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관의 '과학자의 글쓰기'를 읽고 있다. 많은 점에서 참고가 되는 유용한 책이다. 과학자가 글과 책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 책이다. 신문에 게재되는 칼럼과 분량면에서 비슷한 2000자의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책쓰기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광상학(鑛床學)이 양자역학보다 더 중요한 학문이라는 박문호 박사의 말을 계기로 지질학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되었다고 말하며 지질학 관련서들을 추천했다. 저자가 추천한 책은 아니지만 중고생을 위한 한국지질공원 여행이란 책에서 내가 사는 연천군의 재인폭포, 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전곡리유적 토층 등에 대한 글을 만났다.

 

사실 책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석된 연천을 만난 것은 손영운의 우리땅 과학 답사기가 처음이다. 이 책에 의하면 연천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검은 돌이 마치 벌레를 먹은 것과 같은 이상한 곳이라 소개한 곳이다.

 

저자에 의하면 옛 연천 사람들이 그 검은 돌(현무암)로 한탄강 수직 단애(斷崖) 위에 고구려의 3대성인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성을 쌓았다.(이런 방면에 무지한 나는 토성을 쌓았던 백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잘 알 듯 연천은 경관이 빼어나지만 분단의 상징지이다. 지난 427일 연천에서는 DMZ 평화 기원 인간 띠잇기 행사가 개최되었다.(이 시간에 나는 함석헌 기념관에서 김진호 목사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어떻든 과학자의 글쓰기를 통해 나는 또 한번 평소 인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잠정적이라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나는 책을 통해 만나는 연천이 불편하다.

 

어쩌면 나는 파랑새신드롬(다른 데에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는 것)에 따라 서울을 드나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지질공원보다 서울의 궁궐들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궁궐들과 지질공원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선택할 것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가 관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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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정인경 교수의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읽었다. 이 책은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이다. 기획자는 이 해협을 통해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한 것처럼 보스포루스 인문학은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인간과 문화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나든다는 말을 했다. 출간 예정이라던 보스포루스 미술사, 영화사, 여성사, 철학사 등 여덟 권의 후속작 모두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늘 오랜만에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펴본 것은 터키 에페소의 셀수스 도서관에 대해 글을 쓰는 데 참고가 될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지난 토요일(427)엔 김진호 교수의 민중신학자 안병무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함석헌 기념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바울에게로도 이어졌다. 오래 전부터 강연자인 김진호 교수의 리부팅 바울을 읽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강연장에 간 까닭에 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강연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바울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내가 민중신학에 의지하던 때 대하던 바울과, 지금 바라보는 바울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감벤, 랑시에르, 지젝 등 좌파 철학자들이 바울을 호명한 것도 바울 다시 읽기(보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 나는 굳이 터키 에페소의 셀수스 도서관이 아니어도 바울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바울이 밟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길을 되짚거나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인문학적 여행이 된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대한 책들이 몇 권 눈에 띈다. 정독하고 나면 기독교에 대한 내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는 이비론 수도원, 필로세우 수도원, 카라칼르 수도원, 라브라 수도원 등 많은 수도원이 나와 눈길을 끈다. 낭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수도원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책을 읽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入會)한 에라스무스가 이해된다.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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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록, 알바 알토 - Aalto, Architecture & my travels
박희찬 글.그림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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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찬은 영국왕립건축사협회 정회원인 건축사이다. 그가 쓴 여행의 기록, 알바 알토는 핀란드의 건축사 알바 알토(Alvar Aalto: 1898 - 1976)가 설계한 건축물들에 대한 저자의 단상(斷想)을 담은 책이다. 특징적인 점은 저자가 그린 여러 컷의 건축물 그림이 글과 함께 실렸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라트비아 출신의 미국 수필가/ 문예 비평가인 스벤 버커츠(Sven Birkerts: 1951 - )가 말한 구텐베르크의 비극(Gutenberg Elegies)을 이야기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시작된 종이책이 주는 독서와 관련된 감수성들이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큰 고민 없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말한다.

 

알바 알토는 건축 디자인 뿐 아니라 조명, 가구, 인테리어, 패브릭, 냅킨 디자인 등까지 디자인했던 건축가다. 알토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 로에, 르 코르뷔지에 등과 함께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이면서 기능과 합리주의에 매몰되어 지역 환경의 차이를 소홀히 한 모더니즘 건축의 한계를 벗어나 유기적 모더니즘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여행의 기록, 알바 알토'는 저자가 한 핀란드 여행에 바탕을 둔 책이다. 저자는 첫 행선지로 아카데믹 서점을 택했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와 미도리가 처음 만난 장소다. 알토가 설계한 이 건물은 블랙박스 같은 외양과 달리 하얀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아트리움이 자연광으로 충만한 곳이다. 천창(roof light)이 인상적인 곳이다.

 

저자는 알토 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한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학교 마스터스들이 거주하는 빌딩인 데사우 매스터스 하우스를 모델로 설계한 알토의 집이다. 알토는 일본 건축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저자는 알랭 드 보통이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사보아 주택(Villa Savoye)을 예로 들어 삶과 동떨어진 건축이 그 안에 사는 가족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지 지적했음을 전하며 알토 하우스는 그와 격이 다름을 강조한다.

 

본문에는 알토가 설계한 대표 건물인 KELA가 나온다. 핀란드 국민연금센터다. 이 건물 내에 도서관이 있다. 알토는 도서관 건축을 많이 남겼다. 알토 대학 도서관, seinajoki 도서관 등.. 알토 대학 도서관은 메인 빌딩의 한 날개로 자리하고 있다.

