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를 거의 하지 못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사는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컨디션 저하와 집중력 부족이 부진(不振)한 독서 즉 부독서(不獨書)를 낳는 현실 자체다.
덧붙여 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책을 통해 습득한 내용에 내 생각을 붙여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논문 잘 쓰는 법’에서 표현이라는 우회로를 거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정신에 깊이 새길 수 있다고 말한다.(12 페이지)
또한 쓰는 것을 통해 진정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13 페이지) 읽지 않으니 쓸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그렇기에 정신에 새길 내용도 부족하고 그럭저럭 만나는 내용도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시기의 독서에 의거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만한 글일망정 쓴다. 하지만 시미즈 이쿠타로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전면적인 독서를 못하는 현실이다. 단편적인 독서, 닥친 현안(懸案)을 해결하기 위한 땜질식 독서는 한다.
오늘 아침 예스24에서 내 리뷰를 읽고 도움을 받아 책을 구매한 사람으로 인해 내게 소액의 적립금이 셍겼다. 김태연의 소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란 책을 읽고 쓴 리뷰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것은 지난 해 9월이었으니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의 일인 듯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잃고 (책을 제대로 읽지는 못하고) 겨우 글이나 쓰고 있는 것인가? 자신감, 희망, 방향, 목표 등이 그것일까? 내게 적립금이 생긴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지난 시절 내가 치른 독서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나의 스승이고 친구였다. 아니 지금도 그러니 현재형으로 써서 스승이고 친구라고 해야 옳다. 우치다 다츠루가 이런 말을 했다.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없다. 타자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해내지 못하는 자는 텍스트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도 역시 잘 해낼 수 없다.”(‘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44 페이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건 기투(企投) 즉 내던짐이다. 책 역시 그렇게 해야 할 중요한 만남 대상 중 하나다. 현실적으로 모든 책이 그런 대상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의미한다. 나는 한 번 읽고 더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폭력적이지만 책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첫 시간이 지났지만 ‘레비나스로 읽는 민중신학 혹은 민중신학으로 읽는 레비나스‘란 강의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다섯 차례(5월 26일, 6월 2일, 6월 9일, 6월 16일, 6월 23일, 경기대 앞 카페 까멜로. 14시 30분 – 16시 30분) 일정이 남았다.
무한을 찾아내는 목숨을 건 도약을 말한 레비니스와 민중신학의 만남이라니 흥미가 생긴다. 전혀 무연(無緣)한 관계항이 아니니 접점을 찾았겠지만 친연성을 짐작하지 못한 두 항을 만나게 한 것이어서 관심을 부른다.
지난 달 함석헌 기념관에서 열린 ’함석헌과 양심적 지식인들‘이란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를 맡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관계 있는 한백교회가 주최하는 모임이어서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을 많이 읽을 때 행복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책을 읽고 고투할 때 행복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투란 고투(苦鬪)이지만 고투(孤鬪) 즉 외로운 싸움이기도 하다.
그 외로운 읽기, 외로운 공부가 힘들어 다른 사람들을 찾아 이리 저리 다녔던 것이 지난 3년의 내 행적이었다. 그 안에서 최고의 ’스승 같은 도반(道伴)‘을 만났으니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여기 저기서 공부는 계속되고 좋은 만남이 생겨나지만 지속적이어야 의미가 있다. 인연을 더욱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때맞춰(?) 나온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를 읽고 독서의 의미, 방식, 전망 등을 다시 새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