑은 우단사련藕斷絲蓮처럼이란 글이 있다.(: 연뿌리 우.) 우단사련은 연뿌리가 잘라졌으나 끈끈한 점액질의 하얀 실이 나와 계속 연결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형제애 또는 이성간 사랑을 상징한다.

 

꽃은 다 함께 피지 않는다에는 슬픔도 사랑이다란 글이 있어 관심을 끈다. ‘사랑은 우단사련藕斷絲蓮처럼같은 글만 있었다면 흥미를 덜 끌었을 것이다. ‘위대한 모정처럼 당신을 사랑하세요같은 글도 그렇다.

 

권지영 시인의 거미줄이란 시가 생각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 어두운 밤에도 드리워진/ 거미줄 한 가닥// 그대와 나 사이에도/ 저만치의 거리에서/ 아스라이 닿아// 거친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한 가닥

 

어제 나는 한 수업 시간에 아리아드네(ariadne)란 아이디를 쓰는 분에게 테세우스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이 분을 포함 두 명의 다른 여자 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네 시간 가량 노닥거렸다. 아리아드네는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 애인 테세우스를 위해 실뭉치를 주어 길을 잃지 않고 나올 수 있게 한 신화 속 공주다.

 

이 수업에서 나는 낙하산 때문에 정교수가 되지 못한 분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낙하산 줄을 끊어야 하는데, 라 말해 좌중을 웃겼다.(그러고 보니 이 글의 주제는 실 또는 줄인 듯 하다.)

 

거친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한 가닥이란 시구를 접하고 나는 슬픔 의 감정을 느꼈다.(슬픔도 사랑이지만 모든 슬픔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연 한 가닥이란 구절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모든 소중한 인연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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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류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단 차이가 있다. 내가 들을 때는 묻는 형식으로 말하고, 해설할 때는 확실히 익혀 명확히 이야기하되 사안에 따라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답(對答)하거나 강의(講義)할 때보다 질문(質問)하거나 수강(受講)할 때는 새롭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내가 염두에 두는 지침이다.

 

어제 수업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판교(判敎)는 교판(敎判)이라고도 한다는 강사의 말에 고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을 말하는 것이지요? 라고 물었다.

 

일본의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교상판석의 변천을 말한 바 있다. 남북조 시대의 교상판석은 석존(釋尊)의 설법인 모든 경전을 모순되지 않도록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수, 당 이후에는 경전이나 철학서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학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변모하여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어떤 종파보다 뛰어남을 논증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경전의 성립과 전개’ 131, 132 페이지)

 

내가 아는 정도는 대략 이 정도이다. 깊이 있게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바로 어제 지식이랄 것도 없는 내 말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교판 수업 후 들었다.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내가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 글로도 아는 척을 하네.”라며 노골적인 불편감을 표했다고도 한다.

 

그 사람의 말이 결여한 것은 설득력이다. 그도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는 척이 아니란 말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말하자 역정을 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認定) 욕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걸 모르는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란 작품에는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다. 되새길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 사람에게 결여된 것은 자존감이기도 하다. 내가 언급한 내용들이 뭐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감을 표했을까? 나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 질투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만 나도 아는 척 하기 좋아함을 모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를 그렇게 설명한다. 세상 지식은 많고 아는 척 하는 즐거움은 크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란 의미를 지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라는 공자의 말처럼 열심히 배우고 익힌 것을 선의(善意)로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상대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질투하지도 말고 덜 안다고 무시하지도 말며 교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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