 

알토가 설계한 거의 모든 도서관은 KELA 도서관처럼 둥근 천장을 가지고 있다. 이 도서관은 1935년 알토가 설계한 비푸리(Viipuri) 도서관을 닮았다.(비푸리 지역은 현재 소련에 이양되었다. 소련에서는 비보르크vyborg’라 부른다)

 

KELA도서관 내부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창이 없고 중앙에 둥근 천창들이 있을 뿐이다. 이 창을 통해 빛을 받아들인다. 2층 열람실로 향하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1층에 창이 없는 것처럼. 오직 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건축 역사에 길이 남을 알바 알토라는 이름을 유산으로 상속받은 건축학교가 있다. 알토 대학 건축과이다. 알토가 설계한 건물 중 핀란디아 홀도 있다.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에서 이름을 가져온 건물이다.

 

저자는 알바 알토의 건축을 여행하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알바루 시자(Alvaro Siza)라는 또 다른 세계적 거장의 이름이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2006년 안양(安養)의 안양파빌리온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알바루 시자가 알바 알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여행의 기록, 알바 알토는 얇지만 꽤 알찬 책이다. 저자가 선배 건축사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거장 건축가 알바 알토의 업적,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얻은 후배들의 면면을 알 수 있는 책인 한편 알토의 도서관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천창(天窓)에 대한 단서를 얻은 책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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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그의 눈길은 책장 위를 훑었고 마음으로 의미를 새겼으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서술(敍述)한 부분이다.(포이에마 출간 김성웅 옮김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고백록’ 138, 139 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는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이해 못할 일들이 있다고 말한 뒤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희망 또는 그의 존경스러운 삶 이면에서 벌어지는 유혹과의 싸움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궁금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책을 읽을 때 눈길로 책장 위를 훑고 마음으로 의미를 새기고 말을 하지 않은 암브로시우스의 행동까지 이해 못할 일이라고 말한 것일까?‘란 점이다.

 

즉 암브로시우스의 내면에 자리 잡은 희망 또는 그의 존경스러운 삶 이면에서 벌어지는 유혹과의 싸움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이고 암브로시우스가 책을 읽을 때 눈길로 책장 위를 훑고 마음으로 의미를 새기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냥 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최근 나온 어떤 독서 관련 책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가 책을 낭독하지 않고 묵독한 것을 놀라워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아무래도 호들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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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수요 독서 모임에서 장석남 시인의 물의 정거장을 읽습니다. 장석남이란 분은 주로 시를 쓰고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분입니다. ‘물의 정거장은 출간된 지 19년이 지난 책이지만 시인이 드러낸 서정(敍情)은 여전히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이란 사물을 보고 느낀 감정(感情)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지요. 물의 정거장은 시인이 대학로인가를 지나다가 본 글귀라고 합니다. 장석남 시인은 물의 정거장이란 글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물의 정거장이란 책을 읽고 물의 정거장이란 글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대학로를 걸었던 적도 있습니다. ‘물의 정거장은 산문집입니다. 우리는 흔히 산문을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이라 말합니다.

 

반면 시는 aa라 말하지 않고 b라고 말하는 에둘러 말하기의 장르라 말합니다.(에둘러 말하기는 바로 말하지 않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석남 시인은 의미를 얼마나 미끄러뜨리느냐에 따라 시와 산문의 경계가 생겨날 거라 말합니다. 시인은 의미를 미끄러뜨리지 않는다면 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희덕 시인은 시는 기본적으로 숨김으로써 의미를 드러내는 양식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산문은 있는 그대로 솔직, 담백하게 의미를 드러내는 장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산문도 온전히 솔직, 담백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동확 시인/ 평론가는 문학이란 장르를 들키기를 바라면서도 실상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장르라 표현했습니다.

 

정리하면 나희덕 시인은 시는 기본적으로 숨김으로써 의미를 드러내는 양식이라 말했고 임동확 님은 문학은 들키기를 바라면서도 실상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장르라 말한 것입니다.

 

산문은 형식적으로는 에둘러 말하지 않지만 인간의 속성을 감안하면 산문도 온전히 솔직, 담백할 수 없는 장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온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을 글로 100퍼센트 표현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말, 말과 글 사이에는 갭이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자신은 의미를 많이 남겨야 시의 꼴이 이루어지는데 장석남 시인은 의미를 배제하면서도 시가 되기에 그게 경이롭고 부럽다는 말을 합니다. 이에 장석남 시인은 자신은 너무 끔찍한 것, 너무 좋은 것, 너무 행복한 것들은 현실감이 없어서 고개를 돌리게 되며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많다고 말합니다.

 

장석남 시인은 그건 일종의 현실 도피인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좋은 것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모두가 일괄적으로 한쪽만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도피적 태도나 성향도 어느 정도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장석남 시인은 물의 정거장은 일정한 주제가 있어서 나온 글들이 아니므로 아무 데나 펴서 읽으면 될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옮기면 될 것이고 그도 아니면 그냥 덮어도 별로 섭섭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또한 읽다가 스르르 다른 세계로 빠져나가게 하는 글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물의 정거장에는 프랑스의 시인, 철학자, 과학자 바슐라르가 낮달을 하늘에 뚫린 구멍이라 말한 것을 보고 시인이 그렇다면 우물은 땅의 구멍이고 우물과 낮달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스르르 다른 세계로 빠져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인도 말했듯 읽다가 스르르 다른 세계로 빠져나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시인은 물의 정거장을 무용의 효용 즉 쓸모 없음의 효용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지요. 도피적 태도나 성향도 사회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통하는 바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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